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반응형

난세 호걸이 나오는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삼국연의 7대 신비고수

图片信息 《三国演义》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서기 184년 황건적의 난부터 서기 280년까지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집필한 중국의 대표적 연의는 고전역사소설로 명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이 쓴 책이다. 서진(西晉)의 진수가 집필한 ‘삼국지’와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註)’에 수록된 야사와 잡기를 근거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의 줄거리를 취하여 쓴 작품이다.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 하여 모두 24권 240칙(則)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중화권에서는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하며 영미권(英美圈)에서는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라는 영문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전하는 ‘삼국지연의’는 명 가정 1년인 1522년에 판각한 최초 판본은 “가정본(嘉靖本)” 혹은 나관중의 성을 따서 “나본(羅本)”이라 하며 명나라 때 전해지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읽기 불편한 점을 청나라 때 모종강(毛宗崗)이 읽기 쉽게 다시 엮은 “모본(毛本)”이 있다.

이야기는 184년 즉 후한 영제 중평(中平) 원년으로부터 280년 즉 진 무제 태강(泰康) 원년에 이르기까지의 이른바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기본적으로 유비(劉備)가 주인공이며 모든 에피소드는 유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당시는 중국 인구사(人口史)에 따르면 한나라 중기 5600만 명이었던 인구가 한나라 말 극심한 혼란기에 3000만 명으로 줄었으며, 삼국지 시대에는 1600만 명으로 인구가 급감한 전란(戰亂)으로 인한 참담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역사 소설, 통속연의란 제목 자체가 이런 뜻을 담고 있음으로서 역사에는 없는 가공의 설정(設定)들을 많이 등장시켰다. 그 예로 소설의 초반부에서 등장하는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 세 사람의 결의형제(桃園結義)는 유비, 관우, 장비가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한 창작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실제 삼국지에서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을 나관중의 창작에 의해 만들어서 등장시킨 가공의 인물들이 존재한다. 나관중(羅貫中)은 극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이러한 가공의 인물들을 소설에 추가했다. 이 중에는 관색(關色)과 같이 삼국지연의 이전의 민담 등에 등장하는 가공인물들을 나관중이 채택해서 투입한 사례도 있다.

자고이래로 난세에 호걸(豪傑)이 나왔다. 삼국시대라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시기에 시시때때로 환소와 비가가 울렸다. 어떤 영웅은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내지만 어떤 영웅(英雄)은 신비하기 그지없어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여기서 삼국연의에 나오는 7대신비고수를 소개하기로 한다.

7위: 호거아(胡車兒) : 장수(張繡)와 조조(曹操)가 싸울 때, 그의 편장(偏將) 호거아는 조조(曹操)의 신변호위인 맹장 전위(典韋)를 취하게 한 후 그의 쌍극(雙㦸)을 훔쳐 전위로 하여금 완성전투(宛城戰鬪)에서 사망에 이르게 만든다. 전해지는 바로는 호거아가 "힘이 세서 오백 근을 들 수 있고, 하루에 칠 백리를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는 힘이 셌을 뿐 아니라 발도 빨랐다. 그는 이렇게 대단한 장수였던 것이다.

6위: 염행(閻行) : 삼국연의에서 마초(馬超)의 무공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포제이(呂布第二)라 할 수 있고 장비(張飛)가 투구를 벗고, 허저(許褚)가 갑옷을 벗어가며 젖 먹던 힘까지 냈지만, 마초를 이길 수 없었다. 아마도 관우(關羽), 조운(趙雲)등이 올라가서 붙어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초는 하마터면 금성(金城)사람인 염해의 손에 죽을 뻔했다. 염행은 자가 언명(彦明)이고, 한약(韓約)의 부하장수이다. 건안초년 한약과 마등(馬騰)간에 전쟁이 벌어지는데 염행이 마초와 싸우게 된다. 장모(長矛)로 가슴을 찔러갔는데 힘을 너무 많이 주어 모가 부러진다. 염행은 당황(唐慌)하지 않고 부러진 모를 가지고 다시 마초의 목을 찔러간다. 마초는 전혀 반격(反擊)할 힘이 없어서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뻔 한다. 악몽과 다름이 없다. 아쉽게도 염행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 상책(上策)'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서인지 항상 얼굴을 드러내어 당시의 인물들과 다투는데 참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뛰어난 무예를 썩히고 만다. 건안14년에 이르러 조조는 그에게 태수의 관직(官職)을 내린다.

5위: 올돌골(兀突骨) : 제갈량(諸葛亮)이 남방을 평정할 때 일찌기 이인(異人)을 만난다. 바로 오과국(烏戈國)의 국왕 올돌골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키가 장이(丈二)이고 오곡을 먹지 않으며 생사(生蛇), 악수(惡獸)를 먹는다. 몸에는 비늘이 있어 칼과 화살도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코끼리를 타고 선봉에 서며 머리에는 일월낭수모(日月狼鬚帽)를 쓰고 몸에는 금주영락(金珠纓絡)을 입었으며 양쪽 옆구리에는 인갑(鱗甲)이 나왔고 눈에서는 광망(光芒)이 약간 나왔다. 전성기의 위연(魏延)도 그의 앞에서는 어린아이 같았다. 먼저 대패하고 다시 거짓으로 15번을 패배(敗北)하여 체면이 바닥에 떨어진다. 조운(趙雲), 마대(馬垈) 등도 감히 그와 직접 겨루지 못했다. 이 삼국의 슈퍼 이인(異人)을 없애기 위하여 제갈량(諸葛亮)은 할 수 없이 '화공'을 써서 효과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4위: 왕월(王越) : 왕월은 요동 연산(燕山) 사람이다. 동한말기(東漢末期)의 저명한 무술가(武術家)이다. 검술에 뛰어났고, 사아(史阿)의 사부이다. 한환제(漢桓帝), 한영제(漢靈帝)의 재위기간에 호분장군(虎賁將軍) 왕월은 검술에 뛰어나 경성내에서 제사(帝師)로 불리웠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힘은 여포(呂布)에 비견할 만하고 1:1로 싸워서는 적수가 없었다. 다만 그는 공명심(功名心)이 너무 커서 조정에서 관리를 하려는 야심이 강했다. 그리하여 한헌제 유협의 검술교사가 된다. 나중에 조조(曹操)의 명을 받아 다시 조비(曹丕)의 스승이 되어 검술을 가르친다. 일생동안 궁을 거의 나가지 않아서 이름을 떨칠 기회가 없었다. 십상시(十常侍)의 난 때 한헌제를 보호하여 마차를 몰아 추격병을 무수히 죽인다. 한헌제(漢獻帝)를 동탁(董卓)이 데려간 후에는 왕월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가 다시 나중에 조비(曹丕)의 스승으로 나타났다.

3위: 동연(童淵) : 동연은 자가 웅부(雄付)이고 무술명가이다. 병주(幷州)의 이언(李彦)과는 결의형제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의부(義父) 옥진자(玉眞子)에게서 무술을 배운다. 두 사람은 각각 하북 안가(顔家)의 아가씨 안운(顔雲)과 안우(顔雨)를 취한다. 동연은 제자를 2명 거두는데, 한 명은 북지창왕(北地槍王) 장수(張繡)이고 다른 한명은 서천(西川)의 대도독인 익주의 서천창왕(西川槍王) 장임(張任)이다. 두 사람은 모두 그의 "백조조봉창(百鳥朝鳳槍)"을 사사받아 높은 명망을 얻는다. 나중에 동연은 다시 조운(趙雲)을 관문제자(關門弟子)로 받아서, 그의 필생의 무술을 가르친다. 조운은 '백조조봉창'의 기초 위에 그의 유명한 절기 '칠탐반사창(七探盤蛇槍)'을 만들어낸다. 나중에 그의 사형인 장수와 장판파대전(長坂坡大戰)에서 300회합을 겨루는데 칠탐반사창(七探盤蛇槍)으로 백조조봉창(百鳥朝鳳槍)을 이기고 그의 사형 장수를 참살한다.

2위: 좌자(左慈) : 유비가 참여한 '옥대조(玉帶詔)' 암살계획(暗殺計劃)에 몸이 장애인 추가 참여자가 한 명 있다. 그의 이름은 오각선생(烏角先生) 좌사이다. 그는 한 쪽 눈이 먼 절름발이이다. 머리에는 백등관(白藤冠)을 쓰고 몸에는 청라의(靑懶衣)를 입었다. ‘삼국연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저명한 대역사 허저(許褚)가 삼백 철갑군(鐵甲軍)을 가지고도 그를 어찌할 수 없었다고. 이를 보면 좌사는 방어전에 능숙한 기인이사(奇人異士)이다. 비록 이번 암살이 성공하지 못했지만 조조(曹操)는 그날 밤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1위: 마충(馬忠) : 반장(潘璋)의 부장(部將) 마충은 동오(東吳) 진영에서 일류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관우의 주맥성(走麥城)이후 그는 연이어 '신비살수'의 역할을 맡는다. 신비로운 인물로 촉한의 장수들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했다. 관우(關羽)는 역대이래로 힘이 센 것으로 유명했는데 마충(馬忠)과 만나자마자 생포 당한다. 황충(黃忠)은 '신전수(神箭手)'인데 마충의 화살 하나에 맞아죽는다. 징포(張苞)등 촉한의 후기지수는 모조리 마충(馬忠)의 손에 패배한다. 그의 대단한 전적은 삼국에서 따를 자가 없을 정도이다.

중국의 위(魏), 촉(蜀), 오(吳) 세 나라의 역사를 바탕으로 전승되어 온 이야기들을 14세기에 나관중(羅貫中)이 장회소설(章回小說)의 형식으로 편찬한 장편 역사소설이다. 오늘날에는 17세기 모종강(毛宗崗)이 다듬은 ‘모본(毛本)’이 정본(定本)으로 여겨지고 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三國志)》에 서술된 위(魏), 촉(蜀), 오(吳) 3국의 역사를 바탕으로 전승되어 온 이야기들을 중국 원(元)과 명(明)의 교체기 때의 사람인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이 장회소설(章回小說) 형식으로 재구성한 장편 소설이다.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이며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와 함께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꼽힌다. 

진수(陳壽)의 ‘삼국지’에 서술된 위(魏)·촉(蜀)·오(吳) 3국의 역사는 천하의 패권(覇權)을 둘러싸고 3국이 벌이는 힘과 지혜(智慧)의 다툼이 워낙 치열하게 펼쳐졌기에 일찍부터 중국인들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로 전해져 왔다. 당(唐, 618~907) 시대에 이미 3국의 이야기가 야담(野談)으로 전해진 기록이 있으며 송(宋, 960∼1279) 시대에는 전문적인 이야기꾼인 설화인(說話人)들의 이야기 대본인 화본(話本)으로 정리되고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하였다. 당시 곽사구(禱四究)의 ‘설삼분(說三分)’은 매우 유명했으며 인종(仁宗, 1010~1063) 때에는 3국의 이야기를 공연하는 ‘피영희(皮影戱)’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元, 1271∼1368)의 영종(英宗, 재위 1320~1323) 때, 전래되던 화본(話本)들을 바탕으로 푸젠성(福建省) 젠양(建陽)의 출판업자 우(虞)씨가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3권으로 되어 있으며 위에 그림, 아래에 글을 넣은 방식으로 구성(構成)되어 있다. 원(元) 시대에는 이를 바탕으로 많은 희곡이 만들어져 공연되었는데 종사성(鍾嗣成)의 ‘녹귀부(錄鬼簿)’에 따르면 그 수가 30~40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는 명(明, 1368∼1644) 시대에도 출판되었지만 야담(野談)과 화본(話本)에 기초해 있었기에 허황(虛荒)된 내용이 많이 포함(包含)되어 있었고 역사적 사실과도 차이가 많았다. 그래서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은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의 줄거리를 근간으로 하되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429년 배송지(裵松之, 372-451)가 이를 보완한 ‘삼국지주(三國志註)’,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 부분을 바로잡아 장회소설(章回小說)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삼국지연의’를 편찬하였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후한(後漢) 말부터 위(魏)· 촉(蜀)·오(吳) 삼국의 정립시대(鼎立時代)를 거쳐서 진(晉)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의 역사를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 등 세 인물의 무용(武勇)과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지모(智謀)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원본(原本)은 전해지지 않으며 명(明)의 가정제(嘉靖帝, 1507~1566) 때인 1522년에 간행된 ‘가정본(嘉靖本)’이 가장 오래된 판본(版本)으로 전해진다.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란 제목으로 간행된 이 판본은 홍치제(弘治帝, 1470~1505) 때인 1494년의 서문(序文)이 실려 있어 ‘홍치본(弘治本)’, 혹은 나관중(羅貫中)의 성을 따서 ‘나본(羅本)’으로도 불린다. 모두 24권(卷) 240절[節, 혹은 칙(則)]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나관중의 원본(原本)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그 뒤 가정본(嘉靖本)을 근간(近刊)으로 하면서 문체나 내용이 보완(補完)되어 왔으며 수많은 속본(俗本)들을 낳았다. 명(明) 말기에 이지(李贄, 1527~1602)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평을 붙이면서 2개의 절(節)을 하나로 합하여 240절(節)을 120절(節)로 줄였는데 이를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이라고 한다. 그리고 청(淸)의 강희제(康熙帝, 1654~1722) 때인 1679년(강희18년)에 모성산(毛聲山)과 모종강(毛宗岡) 부자(父子)는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에 기초해 작품 전체의 통일성을 높이고 문체(文體)를 간결하게 다듬어 19권(卷) 120절(節)로 구성된 새로운 판본을 간행하였다. 이를 ‘모본(毛本)’이라고 하는데 모종강(毛宗崗)의 개정본은 다른 판본을 압도(壓倒)하고 정본(定本)이 되었다. 오늘날 번역(飜譯)되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내용도 대부분 이 ‘모본(毛本)’에 기초하고 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중국인에게 오랫동안 애독(愛讀)되었고 그 내용은 연극(演劇)이나 강담(講談) 등으로 글자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전달(傳達)되었다. 관우(關羽)는 민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 관제묘(關帝廟)가 곳곳에 세워지기도 하였으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비롯된 ‘삼고초려(三顧草廬)’나 ‘계륵(鷄肋)’, ‘읍참마속(泣斬馬謖)’ 등의 표현이 고사(故事)와 함께 널리 쓰였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한국에서도 조선(朝鮮) 시대부터 매우 폭넓게 읽혔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이미 16세기 초에 조선(朝鮮)에 전해져 1569년에는 국내에서 원문(原文)으로 간행되었다. 인조(仁祖, 1595~1649) 때인 1627년(인조 5년)과 숙종(肅宗, 1661~1720) 때에도 출간(出刊)되었다. 《삼국지연의》를 번역(飜譯)하거나 번안(飜案)한 작품들도 상당수 전해지는데, 이는 사대부(士大夫)만이 아니라 부녀자(婦女子)나 민간(民間)에서도 폭넓게 읽혔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시조(時調)나 소설(小說), 속담(俗談) 등에서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영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렇듯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널리 읽히고 확산된 것은 이 작품이 충효(忠孝)와 의(義)를 강조하는 조선(朝鮮)의 유교적(儒敎的) 지배이념과 일치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근대 이후에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수많은 번역본(飜譯本)을 낳으며 폭넓게 읽혔는데, 1904년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최초로 근대적 활자본이 간행되었고, 1929년에는 양백화(梁白華, 1889~1938)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연재하였다. 그리고 1945년에 박태원(朴泰遠, 1909~1987)이 ‘모본(毛本)’을 기초로 현대적 번역본을 출간(出刊)한 뒤, 박종화(朴鐘和, 1901~1981), 김구용(金丘庸, 1922~2001) 등 수많은 작가들이 각기 다양한 번역본을 출간(出刊)하였다.  

한편 현대에 와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영화(映畫)나 컴퓨터게임, 애니메이션 등으로도 활발(活潑)히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韓國)에서는 고우영(高羽榮, 1938~2005)이 만화(漫畫)로 신문에 연재(連載)한 작품이 1979년 단행본(單行本)으로 출간(出刊)되었고 일본에서는 요코야마 미츠테루(橫山光輝, 1935∼2004)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製作)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코에이(KOEI)는 1985년 ‘삼국지(三國志, samgugji)’라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개발(開發)하였다. 그 밖에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내용에 바탕을 두고 경영학(經營學)이나 처세학(處世學) 등을 논하는 책들도 폭넓게 출간(出刊)되고 있다. 

반응형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