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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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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학파들의 치열한 논쟁 중인 홍학은 20세기 최대의 학문스캔들인가?

图片信息 装点红楼梦


홍루몽(紅樓夢)은 청나라 건륭제 시기의 작가인 조설근(曹雪芹)이 쓴 고전소설이다. 등장인물만 700명에 달하며 등장인물들의 세밀한 묘사로 청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소설(傑作小說)로 칭송받고 있으며 100여 차례 간행되었고 30여 종의 후속편들이 나왔을 만큼 중국에서 크게 인기를 끈 국민적인 고전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홍루몽이 삼국지(三國志)와 서유기(西遊記), 수호전(水滸傳)에 비해 인지도에 밀리지만 많은 중국학자들도 홍루몽에 대해 연구해 "홍학"(紅樓夢學)이란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홍루몽은 문학적 가치,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중국 고전소설의 정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금병매(金甁梅)를 제외시킨 '사대명저(四大名著)'의 하나로 친다.

소설의 제목인 '홍루몽(紅樓夢)'의 뜻을 직역하면 붉은 누각의 꿈이다. 紅樓는 홍등가를 의미하는 게 아니고 중국의 전통 문화에서 여성이 거주하는 구역을 일컫는 말이며 작중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主要人物)들은 여성의 비율이 높다. 소설의 내용과 주제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목의 유래에 대해서는 조설근(曹雪芹)이 소설의 도입부에서 언급하였는데 가장 먼저 언급된 제목인 ‘석두기(石頭記)’는 주인공인 가보옥(贾宝玉)이 여와가 쓰다가 남은 돌의 화신인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정승록(情僧錄)’은 속세의 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그 다음으로 언급된 ‘풍월보감(風月寶鑑)’과 ‘금릉십이차(金陵十二釵)‘는 각각 작중에서 언급 및 등장한 보물 및 등장인물들을 의미하며, 최종적으로 확정된 제목이 ’홍루몽(紅樓夢)‘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청대에 일시적으로 홍루몽이 금서로 지목되었을 때는 ’금옥연(金玉緣)‘이라는 제목으로 유포되기도 했다.

홍루몽의 판본은 80회본과 120회본의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1791년 정위원(程偉元)이 기존의 80회본에 고악(高鶚)이 쓴 40회본을 결합해서 120회본으로 간행한 것이 "정갑본(程甲本)"이고, 이듬해에 이 120회본을 개정한 것이 "정을본(程乙本)"이라 한다.

활자본(活字本)으로 출간되기 이전에는 필사본(筆寫本)의 형태로 유포되었는데 문제는 작가인 조설근(曹雪芹)이 원고가 출간되기 전에 사망해 버려서 시간이 지나면서 조설근이 최초로 작성한 원고 중 유실(遺失)된 부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를 보다 못한 정위원(程偉元)은 지인인 고악(高鶚; 1763~1815)에게 흩어진 필사본(筆寫本)의 내용을 수집, 보완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고 1791년과 1792년에 거쳐 '홍루몽(紅樓夢)'이라는 제목이 붙은 120회본 소설로 출간되었다.

고악은 자신이 쓴 후반부가 조설근(曹雪芹)의 원고를 참고하여 '복원(復原)'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고악(高鶚)이 진시(陳試)를 통과하고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기도 할 정도의 정통 한학자(漢學者)이지만 그래도 진실은 알 수 없다. 조설근이 쓴 80회본까지만 읽었을 때 소설의 주제의식(主題意識)이 더욱 명확해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조설근이 쓴 부분까지만 읽으면 이야기가 덜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당시에도 수많은 자칭 후속편 동인지들이 나돌았는데 정위원이 그 가운데 가장 작품성(作品性) 있는 고악의 버전을 공식 후속편으로 '지정(指定)'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활자본(活字本)으로 출간되기까지의 기간 동안 유실된 내용이 많았던 탓에 2006년에는 중국에서 고악(高鶚)이 후반부 40회의 내용을 변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기사 링크 그러다가 최근에는 고악과 정위원(程偉元) 이전에 이미 120회본 홍루몽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데다가 조설근(曹雪芹)의 판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여러 종류가 드러남으로써 어느 쪽이 '원본(原本)'인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1979년 예일대학교수인 여영시(余英時)는 홍콩 ’중문대학학보(中文大學學報)‘ 제2기에 발표한 "근대 홍학의 발전과 홍학혁명(紅學革命)"이라는 논문에서 "홍학"을 "갑골학(甲骨學)" 및 "돈황학(敦煌學)"과 함께 20세기 중국의 "현학(顯學, 인기학문)"이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홍학은 "호적(胡適)의 제창에 따라 ’홍루몽(紅樓夢)‘의 고증업무는 이미 근대중국학술의 주류인 건륭가경시대의 고증학(考證學)과 융합되었다. 이로 인하여 학술사의 관점에서 보면 홍학은 당대의 현학(顯學)인 갑골학(甲骨學), 돈황학(敦煌學)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전혀 부끄럼이 없게 되었다"

중국예술연구원 중국문화연구소소장이면서 저명한 홍학가인 유몽계(劉夢溪) 선생은 2005년 6월에 출판한 ’홍루몽과 백년중국‘이라는 책에서 중국의 현대학술은 홍루몽연구로부터 시작했다고 적었다. 왕국유(王國維)가 1904년에 발표한 ’홍루몽평론‘은 현대학술사상과 학술규범(學術規範)을 비교적 집중적으로 나타내고 있고, 현대중국사상문화무대에서 많은 일류급 인물들이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홍학(紅學)에 발을 내디뎠다. 예를 들어 왕국유(王國維), 채원배(蔡元培), 호적(胡適), 노신(魯迅), 진독수(陳獨秀), 고힐강(顧頡剛), 유평백(刘平伯), 오복, 진인각, 심종문(沈从文), 곽말약(郭沫若), 왕력, 파금(巴金), 모순(矛盾), 빙심(冰心), 장애령(张爱玲), 임어당(林语堂) 등이 그들이다. 이외에 홍학은 학자들끼리 싸움을 가장 많이 벌인 영역이었다.

그러나 "홍학(紅學)"이 인기 있는 것은 단지 연구인원이 많고 기간이 길며 투입한 규모가 많다는 것이고 논문(論文)과 글을 많이 썼다는 측면이지 학술의 방법론상으로는 그다지 건륭가경때의 고증학(考證學)을 제대로 승계하여 발전시켰다고 할 수 없다. 의문을 풀고 해결하는 실적에서도 홍학은 학문(學問)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여교수에 따르면 색은파(索隱派)가 다시 나타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고증학이 이 몇 가지의 기본문제에 대하여 전혀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曹雪芹)인가 아닌가? 전80회와 후40회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지연재(脂硯齋)는 또 누구인가, 그(또는 그녀)와 원작자는 어떤 특수한 관계가 있는가? 이런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하여도 고증파(考證派)들은 여러 가지 답안을 제시했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정설이 나오지 못했다. 이뿐이 아니다. 조설근의 생몰년대(生沒年代)는 조설근이 조옹 혹은 조부, 누구의 아들인가의 문제 등에 대하여 학술계(學術界)는 아직도 서로 다른 의견을 고집하고 있다.

유몽계(劉夢溪)가 자신의 책에서 "지연재(脂硯齋)는 누구인가" "조설근이 누구의 아들인가" "속서의 작가는 누구인가"는 홍학의 3대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고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연재가 어떤 사람인가? 조설근의 숙부래도 좋고, 백부래도 좋고, 조우래도 좋고, 당촌이래도 좋고, 조설근 자신이래도 좋고, 사상운(史湘雲)이래도 좋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증거가 불충분한 추측에 불과하다. 연구자(硏究者)들 간에도 의견일치가 이루어져있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주장들마다 이를 뒷받침한 실증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자료에서 보면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자료를 어떻게 분석하더라도 지연재가 누구인지 조설근이 누구의 아들인지, 속서의 작가가 누구인지에 대한 세 개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세 가지 풀리지 않는 매듭은 계속 내려갈 것이고 아무도 풀지 못할 것이다"

홍루몽(紅樓夢)의 줄거리는 오늘날의 난징인 금릉(金陵)을 기원으로 한 부유한 가(賈)씨 가문에서 벌어진 여러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이야기는 영국공(榮國公) 가사의 동생인 가정의 차남 가보옥(賈寶玉; 남자 주인공)과 똑똑하지만 몸이 약한 가보옥의 고종사촌 임대옥(林黛玉; 여자주인공 1), 그리고 건강하고 가정적인 이종사촌 설보채(薛寶釵; 여자주인공 2)의 세 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가씨 가문은 녕국공(寧國公)과 영국공(榮國公)이라는 두 개의 공작위를 받은 개국공신 형제의 후예(後裔)이며 다른 유력가문인 사(史)씨, 설(薛)씨, 왕(王)씨와 인척관계를 맺으며 번성하였다. 하지만 본편 시점에 이르러서는 황제의 귀비가 된 가보옥의 누나 가원춘(賈元春)의 친정 나들이를 위해 엄청난 규모의 원림인 대관원(大觀園)을 신축한데다 4대 가문에 속한 가문원들의 지나친 사치, 주색잡기를 포함한 각종 폭정(暴政)들로 인해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녕국공(寧國公) 가경은 불로장생법(不老長生法)에 매달려 경조사를 제외하면 도관에서 생활하다가 수은중독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인 가진 및 가진(賈珍)의 손자인 가용(賈蓉), 영국공(榮國公) 가서, 가서(賈瑞)의 아들 가련은 모두 주색잡기와 사치에 몰두하는 쓸모없는 이들이었다. 가사의 동생인 가정은 그나마 관직 생활을 하는 등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편이었으나, 관직 생활로 인해 지방과 중앙을 전전하느라 집안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조카인 가련(賈蓮)에게 집안일을 위임했고 결과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남성 가문들이 대부분 무능력하였던 탓에 영국공(榮國公) 가사의 어머니인 사태군(가모)과 손자며느리인 왕희봉(王熙鳳), 가서의 동생 가정의 정실인 왕부인(가보옥의 어머니) 등이 4대 가문의 세력을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었으나 결국 쇠퇴(衰退)를 막지 못했다.

가보옥(賈寶玉)은 본래 신화시대에 여와(女媧)가 축융(祝融), 공공(共工)의 싸움으로 인해 구멍이 뚫린 하늘을 복구하기 위해 쓰다가 남은 돌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선계에서 인간의 생활에 대해 호기심(好奇心)을 갖고 지나가던 신선에게 부탁을 하여 입에 구슬을 물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총명한 인물이었으나 유학과 입신양명(立身揚名)에는 전혀 뜻을 두지 않고 또래 소녀들과 어울리기만을 즐긴 탓에 부모의 걱정거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가보옥의 조모인 사태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보옥을 총애(寵愛)하였다.

임대옥(林黛玉)은 돌이 가보옥(賈寶玉)으로 태어나기 전에 신영시자라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선계를 돌아다니던 중 물을 주었던 풀인 강주초의 화신으로 물을 머금은 끝에 인간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으나 신영시자는 이미 인간계에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풀이었던 자신도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인간계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녀는 무남독녀(無男獨女)였고 어머니인 가민이 사망하자 관직 생활을 하던 아버지에 의해 외가인 가씨 가문에 의탁하였으며 시 짓기와 음악에 대한 재능을 갖춘 미소녀였으나 병약한 탓에 신경질(神經質)이 잦고 앓아눕는 날이 많았다.

설보채(薛寶釵)는 가보옥(賈寶玉)과는 이종사촌지간으로 어릴 때 지나가던 스님으로부터 받은 문장이 적힌 금목걸이를 항상 착용(着用)하였는데 가보옥이 태어날 때 입에 물고 태어났던 구슬에 새겨진 문장과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었고 두 명이 서로 인연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임대옥(林黛玉)을 불안하게 하였다. 또한 차분하고 단정한 외모와 성격을 갖추고 있어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황제의 후궁이 되어 귀비의 봉호를 받은 가원춘(賈元春)은 특별허가를 얻어 친정을 방문하였는데, 대관원의 모습을 보고 빈 공간으로 두기 아깝다고 여겨 가보옥 등에게 대관원에 거주할 것을 명하였고 가보옥(賈寶玉)은 임대옥(林黛玉), 설보채(薛寶釵)와 또래 소녀들과 함께 대관원(大觀園) 안에 각각 거처를 두게 되어 시와 노래를 짓거나 책을 읽으며 단란한 시절을 누렸다.

나이를 먹게 되자 가보옥(賈寶玉)은 설보채(薛寶釵)에게도 일정한 호감이 있긴 했지만 임대옥(林黛玉)과의 결혼을 더 원했다. 그러나 병약한 임대옥을 탐탁치 않게 여긴 가보옥의 할머니 사태군은 임대옥보다는 설보채가 신부감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여기에 왕희봉과 왕부인이 동조(同調)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갖고 다니던 구슬 통령보옥(通靈寶玉)이 돌연히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나 가보옥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상태가 되어 버렸고 귀비 가원춘도 같은 시기에 병사하였다. 이에 사태군(史太君) 등은 불길한 기운을 액땜한다는 명분으로 가보옥과 설보채의 혼인을 강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보옥의 측근 시녀였던 화습인(花襲人)을 통해 임대옥에 대한 감정이 보통 것이 아님을 알게 되자, 왕희봉은 가보옥에게는 신부가 임대옥이라고 거짓말을 한 뒤 설보채와 결혼시킨다. 가보옥이 설보채(薛寶釵)와 결혼한 날 임대옥(林黛玉)은 결국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나중에서야 모든 것을 알게 된 가보옥(賈寶玉)은 엄청난 충격으로 인한 허탈상태에 빠져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문원들의 폐단이 겹친 결과 가씨 가문은 공작위들과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몰락해 버렸고 가보옥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조카와 함께 과거에 응시, 급제하였으나 응시장(應試場)을 떠난 후 실종되어 버렸다. 이후 가보옥(賈寶玉)은 아버지 가정(賈政)과 비릉의 나루터에서 재회하지만 가보옥은 한마디 말도 없이 목례만을 한 채 승려와 도사의 무리들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마지막에 진비는 낙향하는 가화와 함께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고 아이를 낳자마자 죽은 딸 영련의 영혼을 천계로 보낸 뒤 망망대사(茫茫大師)와 묘묘진인(渺渺眞人)과 함께 이야기를 끝마친다. 후일담(後日譚)에 보채는 보옥의 아들을 홀로 키우며 수절(守節)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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