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제국시대를 뒷받침할 사상적 작업을 이룩한 핵심인물 동중서(董仲舒)는 유교의 국교화 추진할 기틀을 마련
글: 역사대학사 진에 의해 시작된 중국의 통일과업은 漢(한)에 의해 완성됐다. 이때 본격적인 통일제국시대를 뒷받침할 사상적 작업을 이룩한 핵심인물은 다름아닌 동중서(董仲舒)였다. 그는 유교의 사상적 폭을 더욱 넓히는 동시에, 유교의 국교화를 추진했다. 결국「중국문화=유교문화」라는 등식의 기틀을 그가 마련했던 셈이다.
동중서는 기원전 179년에 태어나 기원전 104년에 죽었다. 河北(하북)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해 "3년 동안 마당을 쳐다보지 않고" 배우기에만 전념했다. 학문이 무르익으면서 그는 저술과 교육에도 힘썼다. 특히 <춘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春秋繁露(춘추번로)>, <天人三策(천인삼책)>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교육방법은 매우 독특했다.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직접 배우기보다 상호간에 학문을 전수하는" 방법을 개발, 새로운 제자가 입문하면 스승으로부터 직접 학문을 배우기보다 기존의 학생으로부터 스승의 학문을 전수받는 형태를 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교육방법으로 말미암아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 몰려들었으며, 그는 마침내 "한대의 공자"라고 칭송되지에 이르렀다.
한제국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대외팽창을 주도했던 武宰(무제: BC 156~BC 87 사이에 재위)가 전국의 선비를 대상으로 자문을 구했을 때 동중서도 이에 응하여 나름대로의 대안을 내놓았다. 동중서<對策(대책)>이란 글에서, 바로 그러한 지적 혼란상을 문제의 핵심으로 지적했다. 그는 학설이 분분하고 정견이 다양한 세태는 통일시대의 대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 "백가(百家:諸子百家)를 축출하고, 오직 유가(儒家)만을 섬길 것"을 무제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동중서가 주창했던 유가의 학술 또는 공자의 가르침이란 결코 공자시대로의 회귀를 의미하지 않았다.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서 孔孟(공맹)사상을 다시 해석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법가(法家) 도가(道家)등 다른 학파의 이론을 상당부분 흡수했다. 다시 말해 그에 의해 유학은 다시 태어났던 셈이다.
그의 주장은 결국 무제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유교는 정식으로 국교로 선언됐고 모든 관리를 유교 교리에 대한 지식의 정도에 따라 임용하고 승진시켰다. 이러한 적극적인 국가 후원으로 유학을 배우기 위해 국립교육기관에 등록한 학생수는 한말까지 무려 3만 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한 대는 물론, 이후 2천년 이상 유가는 중국에서 정통사상의 위치를 누렸다. 더욱이 유교는 중국문화의 전파와 함께 한국 일본 베트남 등에 의해서 지배사상으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리하여 동양문화는 곧 유교문화를 의미할 정도로 오랜 기간 위세를 떨쳤다.
동중서가 주장한 유교사상이란 무엇이었는가 ? 첫째,그의 유교학설은 통일을 강조하고 군주권 확립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춘추(春秋)>를 그러한 이념을 구체화한 저술로 받아들였고, 천하통일이란 "하늘과 땅의 이치이며, 고금의 원리"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통일의 대원리를 실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군주를 "나라의 근본"으로 받드는 태도라는 논리를 펼쳤다. 결국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줄기와 가지, 또는 본,말의 관계라는 것이다.
둘째, 유교의 종교성을 부각시켰다. 그의 天人感應論(천인감응론)은 하늘을 자연과 인간사회 양자를 주관하는 존재로 파악하여, 인간의 일에 대해 감응하는 능력과 의지를 갖춘 인격신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자연과 사회의 모든 변화나 국가의 흥망, 인간의 재앙과 복은 결국 하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셋째, 三綱(삼강)과 五常(오상)을 도덕적 규범으로 제시했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아버지는 아버지, 아들은 아들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중서는 이러한 인간관계의 차별화를 "임금은 신하의 근본(君爲臣綱(군위신강))", "아버지는 아들의 근본(父爲子綱(부위자강))", "남편은 부인의 근본(夫爲婦綱(부위부강))"이라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 설정으로 발전시켰다. 이것이 바로 삼강이었다. 오상은 "어짐(仁(인))", "의로움(義(의))", "바름(禮(예))", "지혜(智(지))", "믿음(信(신))"의 다섯 가지 덕목을 가리킨다. 이러한 덕목은 갖춤으로써, 인간은 서로의 관계를 올바르게 유지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