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李牧, ? ~ 기원전 229)은중국전국시대조나라(趙)의 재상이자 장군이다. 조나라 말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명장으로 손꼽힌다. 본명은이촬(李繓)이고 자가 목(牧)이지만, 본명보다는 이목(李牧)으로 알려져 있다. 벼슬이 상국(相國)에 이르렀으며무안군(武安君)의 칭호를 받았다. 북쪽의흉노(匈奴)와 서쪽의진나라(秦) 등을 상대로 많은 전공을 거두었다.
이목은 전국말기 조(趙)나라 사람이다. 전국4대명장의 하나이다. 또한 조나라 후기의 유일하게 조나라를 지탱한 장수이다. 이목은 초기에 북부변방에서 흉노를 방어했다. 한번은 전투에서 흉노의 정예기병 십여만을 섬멸하여, 흉노가 수십년간 감히 남하하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그후 여러번 조나라군대를 이끌고 진나라를 격패시킨다. 비수지전에서 방어후 반격전략으로 환의(桓齮)를 격패하고 진나라군대에 대승을 거둔다. 왕전(王翦)이 수십만 진나라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할 때도 이목은 1년여동안 지켜낸다. 나중에 반간계에 걸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
경공(耿恭)
경공은 동한이 부풍 무릉사람이다. 두고(竇固), 경병(耿秉)등이 차사국(車師國)을 물리친 후, 차사국을 동한의 판도에 편입시키고 경공을 남겨서 수비하게 했다. 북흉노 선우는 좌녹려왕(左鹿蠡王)으로 하여금 차사국을 공격하게 한다. 경공은 금포성(金蒲城)에서 두번이나 흉노대군을 물리친다. 서역도호부의 군대가 전멸한 후에는 경공이 소륵성(疏勒城)을 점령하고 수천면을 데리고 사수한다. 몇달간 수비를 하고 나자, 식량이 모조리 바닥나고 겨우 몇십명의 한나라병사들만 남는다. 북흉노에서는 사자(使者)를 보내어 투항을 권한다. 경공은 사자를 성으로 올라오게 유인한 후, 친히 그를 죽여버린다. 그리고는 성위에서 북흉노 사자의 시신을 불에 굽는다. 북흉노 선우는 대노하여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여 성을 포위한다. 그래도 여전히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 나중에 한장제(漢章帝)가 파견한 군대가 구원을 와서 위기를 벗어나는데, 소륵성에서 출발할 때는 겨우 26명만이 남았다. 귀로에서도 계속 북흉노의 추격을 받는다. 옥문관(玉門關)에 도착했을 때는 경공과 부하는 겨우 13명만 남게 된다. 악비의 "소담갈음흉노혈(笑談渴飮匈奴血)의 전고는 바로 경공이다.
장순(張巡)
장순은 당나라 포주 하동 사람이다. 안사의난(安史之亂)때 장순은 일개 현령(縣令)이었다. 안사의 반란군이 가는 곳의 지방관리는 바로 투항했다. 그러나 장순은 수하 수천명을 데리고, 옹구(雍丘), 영릉(寧陵), 수양(睢陽)에서 항거한다. 안경서(安慶緖)가 안록산(安祿山)을 죽인 후, 부장 윤자기(尹子琦)에게 반군의 정예병 10여만을 이끌고 수양을 공격하게 한다. 장순은 성안에 양식도 없고, 성밖에 구원병도 오지 않는 상황하에서 수양을 사수한다. 전후로 400여회나 교전이 있었고, 안사의 반군은 손실이 컸다. 반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바람에 당나라의 동남은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장순은 양식이 모두 떨어지고, 사병들이 부상과 사망으로 모두 없어진 후 포로로 잡혀서 죽임을 당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장순이 수양을 방어하면서 많은 전법을 개발해낸 것이다.
왕견(王堅)
왕견은 남송의 명장이다. 항몽총지휘 여개(余玠)의 지휘하여 그는 조세웅(曹世雄)등과 함께 합주(合州), 광안(廣安)등지에서 몽골군을 격패시킨다. 몽케 칸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합주를 포위공격한다. 왕견은 부장 장각(張珏)과 조어성(釣魚城)을 사수하며 여러번 몽골군대를 물리친다. 몽케는 진국보(晋國寶)를 조어성으로 보내서 투항을 권유하나, 왕견에게 죽임을 당한다. 몽골대군은 조어성을 9개월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게다가 몽케칸마저도 선풍화포에 부상을 입어 죽게 된다. 그리하여 몽골군은 할 수 없이 철수한다. 역사에서 조어성전투라고 불리우는 전투이다. 조어성전투는 세계역사를 바꾸었고, 조어성은 몽골인이 함락시키지 못한 유일한 성이 된다.
우겸(于謙)
우겸은 명나라의 명신이고, 민족영웅이다. 토목보(土木堡) 전투후에 명영종(明英宗)이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히고 명나라군대의 정예병은 거의 전멸힌다. 우겸은 남천하자는 주장을 물리치고, 남북양경과 하남의 비조군(備操軍), 산동과 남경연해의 비왜군(備倭軍), 강북과 북경소속 각부의 운량군(運糧軍) 합계 22만을 동원하여 경사를 보위한다. 오이라트 예센(也先)의 정예부대 5만과 싸운다. 22만을 각각 9개의 성문에 배치하고 매 성문 밖에는 2만의 명군이 진을 펼쳐서 적을 맞이한다.
우겸은 각 성문을 모조리 닫아걸고, 자신이 친히 전투를 독려한다. 그리고 명령을 내린다. 전투에 임한 장수가 부대를 돌보지 않고 먼저 퇴각하면 장수를 참한다; 벼사가 장수가 먼저 퇴각하지 않는데 퇴각하면 후대(後隊)가 전대(前隊)를 참한다. 그리하여 장수와 사병들은 모두 이것이 결사의 전투라는 것을 인식하고 군령을 따른다. 예센은 재물을 배앗는 것도 안되고,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기 어렵고, 게다가 명군이 퇴로를 차단하는 것도 겁이 나서 5일간 대치한 후에 철군한다. 우겸은 장수를 보내어 추격하게 하여 거용관(居庸關)까지 좇게 한다. 우겸이 주재한 경사보위전은 명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북송의 '정강지치'가 재연되는 것을 막아냈다.
중국의 7대 명장(名將)
칭기즈칸이나 누르하치같은 이민족정복자들 빼고, 워낙 뛰어난 인물들이 많아서 각자 생각하는 것이 다르겠지만, 손무나 손빈, 제갈량이나 장량같은 장군보다는 군사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시대 순으로 다음과 같다.
➀ 伍子胥(오자서, ?~BC 485, 춘추전국시대) 오자서의 부친 오사는 초나라 평왕의 태자 스승으로, 평왕과 태자의 사이가 나빠지고, 태자가 폐위되면서, 오사와 장남 오상은 평왕에 살해됐다. 홀로 남은 오자서는 복수를 맹세하고, 태자와 함께 정나라로 탈출한다. 정나라로 간 태자는 진나라의 부추김으로 반역을 하려고 했지만, 역으로 살해된다. 오자서는 태자의 아들과 함께 이번에는 오나라로 도망했다. 오나라로 간 오자서는 오나라의 차남 태자 광(光)을 섬기고, 광의 쿠데타 때에도 협력하여, 광은 즉위를 해서 오왕 합려가 된다.
손무와 함께 합려를 보좌하여 강대국으로 만든 뒤, 기원전 506년에 초나라에 병사를 일으켜, 그 수도를 함락시켰다. 평왕은 이미 죽은 뒤였기 때문에 오자서는 묘를 파헤치고 평왕의 시체를 300번이나 채찍질하여 원한을 풀었다. 후에 억울하게 몰려 자결하게 되지만 사후 1000년 뒤인 당나라 때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다.
➁ 韓信(한신, ?∼BC 196, 한나라초기) 회음(淮陰: 江蘇省) 출생. 진(秦)나라 말 난세에 처음에는 초(楚)나라의 항량(項梁) ·항우(項羽)를 섬겼으나 중용되지 않아 한왕(漢王:高祖 劉邦)의 군에 참가하였다. 승상 소하(蕭何)에게 인정을 받아 해하(垓下)의 싸움에 이르기까지 한군을 지휘하여 제국(諸國) 군세를 격파, 군사면에서 크게 공을 세움으로써 제왕(齊王), 이어 초왕(楚王)이 되었다. 그러나 한제국(漢帝國)의 권력이 확립되자 유씨(劉氏) 외의 다른 제왕(諸王)과 함께 차차 권력에서 밀려나, BC 201년 회음후(淮陰侯)로 격하되었다. 한신은 한고조(유방)를 원망하며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을 남겼다. BC 196년 진희(陳豨)의 난에 가담하였다가 탄로나자 여후(呂后)의 부하에게 참살당하였다. 불우하던 젊은 시절에 시비를 걸어오는 시정(市井) 무뢰배의 가랑이 밑을 태연히 기어나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➂ 高仙芝(고선지, ?~755, 당나라 말기) 고구려가 망하자 아버지 사계(舍鷄)를 따라 당나라 안서(安西)에 가서 음보(蔭補)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등용되고, 20세 때 장군(將軍)에 올랐으며, 안서 절도사(安西節度使) 부몽영찰(夫蒙靈)의 신임을 얻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고, 740년경 톈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 부도호(安西副都護)에 승진하고,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에 올랐다.
747년 토번(吐蕃:티베트)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고 동진(東進)하자,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에 발탁되어 군사 1만을 인솔, 파미르고원을 넘어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은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 그 공으로 홍려경어사중승(鴻'A卿御史中丞)에 오르고 이어 특진 겸 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과 동맹을 맺으려는 타슈켄트[石國]를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에 호송한 공로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으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타슈켄트 국왕을 참살했기 때문에 이듬해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분기하여 연합군을 편성, 탈라스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왔다.
이를 막기 위해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 제3차 원정에 나갔다가 크게 패하고 후퇴, 귀국 후 밀운군공(密雲郡公)에 봉해졌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토군 부원수로 출전, 선발군으로 나가, 패전한 우군을 구원하기 위해 방어 담당지역을 무단이동한 사실에 대하여, 평소 사원(私怨)을 품고 있던 부관이 과장하여 밀고(密告)함으로써,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➃ 岳飛(악비, Yue Fei. 1103~1141, 송나라) 자는 붕거(鵬擧)이며 상주 탕음현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지만 금(金)나라 군사의 침입으로 북송(北宋)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참전하여 전공을 쌓았다.
북송이 망하고 남송 때가 되자 무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후베이[湖北]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그의 군대는 악가군(岳家軍)이라는 정병(精兵)으로, 유광세(劉光世)·한세충(韓世忠)·장준(張俊) 등 군벌의 병력과 협력하여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화이허강[淮河], 친링[秦嶺] 선상(線上)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다. 당시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하지만 당시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때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뒤 39세의 나이에 살해되었다. 이때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뒤 39세의 나이에 살해되었다.
진회가 죽은 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구국(救國)의 영웅으로 악왕묘(岳王廟)에 배향되었다. 1914년 이후에는 관우(關羽)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되었다.
학자로서도 뛰어났으며, 저서 《악충무왕집(岳忠武王集)》이 있다.
➄ 鄭和(정화, 1371~1434, 명나라) 정화 : 명나라 윈난성[雲南省] 쿤양[毘陽] 출생. 남해(南海) 원정의 총지휘관. 본성 마(馬)씨. 법명 복선(福善). 삼보태감(三保太監 또는 三寶太監)이라 불린다. 정화의 본명은 마화(馬和)이다.
그의 국적은 중국이지만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 집안의 출신이며 윈난성(雲南省)의 한 지방 관리였던 마합지(馬哈只)의 아들로 태어났다.
1382년 윈난성이 명나라에 정복되자 명나라 군대에 포로가 되어 끌려왔다. 어린나이에 명나라에 끌려온 후 거세되어 환관이 되었고 연왕(燕王) 주체(朱棣)를 섬겼다. 20년 동안 환관으로 일하면서 연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최고의 고문관이 되었다.
1399∼1402년 정난(靖難)의 변 때에 연왕을 따라 무공을 세웠고, 연왕이 건문제(建文帝)를 물리치고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하였다. 이후 환관의 장관인 태감(太監)에 발탁되었으며, 정(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영락제의 명을 받아 전후 7회에 걸쳐 대선단(大船團)을 지휘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케냐 스와힐리에 이르는 30여 국에 원정하여 수많은 외교사절이 왕래하였고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비단과 도자기를 가지고 열대지방의 보석, 동물, 광물 등을 교환하여 중국으로 가져와 무역상의 실리를 획득하였다.
당시 선단의 대선이었던 보선(寶船)의 규모는 길이가 122m, 선폭이 52m이고 9개의 돛대가 달려있었으며 배수량은 약 2700톤으로 추측된다.
1405년 난징을 출발하는 제1차 원정 때에는 보선만 62척이었고 장병 2만 7800여 명이 분승하였으며 선단은 총 317척이었다.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들을 물리치고 인도까지 항해하였다. 마지막 원정이었던 제7차 원정 때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들렀으며 아프리카 케냐의 스와힐리 해안까지 항해했다. 1차 원정으로 중국인의 남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동남아시아 각지에서의 화교(華僑)들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정화가 지휘한 명나라 세력이 인도양에 진출한 것은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80∼90년이나 앞섰다. 정화는 마지막 항해였던 7차 항해에서 돌아오는 중 숨을 거두었다.
사람에 따라 위의 5명보다 다른 사람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사실 이런 질문에는 정답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위의 5명이 뛰어난 명장이란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➅ 薛仁貴(설인귀. 613년 ~ 683년, 당나라) 중국 당(唐)의 장군으로 고구려 정벌에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도호(都護)로서 한반도 침략 정책을 총지휘하였다.
설인귀(薛仁貴)는 당(唐)의 태종(太宗, 598~649)과 고종(高宗, 628~683) 시기에 활약한 장수(將帥)로 613년에 강주(絳州) 용문(龍門, 지금의 山西省 河津)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예(禮), 자(字)는 인귀(仁貴)이다. 농민 출신으로 기마와 궁술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44년 당(唐) 태종(太宗)이 고구려(高句麗) 침입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자 장사귀(張士貴)의 부하로 지원하여, 645년 요동(遼東) 안시성(安市城) 전투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발탁되었다. 당(唐) 고종(高宗) 때인 658년에는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郞將)으로서 영주(營州) 도독(都督) 정명진(程名振)과 함께 요동(遼東)의 적봉진(赤峰鎭)을 습격해 함락시켰으며, 659년에는 내륙 지대의 석성(石城)까지 공격을 한 뒤 돌아갔다. 661년에는 톈산[天山] 인근의 위구르 연맹(Tokuz-Oguz, 九姓回紇)과 전투를 하였는데, 당시 “장군의 화살 셋이 천산을 평정하니(將軍三箭定天山), 장사들은 길게 노래하며 한의 관문으로 들어선다(壯士長歌入漢關)”라는 노래가 불러질 정도로 뛰어난 군공(軍功)을 세웠다.
665년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은 뒤, 그의 장남 연남생(淵男生, 634~679)이 아우 연남건(淵男建, ?~?)과 연남산(淵男産, 639~701)에게 쫓겨 당(唐)에 원병을 청하자 고구려와의 전투에 참가했다. 667년에는 요동(遼東)의 신성(新城)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내분으로 쉽게 점령하였고, 연남생((淵男生)의 반란군과 합류하여 남소성(南蘇城)·목저성(木底城)·창암성(蒼巖城) 등의 성을 점령하고 회군하였다. 668년에는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이적(李勣, ?~669)의 군대와 합류하여 고구려(高句麗) 평양성(平壤城) 점령에 공을 세웠다. 당(唐)이 평양(平壤)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군정(軍政)을 실시하자, 설인귀(薛仁貴)는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로서 군정 총독(總督)이 되었다.
670년 지금의 간쑤[甘肅]과 신장[新疆] 일대에서 티베트[吐蕃]가 강성해지자 설인귀(薛仁貴)는 나파도행군대총관(邏婆道行軍大總官)으로 원정에 나섰지만, 크게 패하여 관직을 잃었다.
671년에는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계림도행군(鷄林道行軍) 총관(總管)으로 신라(新羅)와의 전쟁에 나섰다. 675년 신라(新羅)의 천성(泉城)을 공격했지만 신라 장군인 문훈(文訓)에게 패배하여 평양성으로 물러났다. 676년 11월에는 수군을 이끌고 금강(錦江) 하구 기벌포(伎伐浦)를 공격했지만 사찬(沙飡) 이득(施得)이 이끄는 신라 수군에게 다시 패배하였다. 신라(新羅)와 고구려(高句麗) 부흥군의 반격으로 세력이 위축되자 당(唐)은 676년 평양성을 버리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遼東)의 고군성(故郡城 : 지금의 瀋陽省 遼陽)으로 옮겼으며, 677년에는 신성(新城 : 지금의 瀋陽省)으로 다시 옮겼다.
설인귀는 681년 과주자사(瓜州刺史), 우령군위장군(右領軍衛將軍) 겸 대주도독(代州都督)으로 임명되었고, 682년 돌궐(突厥)과의 전쟁에 나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인 683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죽은 뒤 국가로부터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유주도독(幽州都督) 등의 직위를 부여받았다.
설인귀(薛仁貴)는 중국인들에게 영웅(英雄)으로 숭배를 받고 있다. 《신당서(新唐書)》의 '설인귀열전(薛仁貴列傳)'에는 당(唐) 태종(太宗)이 고구려 원정에 실패해 귀환한 뒤 설인귀에 대해 '짐은 요동(遼東)을 얻어 기쁜 것이 아니라 용맹한 장수를 얻어 기쁘도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중국의 경극(京劇) <독목관(獨木關)>은 당(唐) 태종(太宗)이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에 패해 위기에 빠졌을 때 설인귀(薛仁貴)가 나타나 구해준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설인귀(薛仁貴)는 여러 구전 설화와 《설인귀정동(薛仁貴征東)》, 《설정산정서(薛丁山征西)》 등의 고대 소설의 주인공으로 자리잡아 왔다. 이는 설인귀(薛仁貴)가 일개 농민 출신으로 대장군까지 된 입지전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隋)와 당(唐)의 민간 사회에 '요동(遼東)에 가서 개죽음을 하지 말라'는 말을 떠돌게 할 정도로 수많은 사상자를 낳은 고구려(高句麗)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 때문에 영웅으로 부각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제의 설인귀(薛仁貴)는 용맹스럽고 임무에 충실하기는 했지만 전쟁 중에 군(軍)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아 병사의 노략질을 방임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인명을 참살하는 잔혹함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설인귀(薛仁貴)에 관한 이야기는 18세기 이후 우리 나라에서도 <설인귀전>으로 번역되어 다른 영웅소설들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또한 특이하게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감악산(紺嶽山)에는 설인귀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설화가 전해지며, 그를 산신으로 숭앙하는 풍습이 전승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도 '감악산사는 민간에 전하기를 신라가 당나라의 설인귀를 산신으로 삼고 있다(紺岳祠諺傳 新羅以唐薛仁貴爲山神)'는 기록이 남아 있다.
➆ 曹操(조조, 155~220,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 삼국시대 위) 출생-사망: 155 ~ 220 자: 맹덕(孟德) 시호: 무황제(武皇帝) 별칭: 위무제(魏武帝) 활동분야: 군사, 정치 출생지: 중국 안후이성 시대: 후한
자는 맹덕(孟德),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보저우(亳州)에 해당하는 패국(沛國) 초현(譙縣) 출신으로서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가 된 조숭(曹嵩)의 아들이다.
황건(黃巾)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두각을 나타내었고, 동탁(董卓)이 죽자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武略)을 휘두르게 되었다.
200년 군벌의 최대 세력이었던 관동군의 맹주 원소를 관도(官渡)의 대전에서 격파하였다. 화북(華北)을 거의 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하였으나 208년 손권(孫權)·유비(劉備)의 연합군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대패하였고, 이후에도 그 세력이 강남(江南)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같은 해 승상(丞相), 213년 위공(魏公), 216년 위왕(魏王)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정치상의 실권은 잡았으나 스스로 제위에 오르지는 않았고, 220년 정월 뤄양(洛陽)에서 사망하였다. 아들 조비(曹丕)가 뒤를 잇고 헌제에게 양위를 받아 위나라 황제가 된 뒤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존되었다.
문학을 사랑하여 이른바 건안문학(建安文學)의 흥륭(興隆)을 가져왔으며, 두 아들 조비· 조식(曹植)과 함께 시부(詩賦)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3부자를 '삼조(三曹)'라 부른다. 후세에 '난세(亂世)의 간웅(奸雄)'이라 하여 간신(奸臣)의 전형처럼 여겨져 왔는데, 근년에 이르러 중국 사학계에서는 그를 재평가하는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 글: 지역사(知歷史)<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