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만능박사
◈ 사서(四書) -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송나라 때 정자라는 분이 자은(子恩)의 예기에서 대학, 중용을 분리하여, 논어, 맹자와 함께 엮어 내어서 사서로 만들었다.
그 전에는 오경(五經)이 읽혀졌으나, 어려워서 별로 호응을 못 받았다. 송나라 때부더 사서를 중시하고, 원나라 때는 고시 과목으로 중시 되었으며, 명나라의 영락제에 의해서 사서대전이 만들어졌다.
주자는 사서대전에 주해를 달아 사서집주(史書集註)라고 하였다.
대학과 중용에는 장구(章句), 논어와 맹자에는 집주(集註)라고 명칭을 붙였다.
사서를 배울 때는 먼저 대학을 읽고 학문의 규모를 정하고, 논어에서 근본을 배우고, 맹자에서 그 발전을 터득한 후, 마지막 중용에서 선인들의 높은 사상을 음미하게 된다.
▲ 대학(大學)
공자(孔子)의 손자 자사(子思)가 예기(禮記) 49편 중에서 제 42편으로 들어있던 것을 별책으로 엮은 것이다.
"대학(大學)는 공자가 남긴 글이고, 초학자가 덕으로 들어가는 문호이다.
지금에 있으면서 옛날 사람들이 학문을 한 차서(次序)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이 책이 남아 있기 때문이고, 논어와 맹자는 그 다음이다. "배우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 책에 따라서 배운다면 거의 오차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그 중요성을 말할 수 있다.
중국에서 유교가 국교로 채택된 한대(漢代) 이래 오경이 기본 경전으로 전해지다가 송대에 주희(朱熹, 1130~1200)가 당시 번성하던 불교와 도교에 맞서는 새로운 유학(性理學)의 체계를 세우면서 예기(禮記)에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두 편을 독립시켜 사서 중심의 체재를 확립하였다.
49편으로 구성된 예기(禮記) 중 제42편이 대학(大學)에 해당한다. 주희는 대학(大學)에 장구(章句)를 짓고 자세한 해설을 붙이는 한편, 착간(錯簡 : 책장 또는 편장의 순서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
그는 전체를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어 '경(經)'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제자 증자(曾子, BC 505~BC 436?)가 기술한 것이고, '전(傳)'은 증자의 생각을 그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학(大學)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전통적으로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이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BC 483?~BC 402?)가 지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송나라에서 급(伋: 子思)이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한나라 때 학자인 가규(賈逵, 30~101)도 공급(孔伋)이 송에서 대학(大學)을 경(經)으로 삼고 중용(中庸)을 위(緯)로 삼아 지었다고 하며, 정현(鄭玄, 127~200))도 이 설을 지지하고, 송대의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007)(형제)는 "공씨가 남긴 책"이라고만 언급하였다.
주희(朱熹)는 전을 "증자의 사상을 그의 문인이 기술한 것이다."라 하였는데, 자사(子思)가 바로 증자의 문인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도 대학(大學)은 자사의 저작이라는 견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청대(淸代)에 오면 실증적·고증적으로 검토, 비판하는 학풍이 일어나면서, 종래의 자사 저작설도 비판되어 진한(秦漢) 사이에 또는 전국시대 어느 사상가의 저작이라는 설, 자사가 지은 것이 틀림없다는 설 등이 있으나, 유가의 학자가 지은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대학(大學)의 내용은 삼강령 팔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령은 모든 이론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라는 뜻을 지니며,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親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이 이에 해당되고, 팔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대학(大學)은 예기(禮記) 가운데 한 편의 형태로 우리 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7세기경의 신라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예기(禮記)를 시경(詩經)· 서경(書痙)과 함께 습득할 것을 맹세하는 화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372년(소수림왕 2)에 세운 태학(太學)을 관장한 사람이 오경박사(五經博士)였으니, 고구려에서도 일찍부터 예기(禮記)가 교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기에도 국학 3과정과 독서삼품과의 과목으로 예기(禮記)는 중요시된 경전이었다.
고려 유교의 학풍은 경전중심이어서 예종 때의 국학칠재와 사학(私學) 등에서도 경연의 주요과목으로 예기(禮記)가 자주 강론되었다. 조선 태조는 대학(大學)의 체재를 제왕의 정치귀감으로 편찬한 송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유창(劉敞 : 초명은 敬)으로 하여금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그 뒤 '대학연의'를 어전에서 강의하는 전통이 마련되었다.
주희가 독립시킨 대학(大學)은 1419년(세종 1) '성리대전'· '사서오경대전'이 명나라로부터 수입될 때 함께 들어왔다.
주희의 '대학장구'에 대한 최초의 비판은 이언적(李彦迪)에서 비롯된다. 그는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에서 주희의 일경십전(一經十傳)을 일경구전(一經九傳)으로 산정(刪正)하면서 편차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주자학이 관학으로 정립되고 성현의 편언척구(片言隻句)가 신성시되던 조선 중기에는 주희의 체계를 긍정한 바탕에서 나름의 해석을 모색하는 데 그쳤다.
이와 같은 고식적인 풍토에 반발한 윤휴(尹鑴, 1617~1680)는 '대학고본별록(大學古本別錄)'과 '대학전편대지안설(大學全篇大旨按說)'에서 주희의 방법론적 준거였던 '격물(格物)'이 지적 탐구가 아니라, 종교적 경건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본래 예기(禮記) 안에 있던 '대학고본'이 아무런 착간도 없는 정본(定本)임을 주장하였다.
박세당(朴世堂, 1529~1703)은 '대학사변록(大學思辨錄)'에서 철저한 고증에 의해 대학(大學)이 복원되어야 하며, 주희가 가한 해석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고답적이라 비판하면서, 구체적 실천의 관점을 강조하였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정조와의 문답을 정리한 '대학강의(大學講義)', 그리고 '고본대학'에 입각해 대학(大學) 본래의 정신을 탐색한 '대학공의(大學公議)'를 저술해 명명덕· 신민만으로도 강령이 될 수 있으며 격물(格物)· 치지(致知)는 팔조목에 들 수 없다 하여, 격물· 치지에 입각한 성리학적 사유의 재검토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 예기(禮記)는 이미 유포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그 유입과 전파경로는 알 수 없다. 1045년(정종 11) 왕이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이 찬한 '신간예기정의' 한 질을 어서각(御書閣)에 두고 나머지는 문신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희의 '대학장구'가 처음 반입된 것은 고려 공민왕 19년(1370) 명나라에서 '대통력'· '육경'· '통감'과 함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1423년(세종 5) 대학(大學)을 포함한 사서오경 10부를 성균관·오부학당에 분급(分給)하였고, 1435년 각 도의 수령에게 명하여 그것을 향교에 비치하라고 하였다. 개인이 자비로 갖추고자 할 때는 종이를 보내면 주자소에서 찍어주게 하였다.
15세기 말 함경도·평안도·제주도에까지 대학(大學)이 보급되었다. 선조 때부터 진행된 언해사업은 1576년(선조 9) 이이(李珥, 1536~1584)가 왕명을 받아 13년 만에 완성, 간행하여 도산서원에 하사되었으며, 1605년에 재반포되어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 논어(論語)
공자(孔子)의 언행록이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7권 20편의 유교경전이다. 책의 내용은 공자의 말, 공자와 제자 사이의 대화, 공자와 당시 사람들의 대화, 제자들의 말, 제자들 간의 대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사후에 편찬한 책이다.
공자는 인(仁)에 대하여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인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공자의 자기 수양 과정은 "공자가 말씀하시길, 나는 십오세에 지(志)하고, 삼십세에 입(立), 사십오세에 불혹(不惑), 오십세에 지천명(知天命), 육십오세에 이순(耳順).칠십세에 종(縱)하여, 마음이 내키는 데로 하여도 규범에 벗어나지 않는 경지에 올랐다.(心所欲不踰炬)
논어(論語)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의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일관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생애 전체에 걸친 언행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경전들과는 달리 격언이나 금언을 모아 놓은 성격을 띤다.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論)',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語)'라고 부른다.
현재 논어(論語)는 전20편, 482장,600여 문장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서술방식과 호칭의 차이 등을 기준으로 앞의 열 편을 상론(上論), 뒤의 열 편을 하론(下論)으로 구분하여 앞의 열 편이 더 이전 시대에 서술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각 편의 이름은 그 편 내용의 첫 두 글자를 딴 것으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자의 삶과 행동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널리 읽어온 책이 논어(論語)다. 정확히 누가 언제 이 책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하지만 논어(論語)를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책이 공자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과 행적을 더듬고 자신들의 얘기를 첨가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자 사후 그의 제자들 여기저기 흩어져 대부분 교육에 종사했는데, 여러 곳에서 스승의 말을 죽간(竹簡) 등에 기록해 학생들을 가르칠 때 쓰고 이것들을 나중에 모아서 편찬했을 것이다. 최종 정리는 공자의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던 증삼(曾參(曾子), BC 505~BC 435)의 제자들이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논어(論語)의 성립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은 대부분 '좌전(左傳: '춘추(春秋)'를 해설한 책)'에서 근거를 찾는데,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논어(論語)가 '좌전(左傳)'보다 앞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논어(論語)는 전한 시대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논어(論語)라는 명칭 대신 전(傳), 기(記), 논(論), 어(語)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판본이 전해지고 있었다. 논어(論語)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전한의 6대 경제(漢 孝景皇帝 劉啓, BC 188~BC 141, 재위: BC 157~BC 141)~7대 무제((漢 世宗 孝武皇帝 劉徹, BC 156~BC 87년, 재위: BC 141~BC 87) 기간이라고 하며,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3~4세기 경 한성백제시대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기록되어 남아있다.
논어(論語)는 어느 한 시기에 편찬되었다기보다, 몇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고 보인다. 첫 번째 공자 사후에 중궁, 자유, 자하 등의 제자가 일익을 주도했고, 두 번째 증자 사후에 유자, 민자 등이 일익을 주도했으며, 전국시대 맹자 시기 또는 맹자 사후에 누군가 내용을 첨가하고 보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것은 당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관중(管仲, BC 725~BC 645)에 대한 평가가 상론의 팔일과 하론의 헌문에서 다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관중에 대한 노(魯)나라와 제(齊)나라의 평가가 서로 나뉘었던 것이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노론과 제론을 모두 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상론 10편과 하론 10편은 문체와 호칭 및 술어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상론은 문장이 간략하고 글자수가 짧고, 하론은 문장이 길고 글자수가 많다. 또한 상론의 마지막 10편 향당은 공자의 일상 생활을 담아 결말을 내는 셈이어서, 하론 10편의 사실성에 대한 의문이 있다.
공자 사상은 한마디로 하면 인(仁)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세부 덕목으로서 지(知, 지혜)와 인(仁, 어짊)과 용(勇, 용기)에서의 '인(仁)'은 협의의 '인(仁)'이며, 공자가 내세운 모든 덕목을 총칭하는 개념이 광의의 '인(仁)'이다.
공자는 법이나 제도보다 사람을 중시했다. 사람을 통해 그가 꿈꾸는 도덕의 이상 사회를 이루려고 했다. 그래서 ‘'어짊'을 실천하는 지도자로 군자를 내세웠다. 원래 군주의 자제라는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군자'는 공자에 의해 이상적 인격의 소유자로 개념화되었다. 군자는 도(道)를 추구하고, 도에 입각하고, 도가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존재다. 이 위대한 정치가는 예(禮)로 자신을 절제하고, 악(樂, 음악)으로 조화를 추구한다. 문(文, 문예)을 열심히 공부[學]해 훌륭한 군자로 거듭나고, 정치(政治)를 통해 민생(民生)을 안정시키고 도덕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덕(德)과 의(義)가 사회의 중심 가치가 되는 자신의 이상 사회를 끝내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지난한 삶의 역정 속에서도 도덕 사회의 구현이라는 처음의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는데, 이 꿈이 녹아 있는 책이 논어(論語)다.
이중 대표적인 학이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이 불역군자호)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고 틈나는대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노여워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논어(論語)는 수많은 주석서가 있다. 하안(何晏, 193?~249)의 '논어집해(論語集解)'를 "고주(古注)"라 하고 주희(朱熹, 1130~1200)의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신주(新注)"라 하여 중요하게 여긴다. 조선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지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는 고주와 신주에서 각기 보이는 폐단을 극복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공자의 원의에 가까운 해석을 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당시 조선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 그리고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 1627~1075) 등 일본 유학자들의 주석에까지 고루 시야를 넓힌 점은 정약용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자 시대 이후로 논어(論語)는 중국의 철학자들과 가치관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후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논어(論語)는 유교 경전의 다른 세 책과 함께 사서라고 불리며 유교의 기본 가치관인 "예(禮), 의(義), 충(忠), 인(仁)" 이라는 유교적 인본주의를 가르쳐왔다.
거의 2천년 동안 논어(論語)는 중국의 학자들이 배우는 기본 과정이 되어왔는데, 공자의 저작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도덕적으로 바르고 학식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중국의 과거 시험은 진나라(晉, 265~420)에서 시작되어 청(淸)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는데, 과거 시험에서는 유교경전을 강조하여 수험생들이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글에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평가하였다.
논어(論語)는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영어로는 아서 웨일리(Arthur Waley, 1889~1966)와 A. 찰스 뮬러(A. Charles Muller, 1953~), 그리고 윌리엄 수딜(William Edward Soothill, 1861~1935)의 번역이 가장 유명하다. 일찍이 16세기 후반에 논어(論語)의 일부는 예수교 중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볼테르(Voltaire, 1694~1778)와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는 열 번째 향당편에서 공자가 단순한 사람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특히 볼테르는 계몽철학자로서 논어(論語)야말로 당대까지의 허황된 형이상학이나 신학에 근거하지 않은 정치철학서라고 칭송하며 자신의 연구실에 공자의 초상화를 걸어둘 만큼 공자를 존경하였다. 근래에 논어(論語)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한 시몽 레스(Simon Leys, 1935~2014)는 이 어록은 유명한 사람의 개인의 삶을 묘사한 첫 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1905~1994)도 공자의 논어(論語)가 가장 오래된 지적이고 영적인 완벽한 개인의 초상이라고 말하며 향당편은 근대적인 책과 같이 감동을 주는데,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빼놓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공자(孔子)는 BC 551년 노(魯)나라 양공(襄公) 22년에 태어났다.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어서 가난에 시달리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도 부지런히 이치를 탐구하고 실천에 힘써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20대에 이미 이름을 떨쳐 제자들이 따르게 되었으며, 그의 관심은 예(禮)와 악(樂)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있었다.
당시 노나라는 계손(季孫)·맹손(孟孫)·숙손(叔孫)의 삼환씨(三桓氏)가 정권을 농락하는 형편이었다. 공자는 51세 때 대사구(大司寇)까지 역임했으나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 뒤 천하를 다니면서 정치적 혁신을 실현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68세에 고국으로 돌아와 후진 육성에 힘썼다.
공자는 인(仁)의 실천에 바탕을 둔 개인적 인격의 완성과 예로 표현되는 사회질서의 확립을 강조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이상국가를 지상에 건설하려 하였다. 만년에 육경(六經) 편찬에 힘쓴 것은 후세에게나마 그의 이상을 전하고 실현을 기약하려는 뜻에서였다.
공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그의 사상은 실천을 전제로 한 도덕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따르는 제자가 3천인이 넘었다 하는데, 그 가운데 72인이 뛰어났다고 한다.
논어(論語)의 편찬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➀ 자하(子夏)를 비롯한 공자의 제자들,
➁ 자하·중궁(仲弓)· 자유(子游) 등,
➂ 증삼(曾參)의 문인인 악정자춘(樂正子春)과 자사(子思)의 무리,
➃ 증삼과 유자(有子)의 문인 등이 그것인데, 논어(論語)가 공자 자신의 손으로 기록, 정리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논어(論語)라는 책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양(梁)나라의 황간(皇侃)은 "이 책은 공자의 문인에게서 나온 것이다. 먼저 자세히 따진 뒤에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한 뒤에야 기록했으므로 '논(論)'이라 하였다. '어(語)'란 논란에 대해 대답하고 설명한다는 말이다."라고 말하였다.
원(元)나라의 하이손(何異孫)은 '논어(論語)'가 "글뜻을 토론한 데서 생긴 이름"이라 했고, 청(淸)나라의 원매(遠枚)는 "논이란 의논이란 뜻이며 어린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라고 풀이해서 의견이 다양하다.
'한서'에 의하면, 한나라 때에는 세 가지 종류의 논어(論語)가 전해오고 있었다 한다. 제(齊)나라 사람들이 전해온 제논어, 노(魯)나라에서 전해 온 노논어, 그리고 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고문(古文)의 논어가 그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논어(論語)는 전한 말의 장우(張禹)가 노논어를 중심으로 편찬한 교정본(校定本)이다.
논어(論語)는 모두 20편으로 나뉘어 있고, 각 편의 머리 두 글자를 따서 편명으로 삼고 있다. 예컨대, 첫 편인 학이(學而)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에서 따 왔다. 따라서 논어(論語)의 내용 구성은 ‘배움’에서 시작해 '하늘의 뜻을 아는 것(知命)'까지로 되어 있다.
논어(論語)의 내용은
➀ 공자의 말,
➁ 공자와 제자 사이의 대화,
➂ 공자와 당시 사람들과의 대화,
➃ 제자들의 말,
➄ 제자들간의 대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들 모두는 공자라는 인물의 사상과 행동을 보여주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 나라에 유교가 전해진 것은 중국과의 접촉이 활발해지고 통치질서와 정치윤리에 대한 요구가 드높아가던 삼국시대였다. 논어(論語)도 이 무렵에 전래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42년에 죽죽(竹竹)이라는 화랑이 인용한 논어(論語)의 구절이 보인다. 설총(薛聰)이 구경(九經)을 이두로 읽었으며 강수(强首)가 불교보다 유교의 도리를 배우겠다 하여 뒤에 외교문서 작성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사실은 유교적 교양의 바탕인 논어(論語)가 당시에 이미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증거한다.
682년(신문왕 2) 국학이 체계를 갖추었을 때 논어(論語)를 가르쳤으며, 그 뒤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로 인재를 선발할 때도 논어(論語)는 필수 과목이었다.
고려조에 들어와 문묘(文廟)와 석전의 의례를 갖추는 한편, 사회적· 정치적 제도를 정비한 성종은 990년(성종 9) 서경에 수서원(修書院)을 설치해 전적과 문헌을 수집하게 했는데, 물론 논어(論語)도 여기에 수장(收藏)되었다. 이 무렵 서적의 인쇄와 역사서 편찬, 그리고 궁중의 경연이 성했는데, 논어(論語)는 경연에서 자주 거론된 경전이었다.
조선시대는 오경(五經)보다 사서(四書)를 중요시하는 주자학이 사상·문화 전반의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사서의 중심인 논어(論語)는 시골 벽촌의 어린 학동들까지 배우게 되었다.
이황(李滉)은 논어의 훈석(訓釋)을 모으고 제자들과의 문답을 채록해 '논어석의(論語釋義)'를 지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의 문인 이덕홍(李德弘)의 '사서질의(四書質疑)'가 그 면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 뒤 학자들의 주석이 수없이 많지만 대개는 단편적인 글귀에 대한 나름의 의문과 해석, 아니면 공자의 인격에 대한 찬탄에 그치고 있다.
한(漢)· 당(唐)의 훈고와 송(宋)· 명(明)의 의리(義理)에 매이지 않고 문헌비판적·해석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논어(論語)를 해석한 저작이 정약용(丁若鏞)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이다. 한대에서 청대에 이르는 중국의 거의 모든 학자들과 우리 나라 선비, 그리고 일본의 연구성과까지 검토, 비판해 독자적인 주장을 폈다.
논어의 첫 간행은 1056년(문종 10)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논어(論語)를 포함한 비각소장(祕閣所藏)의 제 경전을 여러 학원(學院)에 나누어 두게 하고, 각각 한권씩 찍어냈다 한다. 이어 1134년(인종 12)에는 이것을 지방의 여러 학관에 나누어주었다.
조선시대에 세종은 주자소를 건립하고 논어(論語)를 포함한 다량의 서적을 간행해서 각 지방에 보급하였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우리말로 풀어 이해하기 쉽게 하려는 노력은 전래 초기부터 있어 왔다.
설총이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을 풀이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말의 정몽주(鄭夢周)와 권근(權近)은 각각 논어(論語)에 토를 달았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다음 전문기관을 설치해 경전의 음해(音解)를 찬하게 하였다. 세조 때에는 구결(口訣)을 정했고 성종 때에 유숭조(柳崇祖)가 '언해구두(諺解口讀)'를 찬집하였다.
선조는 이것이 미비하다 하여 1581년(선조 14) 이이(李珥)에게 명해 사서와 오경의 언해를 상정(詳定)하게 하였다. 사서는 1593년에 이이의 손으로 완성되었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졌다. 이들 언해는 불완전한 번역이었으나 순한문본과 함께 널리 이용되었다.
▲ 맹자(孟子)
맹자(孟子)는 공자(孔子)의 뜻을 진술하여 [맹자(孟子)]7편을 저술하였다.
공자가 언급하지 않는 내용도 시세에 순응시켜 부가하였다.
공자가 인(仁)만 말씀하신 것을 의(義)를 덧붙여 설명하고 있고,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하여 패도를 배격하고, 인뿐만 아니라 절제를 존중하였다.
특히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있다.
사서(四書: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중의 하나이다. 양혜왕(梁惠王)· 공손추(公孫丑)· 등문공(滕文公)· 이루(離婁)· 만장(萬章)· 고자(告子)· 진심(盡心)의 7편으로 되어 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맹자의 저술임이 분명하지만, 자신의 저작물에 '맹자(孟子)'라고 한 점 등을 들어 맹자의 자작(自作)이 아님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당나라의 한유(韓愈)는 맹자가 죽은 뒤 그의 문인들이 그 동안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 어쨌든 수미일관(首尾一貫)한 논조와 설득력 있는 논리의 전개, 박력 있는 문장은 맹자라는 한 인물의 경륜과 인품을 전해주기에 손색이 없다.
맹자(孟子)는 공자의 가르침을 보완·확장하였다. 공자의 인(仁)에 의(義)를 덧붙여 인의를 강조했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말했으며, 민의에 의한 정치적 혁명을 긍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작업에는 인간에 대한 적극적인 신뢰가 깔려 있다. 사람의 천성은 선하며, 이 착한 본성을 지키고 가다듬는 것이 도덕적 책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후한의 조기(趙岐, ?~201)는 맹자(孟子)에 대한 본격적인 주석 작업을 통해 7편을 상하로 나누어 14편으로 만들었는데, 지금도 이 체재가 보편화되어 있다. 송대에 이르러 주희(朱熹)는 조기가 훈고(訓詁)에 치중해 맹자의 깊은 뜻을 놓쳤다고 비판하고, 성리학의 관점에서 '맹자집주(孟子集註)'를 지었다. 이 책은 조기의 고주(古註)에 대해 신주(新註)라고 한다. 주자학이 관학(官學)으로 채택된 원대 이래 공식적인 해석서로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 유학의 전래와 함께 맹자(孟子)도 같이 유포되었지만, 고려 말까지는 육경 중심과 사장학적(詞章學的) 경향에 밀려 '논어(論語)'나 '문선(文選)' 등의 다른 경전에 비해 소홀히 취급되었다. 문장보다 인격을, 육경보다 사서를 교육의 핵심으로 삼는 주자학이 도입되어 자리를 굳히면서 맹자(孟子)는 지식인들의 필수 교양서로 부상되었고, 주희의 주석서가 해석의 정통적 기준이 되었다.
맹자사상의 일관된 핵심은 성선설과 혁명론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이 활발한 논란을 거쳐 배타적 권위를 형성하는 17세기 말까지 성선설에만 국한되었다.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으로부터 비롯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조선조 후반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인간의 본성을 해명하는 입론(立論)의 근거를 주희의 주석에서만 구함으로써 200여 년 동안 해결을 보지 못했다.
주희의 경전 해석과 그 바탕에 깔린 세계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윤휴(尹鑴)와 박세당(朴世堂)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낙인찍히기도 하였다. 이익(李瀷)은 '맹자질서(孟子疾書)'에서 맹자가 양혜왕에게 "이익을 앞세우지 말라."고 한 것은 이익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과의 조화를 꾀하자는 데 그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주자학의 비현실적인 명분론과 의리론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맹자(孟子)는 백가(百家)가 다투어 각기 다른 사상을 주장하던 전국시대에 의연하게 공자사상을 옹호하고, 이를 한층 진전시켰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맹자(孟子) 전편에 흐르고 있어서, 공자 다음가는 아성(亞聖)으로 추앙되고 있다.
▲ 중용(中庸)
유교의 고전으로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 BC 483?~BC 402?)의 저서라고 한다.
내용은 성선설(性善說)을 중심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을 명백히 하고 있다.
성(性), 도(道), 교(敎)의 관계, 즉 천명(天命)은 성(性)이요, 명(命)에 따르는 것은 도(道)요, 도(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자세히 설명하면 성(性)의 본질을 성(誠)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지(知), 인(仁), 용(勇)은 삼달덕(三達德: 어느 경우에도 통하는 세 가지 덕)이고, 친(親), 의(義), 별(別), 서(序), 신(信)의 오달도는 그 궁극이 성(誠)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다.
예기 중의 일편이던 것을 송의 정신(程 )이 따로 떼어내고 주자가 주석을 가해서 사서의 하나가 되었다.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더불어 사서(四書)라고 한다. 유교에서 사서라는 일컬음이 생긴 것은 중국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이다. 주희(朱熹)가 예기(禮記) 49편 가운데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떼어내어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함께 사서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후 사서는 유교의 근본 경전으로 반드시 읽어야 하였다.
중용(中庸)은 이와 같이 '예기' 속에 포함된 한 편이었지만 일찍부터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으며, 한나라 이후에는 주해서가 나왔으며 33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송나라 정이(程頤)에 이르러 37장이 되었다가 주희가 다시 33장으로 가다듬어 독립된 경전으로 분리시켰다.
중용(中庸)의 작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종래에는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백어(伯魚)가 급(伋)을 낳으니 그가 자사(子思)였다. 나이 62세에 송나라에서 곤란을 겪으면서 중용(中庸)을 지었다"라는 대목이 있어 공자의 손자 자사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청대에 고증학이 대두되면서 자사의 저작이라는 정설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학자는 진(秦)· 한(漢)시대의 어떤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저작이라 고증하기도 하고, 또는 자사의 저본(底本)을 바탕으로 후세의 학자들이 상당기간 동안 가필해 완성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여 아직까지 유력한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중용(中庸)을 흔히 유교의 철학 개론서라 일컫는데, 그것은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장(首章) 첫머리에서 “하늘이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대목은 유교 철학의 출발점과 그 지향처를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삶을 누리자면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그 배움에는 길(道)이 있고 길은 바로 본성(本性)에 바탕하며, 본성은 태어나면서 저절로 갖추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태어나면서 저절로 갖추어진' 본성을 유교에서는 맹자 이후 '순선(純善)'한 것이라 생각하였으며, 송대에 와서 정립된 성리학은 이에 기초해 전개되고 있다.
중용(中庸)은 33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전반부·후반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주로 중용 또는 중화 사상(中和思想)을 말하고, 후반부에서는 성(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中)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不偏不倚無過不及)을 일컫는 것이고, 용(庸)이란 떳떳함(평상(平常))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희는 설명하였고, 정자(程子, 송나라 정도명(程明道), 1032~1085)는 기울어지지 않는 것(불편(不偏))을 중(中)이라 하고, 바꾸어지지 않는 것(불이(不易))을 용(庸)이라 하였다.
중화 사상은 중용을 철학적 표현으로 달리 말한 것인데, 이 때의 중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로되기 이전의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마음이 발해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중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라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우주 만물이 제 모습대로 운행되어 가는 것을 뜻한다.
성(誠)은 바로 우주 만물이 운행되는 원리이다. 그 원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꿰뚫어 있다. 그래서 "성은 하늘의 도이고 성되려는 것은 사람의 도"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실한 것은 우주의 원리이고, 성실해지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라는 뜻이다. 결국, 사람은 우주의 운행 원리인 성을 깨닫고 배우고 실천하는 데에서 인격이 완성되며, 결국에 가서는 천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신라 원성왕 4년(788) 관리 등용법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태학(太學)에 설치할 때 그 과목 중에 '예기(禮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삼국 시대에 '예기(禮記)'의 한 편으로서 중용(中庸)을 접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고려 말 정주학을 수용한 이후에는 사서의 하나로 중용(中庸)을 극히 존숭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권근(權近)은 사서에 구결(口訣)을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모든 유학자들이 중용(中庸)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성리학이 바로 중용(中庸)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 사회에 있어서의 학술의 전개와 민족 문화 발달에 중용적 철학 사상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 삼경(三經) - 시경(詩經), 서경(書痙), 주역(周易)인 역경(易經)
▲ 시경(詩經)
시경(詩經)은 오경(五經)의 하나로서 춘추(春秋)시대(時代)의 민요(民謠)를 중심으로 한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詩集)이다.
시경(詩經)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이다. 서주의 말기로부터 동주에 걸쳐(BC 9세기~BC 7세기) 완성된 시집으로 305편이 수록되어 있다. 공자가 문하의 제자를 교육할 때, 주나라 왕조의 정치적 형태와 민중의 수용 태도를 가르치고 문학·교육에 힘쓰기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경(詩經)은 전한시대에 '제시(齊詩)'· '노시(魯詩)'· '한시(韓詩· '모시(毛詩)'라는 네 가지 종류의 책이 나왔지만, 오늘날 남은 것은 그중의 모시(毛詩)뿐이어서 별도로 모시(毛詩)라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시(詩)라고만 불리었으며, "시"라는 말의 어원은 여기서 나왔다. 주나라때 편찬되었다 하여 주시(周詩)라고도 하다가 당나라 때 와서 오경의 하나에 포함되면서 시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여기에 실린 노래들은 철기(鐵器)의 보급으로 농경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봉건제가 정착되어 사상과 예술이 처음으로 피던 주왕조 초에서 전국(戰國) 중기에 불려졌다. 분포 지역은 황하(黃河)를 중심으로 한 주나라 직할 경역이었으리라 추정된다.
311편의 고대 민요를 '풍(風)', '아(雅)', '송(頌)'의 3부로 나누어서 편집하였다. 그중 6편은 제명(題名)만 있을 뿐 어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사가 있는 것은 305편이다.
'풍(風)'이라는 것은 각국의 여러 지역에서 수집된 160개의 민요를 모은 것이요, '아(雅)'라는 것은 연석(宴席)의 노래로, 다시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로 구분된다. 소아 74편과 대아 31편은 조정에서 불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頌)' 40편은 왕조·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의 노래라고 여겨진다. 어느 것이든 고대의 이름없는 민중이나 지식인의 노래이다.
주(周)는 제13대 평왕 때에 도읍을 호경(鎬京)으로부터 하남성(河南省)의 낙양으로 옮겼는데(BC 770), 그때 일을 노래한 것이 있다. 주실 동천(周室東遷) 이전, 즉 서주(西周)의 것으로는 제11대 선왕(宣王, 재위: BC 827~BC 782) 시대의 노래로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이 시경(詩經) 중의 옛 부분이다. 주 왕조(周王朝) 창업의 모습을 노래한 것도 있으나 그것들도 선왕기(宣王期)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설에 의하면 주왕조 초기인 문왕· 무왕시절의 노래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사실이라고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가요를 모은 것이 된다. 공자는 고대의 가요를 통해서 당시 정치·사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풍(風)'에는 애정의 노래라든가 일하는 노래, 유랑의 노래 등이 많으나, '아(雅)' 또는 '송(頌)'에는 천(天)의 사상에 근거하여 주왕조를 찬양한 것이 있다. 또 천은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이라 믿고 천을 원망하여 천의 권위의 붕괴를 노래한 것도 많다. 천의 권위의 붕괴를 말하는 것은, 위정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시경(詩經)'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주왕조를 뒷받침하고 있던 천(天)의 사상에 대한 무명의 민중이나 지식인의 비판의 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천(天)은 지정공평(至正公平)하지 못하다는 원성(怨聲)은 바로 주 왕조의 권위에 대한 피지배층의 비판이다.
▲ 서경(書痙)
서경(書痙)은 삼경 또는 오경의 하나로서 중국의 요순 때부터 주나라 때까지의 정사(正使)에 대한 문서를 수집하여 공자(公子)가 편찬한 책이다.
서경(書經)은 중국 유교의 5경(五經) 가운데 하나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중국의 고대 국가들의 정사(政事)에 관한 문서를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주나라의 정치철학을 상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말한 제일의 자료이다.
크게 우서(虞書)· 하서(夏書)· 상서(商書)· 주서(周書)의 4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요순시대· 하나라· 은나라(상나라)· 주나라에 관련된 내용을 싣고 있다.
전국시대에는 공문서라는 의미로 '서(書)'라고 했다. 이후, 유학을 숭상하고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한나라 시대에서, 당시의 유학자들은 존중하고 숭상해야 할 고대의 기록이라는 뜻에서 '상서(尙書)'라고 하였다. 혹은 상(尙)은 상(上)을 뜻한다고 보아 "상고지서(上古之書, 상고시대의 공문서)"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송나라 시대에는 유교의 주요 경전인 5경(五經)에 속한다는 뜻에서 '서경(書經)'이라고 불렀다.
서경(書經)의 판본은 크게 나누어 '금문상서(今文尙書)'와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있다. 신나라(新, 8~23) 왕망(王莽) 때 유흠(劉歆, ?~23)이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를 들고 나옴에 따라, 기존의 판본인 '금문상서'를 지지하는 금문가(今文家)와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를 지지하는 고문가(古文家) 사이에 금고문 논쟁(今古文論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현존하는 판본은 '위고문상서'와 '칭화대본 죽간상서'가 있다.
서경(書經)은 요임금(堯, BC 2356?~BC 2255?)부터 주나라(BC 1046?~BC 256) 시대까지 요(堯)· 순(舜)의 2제와 우왕(禹王)· 탕왕(湯王)· 문왕(文王) 또는 무왕(武王)의 3왕들이 신하에게 당부하는 훈계와 군왕이 백성에게 내린 포고와 명령, 군왕에게 올린 신하의 진언, 전쟁을 앞두고 백성과 장병들에게 한 훈시, 대신들 사이의 대화 등을 담고 있다.
서경(書經)은 서약(誓約)하는 글인 "서(誓)"와 고시(告示) 또는 포고(布告)하는 글인 "고(誥)"가 주가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전형적인 것들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 반경(盤庚): 은나라 시대의 고시문(告示文)을 주나라 사람이 추기한 것
· 목서(牧誓): 주나라 무왕의 서약문(誓約文)
· 낙고(洛誥): 주나라 때의 고시문
· 강고(康誥): 주나라 때의 고시문
· 주고(酒誥): 주나라 때의 고시문
이들 중 <목서(牧誓)>에서 주나라 무왕은 "지금 저 발(發)은 공손히 하늘의 벌을 행하고자 합니다(今予發惟恭行天之罰 · 금여발유공행천지벌)"라고 말하고 있는데, 서경(書經)의 글들은 모두 이와 같이 조상신(祖上神) 혹은 상제(上帝)에 대한 신앙이나 노예 사회에서의 왕의 권력을 보여주는 무겁고 엄격한 색조(色調)로 일관되어 있다.
서경(書經)은 3000편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해지는 것은 고문(古文) 25편, 금문(今文) 33편 등 58편에 불과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원본이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고문상서(古文尙書)는 한나라 경제(景帝, BC 188~BC 141) 때 노나라의 공왕(恭王)이 공자(孔子)의 옛 집을 허물다 장벽(牆壁)에서 발견했다는, 춘추시대의 문자체(진(晉)나라의 문자)로 씌여진 고본을 말하고, 금문상서(今文尙書)는 한나라 문제(漢文帝, BC 202~BC 157, 재위: BC 180~BC 157) 때, 과거 진(秦)의 박사를 지냈고 상서에 정통했던 복생(伏生)의 구술을 조조(晁錯)가 당시 통용되던 예서로 정리한 것이다.
사정이 이런 만큼 고문상서와 금문상서는 별차이가 없었다고 하나 이후 금문학파와 고문학파로 나뉘어 전수되었다. 고문상서는 동한 광무제漢 世祖 光武皇帝 劉秀, BC 6 ~AD 57, 재위: 25~57) 때 무성편이 서진 말기에 나머지 15편이 전부 없어졌고, 현재는 위고문상서만이 전해지고 있다. 공안국의 위고문상서는 동진 원제(晉 中宗 元皇帝 司馬睿, 276~322, 재위: 317~322)때 매색(梅賾, ?~?)이라는 사람이 위고문상서를 조정에 바쳐진 후 청나라 때까지 천여 년 동안 진짜로 받아들여졌다. 현재 전해지는 고문상서는 공안국 혹은 매색의 위고문상서이다.
현행본 58편 가운데 이르바 '오고'라고 일컫는 대고, 강고, 주고, 소고, 낙고와 금등, 자재, 다사, 다방 등이 서경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성립이 된것으로 주나라 초기의 기록이라고 한다. 오고는 문체가 가장 난해하여 더 고대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때 고요모에는 사상적으로 노장철학과 유가철학이 분화되지 않은 것도 옅보여 고오가 가장 오래되었다는 점에 의문을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
서경(書經)은 모두 58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33편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 부르고 나머지 25편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 한다. 금문상서는 원래 29편이었지만 일부를 분할하여 편수가 늘어났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BC 4세기 이전에 작성된 진본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문상서는 원래 16편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오래전에 소실되었다. 4세기에 나타난 모작은 원본의 제목을 붙인 16편에 9편을 더하여 모두 25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의 5편은 중국의 전설적인 태평시대에 나라를 다스렸다는 유명한 요(堯)· 순(舜)의 말과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6~9편은 하나라(夏, BC 2205년경~BC 1766년경)에 대한 기록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다음 17편은 은나라의 건국과 몰락(BC 1122년)에 대한 기록인데, 은나라의 멸망을 마지막 왕인 주왕이 타락한 탓으로 돌리고 있다. 주왕은 포악하고 잔인하며 사치스럽고 음탕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마지막 32편은 BC 771년까지 중국을 다스렸던 서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서경(書經)은 중국 역사서의 효시로 후대의 '사기'와 '한서'같은 본격적인 정사는 아니지만 중국 고대사의 원천이 되는 책이다. 서경의 기록 대부분은 사관에 의해 사실적으로 쓰여져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서경은 중국 고대 사상의 뿌리로 유가(儒家)의 덕치주의(德治主義), 도가(道家)의 무위이치(無爲而治, 묵가(墨家)의 숭검비명(崇儉非命), 법가(法家, )의 법치주의(法治主義) 등의 사상을 포괄하고 있다.
서경(書經)의 내용과 언어 특징은 은주 시대의 갑골 그리고 청동기에 적힌 글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고 제작연대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 주역(周易)
주역(周易)은 유교의 경전으로 육경(六經)의 한 가지이다. 점을 보는 점서(占書)인데, 경(經)과 전(傳)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경은 양효(陽爻)와 음효(陰爻)를 여섯 개의 선으로 된 그림에 설명을 붙이고 있다. 그 각각의 그림을 괘(卦)라고 하는데, 모두 64개이다. 서죽(三竹)과 산목(算木)을 써서 그림을 구하여 길흉을 판단한다.
주역은 음양(陰陽), 사상(四象), 팔괘(八卦) 등 우주관은 후세 철학, 윤리, 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공자는 주역을 대성이라 하고, 주자는 역경(易經)이라고 불렀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인 동시에 가장 난해한 글로 일컬어진다. 공자가 극히 진중하게 여겨 받들고 주희(朱熹)가 ‘역경(易經)’이라 이름하여 숭상한 이래로 주역(周易)은 오경의 으뜸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주역(周易)은 상경(上經)·하경(下經) 및 십익(十翼)으로 구성되어 있다. 십익은 단전(彖傳) 상하, 상전(象傳) 상하, 계사전(繫辭傳) 상하, 문언전(文言傳)·설괘전(說卦傳)·서괘전(序卦傳)·잡괘전(雜卦傳) 등 10편을 말한다.
한대(漢代)의 학자 정현(鄭玄)은 “역에는 세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간(易簡)이 첫째요, 변역(變易)이 둘째요, 불역(不易)이 셋째다”라 하였고, 송대의 주희도 "교역(交易)· 변역의 뜻이 있으므로 역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이간(易簡)이란 하늘과 땅이 서로 영향을 미쳐 만물을 생성케 하는 이법(理法)은 실로 단순하며, 그래서 알기 쉽고 따르기 쉽다는 뜻이다. 변역이란 천지간의 현상, 인간 사회의 모든 사행(事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뜻이고, 불역이란 이런 중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줄기가 있으니 예컨대,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해와 달이 갈마들어 밝히고 부모는 자애를 베풀고 자식은 그를 받들어 모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주희의 교역이란 천지와 상하 사방이 대대(對待)함을 이르는 것이고, 변역은 음양과 주야의 유행(流行)을 뜻하는 것이라 하였다. '설문(說文)'에는 역이라는 글자를 도마뱀(蜥易, 蝘蜓, 守宮)이라 풀이하고 있다. 말하자면, 易자는 그 상형으로 日은 머리 부분이고 아래쪽 勿은 발과 꼬리를 나타내고 있다. 도마뱀은 하루에도 12번이나 몸의 빛깔을 변하기 때문에 역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역은 일월(日月)을 가리키는 것이고 음양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이상 여러 설을 종합해 보면 역이란 도마뱀의 상형으로 전변만화하는 자연·인사(人事)의 사상(事象)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례(周禮)' 춘관편(春官篇) 대복(大卜)의 직(職)을 논하는 글에 "삼역법(三易法)을 장악하나니 첫째는 연산(連山)이요, 둘째는 귀장(歸藏), 셋째는 주역인데 그 괘가 모두 여덟이고 그 나누임이 64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한대의 두자춘(杜子春)은 연산은 복희(伏羲), 귀장은 황제(黃帝)의 역이라 하였고, 정현은 역을 하(夏)나라에서는 연산이라 하고 은(殷)나라에서는 귀장, 주(周)나라에서는 주역이라 한다고 하였다. 아무튼 연산·귀장은 일찍이 없어지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주대(周代)의 역인 주역(周易)뿐이다.
역의 작자에 대해서는 주역(周易) 계사전에 몇 군데 암시가 있다. 그 중 뚜렷한 것은 "옛날 포희씨(包犧氏)가 천하를 다스릴 때에 위로 상(象)을 하늘에서 우러르고 아래로 법을 땅에서 살폈으며 새와 짐승의 모양, 초목의 상태를 관찰해 가까이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해, 이로써 비로소 팔괘(八卦)를 만들어 신명(神明)의 덕에 통하고 만물의 정에 비기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복희씨가 팔괘를 만들고 신농씨(神農氏, 혹은 伏羲氏, 夏禹氏, 文王)가 64괘로 나누었으며, 문왕이 괘에 사(辭)를 붙여 주역(周易)이 이루어진 뒤에 그 아들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지어 완성되었고 이에 공자가 십익을 붙였다고 한다. 이것이 대개의 통설이다.
역을 점서(占筮)와 연결시키고 역의 원시적 의의를 점서에 두는 것은 모든 학자의 공통된 견해이다. 어느 민족도 그러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대사(大事)에 부딪히면 그 해결을 복서(卜筮)로 신의(神意)를 묻는 방법을 썼다. 하여튼 처음 점서를 위해 만들어진 역이 시대를 거치면서 성인(聖人) 학자에 의해 고도의 철학적 사색과 심오한 사상적 의미가 부여되어 인간학의 대경대법(大經大法)으로 정착된 것이다.
▲ 서전(書典)
서전(書典)은 서경(書經)에 주해를 달아서 편찬한 책이다.
송(宋)나라 때 주희(朱憙)가 제자인 재침을 시켜서 주해한 글을 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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