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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생부 장양왕(莊襄王)은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의 왕이자 장양태상황제이다

图片信息 历史故事秦庄襄王


글: 역사대학사
 장양왕(莊襄王, BC 281~BC 246)은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의 왕이다.

 정식 시호는 장양태상왕(莊襄太上王) 또는 장양태상황제(莊襄太上皇帝)이다.

 초명은 영이인(嬴異人)이었지만, 초나라 출신이었던 적모 화양부인(華陽夫人, 부왕 효문왕의 정비)의 양자가 된 후에 초나라의 후예라는 뜻의 자초(子楚)로 개명하여 영자초(嬴子楚)로 불렸다.

 아버지는 효문왕(孝文王, BC 302~BC 250, 재위: BC 250). 어머니는 하희(夏姬, ?~?)이다.

 진왕 영정(嬴政)의 아버지이다.

 시황제가 '장양태상황제(莊襄太上皇帝)'로 시호를 추존하였다.

 영이인은 아버지 안국군(安國君) 영주와 어머니 하희(夏姬)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자초는 왕자 안국군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 하희가 첩인데다가 안국군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형제들이 20명이 넘어서 왕위 계승과 거리가 멀었다. 결국 영이인은 아버지가 진나라의 왕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왕족으로 취급받아 툭하면 전쟁을 벌여서 목숨이 위험한 조나라의 인질이 되어 한단(邯鄲)으로 갔다.

 그가 조나라로 간 시기는 그의 나이와 진시황이 태어난 시점을(BC 259년 음력 1월 15일) 보면, 적어도 진(秦)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조나라 장수 조괄(趙括)을 무찌르고 사로잡은 40만의 조나라 군대를 생매장한 장평대전(長平大戰, BC 260년 음력 9월) 이전부터 조나라에 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조나라에서 영이인의 대우는 처참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사기(史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에는 "거마를 타고 행차할 때도 충분치 못했고 거처하는 숙소는 곤궁하여 마음먹은 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라고 묘사해 상당히 빈약한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중 한단의 상인 여불위(呂不韋)가 그를 보고는 진기한 재화라 부르며 높게 평가했고(기화가거(奇貨可居)) 얼마뒤에는 영자초를 찾아온다. 여불위는 영자초에게 효문왕의 정비지만 자식이 없었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을 포섭하라는 조언을 하고 천금을 포섭자금으로 내어놓는다. 영자초는 "진나라를 나누어 그대와 함께 다스리겠다"라며 여불위의 조언을 따른다. 그후 여불위가 진나라에서 500금으로 화양부인을 포섭하는 사이 영자초는 남은 500금으로 조나라의 명사들을 포섭한다. 그리고 여불위와 영자초의 포섭은 성공해서 아버지 효문왕과 화양부인은 영자초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약속하고 옥을 갈라 징표로 삼았고 그는 아버지 효문왕과 화양부인에게 막대한 예물을 받는다.

 BC 257년 12월 할아버지 소양왕(昭襄王)이 왕흘을 시켜 조나라 한단을 공격하였다. 조나라 효성왕은 장평대전과 다음해 오대부 능(陵)이 한단을 공격했을 때도 영자초를 살려줬지만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는지 영자초와 영자초의 가족들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영자초는 여불위의 도움으로 600금을 감시인에게 뇌물로 주고 조나라를 탈출해 진나라 군대의 군영으로 간다. 당시 가족들이 조나라에 남겨젔고 효성왕은 남은 가족들이라도 죽이려 했지만 영자초의 부인은 조나라 호족의 딸이라 몸을 숨길 수 있었고 모자는 목숨을 보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탈출한 그는 진나라로 돌아가 화양부인을 만나는데 이때 여불위는 초나라의 옷을 입을 것을 조언했고 초나라 옷을 입고온 이인에게 화양부인이 "나는 초(楚)나라 사람이니 네가 이를 자(字)로 삼아라고 하여"라고 해서 이름을 자초(子楚)로 고쳤다고 한다.

 BC 251년 가을 할아버지 소양왕이 사망한다. 그리고 아버지 안국군(安國君) 영주(嬴柱)가 효문왕(孝文王)으로 즉위하고 자초도 양어머니 화양부인과의 약속에 따라 진나라의 태자에 오른다. 자초가 태자가 되자 조나라는 조희와 영정 모자를 돌려보낸다. 효문왕 원년(BC 250년) 음력 10월 신축일 자초의 아버지 효문왕이 1년간의 소양왕의 장례를 마치고 정식으로 즉위한 지 겨우 3일만에 세상을 뜨게 되어 자초는 진나라의 왕이 된다. 왕이 된 자초는 아들 영정을 태자로 삼고 자신의 후원자 여불위를 승상에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로 봉해 하남(河南) 낙양(雒陽) 지역 식읍 10만호를 하사한다.

 즉위한 해에 여불위를 시켜 동주(東周)를 공격해 멸망시키고, 이어 몽오(蒙骜, ?~BC 240(진시황 7))에게 한나라 공격을 지시하여 한나라의 성고와 형양(滎陽)지역을 함락한다. 장양왕 2년에는 몽오를 시켜 조나라를 공격해 태원(太原) 지역을 함락하고, 3년에는 몽오가 위나라의 고도(高都)와 급(汲)을 함락하고, 조나라의 유차(楡次), 신성(新城), 낭맹(狼孟)을 공격하여 37개 성을 함락한다. 이후 왕흘이 상당(上黨) 지역을 공격하여 태원군을 설치하지만 위나라 장수 무기(無忌)를 중심으로 5개국가가 연합해 반격하자 황하 남쪽으로 퇴각한다.

 그러나 장양왕 3년(BC 247년) 음력 5월 병오일 장양왕은 사망하고, 아들 영정이 진왕 자리를 잇는다.

◈ 권력만 믿고 멋대로 굴던 진(秦)나라 때 간신배 조고(趙高, ?~BC 207)

 중국 진(秦)나라의 환관.
 시황제를 따라 여행하던 중 시황제가 병사하자, 승상 이사(李斯, ?~BC 208)와 짜고 조서를 거짓 꾸며,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扶蘇)와 장군 몽염(蒙恬)을 자결하게 만들었다. 또 시황제의 우둔한 막내 아들 호해(胡奚)를 2세황제(二世皇帝, BC 229~BC 207. 재위: BC 209~BC 207)로 삼아 마음대로 조종했다.

 성은 영(嬴)이고, 씨(氏)는 조(趙)이다. 조고는 본래 조(趙)나라의 먼 왕실 자제였다. 그러나 가족이 죄를 지어 망명하여 진나라로 왔다. 진시황은 조고가 부지런하고 법률에 정통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중거부령(中车府令) 겸 행부새령사(行符璽令事)으로 발탁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호해에게 사건 판결에 대해 가르치라고 명령했다. 조고는 진시황과 호해에게 온갖 아첨을 떨어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한번은 중죄를 저질러 사형당할 뻔했지만, 진시황을 말로 현혹하여 죄를 벗고 원래 직위로 복직까지 했다.

 BC 210년, 진시황이 50살이 되던 해였다. 진시황이 외지로 5번째 순시를 나갔는데 평원진을 지나던 도중에 병으로 드러눕게 되었다. 병세가 날로 위중해졌으므로 태자를 세우는 일이 진시황에게는 급선무였다. 진시황은 아들 부소(扶蘇)에게 태자 자리를 상속한다는 조서를 써 조고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고는 부소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부소가 태자가 되면 자신의 지위가 불리해질 것을 예상한 조고는 우매하고 무능한 어린 호해를 태자로 세우기로 마음먹고 유서를 보내지 않았다.

 7월 사구궁(沙丘宫)에서 진시황이 세상을 떠난 후, 승상 이사는 진시황제가 아직 태자를 확립하지 않은 것을 걱정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혼란이 가중되고 진시황의 수많은 아들들이 서로 황제가 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사는 일단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었다. 조고는 갖고 있던 조서를 호해에게 보여주며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했다. 호해는 옥좌에 오르고 싶었지만 인의충효에 가로막혀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고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실행을 망설인 이유는 승상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고는 이미 이사까지 포섭해 둔 상태였다. 이사는 처음에는 조고와의 협력을 거부했으나 결국 거짓으로 조서를 꾸며 호해를 태자로 올리고 큰아들 부소와 부소의 후견인이었던 명장 몽염을 자살하게 했다. 조고는 서둘러 진시황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고, 호해는 황제로 즉위하여 진이세(秦二世)가 되었다. 조고는 진이세의 심복이자 책략가가 되었다.

 진이세는 왕위에 오른 후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 이사와 조고에게 모든 정치를 맡기고는 사치와 향락에 물들어 갔다. 모든 결정 권한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자 조고의 야심도 점점 커져만 갔고, 결국에는 승상의 지위까지 넘보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에는 도처에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는데, 진시황 때부터 이어져 온 폭정이 호해에 이르러 더 심해졌다. 조세와 부역의 고통도 극심해졌다. 게다가 이미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을 시발점으로 하여 많은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상황의 심각함을 인식한 승상 이사는 누차 호해를 뵙기를 간청하였지만 호해는 향락에 빠져 만나주지 않았다. 조고는 이사에게 황제가 짬이 있을 때 만나 진언하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얼마 후 호해가 향락에 빠져 있을 때 황제에게 진언할 적기라고 이사에게 거짓으로 전했다. 이사는 조고의 말을 믿고 황제를 찾아갔고, 놀이를 방해받기 싫어하던 황제는 매우 분노했다.

 조고는 황제에게 이사가 역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 모함했고, 이사를 고문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결국 이사는 반역죄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호해의 신임을 줄곧 받아왔던 터라 조고는 자연스럽게 승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조고에 의해 결정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조고는 점점 역심을 품게 되었다. 이 즈음에, 함양(咸陽, 산시(陝西)성 셴양시) 밖에서는 진승과 오광의 난이 실패로 돌아간 후,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반군을 이끌고 맹렬한 기세로 공격해오고 있었다. 진이세는 전력을 다해 항우에 대항하였으나 대패하고 정예 군사들을 모두 잃었다. 유방은 함양을 공격하기 위해 수만 대군을 이끌고 우회하여 무관(산시(陝西)성 상뤄(商洛) 단펑현 동남)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암암리에 조고와 내통하였다. 조고는 병으로 조회에 가지 못한다고 핑계를 대고 은밀하게 역모를 꾸몄다.

 장한의 배반으로 진 왕조는 심각한 공격을 받고 위급한 정세에 놓였다. 호해는 시름이 날로 더하여갔다. 그리고 조고에게 "승상이 도적들의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늘 말했는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캐물었다. 조고는 호해가 자신에게 불만을 갖고 의심하기 시작한 것을 알고 비밀리에 동생 조성(趙成), 사위 염락(阎乐)과 함께 대책을 상의했다. 그리고 임금을 시해할 계획을 세웠다.

 조성은 궁에 도적이 들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고, 염락은 출병하여 적을 쫓으러 나갔다. 이로써 궁 안은 텅 비게 되었다. 조성과 염락이 황제가 있는 곳까지 진입했는데, 호해는 처음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으나 곧 상황을 파악했다. 급히 호위무사들을 불렀으나 시종들은 이미 도망간 후였다. 호해는 승상 조고를 만나게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염락은 거절했다. 빠져나갈 도리가 없음을 안 호해는 장검을 뽑아 자살했다.

 염락이 이 사실을 조고에게 보고하였고, 조고는 급히 현장에 가서 호해의 몸에 있던 옥새를 가져와 제위에 오를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관리들이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황제의 꿈은 무산되었다. 조고는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 三世皇帝, ?~BC 206. 재위: BC 206)을 왕으로 내세우고는 황제라는 칭호를 폐하고 진왕(秦王)이라 부르게 했다.

 자영은 조고의 갖가지 악행들을 직접 보고 들어왔기에 자신이 명목상의 왕임을 알았다. 자영은 호해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환관 한담(韓談)과 모든 일을 협의하고 결정하였으며 조고의 계획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고는 자영까지도 살해하려고 했으나 곧 음모가 발각되어 자영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간신배였지만 서법에 능하였던 그는 『애력편(爰曆篇)』이란 글을 작품으로 남겼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史記(사기)> 秦二世紀(진이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秦始皇(진시황) 三七年(삼십칠년) 七月(칠월) 始皇帝(시황제)가 巡行(순행) 도중 沙丘(사구)의 平臺(평대)에서 병으로 죽으면서 태자 扶蘇(부소)를 불러 장례식을 치르라고 조서를 남겼으나 환관 趙高(조고)는 李斯(이사)와 함께 진시황의 죽음을 숨기고 수도 咸陽(함양)으로 돌아와 後宮(후궁) 소생 胡亥(호해)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부소에게는 죽음을 내린다.

 조고는 이사를 제거하고 자신이 승상이 된 다음 호해를 마음대로 부린다.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반란을 꾀했으나 군신들이 자기를 따르게 될지가 염려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떠보기 위해 사슴을 가져다가 二世皇帝(이세황제) 호해에게 바치며,

  "이것이 말이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이세는 웃으며,

  "승상이 실수를 하는구려,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하니."

  "아닙니다. 말이올시다."

  이세는 좌우에 있는 사신들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은 잠자코 있고, 어떤 사람은 조고의 편을 들어 말이라고 하고, 혹은 정직하게 사슴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은 모조리 법률로 얽어 감옥에 넣고 말았다. 그 뒤로 모든 신하들은 조고가 무서워 그가 하는 일에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시황 살아생전에 진은 오랑캐에 의해 망한다는 점괘 때문에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史記(사기)>에 나오는데, 오랑캐(胡)는 다름 아닌 호해였다.

 

历史故事:秦庄襄王

在一霸独强、各国弱小的格局中,各弱小国家若能精诚团结,推举出有威望而能干的联军统帅,完全可以与强敌周旋,维护国际稳定与各国安全。但这恰恰是最困难的,各国领导人必须都有共同一致的政治眼光,坚定不移地支持团结大业,不怕强敌威胁,不被敌人离间,不给敌人机会,才能持久地对抗强敌。吕不韦是秦国丞相,如何消除国门前的危机,秦庄襄王自然要跟他商量。一直以来,离间计是秦国战胜敌人的拿手好戏,于是秦国再一次悄悄派出间谍,携带万斤黄金(其实是黄句,而不是金子)去了魏国。间课找到晋鄙(被力士未意推杀的那个魏国大将)的亲信,用重金贿赂他,要他在魏王面前诋毁信陵君:“信陵君流亡在外十年,一做魏将,诸侯就听他调遣,各国只听说有信陵君,而不知有魏王。他现在正想趁这个机会,南面称王。诸侯害怕他的威名,也想一致拥立他。”从司马迁的记叙来看,开始魏王是不相信的。秦国就一而再、再而三地,坚持不懈地离间,多次派人去祝贺信陵君,说一些模棱两可、似是而非的话:“公子立为魏王了吗?”“什么时候举行大典?”
也把这些话尽量传递到大梁去。魏王天听到这些流言,终于动摇了,就派人去接替信陵君。信陵君很伤心,也害怕,干脆办了病退,天天在家寻欢作乐,喝酒。

信陵君在国际国内享有崇高的威望与号召力,因此能够两次领导诸侯联军战胜秦国。有此两仗,信陵君威名盛于天下。很多人把诸侯的存亡寄托在他身上,纷纷进呈兵法,就是俗称的《魏公子兵法》。到西汉末年、王莽时代,还有《魏公子兵法》二十一篇、图七卷,但没有流传下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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