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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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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전소설의 백미로 손꼽히는 홍루몽연구와 연구자들의 치열한 거촉(擧燭)

图片信息 越缘, 红楼梦缘


중국고전소설의 백미(白眉)로 손꼽히는 ‘홍루몽(紅樓夢)’은 창작 당시부터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다. 구홍학에서 신홍학, 당대 홍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내놓은 서로 다른 목소리와 주장들은 ‘홍루몽(紅樓夢)’연구가 그 동안 어떠한 양상으로 진행되어 왔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홍루몽(紅樓夢)’은 치밀한 구성과 범상치 않은 스토리로 청춘남녀의 비극적인 사랑과 당시 사회의 어지러운 시대상을 보여주며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울렸으나 이와 함께 작품의 독특한 부호체계와 상징성 및 작품 외연의 문제 즉 작가의 생평과 판본 문제 등으로 말미암아 중국고전소설작품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해독하기 어려운 텍스트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로 인해 ‘홍루몽(紅樓夢)’연구는 다의적인 해석과 논쟁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탄생된 ‘홍루몽(紅樓夢)’에 관한 다양한 연구 결과들은 소설 연구의 본질에 대해 깊은 성찰을 요하게 해준다.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한 세기가 시작된 지금 ‘홍루몽(紅樓夢)’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간의 연구사를 하나의 체계화된 틀로 정리해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과거의 궤적들을 종적으로 배열하고 나열하는 방식은 지양하고자 하며 ‘홍루몽(紅樓夢)’에 대한 다의적인 해석과 견해가 형성되게 된 배경과 그 요인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오늘 옛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이것저것 얘기하다 홍루몽(紅樓夢)을 얘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심무(劉心武)를 거론했다. 그는 나에게 '유심무게밀홍루몽(유심무의 홍루몽 수수께끼풀이)'를 읽어보라고 극력 추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먼저 나는 유심무(劉心武)의 시청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기술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대중의 약한 곳을 잡고 대중의 엽기적인 심리에 영합하였다.

작년에 ‘백가강단(百家講壇)’을 볼 때 유심무(劉心武)의 대중 휘어잡는 실력은 알아본 바 있다. 그 때 그는 바로 진가경(陈嘉庚)의 신세의 수수께끼에 대해서 얘기했고 일반적으로 홍루몽(紅樓夢)을 읽어본 사람들에게 그의 주장은 확실히 고혹적(蠱惑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전문가들이 떠든 것에 불과하다.

유심무(劉心武)는 진가경(陈嘉庚)의 침실의 배치로부터 그 주인의 집안이 대단할 것이라고 추단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작자가 유머스럽고 과장된 어조로 독자들에게 주인의 품격을 말한 것일 것이다. 만일 그녀가 정말 황실출신이라면 어떻게 그 시아버지에게 붙들여 간통의 피해자가 될 것인가(시아버지와의 간통이 그녀가 스스로 원한 것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점은 내가 근거로 하는 것은 문학적인 감각이지 무슨 색인이 아니다. 그러나 감각은 아마도 착각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유심무(劉心武)는 ‘백가강단’의 강좌에서 더 볼 수 없었다. 마치 요리를 먹는 것처럼 한번 맛을 보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비록 토해내지는 않지만 두번 다시 먹고 싶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견강부회적(牽強附會的)인 연구방법에 찬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학은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과 하나하나 대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어쨌든 허구이다. 비록 그 근원이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문학작품중의 인물은 그 원형이 존재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것은 원형을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상상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햄릿'은 비록 덴마크왕자의 이야기에서 소재를 따왔지만 작자는 희극중에 자기의 영혼을 주입했다. '로빈슨 크루소 표류기'는 실존하는 해군의 이야기에서 따왔지만 거기에 주입한 것은 작자의 혈액이다.

'한비자(韓非子)'에는 일찌기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개략 현대말로 바꾸면 이런 말이 된다. 갑이 을에게 편지를 썼다. 밤이라서 불빛이 어두었다. 갑은 노비에게 말한다. "촛불을 들어라(擧燭)"라고 말하면서 편지에 "거촉"이라고 쓰게 된다. 을은 편지를 받아보고 크게 깨닫는 점이 있게 된다. "거촉"이라는 것은 바로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여 임명하라는 말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편지를 쓴 사람의 원래의 뜻을 오해한 것이다. 그래서 한비자는 감탄하는 것이다. "현재 학문한다는 사람들이 대개는 이렇다"

그렇다. 작자가 문장을 쓸 때는 "작자의 언어"가 있다. 그러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자기의 작품에 대하여 해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자유롭게 읽기를 바란다. 내 생각에 작품의 운명은 독자들이 자유롭게 읽는데 있다"

나는 홍루몽연구(紅樓夢硏究)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연구에도 길이 있는 것이다. 당연히 그 글자체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사람들에게 남긴 정신적인 자산에 대하여 연구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현재의 홍학연구자들처럼 조설근을 묘에서 파내서 해부하고, 그의 최후를 연구하고, 그의 마지막 식사의 화학적 성분을 연구하여 대중에게 무엇을 먹어서 이런 문학거장이 나왔는지를 전달하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은 안된다. 내 생각으로 만일 조설근이 지하에서 이것을 안다면 그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갈기갈기 찢어발겨지는 것을 안다면 아마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었던 죽까지도 토해내지 않을까? 그래서 홍학연구자들이 다시는 '거촉'하지 않기를 바란다. 

‘홍루몽(紅樓夢)’연구의 다의성에 관한 고찰은 ‘홍루몽(紅樓夢)’텍스트의 특이성을 밝히고 연구사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을 짚어봄으로써 향후 ‘홍루몽(紅樓夢)’연구의 올바른 방향 정립에 일석의 기초를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 연구는 중국고전소설연구의 지난한 여정과 과거의 전통적인 소설연구방식에서 드러난 편향성과 경직성을 타파하고 소설연구의 온전한 제자리 찾기라는 측면에서도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사료된다.

본 연구에서는 ‘홍루몽’텍스트의 대내외적 특수성을 중심으로 ‘홍루몽(紅樓夢)’연구의 다의성에 관한 제요인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홍루몽(紅樓夢)’에 대한 다의적 연구가 빈번히 일어나는 원인을 단순히 텍스트의 정교함이나 탁월성에서 찾고자 하지 않으며 텍스트의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이 촉발시킨 보다 구조적인 문제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에 따라 텍스트 외적인 요인에서는 작가의 생평, 판본, 시대상황(時代狀況), 사회심리적 인소 등이 다루어질 것이고 텍스트 내적인 요인에서는 작품의 신화구도, 모티브, 부호체계 등이 연구의 다의성과 관련하여 집중 분석될 예정이다.

20세기 홍학사(紅學史)는 분기별로 구홍학(舊紅學), 신홍학(新紅學), 당대홍학(當代紅學)으로 나누기도 하고 방법론에 따라 색은파(索隱派), 고증파(考證派), 비평파(批評派)로 나누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1950년대 막시즘에 입각(立脚)해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소설을 분석(分析)하고자 했던 역사정치학파와 20세기말 다시 등장한 신색은파(新索隱派)를 포함하여 색은파, 고증파, 역사정치학파, 비평파, 신색은파(新索隱派) 순으로 각 유파별 특성에 관해 살펴보았다. 또한 그러한 다의적 해석과 견해가 형성되게 된 배경과 연구의 다의성이 안고 있는 재결함 등을 분석함으로써 향후의 연구방향(硏究方向)을 모색해보고자 하였다.

중국 문사철의 역사를 해석학의 역사로 인식할 때 ‘홍루몽(紅樓夢)’연구야말로 중국학술사의 해묵은 전통을 가장 극명(克明)하게 보여준 경우라 하겠다. 또한 20세기의 홍학사(紅學史)에는 중화민족이 백 년 동안 겪어야 했던 시련과 그 과정 속에서 지식인들이 보여준 현실수용과 극복의 몸부림이 응축(凝縮)되어 있다. 만약 ‘홍루몽’의 작자, 판본, 속작자(續作者), 지평문제가 명쾌하게 밝혀졌다면 ‘홍루몽(紅樓夢)’연구에서의 다의성 논란이 이처럼 심각하게 대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홍루몽’텍스트 자체의 내재적 요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중국학술사의 전통적인 흐름이 그대로 ‘홍루몽(紅樓夢)’ 연구에 적용되면서 다의성은 촉발(觸發)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고전소설의 백미(白眉)로 평가받고 있는 ‘홍루몽(紅樓夢)’은 탁월한 문학성으로 독자들을 매료(魅了)시켜 왔다. 그러나 독특한 서사방식과 상징적인 기법 운용으로 작가의 의도를 짐작(斟酌)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는 점 때문에 ‘홍루몽’은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로 인식되어 왔다. 게다가 작가와 친분이 있었던 지연재의 평어에 작가의 취지를 설명하거나 작가의 원의를 파악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어 중국인들의 색은 심리(索隱心理)를 더욱 부추겼다. 색은파(索隱派)에 대한 반발로 호적이 과학적인 고증을 표방하며 신홍학(新紅學)을 제창하였지만 그 역시도 ‘홍루몽(紅樓夢)’을 한 개인의 전기로 인식함으로써 소설을 역사의 한 지류로 보는 전통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50년대 이후 역사정치학파 홍학에서도 ‘홍루몽’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의리를 중시하는 전통 학술의 특성을 그대로 답습(踏襲)하였다. ‘홍루몽’연구의 다의성에 나타난 일관된 기조는 바로 문학의 독립성 유보와 텍스트의 주변화 경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다의적 연구는 ‘홍루몽’텍스트의 다의성(多義性)을 열어주기 보다는 경직된 다의성 안에 갇히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 때문에 ‘홍루몽’의 텍스트 연구는 홍학사(紅學史)에서 즐곧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20세기 초에 이미 왕국유(王國維)와 같은 인물이 ‘홍루몽’텍스트에 대한 문화비평을 시도한 바 있으나 전통 학술의 견고한 아성(兒聲)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텍스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바야흐로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를 맞이한 지금까지 ‘홍루몽(紅樓夢)’의 작가와 가세, 원작과 속작의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현재 실물로 우리 앞에 존재하는 ‘홍루몽’의 문학적 가치를 방치한 채 언제까지 원론적(原論的)인 물음에만 집착한다면 ‘홍루몽’연구의 미래지향적 출로는 모색(摸索)될 수가 없다. 더구나 학술적인 논쟁과 관계없이 ‘홍루몽’은 이미 수많은 독자들에게 그들의 방식대로 읽혀지고 향유(享有)되는 문화적 산물이 되어 있다. 따라서 작품이 존재하기까지의 과정과 그 주변적 요소(周邊的要素)들이 마치 퍼즐게임처럼 완전무결(完全無缺)하게 아귀가 맞춰지기를 요구하며 문학 본연(本然)의 정체성 찾기를 늦춘다면 ‘홍루몽’의 미래지향적 출로(未來指向的出路)는 모색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홍루몽(紅樓夢)’의 문화적 코드와 서사구조(敍事構造)에 관한 연구는 홍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鼓舞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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