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에 변법자강운동으로 유명한 양계초(1873년-1929년)는 슬하에 아홉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의 세 아들이 중국과학원의 원사가 되는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아홉자녀는 차례로 사순(思順), 사성(思成), 사영(思永), 사충(思忠), 사장(思庄), 사달(思達), 사의(思懿), 사녕(思寧), 사례(思禮)이다. 이 중 사순, 사성, 사장은 양계초의 원부인인 이혜선(李蕙仙, 1868년-1923년)의 소생이고, 나머지는 양계초의 두번째 부인인 왕계전(王桂筌, 1885년-1924년)의 소생이다.
장녀 양사순(梁思順, 1893-1966) 양사순은 광동신회에서 태어났고, 일본여자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교육과 훈도를 받아 시사와 음악을 좋아했다. 양계초가 살아있을 때, 그녀는 오랫동안 부친의 조수역할을 했고, 동생들을 보살펴서, 양계초가 매우 아꼈다. 양계초가 일본에 있을 때에는 그녀가 양계초의 일어통역을 맡았고, 양계초의 사망후에는 부친의 편지들을 모아서 <<양계초년보장편>>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녀는 또한 <<예형관사선>>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1908년에 초판이 나오고 이후 여러차례 재판이 나왔다. 이것은 양계초의 학술사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1938년 남편 주희철(周希哲)이 사망한 후 그녀는 혼자서 4명의 아이를 키웠다. 그녀는 해방후에 북경시동성구정협위원과 중앙문사관 관장을 지냈다.
장남 양사성(梁思成, 1901-1972) 양사성은 양계초의 큰아들이다. 중국과학원 원사(院士)이며, 국제적으로 저명한 건축가이다. 중국건축학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 비정청의 그에 대한 평가는 "중국고대건축연구의 조사"이다. 그는 1901년 4월 20일 일본에서 태어나고, 1915년-1923년에 북경청화학교에서 공부하며, 1924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코넬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곧 학교를 바꾸어 펜실베니아대학 건축과로 가고, 1927년 펜실베니아대학 건축학석사를 취득한다. 1927,28년에는 하버드대학 미술연구원에서 공부한다. 1928년 심양동북대학에 건축과를 만들어 1931년까지 건축과 주임으로 근무한다. 1931년-1946년에는 중국영조학사의 연구원으로 근무한다. 이 기간중 1746,47년에 미국예일대학 초빙교수로 가 있기도 하며, 중국을 대표하여 유엔빌딩의 설계위원회 고문을 맡기도 한다. 1948년 프린스턴대학의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다. 1946년-1972년에는 청화대학 건축학과 주임을 맡고, 1972. 1. 9. 세상을 떠난다. 그의 처인 임휘인은 중화민국 제일의 재녀로 알려진 여인이다. 일찌기 그들 부부는 전국의 건축물을 돌아보고 <<중국건축사>>를 저술했을 뿐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국휘(國徽)의 설계에도 참여하고,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의 설계에도 참여하였다. 양사성의 아들인 양종계(梁從誡)는 중국에서 환경운동단체 <<자연의 친구(自然之友)>>를 이끄는 환경운동가이다.
차남(次男), 양사영(梁思永, 1904-1954) 양계초의 둘째아들이다. 중앙연구원의 제1기 원사이며 고고학자이다. 그는 1923년 미국하버드대학의 대학원으로 가서 고고학과 인류학을 배웠다. 1930년에 귀국한 후에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 고고팀에서 일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성립후에는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 부소장을 맡았다. 그는 후강유적지를 발굴하고, 처음으로 지층상에서 앙소, 용산, 상문화의 상대연대관계를 밝히고, 하남 안양 후가장의 상왕능구를 발굴하고, 1930년에 영문으로 <<산서 서음촌 사전유적지의 신석기시대의 도기>>라는 글을 불표하는데, 중국앙소문화에 대한 첫번째의 진지한 연구성과였다.
삼남(三男), 양사충(梁思忠, 1907-1932) 양계초의 셋째아들로 젊은 나이에 죽은 포병장교였다. 양사충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얼마되지 않아 미국으로 유학간다. 그는 버지니아대학 육군학원과 웨스트포인트군사학교에서 공부한다. 1930년대에 졸업하고 귀국하여 국민혁명군에 가입한다. 입대후, 유학경력과 뛰어난 재능으로 빠른 시일내에 국민혁명군 제19로군 포병장교가 된다. 1932년 송호항전중에, 양사충은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이나, 25세의 나이로 복막염을 앓으면서 약을 잘못 먹어, 치로시기를 놓치고 세상을 떠난다.
차녀(次女) 양사장(梁思庄, 1908-1986) 유명한 도서관학자이다. 1925년 부친의 말에 따라, 양사성은 큰언니인 양사순을 따라 카나다에서 공부한다. 먼저 오타와중학에서 공부하고, 공부를 마친 후 맥길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다. 1930년, 그녀는 맥길대학의 문학학사학위를 취득한다. 다음 해, 미국의 컬럼비아대학 도서관학과에서 공부하고, 도서관학사학위를 받는다. 1931년 귀국후 도서관사업에 투신한다. 북평도서관, 연경대학도서관, 광주중산도서관에서 외국어목록편찬업무를 맡는다. 1936년 양사장은 다시 연경대학으로 돌아와서, 영견대학도서관의 외국어편찬목록팀장, 주임을 맡는다. 1943년-1946년에는 전쟁으로 성도로 옮겨가 연경대학 도서관주임을 맡고, 1946년 연경대학이 북경으로 돌아온 후에는 계속하여 도서관 외국어목록편찬팀팀장을 맡고 도서관 부주임을 맡는다. 1952년 연경대학의 북경대학에 흡수되는 조정이후에는 북경대학도서관의 부관장을 맡는다. 그녀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등 언어에 정통했고, 외국어 사전과 서간자료를 잘 알았으며 평생을 도서관에서 보낸다. 1980년에는 중국도서관학회 부이사장을 맡기도 하였다.
사남(四男) 양사달(梁思達, 1912 - ) 유명한 경제학자. 1935년 양사달은 남개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다. 이후 남개대학의 석사연구생이 되며 1937년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는 장기간 경제학을 연구하고, 항전기간동안 중경중국은행 총관리처와 중국은행 장사지행에서 근무한다. 1949년 북경국무원 외자기업국(중앙공상행정관리국의 전신)의 비서처에서 근무하고, 조사연구처에서 통계과 과장을 맡는다. 그는 일찌기 중국과학원 경제연구소의 <<중국근대경제사>>의 편찬작업에 참여하고, 1965년에는 <<구중국기계면분공업통계자료>>라는 책을 주편하기도 한다. 1972년에 퇴직하였다.
삼녀(三女) 양사의(梁思懿, 1914-1988) 유명한 사회활동가. 양사의는 1933년 연경대학 의학부예비반에 합격한다. 3년간 준비후에 협화의학원에서 의학을 배운다. 나중에 혁명에 참가한 후 연경대학 역사학과에 들어간다. 1935년부터 학생운동에 투신한다. 그녀는 일찌기 중국공산당의 외곽조직인 "중화민족해방선봉대"의 대대장을 맡는다. 12.9운동의 핵심학생이었고, 연경대학교 학생지도자였다. 즉, 연경삼걸의 한 명이었다. 그녀는 193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7년에 평진유망학생집훈반에 참가하며, 상해에 파견되어 기독교여청년회노동부에서 여성노동자업무를 담당한다. 1941년에는 남편과 함께 미국을 가서 미국역사를 배운다. 1949는 신중국탄생이후에는 즉시 귀국한다. 이후 제로대학의 여성부주임, 산동성 부녀연합회주석, 중국적십자회국제연락부부부장, 고문등을 지내고 오랫동안 대외연락업무를 맡는다. 여러차례 중국을 대표하여 국제적십자회의에도 참가한다.
사녀(四女) 양사녕(梁思寧, 1916- ) 영광스러운 혁명군인. 양사녕은 상해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남개대학에서 공부한다. 1937년 일본군이 남개대학을 폭격한 후, 더 이상 공부하지 못한다. 1940년, 셋째언니 양사의의 영향을 받아, 양사녕은 신사군에 입대한다. 신사군 123지대 사령부에서 근무한다. 다음 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건국초기에 진의 원수는 건축학자인 양사성(양계초의 장남)에게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고 한다. "그 때 나의 수하에는 두명의 특수한 병사가 있었다. 하나는 양계초의 딸이고, 다른 하나는 장태염(章太炎)의 아들이었다" 진의 원수가 말한 양계초의 딸이 바로 양사녕이었다. 1948년 그녀는 좌경사조의 영향으로 당적을 박탈당하고 이후 35년간 억울하게 지낸다 1983년이 되어서야 당적을 회복한다. 퇴직후 양사녕은 계속 제남 모부대의 간부휴양소에서 거주한다.
오남(五男), 양사례(梁思禮, 1924- ) 양계초의 막내아들이다. 중국과학원 원사이며, 국제우주항공과학원의 원사이다. 일찌기 국제우주항공연합회 부주석에 선임된 적이 있다. 그는 미사일제어시스템 전문가이고, 유도탄제어시스템연구개발영역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우주CAD기술의 창도자이며 기초자이고, 중국의 우주사업에 뛰어난 공헌을 하였다. 양사례는 1941년 고교졸업후 미국퍼듀대학에 유학을 하여 2년만에 3년과정을 마치고, 신시내티대학에서 석사(47년), 박사(49)학위를 받는다. 1949년 10월 귀국한 후, 전신, 방송국등의 건설업무를 수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