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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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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연의'에 기재된 무장들의 '일대일대결' 장면은 역사적으로 실제 존재했는가

图片信息 非虚构:三国武将真实对决,特定条件和对战局作用


'삼국연의'의 문학적 묘사에는 과장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무장 일대일대결(武將一對一對決)"이라는 장면은 역사적으로 실제 존재했었다.

청나라 때의 고증대가는 사적, 필기에 기재된 무장의 일대일대결(一對一對決)에 관하여 정리한 바 있다. 왕완정(王阮亭)이 '지북우담(池北偶談)'에서의 내용을 인용하여 이렇게 결론 내렸다. "예로부터 정말 장수(將帥)들이 싸우는 일이 있었다. 모조리 패관(稗官)들의 헛소리만은 아니다." 비록 그가 찾은 사례가 많지는 않았고 모두 합쳐서 20여개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간적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었다. 최초에 발생한 것은 기원전7세기 춘추시대(春秋時代)이고 가장 늦은 것은 숭정연간이었으며 명나라장수가 농민군(農民軍)을 토벌할 때 일어난 일기토의 고사이다.

조익(趙翼)이 찾아낸 첫번째 투장(鬪將)의 사례는 영웅기개가 넘치는 것이다. '좌전'에 기록된 것인데 노국공자 계성자가 군대를 이끌고 거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상대의 우두머리인 거나를 생포한 후 "우리 두 사람이 사이가 나쁜 것이지, 병사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라는 이유를 들어 도전을 제기한다. 그리고 좌우에 인원을 병풍처럼 둘러싸게 하고 서로 싸웠다(相搏)" 아쉽게도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좌전'의 판본에는 이 일대일대결의 기록이 없다. 볼 수 있는 기록은 그저 이 거나가 계성자에게 1년 내에 2번 붙잡혔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확실하게 일대일대결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한서'에 나온다. 당사자는 바로 서초패왕 항우(項羽)와 한고조 유방(劉邦)이다. 자연히 이 요청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유방이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지혜로 싸울지언정 힘으로 싸울 수 없다"라고 교묘하게 회피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중국역사이래 최초의 일대일대결(一對一對決)이 성사되었을 것이다.

조익이 고증한 첫 번 째 일대일대결(一對一對決)이 성사된 것은 당대문헌에서도 찾아낼 수 있는 일대일대결(一對一對決)이다. 바로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발생한다. 그러나 이번 일대일대결(一對一對決)은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다. 즉 여포(呂布)가 곽사(郭汜)에게 제안한 대결이다. 그의 무력수치는 확실히 곽사(郭汜)보다 낫다. 다만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처럼 과장하거나 파생작품(派生作品)이 나오는 수준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저 "창으로 곽사를 찔렀고"(以矛刺中), 곽사(郭汜)가 죽을 정도는 아니었고 곽사(郭汜)는 부하에 의해 구출(救出)된다.

군벌혼전(軍閥混戰)의 삼국시대는 역사상 무장들의 일대일대결(一對一對決)의 첫 번 째 황금기(黃金期)였다. 우리는 비록 '삼국지(三國志)'같은 정사의 기록에서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라든지 "관우투황충(關羽鬪(黃忠)"같은 장면을 볼 수는 없지만 손책(孫策)과 태사자(太史慈)의 신정령(神亭嶺)에서의 대전은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원소(袁紹)의 대장 안량(顔良)은 정말 관우가 "말을 몰아 안량(顔良)을 여러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찌르고 그의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이것은 아마도 '삼국연의(三國演義)' 독자들에게는 가장 의외로 여겨질 만한 정사의 기록(記錄)일 것이다.

팁으로 강동평정(江東平定)은 후한말 군벌 원술(袁術)의 밑에 있던 손책(孫策)이 양주(揚州) 일대를 정복(征服)하고 독립된 군벌 세력으로 자립한 일련의 원정(遠征)이다. 당시 손견(孫堅)의 아들 손책(孫策)은 아버지 손견이 형주 전투(荊州戰鬪)에서 유표(劉表)에게 전사한 뒤 남양 태수(南陽太守) 원술(袁術)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손책(孫策)은 원술(袁術) 밑에 있으면서 경헌 태수(涇縣太守) 조랑(祖郞), 여강 태수(慮江太守) 육강(陸康) 등을 무찌르고 원술의 세력을 넓히는 등의 공을 세우지만 여강(慮江)에 진기(陳紀)와 유훈(劉勳)을 태수로 보내고 자신을 조롱(嘲弄)하자 결국 원술을 떠나기로 한다. 손책(孫策)은 주치(朱治)와 여범(呂範)의 도움으로 군사를 얻고 원술에게 전국옥새(傳國玉璽)를 주어 군사 4000명과 말 500필을 빌린다. 또한 손견(孫堅)의 부하 황개(黃蓋), 한당(韓當), 정보(程普)와 주유(周瑜), 장소(張昭), 장굉(張紘) 등 여러 인재를 얻어 더욱 탄탄한 세력을 갖추게 되고 양주(揚州를 공격한다.

손책(孫策)이 쳐들어오자 곡아(曲阿)의 양주자사(揚州刺史) 유요(劉繇)는 부하 장영을 보내 손책(孫策)에 맞서게 한다. 장영(張英)은 황개(黃蓋)와 맞서 싸움을 벌이지만 평소 손책(孫策)의 부하가 되고 싶던 해적 출신 주태(周泰)와 장흠(蔣欽)이 장영(張英)의 진영에 불을 질러 손책(孫策)은 승리하게 되고 주태(周泰)와 장흠(蔣欽)을 거두어들인다.

손책(孫策)은 신정령(神亭嶺) 북쪽에 진을 치고 고개 위에 있는 광무제(光武帝)의 사당을 찾는다. 이에 유요(劉繇)는 부하 태사자(太史慈)와 함께 손책(孫策)을 잡으려 공격하고 손책(孫策)과 태사자(太史慈)는 50합을 겨룬다. 그 사이에 손책(孫策)의 부하 주유(周瑜)는 유요(劉繇)의 부하 진무(陳武)를 꾀어내어 자기편으로 만들고 본거지 곡아(曲阿)를 점령한다. 이에 유요(劉繇)는 곡아(曲阿)로 돌아가려 하지만 기습 공격으로 크게 패하고 유요(劉繇)가 착융(笮融)과 함께 우저(牛抵)를 함락시키자 손책(孫策)은 진을 치고 우저(牛抵)에서 맞선다. 손책(孫策)은 우저(牛抵)에서 유요(劉繇)의 부하 우미(于麋)와 번능(樊能)을 단숨에 베어버려 소패왕(小霸王)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결국 유요(劉繇)는 원술(袁術)에게 달아나고 착융(笮融)도 성으로 도망치다가 백성들에게 죽고 손책(孫策)은 말릉성(秣陵城)을 공격한다. 말릉성(秣陵城)을 지키고 있는 유요(劉繇)의 잔당 설례(薛禮)는 손책(孫策)에게 화살을 쏘아 맞히고 손책(孫策)은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그날 밤 설례(薛禮), 장영(張英), 진횡(陳橫) 등이 성 밖으로 나오자 기습 공격을 하여 설례(薛禮)가 복병을 만나 전사하고 장영(張英)은 진무(陳武)에게 진횡(陳橫)은 장흠(蔣欽)에게 사살당하면서 이렇게 말릉성(秣陵城)도 함락되고 경현의 태사자(太史慈)를 공격한다.

경현(涇縣)의 군사들은 2000명에 불과해 진무(陳武)의 공격으로 쉽게 함락되고 태사자(太史慈)는 손책(孫策)에게 사로잡혀 손책(孫策)의 부하가 된다.

삼국시대 이외에 우리가 잘 아는 여러 명의 당, 송의 장수들도 일대일대결(一對一對決)로 상대방 장수의 수급을 벤 기록을 남겼다. 거기에는 항금(抗金) 명장(名將) 악비(岳飛)도 포함된다. 수, 당교체기에 이런 인재가 가장 많았다. 위지경덕(尉遲敬德), 진숙보(秦叔寶)와 설인귀(薛仁貴)는 모두 이런 용장이다. 그중 진숙보(秦叔寶)에 관한 기록이 가장 과장되어 있다. 매번 적측의 장수가 나와서 힘을 자랑하면 진왕은 진숙보(秦叔寶)를 보내어 "만 명의 무리가 보는 가운데 찔렀다". 이런 말이 비록 정사(正史)에 나오기는 하지만 아마도 문학적 성분이 들어간 것일 것이다.

비록 무장의 일대일대결(一對一對決)이 전쟁사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방(劉邦)이 '지혜로 싸우자"는 명목으로 요청을 거절한 유명한 고사(故事)도 있고 대다수의 일대일(一對一)을 제안하는 경우에는 상대방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온다. 그 상대방이 한족이든 아니면 변방의 이민족(異民族)이든 예를 들어 수나라의 두영정(杜榮定)이 돌궐(突厥)의 칸에게 각각 장수 1명을 보내어 일대일로 대결하여 승부를 결정하자고 제안했을 때 쓴 이유는 바로 "사병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는 것이다. 돌궐 칸(突厥汗)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를 보면 일대일대결(一對一對決)에는 무슨 '문화적 차이'는 없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조익(趙翼)이 '적인(賊人)' 유천근(劉千斤)이 승려 혜통(惠通)의 일대일대결 제안을 받아들인 이야기도 적고 있다. 싸우는 방식은 진짜 킬과 창으로 하는 대결(對決)과 달랐다. 그들 두 사람의 대결은 생명(生命)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병기(兵器)를 담요로 싸고 재를 묻혀서 싸우는 것이다. 몸에 흰색이 많은 자가 지는 방식"이었다. 이 일대일대결(一對一對決)의 결과 유천근(劉千斤)이 지고 그는 부하를 이끌고 조정에 투항(投降)한다. 여기서 설명해야할 점은 이 고사는 문인의 필기에 기록된 것이어서 정사만큼 신뢰도(信賴度)가 높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아마도 무장의 일대일대결(一對一對決) 중에서 가장 문아(文雅)한 장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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