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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는 촉한 편을 들어 ‘삼국연의’에서 석정전투(石亭戰鬪)를 언급하지 않았다

图片信息 《大字足本三国志演义》金圣叹先生评批(八册全) 中华


석정 전투(石亭戰鬪) 혹 협석 전투(夾石戰鬪)는 228년 삼국시대 때 위나라와 오나라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당시 제갈량(諸葛亮)의 제1차 북벌을 막은 데 성공한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는 양주 도독 조휴(曹休)로부터 오나라 양주 파양 태수 주방(周魴)이 위나라를 돕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사마의(司馬懿)는 위나라 황제 명제에게 소식을 알리고 군사를 일으키고자 했다. 명제는 일단 조휴(曹休)에게 명해 오나라를 치게 하고 사마의를 시켜 조휴를 돕게 하고 가규(賈逵)에게는 만총(滿寵), 호질(胡質) 등 4군을 지휘하여 동관으로 진격하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나라의 함정이었는데 조휴(曹休)는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심양을 향해 진격(進擊)한다. 한편 오나라에서는 주방(周魴)이 조휴(曹休)를 유인하는 사이에 손권(孫權)이 육손(陸遜)에게 황월을 주고 대도독(大都督)으로 임명하고 주환(朱桓), 전종(全琮)이 좌우독이 되어 각기 3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조휴(曹休)를 맞아 공격했다. 조휴(曹休)는 자신이 속았음을 알고 군사를 물리려고 했다가 속은 것이 부끄럽고 또 자신의 병력이 많고 정예(精銳)하므로 오나라 군대와 교전(交戰)했다.

조휴(曹休)가 패퇴하여 오나라 군대는 위나라 군대를 협석(夾石)까지 추격하여 만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수레 1만 대와 조휴(曹休) 군대의 기계를 대부분 빼앗았다. 왕릉(王淩)이 목숨을 바쳐 힘껏 포위망을 뚫었으므로 조휴(曹休) 군대는 궁지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한편 조예(趙叡)의 명령으로 동관으로 진격한 가규(賈逵)는 동관에 적의 방비가 없는 것을 보고 오나라 군대는 조휴(曹休)가 진격하는 환현(环县) 쪽에 집결했으며 조휴는 이와 싸워 이길 수 없다고 보고 조휴를 응원하는 꼴로 진군했다가 조휴(曹休)가 졌다는 소식을 듣고 신속히 진군하여 의병으로 오나라 군사를 물러나게 하였고 조휴(曹休)는 퇴각하여 석정(石亭)까지 물러났다.

조휴(曹休)의 소식은 사마의(司馬懿)에게 전해져 사마의 역시 철군을 하고 이는 촉나라에도 전해져 제갈량(諸葛亮)이 다시 제2차 북벌을 일으킨다. 이 싸움의 패배로 조휴(曹休)는 악창(惡瘡)이 나 죽었고 가규(賈逵)도 급병(急病)으로 죽었기 때문에 이후 위나라의 양주 방면 전선은 만총(滿寵)이 전장군(前將軍) · 도독양주제군사(都督揚州諸軍事)가 되어 담당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교전처(交戰處)가 완성(宛城), 협석(夾石)이 아닌 석정(石亭)으로 되어 있다. 또 서성(徐盛)이 참전하여 활약하는 것으로 나온다.

삼국시대에 석정전투(石亭戰鬪)는 기실 아주 유명한 전투이다. 그리고 아주 멋진 전투이다. 당시 오(吳)나라의 총사령관인 육손(陸遜)은 주환(朱桓), 전종(全琮), 주연(朱然) 등 저명한 장수를 이끌고 위나라의 조휴(曹休)가 총사령관으로 가목, 주령(朱玲), 왕릉이 이끄는 십만 대군을 물리치고 1만여 명을 참하고 포로로 잡았다. 위나라의 총사령관인 조휴(曹休)는 최종적으로 화병으로 죽었다. 당시 육손(陸遜)이 만일 과감하게 주환(朱桓)의 계책을 받아들였다면 아마도 조위정권의 수도를 바로 취하고 조위정권을 와해(瓦解)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휘황(輝煌)하고 멋지며 보기 좋은 전투가 ‘삼국연의(三國演義)’에는 전혀 언급(言及)되어 있지 않다. 확실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동오(東吳)와 조위 간에 발생한 강릉전투(江陵戰鬪)에 대하여도 한마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전쟁을 잘 묘사하는 것이 장점인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왜 석정전투(石亭戰鬪)를 언급하지 않았을까? ‘삼국연의’를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작자가 석정전투(石亭戰鬪)를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주요한 원인은 작자가 이릉지전(夷陵之戰)의 참열(慘烈)함을 돋보이게 하고 유비(劉備)가 이릉지전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영광스러운 패배(敗北)라는 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손오정권의 주요 장수가 모두 이릉지전(夷陵之戰)에서 희생시켰다. 그래서 나중의 이릉전투(夷陵戰鬪)에서 계속 써나갈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릉지전에서 희생된 손오의 많은 장수들은 석정전투(石亭戰鬪)의 진실한 역사에서 핵심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이릉지전(夷陵之戰)에서 작자는 촉한(蜀漢)을 편들었기 때문에 최소한 5개 방면에서 고쳐 썼다.

첫째, 동오 대장 감녕(甘寧)은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이릉지전(夷陵之戰)에서 촉국의 만장(蠻將, 오랑캐출신 장수) 사마가(沙摩柯)에게 사살되었다고 적었으나 진실한 감녕(甘寧)은 기실 이릉지전(夷陵之戰)에서 병사했다. ‘삼국지’에서 감녕은 220년에 병사하는데 이릉지전(夷陵之戰)은 221년에 발발한다.

둘째, 손오의 (朱然), 반장(潘璋) 등 저명한 장수는 ‘삼국지(三國志)’의 이릉지전에서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전사하지 않았다. 이릉전투(夷陵戰鬪)이후의 강릉전투(江陵戰鬪)에서 주연(朱然)은 소수의 정예병을 이끌고 조위 측의 조진(曹眞), 하후상(夏侯尙), 장합(張郃) 등 고급 장수들이 이끄는 대군과 6개월 이상 혼자서 막아낸다. 조위대군(曹魏大軍)은 결국 어렵다는 것을 알고 물러난다. 이렇게 하여 화하(華夏)에 명성을 떨친다. 관우(關羽)가 일으킨 강릉전투(江陵戰鬪)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리고 주연(朱然)은 스스로를 보전하였으니 관우(關羽)보다 더 뛰어난 것 같다. 다만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주연(朱然), 반장(潘璋)은 모두 전사한다. 이렇게 해버리니 이어지는 동오와 조위 간에 발생한 강릉전투(江陵戰鬪)를 써나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핵심인물인 주연을 이미 이릉전투(夷陵戰鬪)에서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관우가 화하에 명성을 떨치는 이릉지전(夷陵之戰)을 일으켰다는 것만 알지 동오와 조위 간에도 참열(慘烈)한 강릉전투가 일어났다는 것을 모르게 만들었다. 그 이후의 석정전투(石亭戰鬪)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석정전투에서 주연(朱然)은 여전히 동오의 핵심장수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셋째, 촉한정권의 대장 부사인(傅士仁)과 미방(糜芳)이 손오에 투항한 것은 ‘삼국지(三國志)’의 사실이다. 다만 나중에 그들은 촉한(蜀漢)으로 도망쳐 돌아가지도 않았고 마충(馬忠)을 죽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두 사람은 손오에 투항(投降)한 후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자 마충(馬忠)을 죽이고 촉한으로 도망쳐 돌아갔으나 유비(劉備)가 처형했다고 적었다. 또 다른 두 명의 대장인 범강(范疆)과 장달(張達)도 마찬가지로 촉한정권으로 도망쳐 돌아가지 않았다.

넷째, 동오(東吳)의 총사령관은 철군하고 승기를 틈타 계속 추격하거나 심지어 촉한정권(蜀漢政權)을 멸망시키지 않았는데 진실한 역사는 육손(陸遜)이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한 것이다. 하나는 손유연맹(孫劉聯盟)이 반드시 지속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동오(東吳)는 단독으로 존재해나갈 수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조위(曹魏)가 자신이 아직 재정비하기 전에 공격해올까 겁을 냈다. 어쨌든 이릉전투(夷陵戰鬪)은 비록 손오의 대승으로 끝나지만 손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작자는 제갈량(諸葛亮)의 재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육손(陸遜)은 제갈량이 파놓은 팔진도(八陣圖)에 빠져 방향을 잃어서 공격할 수 없었다고 완전히 헛소리를 적어 놓았다.

다섯째, 쌍방군대는 ‘삼국연의(三國演義)’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은 출동(出動)시킬 수가 없었다. ‘삼국연의’에서 유비(劉備)는 70만대군, 동오(東吳)는 20만 대군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실제로 과장(誇張)이 너무 심한 것이다. 당시 촉한의 전체 인구가 백만 가량인데 노인과 어린아이를 빼고 나머지를 다 합쳐야 70만이 되지  않는다. 동오(東吳)는 한 번도 그렇게 많은 군대를 내보낸 적이 없었다. 설사 적벽대전(赤壁大戰)이라고 하더라도 3만에 불과했다. ‘삼국지(三國志)’에는 유비(劉備)가 10만을 출병시키고 동오(東吳)는 약 6만을 출병(出兵)시켰다고 적었는데 비교적 신뢰도(信賴度)가 높다.

그래서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왜 동오(東吳)의 활동이 아주 평범한지 심지어 강릉전투(江陵戰鬪)와 석정전투(石亭戰鬪)를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작자가 유비(劉備)를 끌어올리기 위하여 동오의 많은 저명한 장수를 이릉전투(夷陵戰鬪)에서 희생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발생하는 강릉전투(江陵戰鬪), 석정전투(石亭戰鬪) 등 저명한 전투에 핵심지휘관(核心指揮官)들은 바로 이들 소설이 희생시킨 장수(將帥)들이었다. 사람은 한번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아무리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신화(神話)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 이상 쓸 수가 없었고 한 마디도 언급(言及)하지 않은 것이다.

228년 5월 석정 전투(石亭戰鬪)에서 손권이 조휴(曹休)를 속여 유인하게 하자 주방(周魴)은 산월족(山越族) 가운데 위나라에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을 찾아 동잠(董岑)과 소남(邵南)으로 하여금 위나라에 항복(降伏)하려 하니 군사를 보내 호응(呼應)해 달라는 뜻을 담은 일곱 통의 편지를 보내게 했다.

또 손권(孫權)이 거짓으로 주방(周魴)의 잘잘못을 따지자 머리를 풀어 사과하는 척 하였다. 주방(周魴)의 계략에 속아 넘어간 조휴(曹休)는 10만 군사를 이끌고 주방(周魴)과 호응하려 했으며 조예(曹叡) 또한 사마의(司馬懿)와 가규(賈逵)에게도 별도의 군사를 주어 오를 치게 했다.

그러나 조휴(曹休)는 석정(石亭)에서 육손(陸遜)에게 패하여 간신히 달아났다. 손권(孫權)은 주방(周魴)의 공을 칭찬하고 비장군을 더하였으며 관내후(關內侯)로 삼았다.

주방(周魴)은 태수직(太守職)을 13년간 맡다가 죽었다. 아들 주처(周處) 또한 문무(文武)가 뛰어났고 천기(天紀) 연간에 동관좌승(東觀左丞) · 무난독(無難督)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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