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연의'는 '대인물'에 관한 책이다. 그 안의 주요인물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군국대사(軍國大事)이다. 다만 "대인물(大人物)"도 사람이므로 가정과 친척이 있다. 능력이 우수한 것을 제외하고 그들은 사업과 가정 간에 모순(矛盾)이 생기면 일반적으로 그들은 전자(前者)를 선택한다.
중국인들은 역대이래로 친자(親子)간의 정을 중시했다. 부자자효(父慈子孝)를 강조했다.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인물들 중에서 "효(孝)"로 유명한 사람도 적지 않다. 다만 구체적인 상황과 방식은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유비(劉備), 제갈량(諸葛亮), 강유(姜維) 및 서서(徐庶)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그중 유비와 강유(姜維)는 소설에 나올 때 "모친을 지극한 효로 모셨다" 혹은 "모친을 지극한 효로 받들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서서(徐庶)도 정욱程昱)이 "사람됨이 효성(孝誠)이 지극하다"고 평가한다. 제갈량(諸葛亮)은 숙부가 길렀다. 그가 궁경(躬耕)할 때는 숙부(叔父)가 이미 사망했고 형도 이미 동오(東吳)에서 일을 시작했다. 집안에는 그와 동생만이 있었다. 그래서 "효(孝)"의 문제는 없다.
'삼국지(三國志)'는 특별히 유비(劉備)가 어려서 "모친과 함께 자리를 만들어서 파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고 하였을 뿐 그가 효성(孝誠)스러운지 아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의 표준으로 보면 모친(母親)을 도와서 일을 하고 하릴없이 돌아다니면서 사고(事故)나 치지 않았다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바로 "가난뱅이의 자식은 일찌감치 집안을 책임(責任)진다"는 것이다.
관우(關羽)는 일찍이 살인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관우의 모친(關羽)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분명히 그를 신경써주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부모(父母)가 살아계시면 멀리 놀러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유비(劉備)가 나중에 군대에 들어가서 거사에 참여할 때 모친(母親)이 이미 돌아가셨는지 아니면 그가 사전에 모친과 상의(商議)하였는지에 대하여 소설과 사서는 모두 아무런 말이 없다. 어쨌든 유비(劉備)의 모친은 그 후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에 쫓겨남으로 도망칠 때 가족들 중에는 감씨, 미씨 두 부인과 아두(阿斗)가 있었을 뿐이다.
강유(姜維)는 천수군 기현 사람이다. 이 마을에서 '토박이로 자란 사람'이다. 진정으로 등장(登場)할 때까지 아직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말투는 분명히 확실한 감숙성(甘肅省) 천수 사투리일 것이다. 보통화를 말할 줄 아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이는 강유(姜維)가 효자라는 것을 설명한다. 강유(姜維)의 부친이 살아있을 때 얼마나 능력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름은 아주 특이했다. 강경(姜冏)이다. 강유는 효자로 유명했으므로 제갈량이 그를 복속시킬 때 먼저 그의 모친을 생각해내서 모친이 어디에 거주하고 있는지 묻는다. 고향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제갈량은 위연(魏延)에게 기현을 취하도록 명한다. 과연 강유는 기현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자 상사에 요청하여 스스로 병력을 이끌고 구원하러 나선다. 기성을 지키고 고향을 지키는 것이 바로 모친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 수법은 강유(姜維)와 같은 사람에게는 잘 통한다. 만일 유방과 같은 주인을 만났다면 아마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항우(項羽)가 유방의 늙은 부친을 붙잡아도 그는 양보(讓步)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일 항우가 유방(劉邦)의 부친을 삶는다면 고기탕을 한 그릇 나눠달라고 했다.
제갈량(諸葛亮)도 확실히 인재정책을 잘 아는 좋은 지도자였다. 강유(姜維)가 촉한에 귀순한 후 그는 시시때때로 강유의 가족문제를 해결하고자 생각했다. 기산을 나서는 것이 실패하고 철수하려 할 때 제갈승상(諸葛丞相)은 심복을 "기현에 보내어 강유(姜維)의 노모를 한중으로 보내도록"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강유(姜維)에게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주었다.
강유(姜維)는 이 방면에서 운이 좋았다. 사업과 가족을 모두 돌볼 수 있었으니까. 서서는 그다지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조조(曹操)는 서서(徐庶)를 얻고자 했고 정욱(程昱)이 계책을 꾸민다. 그는 제갈량(諸葛亮)과 같은 방식을 썼다. 즉 서서의 모친을 인질로 잡아서 서서(徐庶)에게 투항하도록 강요한다. 이 계책은 즉시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강유(姜維)의 상황과 달랐던 점은 서서(徐庶)의 모친은 보통의 할머니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원칙성(原則性)이 강했고 죽어도 아들이 조조(曹操)에 귀순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서서(徐庶)가 온 후 그녀는 "충효(忠孝)는 둘 다 이룰 수 없다"고 아들이 기명투암(棄明投暗)한 것을 질책하고 조상을 욕보였다고 질책(叱責)하며 자살한다. 이 서서徐庶)의 모친은 사마소(司馬昭)가 집권했을 때 위나라의 왕경(王經)의 모친과 경지가 비슷하다. 왕경(王卿)은 사마소(司馬昭)를 따르지 않아서 모친과 함께 죽게 된다. 왕경(王卿)은 형을 받기 전에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며 모친에게 말했다. "불효자가 자모까지 연루(連累)시켰습니다." 왕경(王卿)의 모친은 크게 웃으며 말한다. "사람들 중 누가 죽지 않겠는가? 이렇게 죽으면 죽을 곳에서 죽는 것이니 여한이 없다."
서서(徐庶)의 비극은 그가 자신의 모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모친의 비범(非凡)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은 사업도 잃고, 효도도 다 하지 못했다. 그는 유비(劉備)에게 약속한다. 조조(曹操)의 진영에 들어간 후 평생 조조를 위하여 한 가지 아이디어도 내놓지 않겠다고. 서서가 유비를 버리고 조조를 택한 것은 유비(劉備)로서 득도 있고 실도 있으며 득이 오히려 실보다 크다. 서서(徐庶)의 추천으로 그는 제갈량(諸葛亮)을 얻었기 때문이다. 조조측에서도 괜찮은 편이다. 최소한 서서(徐庶)가 자신의 숙적에게 쓰이지 않았다. 서서(徐庶) 자신을 보면 세상에서 언어학에 공헌을 한 것을 제외하고 중국의 헐후어(歇后语; 중국숙어)를 남긴다. "서서(徐庶)가 조조진영에 들어가다(言不發)“. 그의 일생은 그대로 끝난 것이다. 그는 충효(忠孝)의 마음이 모두 있었다. 그리고 양자는 모두 강렬했다. 그러나 모두 얻지 못한다. 모친은 자신의 선택에 노하여 자진했으니 불효이다. 혹은 효가 완벽(完璧)하지 못했다. 조조에게는 불충(不忠)했고 유비(劉備)에게는 제대로 충성하지 못했다.
조조(曹操)도 기실 효도로 유명했다. 사서(史書)와 소설에서 모두 그가 일찍이 "거효렴(擧孝廉)"되었다고 적고 있다. 당연히 조조(曹操)의 이런 효도는 약간의 과장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효렴(擧孝廉)"은 한나라 때의 관리 선발제도이고 오늘날의 대학입시(大學入試)에서 '삼호학생(三好學生)' '우수 반 단 간부' '당원'처럼 가점을 주는 것이어서 이익과 직접 관련(關聯)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점(加點)'보다 더욱 심했다. 왜냐하면 단순히 그것만으로 관직(官職)에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지식(基本智識)에 대한 시험도 치르지 않아도 된다. 당시에 허위가식(虛僞假飾)이 많았다.
민요(民謠)에 "수재로 뽑혀도 글을 읽지 못하고 효렴(孝廉)에 추천되어도 부친과 따로 산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효렴(孝廉)"의 명예를 얻어도 반드시 그의 도덕수준이 그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조조(曹操)의 부친 조숭(曹嵩)은 고위관료(太尉)를 지냈다. 그저 조숭(曹嵩)이 복을 누리고자 할 때 불측의 일이 일어나 제대로 누리지 못했을 뿐이다. 설사 부친의 육탕을 먹겠다고 큰소리친 유방(劉邦)도 황제에 오른 후 부친을 모셔 와서 그의 모든 이치에 맞거나 맞지 않는 요구를 다 들어준다. 그저 정상인(正常人)이라면 자신의 부모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사람과 사람이 다른 것은 그저 개인사업(個人事業)과 개인이익(個人利益)과 가족을 돌보는 것과의 사이에 모순(矛盾)이 생길 때 취사선택을 하는데서 다를 뿐이다.
'삼국지(三國志)'에서 "아들이 효성스럽다"(子孝)는 예는 적지 않다. "부친이 자상하다"(父慈)는 것을 언급한 것은 단 한 곳이다. 바로 원소(袁紹)의 어린 아들에 대한 것이다. 당시 조조(曹操)는 유비(劉備)를 정벌하러 갔고 본거지인 허창(許昌)은 비어 있었다. 원소(袁紹)의 모사인 전풍(田豊)은 유비(劉備)의 구원요청서신을 받은 후 원소(袁紹)를 만난다. 그리고 기회는 얻기 어려우니 원소(袁紹)에게 이 기회에 허창(許昌)을 공격하자고 말한다. 이렇게 하면 "위로는 천자를 보호할 수 있고 아래로는 만민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가운데로는 물론 유비(劉備)를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원소(袁紹)는 당시 얼굴이 초췌하였고 의관이 흐트러져 있었으며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만나자마자 원소(袁紹)는 소리친다. "나는 죽을 것이다." 그 자신이 무슨 병에 걸려서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개창(疥瘡)에 걸린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의 병이 중하니 그는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원소(袁紹)는 조조(曹操)에게 타격을 가할 좋은 기회를 놓친다. 나중에 결국 관도(官渡)에서 패배한다.
이것이 바로 원소(袁紹)가 조조(曹操), 유비(劉備) 및 일체의 정치 군사 분야의 성공한 인사들과 다른 점이다. 조조(曹操)와 유비(劉備)는 모두 자신의 아들을 사랑했다. 조조(曹操)는 조식(曹植)을 가장 사랑했다. 그러나 가족정치의 대국에서 출발하여 그는 조식을 후계자(後繼者)로 삼지 않았다. 유비(劉備)는 아두(阿斗)를 사랑했다. 그러나 부하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장판교(長坂橋) 격전 후 그는 체형적(體型的)인 특질인 팔이 길다는 것을 이용하여 가볍게 아들을 땅바닥에 던진다.
당연히 원소(袁紹)가 패배한 것의 책임을 그 어린아이에만 돌릴 수는 없다. 주로 원소(袁紹) 자신이 '주공(主公)'에 부적합한 성격상 약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겉으로 보기에는 엄해 보이지만 기실 담량(膽量)이 아주 작고 평상시에 아이디어를 많이 내지만 우유부단(優柔不斷)하여 결단을 못 내리고 큰일을 할 때는 자신의 몸을 걱정하고 자잘한 이익(利益)에는 목숨을 잃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정치가와 군사가로서 원소(袁紹)는 불합격이다. 부친으로서 원소(袁紹)는 문제가 있다. 그의 사후 여러 아들이 너 죽고 나 살기 식으로 싸워서 늑대를 집안으로 끌어들인다. 이것도 그의 책임(責任)이다. 다만 어린 아들의 병에 이렇게 신경 쓴 것을 보면 그는 자애로운 부친(父親)으로서의 이미지를 충분히 나타낸다. 사람으로서의 도리로 보자면 괜찮은 점이라 할 수 있다.
원소의 자는 본초(本初)이다; 원소(袁紹)가 아들을 사랑하여 군국대업(军国大业)의 장거를 포기한 것을 기념하여 국제적으로 그리니치천문대(格林尼治天文台)를 통과하는 경선을 '본초자오선(本初子午線)"이라 명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