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상서(尙書)》는 오경(五經) 중의 하나로, 이른바 요(堯)임금, 순(舜)임금, 우왕(禹王), 탕왕(湯王), 문왕(文王), 무왕(武王)의 수제치평(修齊治平), 즉 몸을 닦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며 그 덕을 펼쳐서 나라를 다스리고 온 천하에 평화를 이루는 도를 기록한 책이다. 한대(漢代) 이전까지는 ‘서(書)’라고 불렸는데, 이후 유학의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소중한 경전이라는 뜻을 포함시켜 한나라 때부터 《상서》라고 일컬어졌으며, 송대(宋代)에 와서 《서경(書經)》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상서》와 《서경》 두 명칭이 혼용되고 있다.
2. 저자 저자는 미상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보면 “고대의 왕에게는 대대로 사관이 있어서, 좌사(左史)는 왕의 말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왕의 행사를 기록하였다. 행사의 기록이 《춘추(春秋)》이고, 말의 기록이 《상서(尙書)》이다.”라고 하였다는 점에서 《상서》의 원저자는 고대 각 시대의 사관으로 추측할 수 있다.
3. 서지사항 ‘상서’라는 명칭이 처음 보이는 문헌은 《묵자(墨子)》 〈명귀 하(明鬼下)〉이다. ‘상서’라는 명칭에 대해 공안국(孔安國)은 “상(尙)은 상(上)과 통하여 상고시대의 서(書)를 상서라 한다.”고 했고, 《위서(緯書)》 〈선기검(璇璣鈐)〉에서는 “상(尙)이란 상(上)이다.”라고 하였으며, 왕숙(王肅)은 “위에서 하신 말씀을 아래에서 적은 것이므로 상서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상서》의 ‘상(尙)’이라는 글자는 대체로 상고의 뜻과 존숭의 뜻이 모두 내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순자(荀子)》 〈권학(勸學)〉에서 시(詩)·서(書)·예(禮)·악(樂)·춘추(春秋)를 설명하면서 “서(書)는 정사(政事)를 기록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당(唐)나라 양경(楊倞)의 주(註)에 “이것은 육경(六經)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유효(儒效)〉에서 “서(書)는 성인의 사업에 대해 말한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순자 이전에 이미 육경의 하나로서 《서(書)》가 이미 존재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상서》의 각 편에는 서(序)가 있어서 각 편이 지어진 경위를 밝혀놓았다. 공자의 옛집에서 고문경전이 나올 때 이른바 서서(書序)라고 하는 소서(小序)도 함께 나왔다고 한다. 공영달(孔穎達)은 《시경(詩經)》의 소서처럼 각 편의 앞부분에 서문을 나누어 붙여놓은 것이라고 하여 이를 소서라고 칭하였다. 이 서서는 공자가 지었다는 것이 유향(劉向)과 그의 아들 유흠(劉歆)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송(宋)나라 때의 주희(朱熹)가 서서는 공자의 저작이 아니며 복생(伏生)이 전한 《금문상서(今文尙書)》에도 붙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 이래 많은 학자들 역시 서서를 공자의 저작으로 보지 않았다. 한편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는 공자가 《상서》를 편정했다고 하였으며, 《한서》 〈예문지〉에서는 또 공자가 《상서》 100편을 엮었다고 하였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공자 역시 《상서》의 편찬이나 혹은 정리에 관여한 듯하다. 《상서》는 진 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인해 소실되어 전승과정이 복잡하고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판본으로는 《금문상서(今文尙書)》와 《고문상서(古文尙書)》,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가 있다. 《금문상서》는 복생이 전한 것이라고 하는데, 복생은 한대에 최초로 《서》를 전한 인물이다. 《사기》에 의하면, 그는 제남(齊南) 사람으로 본래 진(秦)나라의 박사(博士)였다. 상서가 분서갱유로 소실되자 한 문제(漢文帝) 때 진나라에서 박사를 지낸 복생이 《상서》에 정통하다는 말을 듣고 한 왕실에서 유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조조(晁錯)를 보내 배워오게 했다. 분서갱유 때 복생은 《서》를 벽 속에 감추었는데, 그 후 전란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한(漢)나라가 천하를 평정한 후 《서》를 찾아냈으나 수십 편을 잃고 29편만을 얻었다. 이것을 가지고 제(齊)·노(魯) 지방에서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한편 복생이 책을 감추었던 것을 조조가 베껴 쓴 것이 아니라 복생이 구술한 것을 받아 적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후한(後漢)의 고문학자 위굉(衛宏)은 “복생은 노년이어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말을 해도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의 딸이 그 의미를 조조에게 설명해주었다. 따라서 제(齊)나라의 방언(方言)이 조조의 영천(穎川) 방언과 달라서 조조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열 가운데 두세 개가 되어 조조는 자신의 추측으로 문맥을 바로잡았다.”라고 하였다. 《고문상서》는 전한(前漢) 경제(景帝) 때 노 공왕(魯恭王)이 궁실을 확장하기 위하여 공자의 구택(舊宅)을 허물다가 그 벽 가운데에서 《춘추》, 《논어》, 《효경》 등과 함께 얻었다는 것이다. 모두 과두문자(蝌蚪文字)로 되어 있었으므로 《고문상서》라고 한다. 《한서》 〈예문지〉에 의하면, 공자의 자손인 공안국(孔安國)이 무제(武帝) 때 이 책을 취하여 복생의 29편과 비교하여 본 결과 그보다 16편이 더 많아서 이것을 조정에 헌상하였으나 무고(誣蠱)의 변을 만나 학관에 세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문지〉의 기록에는 문제가 있다. 노 공왕은 무제의 원삭(元朔) 원년(元年)(B.C. 128)에 죽었으므로 공자의 옛집을 헐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제의 말년이 될 수 없는 일이다. 또 공자의 12대 자손인 공안국은 《사기》의 완성 이전에 죽었을 것이므로 그 완성 후 B.C. 91년에 일어난 무고의 사건에 연루될 수 없다. 그러므로 왕충(王充)은 “경제 때 공왕이 공자의 당에서 100편의 《상서》를 얻었는데, 후에 무제가 그것을 가져왔으나 해독할 수 없어서 궁중에 보관하였다.”(《논형(論衡)》 〈정설(正說)〉)고 하였고, 순열(荀悅)은 “무제 때 공안국의 집안사람이 헌상하였으나 무고사건에 걸렸다.”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사기》에도 공안국이 《고문상서》를 전한 사실을 분명히 하였고, 공안국이 무제 때 박사가 되었던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고문상서》의 존재는 분명한 듯하다. 전한에서는 공안국의 《고문상서》를 신뢰한 학자가 적었으나, 후한에 이르러서는 《금문상서》의 학파를 압도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현(鄭玄)은 고문학을 종합함과 동시에 고문을 위주로 하여 금문을 검토함으로써 경학의 체계를 구축하였다. 하지만 그의 《모시(毛詩)》·《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에 대한 주석은 오늘날 전하고 있으나 《상서주(尙書注)》 9권은 당(唐)나라 시대까지만 전해지고, 다만 책에 인용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의 출현으로 일실되어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위고문상서》는 동진(東晋) 때 나온 《공안국전상서(孔安國傳尙書)》라 일컬어진 것으로 이것이 현존본 《서경》의 원형이다. 성제(成帝) 때 장패(張霸)라는 사람이 《고문상서》의 29편을 십수 편으로 나누고, 다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서서(書序)》에서 발췌한 내용을 붙여 102편의 《상서》를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지만, 이것은 위서(僞書)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 뒤 동진(東晉) 원제(元帝) 때 예장내사(豫章內史) 매색(梅賾)이 《공안국전상서》를 얻어 임금에게 바쳤는데, 이때에는 〈순전(舜典)〉 한 편이 없었고, 제(齊)나라 건무(建武) 4년(497년)에 오흥(吳興) 사람 요방흥(姚方興)이 대항두(大航頭)에게 이것을 얻어 임금에게 바쳤다. 이 〈순전〉은 마융·정현이 주를 단 것보다 28자가 많다. 이것이 현존본 《서경》의 편목과 같은 것으로 복생의 29편을 33편으로 나누고 그 외 25편을 추가한 것이다. 그 후 《상서》는 국학에 채택되었고, 당나라 때 이르러 공영달(孔穎達)이 《상서정의(尙書正義)》를 편정할 때 이것을 정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널리 세상에 통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읽혀지고 있는 《서경집주(書經集註)》도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4. 내용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상서》는 58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周)나라 당시의 원본이 아니라 위진남북조시대에 나온 위작(僞作)이다. 〈우서(虞書)〉 5편, 〈하서(夏書)〉 4편, 〈상서(商書)〉 17편, 〈주서(周書)〉 32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唐虞시대와 夏나라에 관한 글들을 모은 〈우서〉와 〈하서〉는 하늘의 질서에 따라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관직을 두어 덕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하며, 군주와 신하가 서로 합심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상서〉는 군주가 천명을 받아서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는 정치 원리를 밝혔다. 〈주서〉는 정치원리와 여러 군주들과 관리들에 대한 경고, 즉 천명과 왕명을 받들고 은나라의 선례와 문왕의 가르침에 따라 덕을 밝히고 일을 신중히 하며 백성을 보전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도읍을 건설하는 이유를 밝혀 은나라 인사들을 다독였고, 군주의 도리와 제후 및 관료의 직분을 제시하였으며, 왕업 계승의 문제, 형벌 제도, 왕도 등에 대해 논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상서》는 중국 고대 문화의 원류와 정치 상황을 담고 있는 책이지만, 천문·지리·윤리·민생 문제에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따라서 정치 상황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철학적·사상적 면모도 무시할 수 없으며, 전체를 일관하는 애민(愛民)·중민(重民) 사상은 공자와 맹자(孟子)로 계승되어 민본주의(民本主義)로 정착이 되었다. 이상 정치의 실현을 위해 내세운 명덕신벌론(明德愼罰論)은 후세의 현실 정치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오전(五典)·오교(五敎)는 오륜(五倫)으로 발전하여 유교 도덕의 핵심이 됨으로써 오늘날까지 한국과 중국, 일본뿐 아니라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윤리를 설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상서》가 전래된 것은 일찍이 삼국시대 무렵으로 보인다. 경주에서 출토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 그 명칭이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최충(崔沖)이 학도를 모아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보이고,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주자학이 전래되면서 채침(蔡沈)의 《서집전(書集傳)》이 널리 통용되었고, 중국의 주석서 간행과 더불어 각종 연구 성과가 속출하였다. 조선 초기의 학자 권근(權近)이 구결도 붙이고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저술했다고 하는데, 《예기》·《주역》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볼 수가 없다. 이언적(李彦迪), 조광조(趙光祖) 등의 선도적 연구에 이어,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 많은 학자들이 사상적으로 부연하는 글들을 문집에 남기고 있다. 현전하는 것으로 정조(正祖)의 칙찬(勅撰)인 《상서강의(尙書講義)》와 《어제서전조문(御製書傳條問)》, 조익(趙翼)의 《서경천설(書經淺說)》, 정약용(丁若鏞)의 《상서고훈(尙書古訓)》·《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이 있으며, 찬자 미상의 《서전대문(書傳大文)》·《서전정음(書傳正音)》이 있고, 언해본으로는 선조(宣祖) 때의 《서전언해(書傳諺解)》가 있다.
6. 참고사항 (1)명언 • “임금이 임금됨을 어렵게 여기며 신하가 신하됨을 어렵게 여겨야 정사가 비로소 다스려져서 백성이 덕에 속히 교화될 것이다.[后克艱厥后 臣克艱厥臣 政乃乂 黎民 敏德]”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謨)〉 • “사랑할 만한 것은 군주가 아니며 두려워할 만한 것은 민중이 아니겠는가. 민중은 원후(元后)가 아니면 누구를 떠받들며 원후는 민중이 아니면 더불어 나라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니, 공경하여 네가 소유한 지위를 삼가서 백성들이 원할 만한 것을 공경히 닦아라. 사해(四海)가 곤궁하면 천록(天祿)이 영영 끊어질 것이다. 입은 우호를 내기도 하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니, 짐은 다시 딴 말을 하지 않겠다.[可愛非君 可畏非民 衆非元后 何戴 后非衆 罔與守邦 欽哉 愼乃有位 敬脩其可願 四海困窮 天祿永終 惟口 出好 興戎 朕言 不再]”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謨)〉 • “서민들이 음란하고 사악한 붕당이 없고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첨하고 친압함이 없는 것은 임금이 극(極)이 되기 때문이다.[凡厥庶民 無有淫朋 人無有比德 惟皇 作極]” 〈주서(周書) 홍범(洪範)〉 (2)색인어:상서(尙書), 서경(書經),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홍범(弘範), 고요(皐陶), 복생(伏生), 채침(蔡沈). (3)참고문헌 • 尙書文字合編(顧頡剛, 顧廷龍 輯, 上海古籍出版社) • 尙書校釋譯論(顧頡剛, 劉起釪, 中華書局) • 尙書集釋(屈萬里, 聯經出版事業公司) • 尙書源流及傳本(劉起釪, 遼寧大學出版社) • 懸吐完譯 書經集傳(성백효 譯註, 傳統文化硏究會) • 서경강설(이기동 역해,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함현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