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조운(趙雲)은 무예가 고강할 뿐 아니라 미남이다. 이런 사람을 어느 여인인들 보고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조운(趙雲)이 명을 받아 계양(桂陽)을 공격할 때 이런 난감(難堪)한 일이 벌어졌다.
각설하고 조운(趙雲)이 계양을 공격할 때 계양태수 조범(趙範)은 스스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와 투항(投降)한다. 그리고 주인의 예를 다하기 위하여 조범은 조운을 집안으로 모셔서 대접한다. 두 사람은 모두 성이 조씨이므로 조범(趙範)은 두 사람이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자고 제안한다. 조운은 호쾌한 사람이어서 즉시 시원스럽게 응락(應诺)한다. 다만 술을 어느 정도 마셨을 때 조범(趙範)은 내실에서 한 분을 불러서 조운에게 술을 따르게 한다. 조운(趙雲)이 보니 그 부인은 '경성경국(傾城傾國)'의 미색을 지니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의상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다. 조범(趙範)은 자신의 형수인 번씨(樊氏)라고 말한다. 조운은 그 말을 듣자 바로 자리를 뜬다.조운(趙雲)이 당황해 하는 것을 보고는 조범(趙範)이 형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원래 조범(趙範)의 형은 일찌감치 죽었고 형수는 과부(寡婦)로 지냈다. 조범은 형수를 일찌감치 개가(改嫁)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번씨는 과부이기는 해도 눈이 높았다. 개가의 조건은 천하에 보기 드문 것이었다. 첫째는 인재(人才)가 출중해야 하며 명성을 떨치고 있어야 하고 둘째는 가형(家兄)과 성이 같아야 하며 셋째는 문무를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은 조운(趙雲) 한 사람을 제외하고 천하에서 다시 찾기 힘들 것이다. 이미 말을 시작한 것이니 조범(趙範)은 형수를 조운에게 개가시킬 뜻을 밝힌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조운(趙雲)이 벌컥 화를 낸다. 조범을 질책(叱責)하며 말한다. "너의 형수이면 나의 형수(兄嫂)이다. 어찌 인륜을 어지럽힐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나오자 조범(趙範)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둘 곳이 없게 되었다. 일시적으로 분노하여 조운을 붙잡으려 한다. 조운(趙雲)은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주먹으로 조범(趙範)을 땅바닥에 쓰러뜨린 후 말을 타고 성을 나가버린다.
이 사건으로 보면 조운(趙雲)은 확실히 번부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 근원을 따져보면 역시 조운의 '처녀컴플렉스"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떤 때는 아주 기이하다.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다지 많은 이유가 필요 없다. 비록 조운에게 '처녀컴플렉스'가 있지만 나중에 손상향(孫尙香)을 만났을 때는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 버린다. 손부인을 앙모(仰慕)할 뿐 아니라 거의 수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단지 손상향(孫尙香)은 이미 직계상사(直系上司)의 부인이었으므로 조운(趙雲)은 그저 망매지갈(望梅止渴)하고 마음속으로 짝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손부인(孫夫人)은 손견(孫堅)의 딸이며 손책(孫策), 손권(孫權)의 이복 여동생이자 유비(劉備)의 부인이다. 손상향(孫尙香)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지만 이것은 경극(京劇)으로 사용되는 이름이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손인(孫仁, 실제는 그녀의 오빠인 손랑의 별칭)으로 되어 있다. ‘삼국지’에서는 손부인이라고 기록되고 있고 실제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오국태(吳國太)의 딸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손부인은 손인(孫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무예가 출중하여 오라비인 손권(孫權)마저도 두려워하는 여인으로 나온다. 동오로 친히 온 유비를 시험하기도 하며 손권에게서 도망쳐올 때 손인과 유비(劉備) 부처를 추격해오는 정봉(丁奉)과 서성(徐盛)을 물리쳤다. 손권이 손인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손인에게 모친이 위독(危篤)하다는 허보를 보내 소환했고 손인은 이때 어린 유선(劉禪)을 데려가다 조운(趙雲)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 후 익주(益州)로 들어간 유비를 따라 가길 원하는 손인을 손권이 놓아주지 않아 그대로 건업(建業)에 머무르게 되나 유비가 이릉전투(夷陵戰鬪) 패전 당시에 사망했다는 오보(誤報)로 인하여 장강에 투신자살(投身自殺)하였다고 한다.
당시 유비는 조운(趙雲)을 데리고 동오로 가서 손부인을 데려온다. 손권이 계속 해를 가하여 유비는 할 수 없이 교국로에게 도움을 청한다. 교국로의 주선 하에 오국태(吳國太)는 감로사에서 만나기로 한다. 그 결과 유비가 나타나자 동오의 상하가 모두 반긴다. 장모될 오국태도 아주 기뻐한다. 그리하여 이 혼사는 결정된다. 이 기간 동안 오국태(吳國太)는 조운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았다. 조운(趙雲)은 위풍이 늠름한 일대의 인재였다. 오국태(吳國太)는 유비에게 "이 사람은 누구인가?"를 묻는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이전에 장판파(長坂坡)에서 아두(阿斗)를 안고 싸웠던 상산 조자룡(趙子龍)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오국태도 조운(趙雲)은 상당히 존중해준다. 그리고 내심으로부터 그를 칭찬하는 말을 한다. "진짜 장군이로다" 바로 이 말은 졸지에 조운(趙雲)으로 하여금 온갖 생각이 나도록 만들었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나중에 유비와 손상향(孫尙香)이 결혼을 한다. 유비의 호신무사로서 조운은 손부인의 풍채(風采)를 친히 목격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첫눈에 조운은 서로 너무 늦게 만났음을 한탄(恨歎)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상하지만 이 손상향(孫尙香)과 번부인의 배우자선택조건은 아주 유사했다. 그것은 바로 "천하영웅(天下英雄)이 아니면 나는 그를 모시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만 지위가 달랐다. 그래서 한 말의 무게가 다른 것이다. 손상향(孫尙香)은 남자의 흉금을 지니고 자태가 뛰어났다. 이런 여자에게 어찌 조운(趙雲)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무장으로서 조운은 손부인(孫夫人)이 '호관무사(好觀武事)'하는 것을 중시했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이 여자가 이미 주모(主母)가 되었다는 점이다. 조운(趙雲)은 그저 애모(愛慕)의 정을 가슴 속에 품어두고 조금도 태만히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유비와 손부인(孫夫人)이 함께 형주로 돌아온다. 오는 길에 동오(東吳)는 추격하고 포위하여 아주 흉험(凶險)했다. 다행히 손부인의 성격이 강하여 한 마음으로 유비(劉備)를 따랐다. 그리하여 유비는 비로소 생명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번에 손부인(孫夫人)이 보인 여러 가지 모습은 더더욱 조운으로 하여금 그녀를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만든다. 천하를 다 보아도 이런 여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치대로 말하자면 연령상으로는 용모 상으로나 조운과 손상향(孫尙香)은 잘 맞는 한 쌍이다. 다만 나무는 이미 배가 되었다(木已成舟). 게다가 신분의 차이도 있다. 조운(趙雲)이 어떻게 하더라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다행히 조운은 호남아(好男兒)이다. 내심으로 고통을 겪었지만 얼굴에는 이것을 나타내지 않았다.
당연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조운이 손부인(孫夫人)을 잊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생각났다.
얼마 후 손권(孫權)은 모친이 병들었다는 이유를 대며 손상향(孫尙香)을 동오로 속여서 데려온다. 떠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은 속고 있었지만 오직 조운(趙雲)만이 민감하게 적시에 소식을 듣는다. 짝사랑하는 여인이 곧 떠나려는 것을 보자 조운(趙雲)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더 이상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쫓아간다. 소설에서 조운이 손부인(孫夫人)을 쫓아간 것에 대하여 아두(阿斗)를 빼앗아오기 위해서라고 했다. 기실이것은 그중의 한 방면이다. 아두(阿斗)를 데려온다는 핑계로 손부인(孫夫人)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직접 할 수는 없고 그저 이유를 찾아야 했다. 이점에서도 조운(趙雲)의 평상시와 다른 거동을 엿볼 수 있다. 조운(趙雲)이 배에 뛰어올라간 후 손부인의 질책을 받고는 시종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예전에 장판파전투(長坂坡戰鬪)에서 조운(趙雲)이 미부인을 책망(責望)하던 것과 비교하면 강렬한 차이가 있다. 원인은 바로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인의 앞이었기 때문이다. 조운이 어찌 반박(反駁)할 용기가 있을 것인가? 마지막에는 그저 계속 물러서며 좌우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장비(張飛)처럼 올라가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아무런 망설임 없이 동오(東吳)의 주선의 머리를 자른 것과는 다르다.
손부인(孫夫人)은 결국 떠난다. 이것은 조운(趙雲)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한참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삼국지’에 손부인(孫夫人)에 관한 기술은 매우 적다. ‘삼국지’ 촉서(蜀書) 법정전(法正傳)에는 ‘주공께서 공안에 계실 때 북쪽으로 조조(曹操)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시고 동쪽으로 손권(孫權)이 핍박함을 꺼렸으며 가까이에 손부인(孫夫人)이 이 곁에서 변고를 일으킬까 겁내시었으니…’라고의 제갈량(諸葛亮)의 말이 기록되고 있다. 손부인(孫夫人)의 시녀 백 명이 모두 무장해 있어 유비(劉備)는 손부인의 침소에 들어올 때마다 항상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신혼 첫날밤의 날 무장한 시녀(侍女)들을 본 유비는 침실(寢室)에서 도망쳤다고 하는 설도 있다. 이름이 손상향(孫尙香)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삼국지’ 촉서(蜀書) 목황후전(穆皇后傳)에 의하면 유비가 익주를 평정 한 후에 손부인은 오에 귀국했다. ‘삼국지’ 촉서 목황후전(穆皇后傳)에 주석이 달려있는 ‘한진춘추(漢晉春秋)’에 의하면 손부인은 유선(劉禪)을 데리고 오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제갈량은 조운(趙雲)에 명해 장강을 봉쇄해 유선을 구출했다. 이 때문에 유비와 손부인의 사이는 더욱 더 험악하게 되어 손부인(孫夫人)은 공안(公安)에 새로운 거성(莒城)을 쌓게 해 거주하게 해 별거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이로서 손부인과 유비는 사실상 이혼(離婚)한 상태가 되었다.
오에 귀국 후의 손부인(孫夫人)의 행방은 불명하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다른 곳으로 재가(再嫁)를 갔다고도 한다.
나중에 유비(劉備), 제갈량(諸葛亮)이 관심을 가져주고 손부인(孫夫人)이 그 후에 소식을 보내지 않자 조운은 비로소 짝사랑을 포기(抛棄)하고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조운(趙雲)은 손부인(孫夫人)이 떠난 것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다. 나중에 유비(劉備)가 출병하여 동오(東吳)를 토벌하려 할 때 처음 나서서 반대한 사람이 바로 조운이다. 유비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조운(趙雲)은 군대를 따라 출정(出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유비(劉備)는 대패하고 이때부터 촉한은 힘을 쓰지 못한다.
사랑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조운(趙雲)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그저 자기 자신만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