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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반장(潘璋)

[삼국지 인물사전 - 반장(潘璋)] 


반장(潘璋, ? ~ 234년)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將帥)로 자는 문규(文珪)이며 연주(兗州) 동군(東郡) 발간현(發干縣) 사람이다.

생애
손권(孫權)이 양선현의 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가 손권을 따랐다. 손권은 그를 기이하게 여겨 아꼈고 그에게 병사를 모집(募集)하도록 하여 백여 명을 얻게 되자 부장으로 삼았다. 산월의 적을 토벌(討伐)하여 공로를 세웠으므로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됐다. 이후에 오군의 큰 저자에서 침입자(侵入者)를 죽이자 이로부터 도적은 단절(斷切)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이름이 났으며 예장군 서안현의 장으로 승진했다. 유표(劉表)가 형주에 있을 때 백성들은 여러 차례 그들의 침략을 당했다. 반장(潘璋)이 일을 맡은 이후부터 침략자들은 경내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웃하고 있는 현인 건창에서 강도(强盜)들의 폭도(暴徒)가 일어나자 전임되어 건창을 다스리게 되었고 무맹교위(武猛校尉)를 더했다. 그는 사악한 자를 토벌하여 다스려 1개월 만에 전부 평정(平定)시켰다. 그리고 흩어져 떠도는 병사들을 소집(召集)하여 8백 명을 얻었으며 그들을 데리고 건업(建業)으로 돌아왔다.

합비 싸움(合肥戰鬪)에서 장료가 급습했을 때 장수들은 무방비 상태였고 진무는 분투하다 죽었으며 송겸이나 서성은 모두 후퇴하였다. 반장(潘璋)은 후방에 있었지만 곧바로 급히 달려가서 말을 비껴 송겸과 서성의 병사들 중 달아나는 두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모두 돌아와서 싸웠다. 손권(孫權)은 이 점을 특히 칭찬하여 그에게 편장군을 제수했다. 그래서 백 명의 교관을 통솔하여 반주에 주둔(駐屯)했다.

손권이 관우를 정벌할 때 반장(潘璋)은 주연과 관우가 달아나는 길을 차단시켰다. 그는 임저에 도착하여 협석에 주둔했다. 반장의 부하 사마 마충(馬忠)이 관우와 관우의 아들 관평과 도독 조루 등을 붙잡았다. 손권은 의도군의 무현과 자귀현 두 현을 나누어 고릉군으로 만들고 반장을 그곳의 태수(太守)로 임명했으며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 삼았고 율양후(凓陽侯)로 봉했다. 감녕이 죽자 또 감녕의 군대를 주어 합치도록 했다. 유비(劉備)가 이릉으로 출병했을 때는 반장과 육손이 힘을 합쳐 대항했으며 반장의 부하가 유비의 호군 풍습 등의 목을 베었고 죽거나 부상당한 자는 매우 많았다. 반장은 평북장군(平北將軍), 양양태수(襄陽太守)로 임명됐다.

조비의 1차 남정 당시 위나라 장수 하후상 등이 남군을 포위(包圍)하고 선봉 부대 3만 명을 나누어 부교를 만들고 백리주를 건너왔다. 제갈근(諸葛瑾)과 양찬이 함께 병사를 모아 구원하러 달려갔지만 그 사태에 대처(對處)할 바를 몰랐고 위나라 병사들은 날마다 끊임없이 건너고 있었다. 반장(潘璋)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나라의 기세는 방금 흥성(興盛)하기 시작했고 강물은 또 얕으므로 그들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병사들을 인솔(引率)하여 위로부터 상류로 50리 되는 곳까지 가서 갈대를 수백만 개 베어 커다란 떼를 만들어 물의 흐름을 따라 불을 놓아 부교를 전소(全燒)시키려 했다. 떼 만드는 작업이 막 끝나 강물이 가득 찬 것을 보고 띄우려고 할 때에 하후상이 이것을 알고 병사를 인솔하여 물러났다. 반장(潘璋)은 말에 올라 육구까지 내려가서 막았다. 손권(孫權)은 제위에 오른 후 반장을 우장군에 제수했다.

반장(潘璋)은 사람됨이 난폭하고 사나웠으며 금령(禁令)은 매우 숙연했다. 성정은 호탕(浩蕩)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그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외상술을 즐겼는데 빚쟁이가 대문까지 쫓아오면 항상 이후에 부귀(富貴)해지면 다시 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공업(功業) 세우기를 좋아하였으며 통솔(統率)하는 군대는 수천 명에 불과했지만 이르는 곳마다 언제나 만 명이나 되는 것 같았다. 정벌이 멈추었을 때는 즉시 군대 시장을 세웠으며 다른 군에 없는 것은 모두 반장의 시장에서 충족시켰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사치(奢侈)스러웠고 이런 경향은 만년에 더욱 심해져 의복이나 물건은 그의 신분(身分)을 넘는 것을 사용했다. 관리들 가운데 부유한 자가 있으면 그를 죽이고 재물(財物)을 빼앗을 때도 있었다. 법령을 받들지 않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감시(監視)하는 자가 이 일을 들어 상주(上奏)했지만 손권은 그의 공을 아껴 항상 용서(容恕)하고 죄를 묻지 않았다.

이후 234년에 병사했다. 아들 반평(潘平)은 아버지의 성품만 물려받고 능력은 물려받지 못해 회계군으로 쫓겨났다. 반장(潘璋)의 처는 건업에서 살고 있었는데 반장이 공을 세운 덕에 전택(田宅)을 하사받고 전객(佃客) 50가의 부역을 면제(免除)받았다.

난폭(亂暴)하고 사나운 성격으로 술을 좋아해 젊을 적에 가난하지만 언제나 술을 즐겨 마셨다. 손권(孫權)을 섬기면서 219년 관우(關羽) 토벌에서 여몽(呂蒙), 주연(朱然)과 협력하여 관우를 사로잡았다고 하나 실제로 관우를 사로잡은 사람은 부하인 마충(馬忠)이다.

222년 이릉 전투에도 참가해 풍습(馮習)을 죽이는 큰 공적을 세웠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전투에서 관우의 망령에 놀라는 사이에 관흥(關興)에게 참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연의의 창작(創作)이다.

같은 해 위나라의 조진(曹眞), 하후상(夏侯尙), 장합(張郃) 등이 남군(南郡)에 공격해 오자 구원군(救援軍)으로 보낸 손성이 장합(張郃)에게 격퇴당하자 제갈근(諸葛瑾)과 함께 구원군으로 보내졌다. 반장(潘璋)은 장강의 상류로 가서 갈대를 베어 커다란 뗏목을 만들어 이것을 불을 붙여 흘려보내며 물에 띄어놓은 다리를 불태우려 했으나 이 계획(計劃)을 실행하기 전에 위나라 군대는 철수(撤收)했다.

손권이 황제가 되자 반장은 위의 공로로 우장군(右將軍)으로 승진했다. 반장(潘璋)은 시장 운영에 뛰어나 반장이 시장의 감독직(監督職)을 맡으면서 도난(盜難), 상해 사건이 없어졌다. 또한 전쟁(戰爭)이 일단락되면 군대가 관리하는 시장을 열었고 기타 부대에서 물품 부족(物品不足)이 있다면 모두 반장의 시장에서 보충했다.

반장(潘璋)이 이끄는 군대는 수천 명에 불과했으나 언제나 1만 명의 군세(軍勢)처럼 강력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반장(潘璋)은 이런저런 일에서 범죄 행위를 자주 되풀이했다. 강한 물욕으로 금전에 집착(執着)했고 신분에 맞지 않는 복장을 좋아하며 부유한 역인이나 병사를 살해해 재산을 몰수(沒收)하는 등의 불법행위를 자주 일으켰다. 손권은 반장의 공적을 아껴 죄를 묻지 않았다. 반장은 234년에 사망(死亡)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 반장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반장(潘璋)은 219년 관우 포획(關羽捕獲)에 지대한 공을 세운 탓에 나관중(羅貫中)에게 극심하게 밉보였다. 이에 나관중은 222년에 이릉 대전(夷陵大戰)에 반장이 참전하여 관흥, 장포(張苞) 등에게 사살되었다고 기술했다.

실제로 그 전투에서 장포(張苞)는 없었으며 장포는 아버지인 장비(張飛)보다 일찍 죽었다고 한다. 그 전투에서 관흥(關興)에게 사살당한 오나라 장수는 없었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여기에 이이, 반장과 가공의 인물인 담웅(譚雄)을 포함시켜 관흥과 장포가 반장(潘璋), 담웅, 이이, 사정(謝旌) 등을 사살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관우를 생포해서 관우(關羽)의 죽음에 일조했고 이후 손권에게 그 공로로 관우의 청룡언월도를 하사받았다. 이후 이릉대전(夷陵大戰) 초기에 황충(黃忠)과 일기토를 떴다가 패하고 길을 잃어 어느 민가집에서 잠시 쉬고 가려고 들어갔다가 본의 아니게 그 곳에 먼저 와 있던 관흥과 마주쳐 버렸고 당연히 몹시 분기탱천(憤氣撑天)한 관흥이 반장을 뒤쫓자 반장(潘璋)은 도망쳤으나 엎친 데 덮친 격이라더니 관우의 원혼을 봐 버려서 당황(唐惶)해서 더 이상은 도망도 못 가고 있던 상황에서 관흥(關興)에게 뒤에서 칼에 맞아 죽어버리는 굴욕(屈辱)을 당한다. 이로써 관흥은 아버지의 원수(怨讎)를 갚음은 물론 청룡도(靑龍刀)도 되찾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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