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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불위(呂不韋)는 전국시대 말 위나라의 대상인으로 어떻게 진나라의 재상자리에 올랐는가?

圖片信息  呂不韋只是被流放而已 呂不韋為什麼會選擇自殺

글: 역사대학사

 전국 시대 말 위나라의 대상인으로 진(秦)나라의 재상에 올랐다.

 장양왕을 진나라의 왕으로 옹립했고, 왕후 조희(趙姬, BC 280~BC 228)와 내연 관계로 인해 진시황제의 생부라는 설이 있다.

 당대의 학설과 사건, 설화 등을 모은 책 《여씨춘추》를 편찬했다.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정치가로서 원래 양책(陽翟: 河南)의 푸양(阜陽) 사람이다. 대상인(大商人)으로 조(趙)나라의 한단(余鄲)으로 갔을 때, 진나라의 서공자(庶公子)로 볼모로 잡혀 있는 자초(子楚)를 도왔다. 그의 도움으로 귀국한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그 공로에 의해 그는 승상(丞相)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장양왕이 죽은 뒤 《사기(史記)》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정(政: 始皇帝)이 왕위에 올랐다.

 최고의 상국(相國)이 되어 중부(仲父)라는 칭호로 불리며 중용되었으나, 태후(太后: 진시황의 모후)의 밀통사건에 연루되어 상국에서 파면, 자신의 봉지인 허난으로 돌아갔다. 그후 반란을 두려워한 황제가 그를 촉(蜀: 지금의 쓰촨 성(四川省)) 지방으로 쫓아버리려 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여불위(呂不韋: ?~BC 235)는 전국 시대 위나라 복양(濮陽)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나라 수도 양책(陽翟)에서 소금과 비단을 품목으로 장사를 시작한 그는 뛰어난 장사 수완으로 곧 대상인이 되었으며 여러 나라를 왕래하며 상거래했다. 그는 견문이 넓고 식견이 높았다고 한다.

 여불위는 조(趙)나라 수도 한단(邯鄲)에서 장사를 하던 시절 그곳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진나라 공자 영이인(嬴異人)을 만나게 되었다. 전국 시대 국가들은 인질을 교환하는 것으로 평화를 유지했는데, 강한 나라에서는 자국에서 중요하지 않은 왕자를, 약한 나라에서는 태자 같은 중요한 인물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에 진나라에서는 영이인을 조나라의 인질로 보낸 것이었다. 영이인은 소왕(昭王, 또는 昭襄王, BC 325~251, 재위: BC 306~251, 진나라 3대 왕)의 둘째 아들인 안국군(安國君, 효문왕(孝文王, BC 302~BC 250, 재위: BC 250), 진시황의 할아버지)의 아들이었다. 태자도 아닌 안국군의 20명 가까이 되는 아들 중 한 사람, 게다가 안국군의 사랑을 잃은 하희 소생의 아들인 영이인은 당시만 해도 왕위 계승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영이인은 조나라에서도 냉대를 받았으며 생활도 매우 곤궁했다. 그러던 중 진나라에서 태자가 죽고 안국군이 태자가 되었다. 영이인의 위치는 태자의 아들로 격상했으나 그에게는 여전히 배다른 형제가 20여 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여불위는 밭을 팔았을 때는 10배의 이익이 남고, 보석을 거래했을 때는 100배의 이익이 남지만 나라의 주군을 세우면 그 이익을 따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영이인에게 투자하여 그를 왕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여불위는 먼저 금 500근을 영이인에게 주어 그가 조나라의 인사들과 사귈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은 금 500근으로 조나라의 진귀한 물건을 구입하여 진나라로 향했다. 여불위는 안국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리고 화양부인의 친언니를 통해 그녀와 친분을 맺는 데 성공했다. 여불위는 아들이 없는 화양부인에게 양자를 들여 그를 안국군의 후계자로 삼아 후대의 안정을 꾀하라고 조언했다.

 더불어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영이인이 매우 어질며 본인은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태자와 화양부인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다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불위의 조언에 따라 화양부인은 안국군에게 영이인을 자신의 양자로 들이겠다고 간청했다. 영이인은 화양부인이 초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름을 '자초(子楚, 장양왕(莊襄王, BC 281~BC 246. 재위: BC 249~BC 246))'로 고친 후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어 한순간에 왕위 계승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안국군은 자초에게 후한 예물을 보내고 여불위에게 그의 보좌를 맡겼다. 여불위의 노력으로 안국군의 후계자가 된 자초는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제후들 사이에서 점점 명성을 쌓아 나갔다.

 자초는 한단에서 조희(趙姬, BC 280~BC 228)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녀는 당시 여불위의 애첩으로 미모와 가무가 매우 뛰어났다. 기원전 259년 조희는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영정(嬴政), 훗날 중국 역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하고 진시황제가 되는 인물이었다. 《사기》에는 조희가 자초의 사람이 되기 전에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고 전한다. 영정이 자초의 아들이 아니고 여불위의 아들일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기원전 251년 소양왕이 죽자 태자 안국군이 효문왕으로 즉위했다. 자초는 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연로했던 효문왕은 즉위 1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로써 기원전 250년, 여불위를 만나기 전까지는 왕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자초가 장양왕으로 즉위했다. 장양왕은 여불위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문신후에 봉했다. 또한 낙양 땅 10만 호를 하사하여 그의 공을 치하했다.

 기원전 247년 장양왕이 세상을 뜨고 아들 영정이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이 어렸기 때문에 영정의 생모인 태후와 승상 여불위가 섭정을 했다. 영정은 여불위를 상국(相國)에 임명했으며, '중부(仲父)'는 존칭을 하사했다. 또한 자신이 친정할 수 있을 때까지 모든 정사를 맡아보게 했다.

 재상보다 높은 상국(相國)이 된 여불위의 권세가 높아지자 여불위를 찾는 인사들의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여불위의 집에 드나드는 문객들의 수만 해도 3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인 《여씨춘추(呂氏春秋)》는 그가 3000명의 식객들을 시켜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도가(道家)사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나, 유가(儒家)· 병가(兵家)· 농가(農家)· 형명가(刑名家) 등의 설(說)도 볼 수 있다. 또한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시사(時事)에 관한 것도 수록되어 있어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론서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완성되자 여불위는 셴양(咸陽)의 시문(市門)에 걸어놓고, 이 책의 내용을 한 자라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여 완벽한 내용을 과시하였다.

 또한 여불위는 참모 이사(李斯, BC 284~BC 208)를 영정에게 천거했으며, 동주를 공격하여 주나라를 멸망시키는 등 훗날 영정이 천하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BC 238년 영정은 자신의 생모인 태후 조희(趙姬)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사건의 진상을 밝히도록 했다. 태후가 노애(嫪毐, ?~ BC 238)라는 환관과 정을 통했는데, 노애는 실제로 환관이 아니라 태후의 정부였고, 이에 더해 노애가 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노애는 여불위가 태후와의 사적인 관계를 끊고자 태후에게 바친 인물이었다. 여불위는 영정이 진왕으로 즉위했을 당시 태후와 정을 통하는 사이였는데, 영정이 성장함에 따라 그 사실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했다. 이에 자신의 식객이었던 큰 음경을 지니고 있던 노애를 환관으로 가장시켜 태후 곁에 머물게 했던 것이다. 영정이 조사에 착수하자 위기감을 느낀 노애가 먼저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노애가 진나라의 정예군을 물리치기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노애는 거열의 극형에 처해지고 삼족이 멸하는 벌을 받았다.

 영정은 이 사건을 빌미로 여불위까지 제거하려 했으나 선왕을 보좌한 그의 공이 크고, 빈객과 유세가들이 그를 변호했기 때문에 처벌을 포기했다. BC 237년 영정은 상국 여불위를 해임하고 그의 식읍지인 낙양으로 쫓아냈다. 그러나 여불위의 명성은 누그러지지 않고 제후국의 빈객들과 사자들의 발걸음이 계속되었다. 여불위가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진 영정은 BC 235년 친서와 함께 여불위를 촉(蜀) 땅으로 귀양 보냈다.

 '그대에게 어떤 공이 있어서 진나라는 문신후(文信侯)에 봉하고 10만 호를 주었는가? 그대와 진은 어떤 관계이기에 중부(仲父)라고 불리고 있는가? 그대는 일가를 이끌고 촉 땅으로 가라.'

 기원전 235년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단절되었음을 느낀 여불위는 독주를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영정은 여불위의 장례 때 눈물을 흘린 자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고 한다.

 여불위는 상인에서 정치가로 변모하면서 세 가지 공을 세웠고 한 가지 과오를 저질렀다.

 첫째, 그는 후계자 구도가 완성되지 않아 자칫 왕위 쟁탈로 국력을 낭비할 뻔했던 진나라에 자초를 내세워 원만하게 왕위를 승계시켰다.

 둘째, 주변국을 정벌함으로써 진나라의 위력을 과시했다.

 셋째, 사농공상을 중시하여 진나라의 문화를 거듭나게 했다.

 하지만 여불위는 자신의 부정을 덮고자 태후에게 부정한 사람을 천거하는 일생일대의 치명적인 과오로 목숨을 잃었다.

 여불위와 부친과의 대화
  "아버님,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백 냥 가량의 자본을 투자했다면 그 소득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부친은 어리둥절하였으나 즉시 대답했다.

  원래가 어리석지 않은 아들의 질문이라 까닭이 있을 거라 생각하여 느낀 대로 대답했다.

  "약 열 배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그럼 주옥(珠玉)을 사서 잘 보관하였다가 팔면 그 이익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 백 배는 될 것 같구나."

  이 말을 듣자 여불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넌지시 물었다.

  "그럼 왕이 될 자를 도와주고 나중에 권력을 차지하면 그 이익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엉뚱한 물음에 여불위의 부친은 뚫어지게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거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익이 아니겠느냐?"

  이와 같은 대답에 여불위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사실 농사는 육체가 피로하고 장사는 마음이 피로한데다가 그 수입마저 고정되어 있습니다. 저는 방금 지난번 전쟁 때 생포된 황손(皇孫) 이인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相)이 차후 천하에 으뜸가는 귀인이 되겠더군요."

- 한 글자엔 천금의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아주 빼어난 글자나 시문(時文)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전국 시대 말엽,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과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은 각 수천 명, 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과 위(魏)나라 신릉군(信陵君)은 각 3000여 명의 식객(食 客)을 거느리며 저마다 유능한 식객이 많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편 이들에게 질세라 식객을 모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일개 상인 출신으로 당시 최강국인 진(秦)나라의 상국(相國: 宰相)이 되어, 어린(13세) 왕 정(政: 훗날의 시황제)으로부터 중부(仲父)라 불리며 위세를 떨친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정의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가 태자가 되기 전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기화가거(奇貨可居)'라며 천 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오늘날의 영화를 거둔 여불위였다. 그는 막대한 사제(私財)를 풀어 3000여 명의 식객을 모아 들였다.

 이 무렵, 각국에서는 많은 책을 펴내고 있었는데 특히 순자(荀子)가 수만어(語)의 저서를 내었다는 소식을 듣자 여불 위는 당장 식객들을 시켜 30여만 어에 이르는 대작(大作)을 만들었다. 이 책은 천지만물(天地萬物), 고금(古今)의 일이 모두 적혀 있는 오늘날의 백과 사전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대작은 나 말고 누가 감히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의기양양해진 여불위는 이 책을 자기가 편찬한 양《여씨춘추(呂氏春秋)》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이《여씨춘추》를 도읍인 함양(咸陽)의 성문 앞에 진열시킨 다음 그 위에 천금을 매달아 놓고 방문(榜文)을 써 붙였다.

 "누구든지 이 책에서 한 자라도 덧붙이거나 빼는 사람에게는 천금을 주리라."

 이는 상혼(商魂)이 왕성한 여불위의 우수 식객 유치책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진기한 물건은 사 둘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훗날 큰 이익으로 돌아올 물건이나 사람한테 투자를 해 두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말엽, 한(韓)나라의 큰 장사꾼 여불위(呂不韋)는 조나라 도읍 한단[邯鄲(감단)]에 갔다가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의 손자인 자초(子楚)를 우연히 알아 친하게 되었다. 자초는 볼모의 신분으로 조나라에 와 있었는데, 그동안 두 나라 관계가 나빠지는 바람에 신분에 어울리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찬밥 신세로 떨어져 있었다.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을 발견했다고 기뻐한 여불위는 장사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늙은 아버지한테 지혜를 구했다.

"밭을 갈아 농사를 지으면 한 해에 어느 정도의 벌이가 될까요?"

"많아야 10배 정도겠지."

"보석에 투자를 하면요?"

"그건 넉넉잡아 100배쯤 될까."

"그럼 한 나라의 임금을 만드는 경우의 투자 효과는 어떨까요?"

"그야 천만 배도 더 되겠지. 하지만 그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여불위는 기뻐하며 아버지에게 자초의 이야기를 했다.

 "소자가 보기에 자초 공자는 지금 불우한 처지에 있을망정 눈빛에 정기(精氣)가 돌고 식견이나 태도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투자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여 아버지한테 동의를 구한 여불위는 조나라에 다시 가서 자초를 만났다.

 "공자님의 부친이신 안국군(安國君)께서는 연로하신 부왕의 뒤를 이어 머잖아 보위에 오르실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정빈이신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소생이 없으므로, 부득이 공자님을 비롯한 여러 서출(庶出) 왕자들 중에서 어느 한 분을 세자로 세워야 합니다. 그럴 경우, 과연 어느 분이 영예를 입게 될까요?"

 "글쎄요. 배다른 형제가 무려 스무 명이나 돼서..."

 "공자님은 어떻습니까?"

 "나야 타국에 와서 붙잡혀 있는 몸이니 누구보다 불리한 조건이겠지요."

 한숨을 섞어 말하는 자초에게 여불위는 바짝 다가앉았다.

 "그렇게 절망적으로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공자님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한테 천금(千金)이 있으니, 공자님의 이름으로 화양부인께 좋은 선물을 올려 환심을 사 두겠습니다. 그런 한편 공자님이 귀국하실 수 있도록 백방으로 손을 쓰겠습니다."

 감격한 자초는 여불위의 손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만일 천만다행으로 내가 보위에 오를 수만 있다면, 맹세코 공과 더불어 평생동안 부귀를 함께 나눌 것이오."

 여불위는 귀국하자마자 막대한 헌상품을 가지고 화양부인을 찾아가 자초가 전하는 물건이라며 전했다. 그리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부인에게 은근히 말했다.

 "자초 공자께서는 마마를 여간 존경하시지 않습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마마께서 그분을 아들로 삼으시면 장래가 편안하시리라 여겨집니다. 여러 공자님들 중에 그분을 덮을 만한 인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 것 같군요. 하지만 자초가 조나라에 붙들려 있으니 어쩌지요?"

 "그야 방법이 왜 없겠습니까."

 화양부인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한 여불위는 조정 대신들을 구워삶아 자초가 귀국할 수 있는 길을 트도록 했다. 그렇지만 양국의 정치적 이해에 걸려 공식적인 귀국이 용이하지 않자, 많은 돈을 가지고 조나라에 다시 들어가서 성문 수비병들을 매수한 다음, 장사꾼으로 변장시킨 자초를 감쪽같이 빼내어 진나라로 데리고 왔다. 

 이렇게 해서 귀국한 자초에게 여불위는 자기 씨앗을 잉태한 천하절색의 애첩 조희(趙姬)까지 헌납하여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막대한 재력과 탁월한 말솜씨로 그를 적극 지원하여 세자로 세우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여불위는 재상이 되었다. 장양왕은 불과 3년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여불위는 상국(相國)의 지위에 올라 영화를 더 누렸다. | [출 전]《史記》<呂不韋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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