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반응형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고 분봉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제를 확립한 진시황(秦始皇)은 폭군인가, 영웅인가

图片信息 被后世文人写成暴君的秦始皇,用他留给后世的功绩做着

글: 역사대학사

 진시황의 본명은 영정(嬴政)이고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 분봉제를 폐지하고 중국 최초로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문자의 정리, 도량형의 통일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아방궁(阿房宮) 건설, 분서갱유(焚書坑儒) 등의 폭정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BC 210년 병사했다.

 진시황제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통일제국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폭군으로 부각되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중국이 전국 7웅에 의해 분열되어 서로 각축을 벌일 때 기원전 259년에 태어났다.

진시황의 성은 懶(영). 이름은 政(정).
 趙(조)나라의 대상인 여불위의 공작으로 즉위한 장양왕의 아들로서 13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태후의 신임을 받은 여불위와 노애가 권력을 농단하였으나 BC 238년 친정을 시작,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울요와 이사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BC 230~BC 221년에 한· 위· 초· 연· 조· 제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親政(친정)에 들어가 본격적인 영토 확장작업에 착수한 것은 23세 때였다.

 놀랍게도 그의 통일사업은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기원전 8세기부터 분열된 중국이 하나의 통치체제 밑에서 역사를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그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황제라는 존호를 최초로 제정하고 二世(이세)나 三世(삼세)는 물론 萬世(만세)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 始皇帝(시황제)라 칭했다. 또한 전국을 하나의 통치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郡縣(군현)제도를 실시했다. 황제를 정점으로 西周(서주, BC 1122~1771)시대의 봉건체제를 대신하게 됐다. 이후 중국은 2천년 이상 군현제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不老長生(불로장생)에 대한 집착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영원하기를 원하듯, 통일제국이 영구히 존속하도록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집념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가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얼마 못되어, 진제국의 長壽(장수)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왜 진이 이렇듯 단명하고 말았는가?
 우선 통일과업을 완성시킨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뒤를 이었던 泰二世(태이세)황제는 정통성 시비에 말려들기도 했다.

 더욱이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은 탄생했지만, 아직도 봉건제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세월을 거쳐 중국은 봉건적인 정치질서에서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전환해 왔다. 또한 통일 후 진은 전국시내에서 서로 자웅을 겨루던 나머지 6국의 지배층 1만호를 강제로 수도 咸陽(함양)으로 이주시켜,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제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결국 진제국 말기 지방 토호와 6국의 귀족세력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진왕조를 전복시켰다.

 진시황제부터 시작된 무리한 토목공사도 진의 단명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인공위성에서 욱안으로 관찰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는 1만 2천 7백리의 만리장성, 사치의 상징으로 거명되는 길이 690m, 폭 114m의 아방궁, 무수한 호화유적을 남긴 진시황제 무덤(높이 약 70여m, 동서 약 600m, 남북 200여m), 그 외에도 무수한 건축물이 조성됐다. 당연히 이를 위해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어, 통일된 후에는 세부담이 무려 20배로 늘었다고 백성들이 불평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국토나 도량형, 문자 따위의 통일 뿐 아니라 사상의 통일까지 이루려고 했던 진은 결국 「통일작업」의 무리한 추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단명을 초래했다.

 焚書坑儒(분서갱유)는 말로 사상통제가 낳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모두 460여명의 선비를 생체로 매장하여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식인들을 단숨에 제거했다. 또한 진나라 외에 다른 나라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는 물론, 농업등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책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책을 불사르는 문명파괴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는 지식분자, 특히 유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는 중국은 물론 동양문화 전체에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업되는 최초의 선례가 됐던 셈이다.

 이로 말미암아 동양인은 전통적으로 획일적인 사고에 길들여졌으며,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중국인은 물론 동양인 전체가 다원화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다.

◈ 서안의 진나라 병마용갱(兵馬俑坑)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불멸의 생을 꿈꿨던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고 있다.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제서야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중이다.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견되었으며 700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과 100개가 넘는 전차, 40여필의 말, 10만여개의 병기가 발굴되었다. 병기들 대부분이 실제무기이며 현재는 창고에 보관 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도용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 스타일을 갖고 있어 그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병마용갱은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호갱은 당시 농민이 처음 발견한 것이고, 후에 2, 3호갱이 발견되었다.

 1호갱은 세 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약 230m, 남북으로 약 62m로 총 면적이 12㎢ 정도이다. 1호갱은 동서 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있고, 2호갱은 면적이 약 6000㎡이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2호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다. 3호갱은 면적이 520㎡으로 凹모양이며, 병마용들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역시 현재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중이다. 학자들은 발견된 3개의 갱 외에도 진시황릉 근처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더 많은 병마용갱이 묻혀 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

o 개관시간: 08:30~17:30
o 입장료: 90위안(12월~2월까지는 65위안)
o 교통: 기차역 입구에서 306번 버스나 7번 관광버스를 타면 병마용갱까지 바로 갈 수 있으며, 요금은 5위안이다.

◈ 진시황릉(秦始皇陵)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BC 259~210)이 여기에 묻혀 있다. 능묘는 38년간에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의 높이 76m, 둘레 2,000m이다. 측량조사에 의하면 능원은 내외 두 성곽으로 둘러졌고 내성의 둘레 2,525m, 외성의 둘레 6,264m이다. 무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야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내부는 개발이 되지 않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고 해도 내부는 볼 수가 없다. 진시황이 무덤을 설계할 때 훗날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은 등을 이용한 여러 가지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그 비밀을 풀 수 없어 과학이 조금더 발전하여 그 비밀을 풀 수 있을때 발굴 한다고 한다.

 따라서 진시황릉까지 간다고 해도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 사진 촬영을 하거나 릉 위에 오르는 정도의 관광을 할 수 있다. 요새는 릉 주변을 아름다운 공원으로 만들어 미니 전동카나 마차로 릉 주위를 돌거나 공원 주변에 전시해 놓은 옛 유물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1987년 유네스코는 진시황릉을 세계유산 명록에 넣었다.

o 교통 : 기차역에서 녹색 306번 관광전용선 버스를 이용

◈ 진시황(秦始皇)과 불로초(不老草)
 중국의 도교(道教)는 불로불사(不老不死)를 한몸에 구현한 '선인(仙人)'을 목표로 했던 종교다. 물론 그 시조라 불리는 노자와 장자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현실 도피적이고 염세적인 가르침을 펼쳤던 사상가만은 아니다. 그들의 사상은 중국 고유의 신선사상과 결부되어 민간에 퍼지면서 도교라는 전대미문의 종교를 탄생시켰다. 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로불사의 신선이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복약(服藥) 신선이 되는 약을 먹을 것
 피곡(皮穀) 곡물을 먹지 않을 것
 도인(導引) 기공 체조
 행기(行氣) 호흡술
 방중(房中) 남녀교접술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시도된 것이 복약으로 한 마디로 선약(仙藥)을 만들어 먹는 것이다. 다섯 가지 방법 중에서 가장 간단하기도 하다. 늙지 않는 선약이 불로초만은 아니라고 알려졌지만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식물이라면 더욱 환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선약 찾기는 진시황제만 했던 것은 아니다.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위왕(威王, 재위: BC 356~BC 320)과 선왕(宣王, 재위: BC 319~301), 연(燕)나라의 소왕(昭王, 재위: BC 311~BC 279)이 신하를 시켜 발해(渤海)의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신선을 만나 불사약을 구해 오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신산(三神山)이라는 곳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발해 한가운데 있는데 속세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금방 다다랐다 생각하면 배가 바람에 불려 가버린다. 언젠가 가본 사람이 있었는데 신선들과 불사약이 모두 그곳에 있고 모든 사물과 짐승들이 다 희고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도착하기 전에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구름과 같은데 막상 도착해보면 삼신산은 물 아래에 있다. 배를 대려 하면 바람이 끌어가버려 끝내 아무도 도달할 수 없었다 한다."

 제나라는 산둥반도에 있던 고대국가로 '삼신산'을 신앙하여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신선 사상은 제나라의 사상가 추연(鄒衍 또는 騶衍, BC 305~240)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결부되어 보다 업그레이드 된다. 그는 맹자보다 약간 늦은 시대 사람으로 세상의 모든 사상(事象)은 토(土)· 목(木)· 금(金)· 화(火)· 수(水)의 오행상승(五行相勝) 원리에 의하여 일어나므로 역사의 추이(推移)나 미래에 대한 예견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사상을 아우르면 삼신산 즉 불로초는 당연히 존재해야 했다.

 불로초 찾기에 가장 열을 올린 사람이 바로 진시황제(秦始皇帝)다.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 본기」에 선약(불로초) 찾기와 방자 서복(徐福, 또는 서불(徐巿)에 관한 기록이 남다르게 보이는 이유다. 『사기』에는 진시황이 서복을 통해 불사약을 구하려는 내용이 매우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시황 28년(기원전 219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齊) 땅 사람인 서불(徐市) 등은, 바닷속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라 하며 그곳에 신선들이 살고 있으니 재계(齋戒)한 후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신선을 찾으러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서불은 동남동녀 수천 명을 데리고 신선을 찾으러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서복(徐福, 또는 서불(徐巿))은 BC 255년 제 나라 산둥반도 랑야(琅琊) 군에서 태어나 천문, 지리, 해양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방사로 알려진다. 진시황의 불로초 찾기는 계속되어 시황 32년(BC 215년)에 진시황이 갈석산(碣石山)에 가서 연(燕)나라 출신 노생(盧生)을 파견하여 선문(羨門)과 고서(高誓, 전설상의 신선이름)라는 신선을 찾아보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시황 35년(BC 212)에는 노생이 진시황에게 자신들이 영지(靈芝), 선약(仙藥), 신선을 찾으러 나섰으나 항상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무언가가 이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며, 진시황이 항상 신분을 숨기고 비밀리에 다니면 악귀가 피하고 비로소 진인(眞人)이 나타나 불로초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진시황은 진인이 한없이 부럽다고 했는데 노생과 후생은 불로초를 찾지 못하자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진시황이 천성이 포악하고 고집스럽게 자기주장만 내세운다며 도망갔다. 이 사건은 진시황에게 방사에 대한 큰 배신감을 심어주었는데 후대에 두고두고 비난받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도 알려진다. 진시황이 불로초에 집착하자 그동안 진시황에게 불로초를 찾겠다고 공언한 서복은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으로 생각해 시황 37년(BC 210)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봉래산의 선약은 구할 수 있으나 커다란 교어(鮫魚, 상어)가 방해하여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활 솜씨가 뛰어난 사람들을 저희와 함께 보내 주시어 상어가 나타나면 쇠뇌(連弩)를 이용하여 집중적으로 화살을 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진시황은 자신이 직접 쇠뇌를 들고 대어가 나타나면 쏘려고 기다렸다. 랑야에서 북쪽으로 영성산(榮成山)에 이르도록 계속 올라가면서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대어 한 마리를 발견하고 사살한다. 마침내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가지만 병이 생겨 죽는다.

 궁극적으로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불로초에 대한 믿음은 중국 황제에게 계속 매력적인 주제로 전해졌다. 한(漢)의 무제(武帝, BC 148~87) 역시 여러 사람을 삼신산에 보내어 신술(神術)을 익히고 불로초를 구해오게 했다. 위· 촉· 오 삼국시대에 오의 손권도 230년경 장생불사를 꿈꾸던 진시황이 선약을 구하기 위해 서복을 파견했다는 전설의 땅 이주(夷洲)와 단주(亶洲)로 군대를 파견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국인들의 관심을 자아내는 것은 삼신산이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을 의미한다는 설이다. 바로 서복이 한국을 찾게 된 이유가 바로 이들 산에 있는 불로초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반응형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