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교체 종신제 폐지 영도체제를 규정하는 중국 최고지도자인 국가주석 퇴진은 누가 결정하는가?
글: 관령(關嶺)
신중국 성립이래, 공식적인 발표에 따르면,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등 5대의 최고지도자가 있었다. 마오쩌둥시대에는 최고지도자의 종신제를 실행했다. 1961년 마오쩌둥은 영국의 육군원수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를 접견할 때, 몽고메리가 그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묻자, 마오쩌둥은 이렇게 대답한다: "분명하다. 류샤오치(劉少奇)이다. 그는 우리 당의 제1부주석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바로 그이다."
류사오치가 타도된 후, 마오쩌둥은 린뱌오(林彪)를 후계자로 세운다. 린뱌오는 913사건으로 이국땅에서 사망한다. 마오쩌둥은 다시 왕홍원(王洪文)을 후계자로 세운다. 사실은 증명한다. 왕홍원은 후계자가 마땅히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지 못하여, 대임을 맡을 수가 없었다. 1976년초, 마오쩌둥은 다시 화궈펑(華國鋒)을 후계자로 세운다.
화궈펑은 비록 '영명한 지도자'로 추앙되었지만, 당내에 경력도 없고, 실력도 없었다. 1978년, 중공 13기 3중전회가 개최된 후, 화궈펑은 점차 권력중추에서 밀려나고, 중국은 덩샤오핑시대로 접어든다.
마오쩌둥인 종신제로 개인독재를 한 것과 비교하면, 덩샤오핑은 일찌감치 1980년에 당과 국가의 영도체제의 개혁을 제안하고, 집단지도체제를 견지하며,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에 반대하며, 종신제를 폐지하고, 은퇴제도를 마련한다. 나중에 중국은 확실히 종신제를 폐지했고, 은퇴제도를 건립했다. 그러나 당과 국가지도자의 은퇴연령은 규정해두지 않았다. 그리고 중공의 당장에는 중공중앙총서기, 중앙군위주석에 대하여도 임기제한을 규정하지 않았다.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2016년, 18기 6중전회 문건기초위 멤버인 덩마오셩(鄧茂生)이 외국기자와의 한담때, 정치국상위의 "칠상팔하(七上八下, 즉 67세는 한번 더 취임할 수 있고, 68세는 퇴임한다는 것)"의 연령규정을 부인한다. 덩마오셩은 이렇게 강조했다. 중요 지도자의 은퇴여부에 대하여 규정이 있고, 엄격한 조직절차가 있다. 그러나 실제상황에 맞추어 신축성있게 처리한다." 칠상팔하는 그저 민간의 말일 뿐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의 공식적인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의 은퇴에 관한 공개보도를 보면, 발견할 수 있다. 중공지도자가 언제 은퇴할지에 대하여는 모두 지도자 자신이 제안해서, 중앙전체위원회의 동의를 받아 권력교체를 완성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외부에서 알 수가 없고, 권력교체가 되어야 비로소 알게 된다.
1987년 중공 13대때 덩샤오핑은 중앙정치국상위와 중앙고문위원회주임의 직위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보통당원의 신분으로 중앙군사위주석직은 유임했고, 계속 권력을 장악하여, '반퇴(半退)'를 실현했다.
64사건이 발생한 후, 덩샤오핑은 은퇴를 결정한다. 1989년 9월, 덩샤오핑은 장쩌민, 리펑, 챠오스, 야오이린, 송핑, 리루이환, 양샹쿤, 완리와 얘기를 나눈다. 그는 11월초 중공 13기 5중전회에서 은퇴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같은 날, 그는 중공중앙정치국에 서신을 보내, 중앙군사위주석의 직위에서 사임하겠다고 말한다. 11월, 13기 5중전회는 덩샤오핑의 신청에 동의하고, 장쩌민이 중앙군사위주석의 직무를 맡기로 결정한다.
회의공보에는 덩샤오핑이 "당과 국가의 근본이익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신체가 아직 건강할 때 현임직무를 사임함으로써, 그가 여러해동안 계속 말해왔던 지도자의 직위에서 완전히 물러나겠다는 숙원을 실현했고,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의 넓은 흉금을 보여주었다. 전체 동지는 그가 직접 간부의 영도직위종신제를 폐지하는데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는데 대하여 숭고한 경의를 표시했다."
장쩌민은 이렇게 말했다. 덩샤오핑이 은퇴하겠다고 말한 후, "처음에는, 중앙상위는 현재 우리나라의 건설과 개혁이 관건적인 시기라는 점을 고려하고 또한 복잡한 국제정세에 직면해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덩샤오핑동지가 계속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그가 조금 더 늦게 은퇴할 것을 간절히 희망했다. 샤오핑동지는 당의 사업은 계속 이어가야 하고, 국가의 장기간의 안정이라는 역사의 고도에서 심사숙고하여 계속 설명했다. 지금 물러나는 것이 더욱 좋다."
2002년 11월 중공16대에 장쩌민은 중공중앙총서기의 직위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계속하여 중앙군사위주석의 직위는 유임한다. 장쩌민, 후진타오등 중공의 신임, 전임 상위가 16대 대표회의에서 만났을 때, 후진타오는 장쩌민을 핵심으로 하는 제3대 지도자집단의 역사적 공헌을 높이 평가했다. 후진타오는 이렇게 말한다. 당의 사업이 계속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 중의 많은 동지들은 앞장서서 중앙지도자의 직위에서 물러났다. "공산당원으로서의 넓은 흉금과 높은 품격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장쩌민 동지, 리펑, 주룽지, 리루이환, 웨이젠싱, 리란칭등 동지들에게 기타 지도자동지들에게 숭고한 경의를 표한다."
덩샤오핑이 사임한 것과 마찬가지로, 2004년 9월, 장쩌민은 중앙정치국에 서신을 보내 중앙군사위주석의 직무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한다. 같은 달 거행된 16기 4중전회는 장쩌민의 신청에 동의하고, 후진타오가 중앙군사위주석을 맡는다. 회의공보에서는 장쩌민이 중공중앙총서기와 중앙군사위주석의 직무에서 물러난 것은 모두 "스스로 제안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군사위확대회의에서, 장쩌민은 이렇게 말한다: "당의 16대를 준비하는 기간에, 당과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과 장기적인 안정을 고려하여, 나는 더 이상 중앙지도자직무를 맡지 않겠다고 얘기했고, 중앙위원회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당의 16대에서, 나는 총서기를 넘겨주고, 2003년의 전인대회의에서, 나는 국가주석의 직위를 넘겨주었다. 당시 중앙은 내가 당과 국가의 군사위주석을 유임하도록 결정했다. 그 이후, 나는 계속 적당한 시기에 지도자직위에서 완전히 물러나기를 희망했고, 지금 나의 바램은 실현되었다."
후진타오는 이렇게 말했다. 장쩌민이 스스로 군사위원회 주석의 직위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것은 "우리 당, 국가, 군대의 고위지도자의 신규교체의 제도화, 규범화, 절차화에 역사적인 공헌을 했다. 장주석의 높은 품격과 넓은 흉금은 우리에게 빛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2012년 11월 중공18대에서 후진타오는 완전히 물러난다. 시진핑은 중공중앙총서기, 중앙군위주석을 승계한다. 후진타오, 시진핑등 중공 신구상위가 18대 대표대회에서 만났을 때, 시진핑은 이렇게 말한다: "당과 인민의 사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후진타오동지 및 우방궈, 원자바오, 자칭린, 리창춘, 허궈창, 저우용캉등 동지는 앞장서서 당중앙의 지도자직위에서 물러났고, 숭고한 품성과 높은 품격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숭고한 경의를 표한다."
다음 날, 후진타오, 시진핑은 중앙군위확대회의에 참석한다. 시진핑은 이렇게 말한다. 후진타오가 스스로 더 이상 중공중앙총서기, 중앙군사위주석의 직무를 맡지 않겠다고 하였다. "당의 18대와 18기 1중전회는 후주석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후주석이 이런 중대한 결정을 내린 것은 그의 당, 국가, 군대사업의 발전이라는 전체적인 국면을 깊이 고려한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고, 마르크스주의정치가와 전략가로서의 장기적 안목과 넓은 흉금 그리고 높은 품격을 충분히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