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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영웅호걸들 무공순위 배열과 삼국지 등장인물 인간력 곡해를 재평가 

图片信息 蜀汉政权真像《三国演义》描述那般团结吗?


사람이 쓴 소설 중 성경(聖經)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 삼국지 아닐까 싶다. 아니 정확히는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다. 이 책은 삼국시대(三國時代)가 종결 된지 천년이나 지난 1300년대 말~1400년대 초에 지어진 삼국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정사(正史)의 기록과 일치하진 않는다. 소설이니 소설답게 허구성(虛構性)이 짙기는 하지만 엄청난 사람이 읽는 책이다 보니 그에 맞게 평론이나 역발상의 후속작(後續作)도 엄청나게 간행되고 있다. 계화(桂華)가 지은 ‘삼국지 인간력’에는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다뤄진 인물들의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재평가(再評價)를 통해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등장인물(登場人物)들에 대한 곡해(曲解)를 최대한 줄여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삼국(三國)"에 나오는 여러 영웅의 무공등급(武功等級)에 관하여 민간(民間)에서 널리 알려진 설은 이렇다.

일여이조삼전위(一呂二趙三典韋), 1위는 여포(呂布), 2위는 조운(趙雲), 3위는 전위(典韋) 
사관오마육장비(四關五馬六張飛). 4위는 관우(關羽), 5위는 마초(馬超), 6위는 장비(張飛)
칠황팔허구강유(七黃八許九姜維)  7위는 황충(黃忠), 8위는 허저(許褚), 9위는 강유(姜維)

이 말은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출처(出處)는 명확하지 않다. 작자는 고의로 전위(典韋), 장비(張飛), 강유(姜維)를 세 마디의 말미에 넣은 것은 자연스럽게 운을 맞추기 위함이다. 위, 비, 유는 중국어로 웨이(韋), 페이(飛), 웨이(維)이다. 그래서 읽을 때 자연스럽고 쉽게 기억(記憶)이 된다. 사실은 증명(證明)한다.  작자의 방식은 아주 효과적(效果的)이었다. 그래서 이 문구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생각해봐야할 문제들이 많다. 예를 들어 조운(趙雲), 관우(關羽)와 강유(姜維)는 너무 높이 평가했고 장비(張飛), 마초(馬超)와 허저(許褚)를 너무 낮게 평가했다. 그리고 안량(顔良), 문추(文醜), 방덕(龐德)이 빠졌다.

"삼국(三國演義)"의 최고수들 중에서 여포(呂布)와 장비(張飛), 여포(呂布)와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마초(馬超), 마초(馬超)와 허저(許褚), 허저(許褚)와 전위(典韋), 관우(關羽)와 황충(黃忠), 관우(關羽)와 방덕(龐德), 조운(趙雲)과 문추(文醜)는 각각 싸워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여포가 1위라는 데는 아마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소위 "인중여포, 마중적토(人中呂布馬中赤兔) "로 책에서 확실히 아무도 1:1로 붙어서 여포(呂布)를 이길 수는 없다. 일류고수인 하후돈(夏侯惇)은 여포와 싸워서 팔 합 만에 패했고 유비관우장비(劉備關羽張飛)는 세 명이 공동으로 여포(呂布)와 싸워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다. 여포(呂布)는 무공이 높으면서 활도 잘 쏘았다. 원문사극(轅門射戟)에 일백 오십 보천양은 고금의 신전수에 이름을 올릴 만하다.

조운이 2위가 될 수 있을지는 문제이다. 막 출도(出道)했을 때 문추(文醜)와의 오륙십 회합(會合)의 싸움에서 승부를 내지 못했고 난전 중에 허저(許褚)와 싸워본 것을 제외하면 조운(趙雲)은 다시 다른 절정고수들과 1:1로 싸워본 적이 없다. 이름을 날리게 된 전투인 "장판파칠진칠출(長坂坡七進七出)"에서 조조(曹操)의 수하 오십 명을 무찔렀다. 이 전투는 아주 멋지지만 절정(絶頂)은 아니다. 만일 장비(張飛), 마초(馬超), 허저(許褚) 혹은 전위(典韋)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칠진칠출(七進七出)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비(張飛), 허저(許褚)와 전위(典韋)의 성격으로 보면 아마도 죽인 숫자가 더 많았을 것이다. 결국 조운(趙雲)을 순위 5위내에 두는 것은 문제(問題)가 없다. 그러나 2위로 꼽는 것은 확실히 부족(不足)한 점이 있다.

전위(典韋)는 맹장이고 일찌기 산에서 호랑이를 쫓고 시내를 넘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너무 일찍 죽었다. 그래서 더 많이 실력(實力)을 드러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절정고수(絶頂高手) 중에서 전위는 허저(許褚)와만 싸워본다. 두 사람은 승부(勝負)를 가리지 못했으니 기본적으로 같은 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순위에서 전위(典韋)는 3위이고 허저(許褚)는 7위이다. 이를 보면 서열(序列)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관우(關羽)의 등급은 문제가 가장 많다. 관우의 무공은 張飛(장비)보다 못하다. 그저 황충(黃忠), 방덕(龐德)과 비슷하다. 그러나 조운(趙雲)과 대등한 문추는 금방 죽였다. 그리고 무공이 문추(文醜)보다 뛰어난 안량(顔良)까지도 이는 그저 장비(裝備)가 뛰어난 것에 돌려야겠다. 적토마(赤兎馬)에 언월도(偃月刀)까지 말도 빠르고 칼도 빠르고 안량(顔良)은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문추(文醜)는 "원래 겁이 많아서"였다. 만일 양군이 대진(對陣)하고 있었다면 원래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할 리는 없다. 그 실제상황은 관우(關羽)와 유비(劉備)가 헤어진 후 유비(劉備)는 원소(袁紹)에 투신하고 관우는 조조(曹操)에 투신한다. 원소(袁紹)의 수하대장인 안량(顔良)은 관우가 출진(出陣)하는 것을 보고 원래 관우(關羽)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면 유비(劉備)가 이곳에 있다고 말하려고 한 것이다. 혹은 관우(關羽)에게 왜 조조(曹操)의 진영에 가 있느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막 물어보려고 했을 때 관우의 적토마(赤免馬)는 빨라서 일찌감치 눈앞까지 달려와 있었고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들어 베어버린 것이다. 

문추(文醜)와 대전할 때는 삼합도 싸우기 전에 문추가 겁을 먹고 말을 빼서 강을 돌아 도망간다. 관우(關羽)의 말이 빨라서 문추를 쫓아가고, 머리 뒤에서 칼을 휘두르고 문추(文醜)를 벤다. 문추는 겁이 많아서 확실히 안량이 관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고 그는 스스로 안량(顔良)의 무공이 자신보다 위라고 여겼기 때문에 스스로 관우(關羽)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미리 생각하여 겁을 먹은 것이다. 그래서 싸우면서 도망칠 생각만 했다. 그는 관우가 안량을 죽인 것이 사실은 안량(顔良)이 기습적인 방식에 당해서 허무하게 죽은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목숨을 헛되이 잃은 것이다.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를 비교하면 하나 참조할 것이 있다. 

관우(關羽)는 기령(紀靈)과 삼십 합을 싸웠으나 승부를 내지 못하고 기령(紀靈)이 병력을 거두어 간다. 장비(張飛)는 기령(紀靈)과 십 합도 되지 않아 기령을 찔러 말 아래로 떨어뜨린다. 그 외에 마초(馬超)가 공격해 들어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갈량(諸葛亮)이 이렇게 말한다. "장비, 조운(趙雲) 두 장수만이 대적(對敵)할 수 있을 것이다." 관우(關羽)는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관우의 무공은 장비(張飛), 조운(趙雲)과 마초(馬超)보다 못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황충(黃忠) 방덕(龐德)과는 싸워서 승부를 내지 못했으니 대등(對等)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만 황충과 싸울 때 관우는 장년이고 황충(黃忠)은 이미 육순에 가까웠다. 이를 보면 황충(黃忠)이 20년만 젊었다면 관우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방덕과는 이틀간 교전(交戰)했고 백오십 합을 싸워서 승부를 내지 못했다. 마지막에 방덕(龐德)이 쏜 화살에 왼쪽 팔을 맞는다. 이는 진 것이다. 그래서 관우(關羽)를 4위로 올린 것은 작자와 독자가 그를 편애(偏愛)하기 때문이다. 실제상황은 그와 차이가 많다. 만일 진실(眞實)된 무공으로 따진다면 관우(關羽)는 10위내에 들기 힘들 것이다.

마초(馬超)를 5위로 한 것은 확실히 너무 저평가(低評價)한 것이다.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마초(馬超)의 용맹은 여포(呂布)에 뒤지지 않는다고 팔합(八合)도 되지 않아 우금(于禁)을 격패(擊敗)시키고 이십 합에 장합(張郃)을 격패시키고 허저(許褚)와의 싸움에서도 약간 우위를 점하고 장비(張飛)와의 싸움에서는 승부를 가리지 못한다. 방덕(龐德)은 비록 용맹(勇猛)했지만 기꺼이 그의 아래로 들어간다. 이상의 여러 가지를 보면 추정(推定)해볼 수 있다. 마초(馬超)의 무공은 순위 3위안에 든다.

장비를 6위로 놓은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책에서 여포(呂布)와의 1:1에서 100합을 넘기고도 승부(勝負)를 보지 못한 것은 장비 한 사람뿐이다. 허저(許褚)와는 두 번 만났고 모두 난전(亂戰) 중이었다. 한번은 허저(許褚)가 싸우고 싶어 하지 않아서 도망간다. 또 한 번은 허저(許褚)가 안장도 없이 장비와 싸운다. 장료(張遼)와 서황(徐晃) 두 장수가 말을 달려와서 협공(挾攻)한다. 이를 보면 장비(張飛)의 무공은 허저(許褚)보다 위이다. 마초(馬超)와 장비는 싸워서 비겼는데 거기에는 연령의 우세도 있을 것이다.

이상의 고수들 외에 2명의 무공이 고강(高强하여 충분히 순위(順位)에 들 만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다. 그들은 바로 한 명은 안량(顔良)이고 다른 한 명은 문추(文醜)이다. 두 사람은 모두 하북 명장이다. 안량은 이십 합 만에 조조 수하의 일류고수 서황(徐晃)을 격패하였다. 서황(徐晃)의 무공은 허저(許褚)보다 약간 떨어지나 장료(張遼), 장합(張郃), 하후돈과(夏侯惇)는 비슷하다. 안량(顔良)이 이십 합 만에 가볍게 서황을 이겼는데 이 전적을 전체 삼국을 살펴봐도 여포(呂布)가 팔합 만에 하후돈(夏侯惇)을 이기고 마초(馬超)가 이십 합 만에 장합(張郃)을 이긴 것과 비교할 만하다. 이를 보면 그의 무공은 관우(關羽)보다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문추(文醜)는 안량(顔良)과 나란히 이름을 날렸고 조운(趙雲)과 육십 합을 싸워서 승부가 나지 않았다. 화살로 장료(張遼)를 쓰러뜨리고 그 후에 서황(徐晃)을  격패(擊敗)시킨다. 절대로 등한지배(等閑之輩)가 아니다. 아쉽게도 두 사람은 시운(時運)을 잘못 만나서 관우(關羽)의 기습으로 쉽게 목숨을 잃는다. 너무나 가치 없게 죽었다.

전체 "삼국지(三國志)"를 보면 영웅(英雄)이 많다. 단순히 무공(武功)으로만 보면 순위(順位) 10위내는 아래와 같다고 해야 할 거다.

1위 여포(呂布), 2위 장비(張飛), 3위 마초(馬超), 4위 안량(顔良), 5위 조운(趙雲), 6위 전위(典韋), 7위 허저(許褚), 8위 문추(文醜), 9위 황충(黃忠), 10위 방덕(龐德).

그 다음으로는 관우(關羽), 장료(張遼), 강유(姜維), 손책(孫策), 태사자(太史慈), 감녕(甘寧), 위연(魏延), 하후돈(夏侯惇), 장합(張郃), 서황(徐晃), 하후연(夏侯淵), 주태(周泰), 능통(淩統) 등이 있을 것이다. 

1800년 전 중국의 패권을 두고 위(魏), 촉(蜀), 오(吳) 삼국간의 치열한 전쟁을 다룬 소설 ‘삼국지’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삼국지에는 엄청난 등장인물과 오묘한 심리전, 그리고 탁월한 용병술과 권모술수(權謀術數) 등의 지략이 펼쳐지기 때문에 전 세계인에게 오랫동안 사랑 받아 잘 팔리는 책이다. 아마 나관중(羅貫中)이 조앤 롤랑처럼 인세를 받는 작가였다면 그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허문순교수의 삼국지병법은 이문열(李文烈)씨나 정비석(鄭飛石)씨 등의 삼국지를 비롯해 종류도 다양한 삼국지를 7번 정도 읽은 것 같다. 삼국지는 읽을 때 마다 흥미진진(興味津津)하기 때문에 다시 읽고픈 소설에 항상 우선순위(優先順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이런 인기 있는 역사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지 속  주요 인물(主要人物)들의 평가는 항상 얘깃거리가 되어 왔다. 그 중 가장 많은 문제가 제기되는 부분이 조조(曹操)와 유비(劉備)의 역할이다. 소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한 왕실의 부흥(復興)을 토대로 전개되기 때문에 촉의 유비 진영(劉備陣營)을 정의로 위의 조조 진영(曹操陣營)을 불의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중국의 2/3를 차지한 위의 조조가 결국 변방의 1할씩을 차지한 유비에 비해 천 수백 년 간 지탄(指彈) 받아야 하는 악인이었나 하는 것에 대한 반론(反論)이 만만치 않다. 오히려 근래에는 조조(曹操)는 성공한 사업가의 모델로서 소개되고 유비(劉備)는 변화에 적응(適應)하지 못하고 우유부단(優柔不斷)한 관리자의 모델로 소개되기도 한다.

이 책 ‘삼국지 인간력(三國志人間力)’의 저자 계화(桂華)는 중국의 시대별 인물 연구에 전념(專念)한 학자이다. 그는 이 책에서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의도적으로 신격화(神格化) 되었거나 또는 폄하(貶下)된 인물들에 대해 보다 사실적인 정의(定義)를 내리고자 노력한 것이 돋보인다. 하긴 삼국지를 두어 번 이상 읽어본 사람들은 유비(劉備)의 역할과 조조(曹操)의 역할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조조(曹操)의 아들인 조비(曹丕)가 한왕조(漢王朝)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황제(皇帝)에 오르는 것은 역사적으로 자연스러운 수순(手順)이리고 볼 수 있다. 강대국(强大國)이 약소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여는 것은 봉건(封建) 전제국가 시기에는 항상 있어왔던 일이기에 유비(劉備)의 촉한이 한왕조를 잇는 정통성(正統性)으로 보는 것은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나관중(羅貫中)의 개입으로 촉한을 정통성이 있는 정의로 위를 간웅(姦雄)이 세운 불의의 국가로 몰아붙인 것은 진수(陳壽)의 정사 ’삼국지(三國志)‘와 많은 부분이 배치된다. 나관중(羅貫中)은 이러한 사실들을 강조하고자 유비(劉備)를 비롯한 촉한의 사람들이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재주를 지녔거나 엄청난 무공을 소유한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라고 의도적으로 부풀린 점이 정사와 다르게 표현되었다.

삼국지 인간력(三國志人間力)에서 삼국지에서 활약한 위촉오(魏蜀吳)의 조조(曹操), 유비(劉備), 손권(孫權)과 이들 주변의 모사(謀士), 무장들을 포함해 9명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각각 조조(曹操), 여포(呂布), 유비(劉備), 손권(孫權), 사마의(司馬懿), 제갈량(諸葛亮), 곽가(郭嘉), 관우(關羽), 조운(趙雲) 순으로 재평가가 이뤄지는데 유비(劉備)보다 조조(曹操)와 여포(呂布)가 1,2번째에 사마의(司馬懿)가 제갈량(諸葛亮)이 뒤에 심지어 사후에 민간신앙(民間信仰)에서 신격화(神格化)된 관우(關羽)가 겨우 뒤에서 두 번 째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에서 저자 계화(桂華)가 유비진영의 인물들이 과대평가(過大評價)된 부분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그간 읽었던 수많은 삼국지에서 크게 비중이 다뤄지지 않았던 조조(曹操)의 모사 곽가(郭嘉)가 평전에 의연히 등장해 있는 것이었다. 그는 38세에 요절한 조조(曹操)의 수많은 모사들 중 한명이었고 조조가 스스로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고 일컫던 순욱(荀彧)과 정욱(程昱), 가후(賈詡), 순유(荀攸)와 비교해 부각을 받지 못했던 인물이었기에 약간 특이한 선정(選定)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조조(曹操)를 보자. 조조(曹操)는 그의 잔인함과 교묘한 용병술(用兵術)로 천하의 2/3를 차지한 당시의 승리자다. 이런 조조는 한 왕실을 찬탈(簒奪)했다는 이유로 어디서나 간웅(奸雄) 취급을 받지만 실은 영웅을 좋아하고 문재에도 탁월한 진정한 군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조조가 장판에서 아두(阿斗)를 품에 안은 조운(趙雲)을 살려 보낸 일이나 관우(關羽)를 거두고 있으면서 유비(劉備)에게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 장면을 볼 때 그는 진정 영웅(英雄)을 아끼는 성공적인 제왕(帝王)이었다고 본다.

삼국지(三國志)에서 나온 무장들 중 가장 무공이 높은 인물로는 누구나 여포(呂布)를 꼽는다. 여포는 삼국지에서 지략도 없고 지조(志操)도 없이 무공만 높은 무식한 장수(將帥)로 알고 있지만 실상 그는 대단한 무공(武功)뿐 아니라 대인배의 도량(度量)을 갖추고 있는 영웅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의 단점이라면 주변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무공만을 믿는 단순(單純)함이라지만 이런 성격은 무장만이 갖고 있는 여유라고 해석한다. 그는 실상 패권(覇權) 다툼에는 큰 관심이 없고 그의 용맹을 떨칠 수 있는 자리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던 진짜 무장(武將)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단점은 그의 최후에 치명적(致命的)으로 와 닿게 된다. 모사(謀士)들의 간언(間言)을 무시하고 방심하다 사로 잡혀 어이없이 삼국지(三國志) 초반에 명을 달리하는 비극적 인물도 된 것이다.

세 번 째로 다뤄진 인물이 삼국지 최대의 사기 인물이라는 유비(劉備)이다. 유비는 모든 면에서 인자하고 관대한 제왕(帝王)의 풍모를 가진 황숙으로 표현되었지만 그의 이런 행동은 대부분이 계산된 이면이 있다고 한다. 정사에는 유비가 어릴 적부터 황제(皇帝)가 되는 것을 꿈꿔 왔다고 소개하고 있으며 중산정왕(中山靖王) 경제의 19대손이라고 기치를 건 것은 증명되지 않는 족보(族譜) 체계를 이용한 가식적(假飾的)인 명함이라고 비판한다. 미투리나 만들던 짚신 장수가 황족의 후손임을 자칭하고 다녔다면 당시로선 역적의 죄로 다스릴 수 있는 중죄인데 황건적(黃巾賊)의 난이나 후한 말기의 혼란(混亂)을 틈탄 정략적(政略的) 홍보라고 본다. 게다가 사실 역사적으로 있지도 않은 도원결의로 이들 삼형제의 의기를 찬란히 표현하였단다. 그는 유방(劉邦)을 모방한 제왕학의 대가였다. 어릴 적부터 파당을 결성하여 조폭(組暴)과 같은 건달생활을 하였고 시대의 유불리에 따라 원소(袁紹), 조조(曹操), 유표(劉表), 도겸(陶謙), 손권(孫權)에게 의탁하기도 하고 배신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들의 영지를 가로채고 ‘빌려온’ 것으로 치부하기도 하였다. 이 중 제갈량(諸葛亮)은 유비에게 속은 가장 큰 피해자로 보는 것이 이채롭다. 제갈량(諸葛亮)을 얻기 위한 삼고초려(三顧草廬)로 자신의 휘황찬란한 후광을 이용해 평범한 은둔 유학자(儒學者)를 감화시켜 평생을 받들게 했다는 의혹(疑惑)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를 따르던 많은 인물들이 변절(變節)한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나 그가 옮길 때마다 백성들이 그를 따라나섰다는 점에서는 그가 자신의 인물들이나 백성들에게 베푼 인의나 후덕(厚德)함은 예사롭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라 하겠다.

손권(孫權)은 삼국지의 세 인물 중 비중이 가장 적다. 그는 아버지인 손견(孫堅)이나 강동의 소패왕(小霸王)이라 일컬어졌던 형 손책(孫策)의 후광에 힘입어 오나라를 무상 양도 받은 행운아(幸運兒)이고 비록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曹操)를 크게 물리치지만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의 계책에 속아 아무런 소득도 없이 주유(周瑜) 같은 장수를 잃는 손해를 본 무능하고 소극적인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와 오나라는 삼국 중 가장 긴 수명(壽命)을 자랑한다. 무탈하게 71세까지 천수(天壽)를 누렸고 오나라도 삼국 중 제일 오래 살아남았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해 적절한 정치적 유착(癒着)을 이뤄냈고 오랜 기다림과 부국(富國)의 기치를 통해 나라를 풍요롭게 만들었기에 유비(劉備)가 다스린 촉의 백성들보다 더 풍족(豐足)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조조(曹操)의 위(魏)를 멸하고 진(晉)을 연 사람은 사마의(司馬懿)의 손자인 사마염(司馬炎)이다. 사마의의 두 아들인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는 현재까지도 사마씨 후손들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드는 몰염치(沒廉恥)한 인물들이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아비인 사마의(司馬懿)는 삼국지 말미의 최대 흥밋거리인 제갈량(諸葛亮)과의 대치에서 지독한 인내심(忍耐心)을 바탕으로 위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다. 그가 겁이 많고 너무 신중해 공명에게 농락(籠絡)당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상 그는 공명의 용병술(用兵術)을 간파하고 가장 취약점(脆弱點)을 골라 이를 실천한 위대한 전략가(戰略家)이다. 마치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汉尼拔)의 집중적인 공격을 ‘방어’라는 전략을 고수하여 한니발을 물리친 로마의 집정관 파비우스 막시무스(法比乌斯·马克西姆斯)를 연상시킨다. 하여튼 그는 공명(孔明)에게 놀림도 받고 부하장수들에게 겁쟁이라는 오명(汚名)을 듣기도 했지만 실제 위나라를 구했고 그의 아들과 손자가 진나라를 세우는 데 기틀을 마련한 영웅(英雄)이다. 삼국지 제일의 책사(策士)라는 제갈공명(諸葛孔明)보다 사마의(司馬懿)가 먼저 소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비(劉備)에 이은 또 한 명의 나관중(羅貫中) 식 영웅이 바로 제갈량(諸葛亮)이라고 한다. 사실 삼국지에서 공명(孔明)의 활약은 엄청난 흥분을 일으켜왔다. 그의 배치와 설정은 모두 정확히 들어맞았고 유비 사후에는 촉의 내치(內治)에서 보여준 행정가(行政家)의 면모까지도 공명이 완벽(完璧)한 관리자로서의 모델로 적합하게 생각돼 왔다. 하지만 공명은 실제 정사에서는 행정가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가 지휘한 전투도 몇 개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맹획(孟獲)의 칠금칠종(七擒七縱)도 병법에 문외한인 맹획(孟獲)을 상대로 하였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격하시킨다.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에만 나섰으며 공명이 펼친 공성계(空城計)나 오장원(五丈原 )에서 철군 시 중달을 물리친 일도 기존에 있던 병법에서 참조한 내용이거나 사마의(司馬懿)의 지나친 섬세함의 결과라고 한다. 관우(關羽)를 화용도(華容道)에 배치하여 조조(曹操)를 놓아 보내게 한 것이나 형주(荊州)에서 관우를 죽음에 이르게 된 것과 백제성(白帝城)에서 유비가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도 공명의 작전이나 배치의 실패로 여기거나 혹은 관우와의 갈등(葛藤)을 배경으로 고의적인 설정을 한 것이 아닌지 의구심(疑懼心)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가 유비(劉備) 사후 촉의 전권을 휘두르지 않고 백성을 다스린 점이나 후계자(後繼者)를 제대로 점지한 것은 그가 가진 식견(識見)이 보통은 아니었던 것으로 인정한다.

조조(曹操)의 모사 중 중급 정도로 보았던 곽가(郭嘉)가 이 평전에 소개되는 것이 이채롭다. 곽가는 책에서 똑똑한 아첨쟁이로 소개되는데 그의 주군(主君)을 고르는 안목과 십승십패설(十勝十敗設)로 조조의 마음을 얻은 데서 부합된 닉네임 같다. 그는 원소(袁紹) 휘하로 찾아갔다가 박대를 당하고 조조 진영으로 오게 된 인물이다. 원소와의 관도(官渡) 싸움에서 전풍(田豊)의 모략으로 이긴 조조가 원소의 아들들을 궤멸(潰滅)하는 데는 바로 곽가의 계략 덕분이었다. 그의 밀고 당기는 전략으로 원술(袁術)과 원상(袁尙) 형제의 내분을 불러왔고 힘들이지 않고 사세삼공 집안인 원씨 가문을 멸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의 평가가 비록 순욱(荀彧)이나 정욱(程昱), 가후(賈詡)보다는 못하다 하더라도 그가 요절하기 전까지 이른 계책은 조조 초기 기반을 다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조조가 적벽(赤壁)에서 패한 뒤 곽가(郭嘉)의 부재를 탄식(歎息)했다는 데에서 그가 지닌 비중(比重)이 얼마나 컸는지 느낄 수 있다.

관우(關羽)는 그의 충직(忠直)함이나 무공의 뛰어남으로 인해 사후 그의 사당(祠堂)과 묘가 세워지는 등 신이 된 무장이다. 그는 무성(武聖)으로 불리우며 요즘에도 운장신은 무속 신앙자(巫俗信仰者)들이 모시는 신들 중 높은 반열(班列)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관우(關羽)는 실상 킬러의 면모를 지닌 냉철한 무장이었단다. 어릴 적 원수를 살해하고 화를 피하기 위해 방랑생활(放浪生活)을 하였으며 유비(劉備)를 만나 그의 행적이 정당화(正當化)되는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조조(曹操)의 휘하에서 원소(袁紹)의 장수 안량(顔良)과 문추(文醜)를 벤 일은 그가 가진 살인자적 능력(殺人者的能力)으로 불시 기습작전(奇襲作戰)이 성공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안량(顔良)과 문추(文醜)가 관우(關羽)에 비해 그리 형편없는 무공실력(武功實力)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칼 또는 3합에 목이 떨어졌다는 것은 그의 기습작전과 그가 타고 있는 적토마(赤免馬)의 능력이 배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다. 그가 가진 위대한 자존심(自尊心)은 결국 맥성(貊城)에서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큰 단점(短點)으로 작용되었고 그는 홀로 쓸쓸히 죽어갔다는 얘기에는 덕과 무용이 겸비(兼備)된 인격을 갖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가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개된 인물은 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 자룡 조운(趙雲)이다. 그는 평생 유비(劉備)만을 섬긴 진정한 경호대장(警護隊長)이었으며 무공 또한 관우(關羽), 장비(張飛)에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저 역시 조운(趙雲)에 대해서는 과대포장(誇大包藏)된 면을 깎는 것 보다 과소평가(過小評價)된 면을 되살려주고 있다. 즉 자룡(子龍)의 공적이 관우(關羽)나 장비(張飛), 제갈량(諸葛亮)에 못지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직은 말직이었으며 하다못해 위연(魏延)보다도 낮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자룡(子龍)은 비련한 주공을 만난 비운의 영웅이었다고 분석한다.

소설은 소설의 재미를 위해 어느 정도 각색(脚色)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하면 성공한 제왕(帝王)이 천 수백 년에 걸쳐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고 모자란 인물이 영웅으로 추앙(推仰)되기도 한다. 소설적 재미와 사실적 현실(現實)에서 적당한 해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흑백(黑白)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얽매이는 우를 범하지 않는 방법이다. 유비(劉備)가 한 없이 인자했던 것도 아니고 조조(曹操)가 끊임없이 살육을 저질렀던 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이 두 영웅을 흑과 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니 삼국지가 소록소록 생각난다. 사실관계야 어찌됐던 소설 삼국지(三國志)는 재미있고 책 속에 녹아 들어가 있는 숱한 인물들의 배신과 음모, 영웅호걸(英雄豪傑)들의 흥망성쇠 과정이 시사(時事)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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