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연의(三國演義) 드라마가 다시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 이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나관중(羅貫中)이 쓴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가정 연간에 간행된 가정본(嘉靖本) 계통, 가정 연간 이후에 간행된 지전본(志傳本) 계통, 문인 모종강(毛宗崗)이 만든 모종강본(毛宗崗本) 계통이 있다. 세 계통은 장회(章回), 판의 형식, 자구(字句), 주(註), 삽입 시가, 관우(關羽)의 셋째 아들인 관색(關索)의 등장 여부에서 차이가 있을 뿐 내용상의 차이는 별로 없다. 세 판본 중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것은 모종강본(毛宗崗本)이다.
그 이유는 난삽(難澁)한 장회를 120회로 정비하고, 권두사(卷頭辭), 협비(夾批), 총평 등을 대폭 가다듬었으며 무엇보다 등장인물의 생동감(生動感), 이야기의 흥미의 제고, 촉한(蜀漢) 정통론과 존유폄조(尊劉貶曹) 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조선 전래 시기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569년(宣祖) 기사에 의거하여 16세기 무렵으로 여겨진다. 이후 이 소설은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과 목판본(木板本)으로 간행되었고 한글로도 번역되어 필사본(筆寫本)·세책본(貰冊本)·방각본(坊刻本)·활판본(活版本) 등 다양한 형태로 유통되어 읽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이본(異本)은 200여 종이며 일반필사본(一般筆寫本)·세책본(貰冊本)·방각본(坊刻本)·활판본(活版本)의 형태로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서울대학교 도서관, 순천시립 뿌리 깊은 나무박물관 등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각 이본은 ‘삼국지’ ‘삼국연의’ ‘삼국지전’ ‘삼국대전’ ‘정치기(鼎峙記)’ 등으로 제명이 다양하며 전체를 번역한 완역본(完譯本)에서부터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자룡(趙子龍)과 같이 특정 인물만을 따로 떼어낸 발췌번역본, 원본에 없는 새로운 번안본(飜案本)인 ‘적벽가(赤壁歌)’와 ‘화용도(華容道)’도 있다.
후한(後漢) 말 동탁(董卓)과 십상시(十常侍)들의 농간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유비(劉備), 손권(孫權), 조조(曹操)는 각각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을 세우고 각축(角逐)을 벌였다. 유비는 관우(關羽), 장비(張飛), 제갈량(諸葛亮), 조자룡(趙子龍) 등의 영웅들과 함께 천하를 통일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울러 이들과 통일의 대업을 놓고 경쟁했던 손권(孫權)과 조조(曹操) 또한 꿈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후대에 등장한 전략가 사마의(司馬懿) 집안에서 대업을 이루었다. ‘삼국연의(三國演義)’는 이러한 역사적 내용을 다루면서 한편으로는 권력의 허망함, 인간사(人間事)의 허무함을 보여 주고 있다.
중국인들은 왜 삼국연의(三國演義)를 좋아할까? 어떤 사람은 권력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는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연의'가 '정치계몽서(政治啓蒙書)'이다. 왜냐하면 그 책은 '유사 이래 중국의 정치투쟁과 권력운용(權力運用)'에 대하여 '가장 상세하고 생동감 있는 해석'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평가(批評家)들을 만일 원저에서 슬쩍 덮어 감추려고 했지만 독자들이 즐겁게 찾아내는 것들을 신판 TV드라마 '삼국'에서 확대재생산하여 중국인들을 다시 자극하고 있어 우려할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일리(一理)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확실히 중국인은 권력을 좋아하고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좋아한다. 권력과 권모술수를 좋아하는 것은 난세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노우선생이 말한 것처럼 난세(亂世)가 되어야 문명과 제도가 붕괴되어야 권력은 정치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때만이 권력투쟁(權力鬪爭)은 첨예하고 복잡하여 끝 간 데까지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삼국은 바로 이런 시대이다. 기껏 해봐야 100년을 넘지 않는 역사의 일화(逸話)이지만 문학예술작품에서 계속하여 등장하여 찻집 술집에서 오랫동안 얘기되는 꺼리가 되었고 식후에 차를 마시면서 얘기하면 피곤한 줄 모르는 화제(話題)가 되었다. 그 근본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 우리가 '아편쟁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알아야 할 것은 권모(權謀)와 술수(術數)는 근본이 마약(痲藥)이라는 것이다. 일단 권력이라는 이 아편대에 집게 되면 갈수록 중독(中毒)이 되고 만다. 결국은 사람이 귀신으로 바뀐다. 사람(人)이 사람이 아니고 귀신(鬼神)이 귀신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조조(曹操), 유비(劉備), 손권(孫權)이 모두 그러하다. 그저 제갈량(諸葛亮)만이 달랐다. 그러나 정파인 제갈량도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는 '권모술수'를 쓰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금낭묘계(錦囊妙計)'니 '삼기주유(三氣周瑜)'니 마치 무슨 마약밀매업자같이 그려졌다. 단지 도덕적인 경향(傾向)의 이유로 이런 권모술수가 '지혜'로 묘사되었고 정정당당하게 숭상(崇尙)을 받았을 뿐이다. 이것은 드라마 ‘잠복’과 비슷하다. 비록 주제가(主題歌)는 '진정한 사랑은 영원하다' '진정한 충성은 영원하다'이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직장요령(職場要領)'을 얻고 '사무실정치'를 알고 여칙성(余則成; 잠복의 주인공)의 전술을 활용하게 된다. 중국인은 재주가 있는 것 같다. 항상 권모와 지혜 간에 서로 전환(轉換)할 수 있는 능력을 마약(痲藥)의 독성(毒性)이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는 이를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방법이 없다. 중국인(中國人)들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건 처치곤란이다. 먼저 권모술수라는 것은 문예작품(文藝作品)에서 쓰지 않으려면 실제생활에서 없어야 한다. 문학예술은 실제생활을 반영(反映)한다. 못 본 척 하는 것은 거짓이다. 하물며 생활의 곳곳에 이런 것이 있는데 문학예술만 깨끗할 수 있겠는가? 그게 가능하겠는가?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실하고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사람을 망치는 것이다. 그들의 면역능력(免疫能力)과 방어기교(防禦技巧)를 익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일부러 나쁜 짓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삼국연의(三國演義)나 잠복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생활 중에서 충분히 학습할 수 있다. 조금 듣기 싫은 말로 하자면 생활이 진정한 살아있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대강당(大講堂)이다. 생활을 못하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금지하지 못하고 금지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쓰는 사람은 가지각색이기 때문이다. 그 수완(手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그 수완을 구경하려는 사람도 있다. 세계에 그렇게 많은 경찰드라마가 있지만 보려는 사람은 수두룩하다. 그들이 모두 도적(盜賊)이 되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삼국연의나 삼국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모두 아편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물며 우리에게 그런 도적이 될 마음이 없다고 해서 그런 도적의 마음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도적이 되기는 어렵다. 권세(權勢)가 없는 사람은 권모술수를 부릴 수도 없다.
당연히 당신이 이런 극을 보기를 즐긴다면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격조(格調)가 높지 못하다고 할 수는 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이것은 중국인의 국민성(國民性) 때문이다. 그 말에는 동의한다. 단지 일깨워주고 싶은 것이 있다. 첫째, 궁중정변(宮中政變)과 다툼을 그린 극을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중국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당신은 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보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어쨌든 권모술수극(權謀術數劇)을 본다고 하여 위법한 것은 아니다. 권모술수극(權謀術數劇)을 만드는 것은 언론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좀 더 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국민의 권리(權利)이다. 역사에 대한 액세스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실상 권모술수(權謀術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그것은 권력이 제한받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조(曹操), 유비(劉備), 손권(孫權)의 문제점이다. 특히 그들의 만년의 문제점이다. 비교하여 말하자면 그들의 권모(權謀)와 술수(術數)는 오히려 '소아과'적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방어해야 하는 것은 먼저 권력의 남용(濫用)이다. 다음으로 권모술수의 악용(惡用)이다. 그 다음이 바로 일반 백성이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즐기는 것이다. 하물며 중국역사(中國歷史)만 얘기하면 특히 중국정치사의 경우에는 이것이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이다. 무대와 은막(銀幕)을 권모술수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깨끗하게 하고 권모술수(權謀術數)가 전혀 없게 할 필요는 없다.
결국 권모와 술수와 권력투쟁은 은막(銀幕)으로 옮겨올 수 있다. 무대로 옮겨올 수 있다. 단지 조심하면 된다. 먼저 편극(編劇)도 좋고 감독(監督)도 좋다. 모두 '단정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어떻게 해야 '단정'한가.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堅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제한받지 않는 권력'이 사람을 해치고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 국가와 민족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권모와 술수가 왜 나쁜지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여기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경각심(警覺心)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상승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즐길 수도 감상(鑑賞)할 수도 없다. 이것이 최저선이다. 최저선(最低線)을 무너뜨리면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독자와 관중에 대하여는 심리조정(心理調整)을 권하고 싶다. 무엇이 조정인가? 위는 '비판에 참가'하는 것이고 아래는 '교재(敎材)로 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가장 바람직한 것은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지능게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극을 보는 것을 교과서(敎科書)를 보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진짜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극은 극이다. 재미는 있다. 주의(注意)할 것은 이것은 그냥 구경거리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편(鴉片)은 담배가 된다. 담배도 문제는 있다. 그러나 금연(禁煙)은 공공장소나 미성년자(未成年者)에게만 가능하다. 왜 그런가. 우리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체에 있어서 왕왕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다.
'삼국연의(三國演義)'는 조선에서 상층 양반사대부에서부터 부녀자들 평민들에게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인기(人氣)를 얻었다. 그 이유는 조선의 통치 이념인 충효의(忠孝義)가 이 소설에 잘 형상화(形象化)되어 있고 영웅들의 성공과 좌절, 다양한 인물 군상(人物群像)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