조조(曹操)에게는 "팔호기(八虎騎)"와 "오자양장(五子良將)"이 있고 원소(袁紹)에게는 "하북사정주(河北四庭柱)"가 있으며 유비(劉備)에게는 "오호상장(五虎上將)"이 있다. 그렇다면 손권(孫權)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원래 손권에게도 "강표십이호신(江表十二虎臣)"이 있다.
강동십이호신(江東十二虎臣) 또는 동오십이호신(東吳十二虎臣), 혹은 강표지호신(江表之虎臣)은 오에서 활약(活躍)이 뛰어났던 열두 명의 장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진수(陳遂)가 지은 정사 “삼국지(三國志)”의 오서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陵徐潘丁傳)'에서 비롯한 말로 촉한(蜀漢)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조위(曹魏)의 오자양장(五子良將)과 같이 후대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다.
역사가 진수(陳遂)는 이들의 열전을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陵徐潘丁傳)'으로 한권에 함께 담아 편찬(編纂)했고 해당 권 마지막에 "이 장수들은 모두 강표지호신(江表之虎臣, 강동의 용맹한 신하)로서 손씨에게 두터운 대우(待遇)를 받았다."라고 평해서 강동십이호신(東吳十二虎臣) 병칭의 유래가 되었다.
'삼국지 권55, 오서10,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陵徐潘丁傳)'에는 12명의 동오 개국공신(開國功臣)을 합하여 하나의 전으로 썼다. 이 12명은 각각 정보(程普), 황개(黃蓋), 한당(韓當), 장흠(蔣欽), 주태(周泰), 진무(陳武), 동습(董襲), 감녕(甘寧), 능통(凌統), 서성(徐盛), 반장(潘璋), 정봉(丁奉)이다. 이들을 "강표십이호신(江表十二虎臣)"이라 부른다.
손권(孫權)의 이 십이호신(十二虎臣)은 듣기에 대단해 보이지만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 실제로 그중 일부는 억지로 숫자를 채운 느낌이 있다. 명실상부(名實相符)한 호신은 아닌 것이다.
선훼인망(船毁人亡)의 동습 :동습(董襲)은 양주 회계(會稽) 여요(餘姚) 사람이다. 손책이 회계군의 왕랑(王朗)을 격파한 후 손권에 투신하고 손책(孫策)을 따라 산음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적장 황용라(黃龍羅), 주발(周勃)을 참살한다. 동습은 10일 만에 수만의 반군을 격패시키고 파양(鄱陽)의 팽호(彭虎)의 반란을 평정한다. 나중에 손권이 황조(黃祖)를 토벌할 때 동습은 용맹(勇猛)하게 전진하여 황조의 몽충함(蒙沖艦)의 줄을 끊는다. 그리하여 손권이 황조(黃祖)를 순조롭게 참살(斬殺)할 수 있었던 것은 동습의 공로가 아주 크다.
유수(濡須)전투에서 폭우가 내릴 때 그가 탄 선박이 전복(顚覆)된다. 동습은 끝까지 배를 버리고 도망치지 않고 배와 생사를 함께 하여 결국 목숨을 잃는다. 동습은 비록 용맹하지만 최종적(最終的)으로 죽은 원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유용무모(有勇無謀)의 인물이고 호신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갑옷과 투구를 잃어버린 서성 : 서성(徐盛)은 일찌기 겨우 200명의 장병을 이끌고 황조(黃祖)의 아들 황사(黃射)의 수천군대의 공격을 막아낸 바 있다. 그러나 오자양장(五子良將)중 하나인 장료(張遼)를 만나서는 낭패한 모습을 보인다. 소요진 전투(逍遙津戰鬪)에서 서성의 부대는 장료(張遼)에게 패배하여 갑옷과 투구를 잃었고 서성 본인은 무기까지 버리고 도망친다.
체면(體面)이 바닥에 떨어질대로 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서성은 비록 일찌기 황사와 같은 무명소졸(無名小卒)을 격퇴시킨 바가 있으며 진정한 명장(名將)인 장료를 만나서는 본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무예는 평범(平凡)하여 호신이라 할 수가 없다.
대임(大任)을 맡을 수 없었던 진무 : 손권은 진무(陳武)를 중용했다 이는 주로 진무의 가족이 큰 영향력(影響力)을 지녔기 때문이고 진무가 정말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진무의 유일하게 기록에 남은 전투는 '장료(張遼)가 소요진(逍遙津)에서 위세를 떨치다"는 거기이다.
진무의 부대는 원래 강동(江東)의 최정예부대였는데 장료의 돌격대(突擊隊)를 맞이할 때 원래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지만 결과는 궤멸(潰滅)하고 주장인 진무는 전사한다. 그래서 진무는 기실 대임을 맡을 인물은 아니라고 본다. 만일 가족배경(家族背景)이 대단하지 않았더라면 손권(孫權)이 어찌 그로 하여금 정예부대(精銳部隊)를 이끌게 했겠는가?
유용무모의 주태 : 주태(周泰)는 전투에서 아주 용감(勇敢)했다. 매번 전투 때마다 솔선수범했다. 선성(宣城)전투에서 손권이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주태는 손권을 구하기 위해 여러 번 적진으로 돌진(突進)하며 12곳에 부상을 입으며 결국 손권을 구해냈다.
손권은 주태의 구명지은(救命之恩)에 감격하여 주태를 유수독(濡須督)에 임명한다. 그의 지위는 서성보다 위였다. 다만 전쟁터에서의 활약(活躍)은 서성만 못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무런 실적(實績)이 없었다고 제2차 유수전투(濡須戰鬪)에서 손권은 주태를 소환(召還)하고 여몽, 장흠으로 바꾸어 기용(起用)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면 주태가 십이호신(十二虎臣)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손권(孫權)을 구해주었기 때문이지 명실상부(名實相符)한 호신은 아니다.
순전히 경력에 의존한 한당 : 한당(韓當)은 손책(孫策) 시기에 이미 중요장수였다. 그러나 손권시기에 들어 직위(職位)는 오히려 그보다 어린 장수들보다 못했다. 한당은 실제로 내놓을만한 전공(戰功)이 없었기 때문이다.
손권이 그에게 상을 내릴 이유도 없었다. 그가 천천히 관직(官職)이 오른 것은 순전히 그의 나이가 계속 더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경력의 의존(依存)하여 승진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무명소배인 장패(臧覇)도 이기지 못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떠할까 : 정보(程普)는 전투에서 사병들보다 앞장섰고 일찌기 혼자서 손책(孫策)을 구해준 적이 있다. 그의 용맹(勇猛)함은 주태에 못지 않다. 남군전투(南郡戰鬪)에서 정보와 주태는 함께 조인을 격패(擊敗) 시킨다.
황개(黃蓋)는 적벽대전(赤壁大戰) 때 거짓으로 조조에 투항하여 화공으로 조조(曹操)의 수군을 대파하고 대승을 거둔다. 황개는 나중에 다시 500명의 부대를 이끌고 모릉만(武陵蠻)을 격파하여 반란을 평정(平定)하기도 했다.
장흠(蔣欽)은 제3차 유수전투(濡須戰鬪)에서 여몽(呂蒙)과 함께 조조의 공격을 막아낸다. 장흠은 여몽과 함께 형주를 기습(奇襲)하는 전투에도 참가한다.
감녕(甘寧)은 황조의 수하로 있을 때 손권의 부하장수 능조(凌操)를 사살한 바 있다. 나중에 손권에 투항(投降)하고 제3차 강하전투에서 감녕은 손권에 정보를 제공하여 황조(黃祖)를 격패시킬 수 있었다. 남군전투(南郡戰鬪)에서 이릉을 탈취하고 조인의 공격을 막아낸다. 제2차 유수전투에서 감녕은 백기(百騎)로 적의 군영을 기습하여 조조(曹操)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능통(淩統)은 강하전투에서 동습(董襲)과 함께 황조의 부하장수 장석(張碩)을 참살한다. 손권이 소요진(逍遙津)에서 패배할 때 능통이 용맹하게 나서서 손권을 구해주었다.
반장(潘璋)은 형주전투(荊州戰鬪)에서 부하를 이끌고 관우(關羽)를 생포한다. 이릉전투(夷陵戰鬪)에서 반장은 부하를 이끌고 풍습(馮襲)을 참살한다. 강릉전투(江陵戰鬪)에서 반장은 하후상(夏侯尙)이 놀라서 도망치게 만든다.
정봉(丁奉)은 동관전투(潼關戰鬪)에서 '혈중분단병(血中奮短兵)"으로 위군을 대파한다. 이것은 석정전투(石亭之戰) 이후에 동오(東吳)의 최대 승리였다.
누가 진정한 호신(虎臣)이고 누가 억지로 숫자를 채웠는지는 이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