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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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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학가들 홍루몽 후40회는 고리타분하고 재미가 없고 졸렬한 작품이라고 비판

图片信息 红楼梦里看到的.这是标题诗,和正文有什么联系?古鼎新


이 글은 중국 청대의 조설근(曹雪芹; 1715~1763)이 쓴) 홍루몽에 대한 작품론을 전개(展開)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첫째, 작품배경(作品背景)이 된 청대 현실에 초점을 맞추어 ‘반봉건(反封建)’을 핵심으로 파악(把握)하는 견해와 둘째, 홍루몽을 연구하는 당대의 현실과의 관련선상에서 홍루몽(紅樓夢)의 현실관을 살피는 논의가 그것이다. 이 경향성(傾向性)은 대체로 역사성에 기초한 연구사들 내에서 착종(錯綜)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가부(賈附)의 몰락과정을 서사의 중심선(中心線)으로 간주한 가운데 세부적으로 공명과 경제, 도덕, 그리고 혈연(血緣)의 연속성이라는 문제들을 주 쟁점으로 하여 홍루몽에 대한 문학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할 것인바 기존 논의에서 ‘반봉건(反封建)’이라는 용어로 포괄되던 작품의 배경이 되는 청대(淸代) 현실에 대한 논의를 전제왕권과 가부장권의 대칭적 관계 및 정학(情學)을 통해 보다 구체적(具體的)으로 진행할 것이다. 나아가서 작품전반에서 주요한 모티프가 되고 있는 죽음의 문제, 작품의 중후반부터 탄력적(彈力的)으로 전개되는 결혼의 문제들을 통해 작품에 내재하는 청대 현실에 대한 전망(展望)을 또한 생물학적 측면에서 엿보게 될 것이다. 

본고에서 전개될 이러한 논의들은 모두 ‘공간기호학(空間記號學)’의 일관된 관점으로 전개될 것인바 이를 통해 문학사회학적 관점(文學社會學的觀點)에 문예 미학적 관점이 접맥(接脈)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 동안 홍루몽의 서사구조에 대한 논의가 다각적(多角的)으로 전개된 바 있으나 홍루몽의 전체 서사를 세부적(細部的)으로 아우르면서 일관된 관점으로 그 ‘구조’―내용과 형식(形式)의 일원론을 포함하는 개념임을 구명(究明)한 연구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본고는 흥성함에서 쇠망으로 부침(浮沈)하는 가부의 가족사적 흐름을 공간기호학을 통해 구조화(構造化)하여 밝힘으로써 홍루몽의 서사미학(敍事美學)을 또한 밝히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예시(豫示)한 바에 따라 홍루몽에 대한 정치한 작품론(作品論)을 전개할 것인바 이는 본고가 목적으로 하는 비교 연구(比較硏究)하고 나아가서 동아시아 문학(東亞細亞文學)에 대한 보다 확대된 논의들을 위한 토대(土臺)가 될 것이다. 다만 자기표절(自己剽竊)의 문제와 지면상의 문제 등을 고려하여 다른 문학과의 대등한 비교 연구가 수행되지 못함을 미리 밝혀둔다. 필자가 발표한 관련 기존 논문들을 전제(前提)한 가운데 두 작가의 문학에 내포된 핵심적 사항(核心的事項)들에 대한 비교 논의를 간략히 전개할 것이다. 

홍루몽의 서사구성양상(敍事構成樣相)은 다원적이기에 일찍이 논자들은 그 주선(主線)과 부선(副線)이 무엇인지 다원적인 서사단위들이 미시적(微視的) 혹은 거시적(巨視的)으로 어떻게 짜여 있는지에 주목해 왔다. 가족사(家族史)의 흥망이라는 가족사소설의 기본 서사구성(敍事構成)에 비추어 보았을 때 홍루몽은 공명과 경제의 측면, 도덕적 측면, 그리고 죽음과 결혼의 양상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생물학적 측면(生物學的側面)에서 그 부침이 확연히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를 우선 가족사의 흥망(興亡)이라는 중심 서사 축을 구성하는 부분적인 서사단위들인 것으로 보고 각각 가정 관련서사, 왕희봉 관련서사, 대관원 관련서사와 그리고 결혼관련(結婚關聯) 서사로서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이들 각각의 서사단위들은 유기적인 구성체로서 홍루몽(紅樓夢)의 전체 서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들 서사단위(敍事單位)들은 나름의 공간기호학적 지형을 이루고 있는 바 이는 서술(敍述)을 통해 본 장에서 설명할 것이다.

"홍루몽(紅樓夢)의 스토리구조는 아주 교묘하다" 이것은 홍학계(紅學界)에서 계속 즐겨 쓰는 말이다. 홍학가(紅學家)의 입에서 말하는 소위 "스토리구조가 아주 교묘하다"는 것의 의미는 원저(原著)에 앞에서 뒤에 나오는 각종 인물의 운명과 이야기전개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위 "복맥천리(伏脈千里)는 복선이 천리나 깔려있다"라는 등의 헛소리이다. 왜 이것을 헛소리라고 하는가? 

왜냐하면 우선 이런 헛소리의 기본전제가 매우 박약(薄弱)하기 때문이다. 스토리전개를 아주 교묘(巧妙)하게 하였다는 전제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스토리전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홍루몽(紅樓夢)은 책 전부에 무슨 스토리전개랄 것이 있는가? ‘홍루몽’에 있는 것은 전부 계모산피(鷄毛蒜皮)는 닭털이나 마늘껍질같이 시시한 내용, 과담핍미(寡淡乏味)는 맛이 없음의 자잘한 일들 분이다.

‘정심심, 우몽몽(情深深, 雨夢夢)’을 보았는가? 안에는 할머니 하나가 고양이를 찾는 아주 무료한 이야기이다. 경요(瓊瑤, 대만의 유명한 드라마작가)는 이것을 가지고 여러 편을 찍었다. 원래 아주 무료한 저능아적(低能兒的)인 자잘한 이야기를 경요(琼瑶)가 떠들다보니 무슨 살인사건이나 궁중정변(宮中政變)처럼 깜짝 놀랄만하게 그린 것이다. 이게 무엇인가? 전부 가짜이지 않은가? 모두 허장성세(虛張聲勢)이지 않은가? 

홍루몽(紅樓夢)의 이야기전개가 바로 경요(琼瑶)의 소설과 같다. 전부 계소산피요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은 아무 관계없는 자잘한 일들뿐이다. 그런데도 마치 하늘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쓴 것일 뿐이다. 나는 홍루몽(紅樓夢)은 여자가 쓴 게 아닌가 의심(疑心)하고 있다. 아니면 게이이던가. 왜냐하면 여자들이나 이런 무료하고 졸렬(拙劣)한 소설을 쓸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현대문학에서 강조(强調)하는 갈등이나 클라이막스(高潮)도 없고 말이다.

홍루몽(紅樓夢) 안의 일부 유명한 스토리를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소설이 얼마나 무료한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서(周瑞)가 궁화를 보내는 장면"을 보면, 예를 들어 "설보채(薛宝钗)가 나비를 잡는 장면"을 보면, 예를 들어 "시사를 만들어 시를 짓는 장면", "사상운(史湘雲)이 술에 취해 가슴을 드러내고 낮잠 자는 장면"...등등 이다. 이런 장면이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는가? 도대체 무슨 스토리의 전개(展開)가 있는가? 

도대체 무슨 예술성(藝術性)이 있는가? 나는 도저히 무슨 깊이를 알지 못하겠다. 물론 홍루몽(紅樓夢) 팬들을 그렇지 않게 볼 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주서(周瑞)가 궁화를 보내는 장면에 대낮에 평아(平兒)가 물을 쏟는 것을 보고는 그들은 이것은 왕희봉(王熙鳳)과 가련(賈璉)이 대낮에 음탕한 짓을 하는 것을 암시한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조설근이 여기서 왕희봉과 가련의 황음한 생활을 드러낸다고 본다. 그래서 예술성이 높다고 하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지어내는 것이 바로 소위 '홍학(紅學)'이다.

중국인을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고 소설을 쓸 때도 마차가지다 모두 괴이(怪異)하고 신비로운 전주(前奏)를 두어 강조하기를 좋아한다. 마치 한국 드라마 ‘대장금(大長今)’의 제1집에서 사람 같기도 하고 신선(神仙) 같기도 한 사람이 장금의 부친에게 "너의 일생의 운명(運命)은 세 여자와 관련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이런 장면은 아주 잘 설계(設計)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많은 중국의 고전 장편소설에서 관용(慣用)되던 기법일 뿐이다. 

예를 들어 ‘삼국연의(三國演義)’에는 매번 큰 장면이 시작될 때마다 일부 신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사람이 나와서 미래의 일을 알려주고 당사자에게 경고(警告)를 하곤 한다. 예를 들면 도사 좌사, 관차각등이 그들이다. 미리, 신선, 도사, 고승, 꿈 등을 통해서 나중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오래된 문학작품(文學作品)일수록 더 그렇다. 문학작품뿐 아니라 일부 역사서에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 그래서 이런 예술기법(藝術技法)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이고 홍루몽(紅樓夢)에 특유한 것도 전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들어 홍루몽이 독특하고 고심막측(苦心莫测)한 것처럼 얘기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법(手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홍학가(紅學家)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약간의 주사마적(蛛絲馬跡)은 어떤 사건이나 일이 있었다는 흔적(痕迹)을 발견하면 그들은 바로 원작자는 뒤에서의 이야기전개를 암시(暗示)한다고 하고 스스로 총명(聰明)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위 고악(高鄂)의 후40회에 대하여는 완전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조설근(曹雪芹)은 원래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왜 이런가? 바로 이런 홍학가(紅學家)들이 스스로 총명한 척해서 원저의 문자에 대하여 졸렬(拙劣)한 해석과 추측을 더했기 때문이다. 

홍학가(紅學家)들이 하루 종일 연구하는 게 무엇인가? 그들은 바로 앞의 문자가 뒤의 무엇을 암시(暗示)하는지를 연구한다. 그래서 유심무(刘心武)가 연구해낸 것은 진짜 가격이 나중에 어떻게 된다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임대옥(林黛玉)이 나중에 수용(水溶)에게 시집간다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설보채(薛寶釵)가 가우촌(賈雨村)에게 시집가는 것이고 등등의 말도 안 되고 황당(荒唐)하기 그지없는 가소로운 연구 성과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연구 성과(硏究成果)를 얻어내는 것은 원저의 문자에 대한 추측과 상상에서 집어내는 것이다. 불행한 것은 상용(常用)한자가 겨우 3000자밖에 되지 않아 많은 글자의 의미는 중복(重複)되고 쉽게 다른 의미로 읽히거나 오해(誤解)된다는 점이다. 바로 조상들이 이렇게 분명하지 않은 문자를 발명(發明)하였으니 오늘날의 홍학이 번영(繁榮)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문자추측(文字推測)과 유희 중에서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만다. 그래서 갈수록 더욱 원저(原著)의 문자에 미신적(迷信的)인 믿음을 갖는다. 그들은 조설근(曹雪芹)의 원저를 더욱 신격화(神格化)하고 그들은 '홍루몽의 이야기구조는 정말 교묘(巧妙)하다'는 감격적인 말을 내뱉는 것이다. 원인은 바로 원저 또는 중국한자(中國漢字)가 그들에게 많은 추측과 유희 마스터베이션을 할 기회(機會)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수렁으로 빠지게 되면서 그들은 더욱 전80회를 미신적으로 믿고 이것이 바로 원작자인 조설근(曹雪芹)의 글이라고 보고 더더욱 후40회의 글을 멸시(蔑視)한다. 왜냐하면 속작(續作)은 고악(高顎)이 쓴 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하여 조설근(曹雪芹)을 칭송하고 고악(高顎)을 폄하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고악이 이 소설을 구해냈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조설근(曹雪芹)의 전80회는 정말 고리타분하고 재미가 없다. 80회동안 거의 회계장부 같다. 글재주도 아주 졸렬(拙劣)하다. 그러나 후40회에 오면 비로소 약간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비로소 유려(流麗)한 문자가 나온다. 비록 이렇기는 하지만 전체소설은 여전히 졸렬한 삼류소설(三流小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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