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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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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 작가 조설근에 대한 홍학 고증연구와 홍루몽연구의 변천

图片信息 : 名著导读之《红楼梦》


조설근(曹雪芹)은 중국의 4대 명저 중의 하나로 불리우는 "홍루몽(紅樓夢)"의 위대한 작가이다. 이는 어린아이들도 다 알고 있는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홍학(紅學) 고증파(考證派)의 시조격인 후스(胡適)의 이 결론에 대하여 학술계에는 이견(異見)이 계속하여 존재하여왔다. 고증파인 홍학가(紅學家)들이 계속하여 이러한 전제하에 고증을 계속하는 외에 많은 독자와 학자들은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인지에 대하여 회의적(懷疑的)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유평백(兪平伯) 선생은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이라는 설의 지지자(支持者)에서 회의자로 변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홍루몽(紅樓夢)"의 책에 쓰여 있는 이야기와 조설근(曹雪芹)이라는 이름 및 고증파들이 고증하여 얻은 조설근의 집안내력과 비교를 해보면 조설근은 그 이름에서도 그렇고 홍학자들이 고증을 통하여 얻은 조설근의 가족사(家族史)와도 많은 모순(矛盾)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만일 "홍루몽"에 반청조명(反淸弔明)의 관점이 선명하다고 보거나 여기에 청나라시기의 옹정(雍正), 건륭제(乾隆帝)때 여러 번에 걸쳐 잔혹한 문자옥(文字獄)이 발생한 것을 볼 때 그는 절대 자기의 진짜 이름을 책속에 써넣음으로써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부를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이로 인하여 "홍루몽"의 작가는 조설근이라는 설은 근거가 박약하다는 것이다. 후스(胡適) 선생이 주장하고 많은 홍학가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홍루몽"은 조설근의 집안이야기를 그린 자전소설(自傳小說)이라는 주장(主張)도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홍루몽(紅樓夢)"을 읽어본 독자라면 모두 알겠지만 조설근(曹雪芹)은 도홍헌(悼紅軒)에서 공공도인(空空道人)이 베껴온 석두기(石頭記)를 열 번 피열(披閱)하고 다섯 번 첨삭(添削)한 홍루몽중의 인물이다. 그리고 이 조설근은 단지 책의 앞뒤에서 각각 한번씩 출현한다. 가장 먼저 조설근과 동시에 책에서 나오는 인물은 공공도인(空空道人)을 제외하고는 공매계(孔梅溪)가 있고 다음이 조설근이다. 글자의 뜻으로 볼 때 공공도인(空空道人)도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공매계도 '恐沒戱' (아마도 없을 것이다)와 같은 발음이 되고 책에 나오는 견사은(甄士隱)은 '眞事隱'(진짜로 있었던 일은 숨기고), 가우촌(賈雨村)은 '假語存'(거짓말은 남는)으로 영련(英蓮)은 '應憐'(불쌍한) 등등 모두 그 음을 따서 지은 것이다. 

"홍루몽(紅樓夢)"에는 "가작진시진역가, 무위유처유환무(假作眞時眞亦假, 無爲有處有還無, 가짜가 진짜가 될 때, 진짜도 가짜로 되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는 곳에는 있는 것이 다시없는 것이 된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기고 있다. 이로써 볼 때 책에서 나오는 모든 이름이 만들어낸 이름인데 작가가 자신의 이름만 진실한 이름으로 써넣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초창기에 "홍루몽 소설의 본명은 석두기(石頭記)인데 작가가 누구인지는 여러 설이 있고 도대체 누가 지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책안에 설근(雪芹) 조선생이 수정작업을 했다고 기재(記載)되어 있다.

그러므로 홍루몽(紅樓夢)의 책에서 나타나는 도홍헌(悼紅軒) 중에서 조설근(曹雪芹) 선생은 진실한 이름이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조설근선생"은 공공도인(空空道人), 견사은(甄士隐), 가우촌(賈雨村) 등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원래 존재하지 않는 단지 책속의 인물(人物)인 것이다. 만일 "홍루몽"중의 많은 인물들의 이름 짓는 특색에 맞추어 보면 조설근(曹雪芹)은 차오세친, 초사근(抄寫勤) 즉 "열심히 배껴 쓴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홍루몽 연구와 홍학(紅學)의 몇 가지 분야
조설근(曹雪芹)의 "홍루몽(紅樓夢)"을 연구하는 학문(學問)을 중국에서는 홍학(紅學)이라고 부른다. 홍학에는 몇 가지 분야(分野)가 있는데 간단히 소개(紹介)하고자 한다.

1) 조학(曹學)
홍루몽(紅樓夢)은 조설근(曹雪芹)이 자신이 겪은 일을 기초로 쓴 글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므로 홍루몽의 내용을 이해(理解)하기 위하여서는 조설근의 신세내력(身世來歷)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고 조설근의 조부, 부친, 본인의 3대에 걸친 흥망성쇠(興亡盛衰)와 배경이 된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乾隆)의 시대에 실제 발생했던 사건들이 홍루몽에서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2) 판본학(版本學)
홍루몽의 판본(板本)은 매우 다양한데 건륭19년의 갑술본(甲戌本), 건륭 24년의 기묘본(己卯本), 건륭25년의 경진본(庚辰本), 나중에 몽고왕부(蒙古王府)에서 발견된 초본(抄本), 러시아 레닌그라드에서 발견된 고본(稿本), 척요생(戚蓼生)이 서문을 쓴 척서본(戚序本), 서원위라는 사람이 서문을 쓴 서서본(西書本), 몽각주인(蒙刻主人)이라는 사람이 서문을 쓴 몽각본(蒙刻本) 등등이 있다. 홍루몽이 원래는 조설근(曹雪芹)이 쓴 글을 돌려서 옮겨 적으면서 세상에 나온 것이므로 초기본(抄記本)은 매우 다양하고 각 본마다 내용이 약간씩은 다르다.

3) 지학(脂學)
홍학(紅學)에서 가장 흥미 있는 분야의 하나가 "지학(脂學)"이다. 지학은 홍루몽의 초본에 비어(批語, 비평하는 글)을 써놓았는데 그 글이 대부분 "지연재(脂硯齋)"라는 사람에 의하여 쓰여져 있다. 그런데 지연재라는 사람은 단순히 조설근이 쓴 홍루몽(紅樓夢)에 대하여 비평문을 쓴 정도가 아니라 조설근(曹雪芹)과 매우 가까웠던 사람(아마도 부인)일 것으로 추정(推定)한다. 비평문에는 어떤 글 뒤에는 "그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이 있었다", "진짜로 그 일이 있었다. 작가와 내가 실제 겪은 일이다", "이 말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작가는 아직도 금괴성(金塊城)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인가. 오늘 다시 옛일을 생각하니, 장이 끊어지고 가슴을 쥐어뜯는 듯하다" "작가는 아직도 왜유방에서 합환화로 술을 빚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구나. 손가락으로 꼽아보니 20년이로다", "봉저(王熙鳳)가 극을 골랐고 지연이 붓을 들었는데 지금 아는 자가 없구나" "(제22회) 이 회를 완성하지 못하고 설근이 갔구나. 아쉽도다" 이외에 진가경에 관한 부분은 지연재가 조설근에게 삭제(削除)하도록 요청하고 조설근이 5,6페이지를 삭제했다는 내용(內容)도 있다.

4) 탐일학(探佚學)
탐일학은 홍루몽(紅樓夢)에서 없어지거나 빠진 부분을 찾는 학문이다. 즉 조설근(曹雪芹)이 남긴 것은 전반부 80회이고 후반부 40회는 30여년 후에 고악(高鳩)이 쓴 글인데 원래 조설근이 쓰려던 글과는 차이가 많다. 이런 점에서 앞부분에 남긴 글과 지연재(脂硯齋)의 글 등을 통하여 원래의 후반부(後半部) 또는 없어진 부분을 추정하는 것이다. 홍학의 연구자(硏究者)들은 개략 64회와 67회는 조설근의 글이 아니라고 보고 있고 13회도 후에 일부를 삭제하고 보완(補完)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홍루몽연구의 변천
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을 홍학(紅學)이라고 부르는데 최소 건륭18년(1753년)부터 시작되었다. 홍학자(紅學者)들은 오사운동(五四運動)을 계기로 구홍학(舊紅學)과 신홍학(新紅學)으로 구분한다.

1) 구홍학의 주요학파
평점파(評點派) : 중국문학사에서 평점파의 기원은 명나라 중기 때부터이다. 김성탄(金聖嘆)이 “수호전”의 피를 달고 모종이 “삼국연의(三國演義)”의 피를 달고 장죽파는 “서유기(西遊記)”의 피를 달았다. 나중에는 하나의 고정적인 격식을 갖추었다. 각권의 앞에 피서, 제사, 독법 등이 있고 매회에 회전 회후의 미피, 협피, 피주 등이 있다.

지연재는 최초로 김성탄(金聖嘆)을 배워 “석두기(紅樓夢)”에 평점을 붙인 평론가이다. 그는 대량의 평점식의 평어(評語)를 썼고 이로 인하여 석두기는 “지연재중평석두기”라는 명칭(名稱)을 얻었다. 지연지의 비문(碑文)은 홍루몽의 초본의 원글과 함께 이어져 내려왔다.

평점파(評點派)의 대표인물은 청나라 때의 왕설향, 장신지, 요섭 등의 사람이고 이 사람들은 권점, 평어추가 등의 형식(形式)을 통하여 또한 정위원, 고악이 보완한 120회본 홍루몽(紅樓夢)에 평점을 진행하였다.

색은파(索隱派)
색은파는 정치색은파라고도 한다. 소위 색은이라는 것은 글자문면에 대한 탐색을 통하여 글속의 진짜 사람, 진짜 사건을 찾아내는 것이다. 색은파(索隱派)는 건륭, 가정시기에 경학고증풍(經學考證風)의 영향을 받아 하나의 학파를 형성했다. 색은파의 주요한 수단(手段)은 여러 번잡한 고증을 거쳐 소설의 스토리와 인물 중에서 숨겨진 사건 숨겨진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다.

색은파의 개산조사는 주춘(周春, 1729-1815)이 꼽힌다. 주춘은 홍루몽(紅樓夢)을 금릉(金陵) 장후의 집안일을 썼다고 하였다. 이런 관점은 후대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색은파(索隱派)가 후대에 미친 비교적 큰 영향은 "명주의 집안일이라는 설"(나란싱서의 집안일이라는 설), "청세조(淸世祖)와 동악비(董鄂妃)의 이야기라는 설"(또한 푸린과 동소완의 사랑이야기라는 설), "만주배척설(滿洲排斥說)"등이 있다.

색은파는 청말민국초(淸末民國初)에 성행하였다. 주로는 역사상이나 소문에서의 사람이나 사건을 홍루몽(紅樓夢)에서의 인물이나 이야기에 비유하는 것이다. 대표작으로는 왕몽완, 심병암의 “홍루몽색은”, 채원배(蔡元培)의 “석두기색은”, 및 등광언의 “홍루몽석진” 등이 있다. 지금까지도 이러한 유(類)의 글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제영파(題詠派)
제영파는 책속의 인물의 슬픔과 기쁨, 헤어짐과 만남에 착안(着眼)하여 제영파의 사사, 부, 찬, 어떤 사람들은"영화부귀는 쉽게 흐르고 인생은 꿈과 같다"는 인생관, 불가의 "색공(色空)"관념과 "몽환(夢幻)"사상. 어떤 사람은 책속의 '풍월번화"와 "사랑이야기"를 붙잡아 대거 "번화(繁華)"한 풍경과 "향염(香艶)"의 사랑을 그리면서 앙모와 사념을 토로하는 것이다.

왕국유(王國維).
구홍학가중에서 평점파(評點派)고 아니고 색은파(索隱派)도 아니며 제영파(題詠派)도 아니면서 일파를 이룬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왕국유(王國維)이다. 왕국유는 최초에는 철학과 미학의 관점에서 홍루몽의 예술가치(藝術價値)를 비평한 홍학가이다. 왕국유는 먼저 철학과 미학(美學)의 이중을 이룬 기초로 문학비평체계(文學批評體系)를 건립하고 다음으로 헛된 것을 버리고 진실(眞實)을 추구하는 고증정신(考證精神)을 제출하여 홍학의 연구가 구홍학의 수수께끼 찾기식의 견강부회(牽合附會)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2) 신홍학
고증파(考證派) : 신홍학의 주요한 인물은 호적(胡適)이다. 그는 1921년에 “홍루몽고증”이라는 글을 쓴다. 다음 해 다시 “발홍루몽고증”을 쓴다. 이 두 편의 문장에서는 고증파홍학(考證派紅學)의 개파작품으로 인정된다. 호적의 "고증"은 홍루몽의 연구에 신천지를 개척해주었다. 호적(胡適)은 철저하게 채원배(蔡元培)를 대표로 하는 색은파 홍학을 비판(批判)했다.

그는 첫 번째 문장에서 "나는 우리가 "홍루몽(紅樓夢)"의 고증을 하는 것은 단지 이 두개의 문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가 고증이 필요한 두개의 문제가 가리키는 것은 작가와 판본(板本)이었다. 이것이 바로 호적(胡適)이 홍루몽고증에 선을 그은 대상과 범위(範圍)였다.

1930년대에는 홍학이 점점 호적(胡適)의 고증, 저자, 판본의 작은 범위에서 벗어났다. 적지 않은 연구자(硏究者)들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開拓)하여 일련의 새로운 과제(科題)를 제출했다. 홍루몽(紅樓夢)의 시대배경, 주제사상, 예술특징, 인물형상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는 연구의 중심이 인물형상(人物形象), 심리상태의 분석으로 옮아간다. 1940년대 말에는 주여창이 “홍루몽신증”을 내놓았는데 "하나의 홍루몽과 그 작가 조설근(曹雪芹)에 대한 자료고증서이다" 그리고 홍학의 역사상 처음으로 지연재의 비문에 대하여 중시(重視)하기 시작했다.

비홍운동(批紅運動)
1954년에 유평백(愈平伯)의 “홍루몽연구”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이어서 호적파(胡適派)의 주관유심주의학술사상과 문예사상에 대한 비판이 전개된다. 이 비판운동에서는 신노홍학의 많은 관점(觀點)이 모두 비판받는다. 1953년부터 1963년까지 어떤 사람은 이 시기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홍루몽(紅樓夢)을 연구한 시기라고 한다. 주요한 표지는 "조설근서거이백주년기념전람회(曹雪芹逝去二百週年紀念展覽會)"를 개최한 것을 들 수 있다.

홍학현황(紅學現況)
1976년이후 홍학연구의 내용은 갈수록 넓어졌고 분화도 더욱 구체적(具體的)이 되었다. 사람들은 홍학의 개념에 대하여 다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주여창은 "현학(現學)", "지학(脂學)", "판본학(版本學)", "탐일학(探佚學)"을 홍학중의 사대지주(四大支柱)라고 불렀다. 많은 홍학가들은 홍학을 "조학(曹學, 外學)"과 "홍학(紅學, 內學)"으로 나눈다. "조학"은 조설근(曹雪芹)의 집안, 전기, 문물등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홍학"은 홍루몽(紅樓夢)의 판본, 사상내용, 인물창조, 예술성과, 책으로 만드는 과정 등을 연구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유심무(刘心武)가 진가경(秦可卿)을 통하여 홍루몽을 연구하는 것을 스스로 "진학(秦學)"이라고 이름붙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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