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강희-옹정-건륭 삼대에 걸쳐 한 귀족 가문의 성쇠를 다룬 ‘홍루몽(紅樓夢)’은 전 세계에 이를 연구하는 학자가 수천 명에 이를 정도로 대단한 소설이다. ‘홍학(紅學)’이라는 별도의 학문 분야가 형성될 정도다. 마오쩌둥(毛泽东)은 이 작품은 최소한 다섯 번은 읽어야 하며 ‘홍루몽(紅樓夢)’을 읽지 않으면 중국 봉건문화(封建文化)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했고 중국인들은 ‘홍루몽’을 만리장성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작품성이나 보편성의 잣대로 보자면 ‘서유기(西遊記)’ ‘삼국연의(三國演義)’ ‘수호전(水滸傳)’ ‘금병매(金甁梅)’ 등 중국 사대기서보다 훨씬 윗길에 오른 작품이 바로 ‘홍루몽(紅樓夢)’이다.
최근 홍학에 얽힌 이야기를 좀 접하면서 다시 ‘홍루몽(紅樓夢)’ 읽기에 도전하고 싶다는 고질병이 도지고 있다. ‘홍학(红學)’에 얽힌 이야기도 ‘홍루몽’만큼 흥미진진하다. 중국의 20세기는 ‘홍학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 모두에서 서양(西洋)에 밀리고 짓밟힌 중국인의 자존심(自尊心)이 이 작품에 기대어 소생(蘇生)하기 시작했다. 세계에 하나의 ‘학’을 이룰 정도로 대단한 작가는 셰익스피어와 조설근(曹雪芹)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어떤 친구가 책 두 권을 보내주었다. 책제목은 '유심무(刘心武)의 홍루몽의 비밀풀이'였다. 이 책의 겉표지에는 큰 글자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박아 넣었다. "CCTV에 나오는 것은 나의 포기할 수 없는 공민권(公民權)이다" 친구의 설명을 듣고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유심무(刘心武)의 이 책은 CCTV의 "백가강단"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 백가강단에서 유심무(刘心武)는 일찌기 그가 여러 해 동안 홍루몽(紅樓夢)을 연구해온 성과를 시청자들에게 강연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홍학계의 어떤 사람이 그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을 하였고 그래서 유심무 선생(刘心武先生)은 겉표지에다가 위와 같은 문구(文句)를 집어넣어 인쇄하였다는 것을 아마도 출판사(出版社)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저 CCTV의 덕을 좀 보자는 것이었을 것이고 뭐 잘못된 거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하여 본인은 이 책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유심무(刘心武) 개인이면 되었지 이 책에 대하여 CCTV와 연결시킬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눈앞에서 그렇게 한 것을 보니 짙은 상업적(商業的)인 냄새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자세히 보았다. 그러나 절반을 봤을 때 도저히 더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책을 덮고 그냥 ‘홍루몽’원전을 꺼내서 읽었다. 내가 '더 읽을 수가 없었다'고 한 것은 이 책에 무슨 흥분(興奮)되는 게 없어서가 아니다. 사실은 팔아먹기 위해서 유심무(刘心武)는 아주 많은 공을 들였다. 예를 들어 유심무(刘心武)는 그의 연구성과를 책 속에 열거하였는데 가보옥(贾宝玉)은 확실히 설보채와 성생활을 가졌고 설보채(薛宝钗)는 난산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적었다. 이름 날리는 중국문단의 대작가가 뒤돌아서서 연구한 것이 기껏 가보옥이 설보채 또는 임대옥(林黛玉)과 성관계를 가졌는지인지 아닌지라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유심무(刘心武)의 이 책을 더 읽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연구방법이 편집적이고 황당하기 때문이다. 많은 홍학가들과 마찬가지로 유심무(刘心武)는 소위 연구에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 것이다. 작가로서 그는 홍루몽을 걸출한 소설책으로 읽지를 아니하고 이 소설을 조설근(曹雪芹)의 족보라도 되는 듯이 연구한 것이다. 이런 방식이 작가라는 사람에 의하여 저질러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고, 놀라울 뿐이다. 예를 들어,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 중의 묘옥(妙玉)에 대하여 유심무는 그의 저술에서 여러편의 글을 썼는데, 제2부에서 3편의 60여페이지에 달하는 연구를 하였다. 제목은 제1페이지의 ‘묘옥이 정책에 들어간 것과 순위의 수수께끼’, 제72페이지의 ‘옥석의 수수께끼’에 이르러 끝이 난다. 그 중에서 묘옥(妙玉)이 왜 십이채(十二釵)에 들어갔는지에 대한 것 이외에 "묘옥(妙玉)의 사랑의 수수께끼"와 같은 것도 있다. 비구니의 이미지에 대하여 사랑까지도 연구해 내다니 정말 쓴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묘옥 말고 유심우(刘心武)가 더욱 연구한 것은 진가경(秦可卿)이고 그녀를 자기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진가경의 원형에서 진가경(秦可卿)이 고발당한 것까지 유심무의 고증과 조사는 재미가 있었다. 현재의 홍학연구(紅學硏究)가 고증과 억측의 구렁텅이에 빠졌는데 홍루몽연구(紅樓夢硏究)와 당대중국문화에 있어서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만일 명청시기의 지식인들이 고증을 통하여 중화문화의 일맥을 전승(傳承)하였다고 말한다면 홍학가(紅學家들)의 번잡하고 무료한 고증작업은 도대체 당대문화와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일까?
후인들은 어떻게 오늘날의 소위 홍학연구를 평가할까? 전문적인 학술연구로 취급해줄 것인가? 아니면 옛사람들의 집단적인 억측병이 도진 것으로만 생각하고 말 것인가? 홍학연구는 가짜학술의 경계선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소위 연구라는 것은 겨우 조상의 발자국을 쫓아가는 것으로 밥을 얻어먹는 것인데 의미가 어디에 있는 걸까? 문학작품에서의 인물은 원래 허구적인 것인데 이런 인물에 비록 원형이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개조된 것이다. 이런 인물형상을 추적하여 알아내는 것이나 조설근이 생활했던 그 시대와 역사배경에서 하나하나 대조하여 찾아내고 있는데, 이것이 학술연구인가 포풍착영(바람과 그림자를 잡는 것)인가?
국내의 홍학연구는 무료한 추측이나 무의미한 고증이다. 문학창작과 발전의 각도에서 본다면 묘옥(妙玉)이 도대체 누구와 사랑을 나누었던 진가경이 왜 천향루에서 죽었던 의미가 크지 않다. 독자에게 있어서 홍루몽 자체는 그저 뛰어난 소설일 뿐이다. 역사적 사실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많은 정력을 들여서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을 하는 것은 홍루몽을 이용하여 '위대(偉大)'하다는 허명을 얻게 하는 것과 문사들을 한 무더기 먹여 살리는 것 이외에는 역할도 거의 없다.
아주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당대의 홍학연구 그 자체는 바로 일련의 학자들이 하는 일종의 '가짜학문'이다. 소위 홍학전문가는 바로 '홍루몽'을 먹고사는 문화노동자일 뿐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회의를 열 때 배경이나 이루고 논문이나 읽는 외에는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다.
유심무(刘心武)는 작가로서 아주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왜 그가 홍학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갔는지 모르겠다. 아무도 연구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연구결과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잔치'에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한 작가로서 국내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관심가질 만한데 그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얼마나 많은 소재들이 소설로 쓰일 수 있는데 소설로 만들지 않고 버려두면서, 오히려 몸을 돌려 '홍학가(紅學家)'가 되고 '문화밥'밖에 먹을 줄 모르는 백면의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까?
당대의 중국지식인(中國知識人)들은 절대로 지식계의 그 다섯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더구나 문화계의 그 오일류의 귀족자제(貴族子弟)의 부용(婦容)이 되어서도 안 된다.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말을 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술을 마시며 진짜도 가짜도 아닌 글을 쓰고 이건지 저건지도 모르는 돈을 받고 이렇게 한다면 "문화(文化)"라는 두 글자가 없어지는 것이다. 있는 것은 그저 두 글자이다. 손님 받는 것이다.
18세기 중반에 창작되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작품 속의 개성적 인물(個性的人物)들, 시적 정취(情趣)가 넘치는 청춘기 여성들의 세계, 고유명사의 중의적 구사로 획득(獲得)한 역사 평론적 가치(評論的價値), 중국 문학에 등장한 온갖 문체로 묘사되는 귀족문화의 실상, 남성 중심 가부장 사회(家父長社會)에서 유독 돋보이는 강한 여성 중심적 세계관 등은 홍루몽(紅樓夢) 월드의 서까래와 대들보 역할을 해주는 것들이다.
그런데 ‘홍학(紅學)’의 열풍을 만든 건 이런 작품 내부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고전소설(古典小說)이 그렇듯 ‘홍루몽’도 판본이 매우 다양하다. 원작자가 80회본을 썼고 그게 인기를 끌자 120회본으로 추후에 늘렸다는 게 대강의 얼개이고 그 사이에 무수한 판본이 있다. 인쇄(印刷)가 아니라 필사를 해서 작품이 유통(流通)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에 관련된 온갖 추측과 문제제기가 ‘홍학(紅學)’의 상당 부분을 이룬다. 그다음은 작가 문제다. 과연 ‘홍루몽’은 조설근이 쓴 것일까? 아직까지 이에 대해 누구도 확답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구상을 아들 사마천(司馬遷)이 이어받아 구현한 것이 ‘사기(史記)’인 것처럼 중국 전통시대엔 작품 창작도 일종의 가업으로 이어진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래서 ‘홍루몽’ 또한 진짜 작가는 조설근(曹雪芹)의 아버지라느니 작은아버지라느니 등의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홍루몽(紅樓夢)’이 모든 언론 매체의 표지를 장식하고 대중의 가슴에 불을 지른 가장 결정적인 한 방은 이 작품이 보여준 반(反)만주족 의식이다. ‘홍루몽’ 속의 반만 의식에 주목한 학자들을 ‘색은파(索隱派)’라 부르는데 이는 작품에 ‘숨겨진(隱)’ 의미를 ‘색출(索)’해낸다는 의미다. 대개 등장인물 이름이나 장소, 건물의 명칭 등에서 작가가 청나라 만주족을 풍자(諷刺)하려는 목적으로 숨겨놓은 말장난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것이 지나쳐서 소설을 읽는 게 퍼즐을 푸는 일이 되어버렸고 되는 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난무했다. ‘홍루몽(紅樓夢)’에 대한 색은적 독법(索隱的讀法)은 청나라가 망하기 전후로 가장 흥성(興盛)했고 1940년대까지 유지됐지만 1950년대 이후로는 ‘역사고증파(歷史考證派)’와 ‘소설비평파(小說批評派)’의 비판을 받고 대륙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오히려 1960년대에 부활(復活)하기도 했다.
최근 ‘홍학(紅學)’은 예전의 활력을 확연하게 잃고 말았다. ‘홍루몽(紅樓夢)’이 뛰어난 작품인 것은 맞지만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스토리의 흡인력(吸引力) 면에서 경쟁력이 약하니 ‘홍학(紅學)’을 해본들 들어줄 독자가 자꾸 줄기 때문이다. ‘홍학(紅學)’의 부흥을 이끌었던 판본 문제, 작가의 진위 문제, 숨겨진 의미를 색출해내는 탐정놀이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간에 묻혀 있는 새로운 판본(板本)이나 조씨 가문의 사료 같은 것이 새롭게 나와야 다시 한 번 불끈 흥분(興奮)할 수 있는 계기가 될 텐데 말이다.
홍학(紅學)의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올해는 ‘홍루몽’ 완독(玩讀)에 성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스러져가는 ‘홍학(紅學)’은 스테디셀러가 되지 못하는 ‘홍루몽(紅樓夢)’에 대한 연민의 정을 기존의 열망에 추가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