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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태(楊永泰): 장개석의 제일모사

 

 

글: 유계흥(劉繼興)

역사상 일종의 지식엘리트들은 "문객(門客)", "군사(軍師)", "막료(幕僚)"등의 신분으로 자신의 '주인', '주공'을 위하여 계책을 내고, 근심거리와 어려움을 해결해주는데, 이들을 "모사(謀士)"라고 불렀다. 고대의 저명한 모사로는 범증, 진평, 곽가, 가후(賈詡)등이 있다.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지모가 출중하고, 기계묘책(奇計妙策)을 많이 내놓았다. 장개석의 곁에도 국민당정계에서 '제일모사"라고 불리던 사람이 있었다. 장개석의 수석지낭(首席智囊)"으로 이름은 양영태이다.

 

1928년, 장개석이 일찌감치 결의형제를 맺은 당시 국민정부 외교부장 황부(黃郛)는 장개석에게 지식이 뛰어난 양영태를 추천한다. 그러나 장개석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나중에 송호경비사령관 웅식휘(熊式輝)는 다시 양영태의 '삭번(削藩)' 묘계를 장개석에게 올린다. 이때, 장개석은 마침 각지에서 병력을 지니고 있는 군벌의 세력이 커져서 고민하고 있었다. 양영태의 헌책은 설중송탄과 같았다. 장개석에 있어서는 오랜 가뭄끝애 내린 단비와 같았다.

 

장개석과의 첫번째 만남에서, 양영태의 지모는 장개석을 크게 탄복시킨다. 그는 장개석을 위하여 현대판의 <융중대>를 내놓는다. 장개석이 당금천하의 대사에 관한 견해를 묻자, 양영태는 미리 생각해두었다는 것이 시원시원하게 설명하며 오랫동안 생각해둔 '삭번책'을 말한다: "경제적인 면에서 풍옥상의 제2집단군을 와해시키고, 정치적으로 염석산의 제3집단군을 해결하며, 군사적으로 이종인의 제4집단군을 해결하며, 외교방법으로 장학량의 동북군을 상대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장개석은 마치 성호관정(醒醐灌頂)처럼 머리가 맑게 깨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풍옥상이 점령하고 있던 하남, 섬서, 감숙, 청해등의 성은 모두 척박한 땅이다. 풍옥상의 방대한 부대를 먹여살리는데는 힘이 들었다. 풍옥상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돈이 있어야 군수를 해결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그의 수하의 적지 않은 장수들은 병력을 이끌고 전투하는 것이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고 돈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그후 장개석은 돈을 이들에게 건네고, 관직을 주겠다고 약속하여 풍옥상의 부하들을 매수한다. 예를 들어, 석우삼(石友三), 한복구(韓復榘)가 그들이다. 여기에 다시 무력으로 위협하여, 마침내 풍옥상의 집단은 와해되고 만다. 중원대전후, 고뇌에 빠진 풍옥상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의 서북군은 뭐든지 다 좋았는데, 하나는 돈을 못이겼고, 둘은 여자를 못이겼다.

 

계산에 밝은 염석산은 스스로 자신의 역량이 장개석집단에 대항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염석산은 정력을 산서경영에 쏟는다. 한 마음으로 산서를 그의 '독립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양영태는 이 점을 알아보았고, 염석산에 대하여는 정치적 수단으로 해결하기를 제안한 것이다.

 

실력을 갖춘 몇몇 거대한 지방군벌중에서 계계(桂係)는 일찌감치 국민당에 귀부한다. 북벌때 계계는 제7군으로 편제되고 장개석 산하의 주력군이었다. 다만 그들은 장개석이 급양분야에서 제1군(황포계)에 치우치는데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계계는 군사실력이 계속 증가하면서, 야심이 커져갔다. 1927년 8월, 장개석이 제1차 하야를 하는데, 이는 계계의 압박과 관련이 있다. 양영태는 계계에 대하녀는 반드시 군사적으로 철저히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후, 1949년까지 20여년동안, 장개석과 계계의 갈등은 어떤 때는 완화되고 어떤 때는 긴장되었다. 지방실력파중에서 장개석에게 타격이 가장 크고, 투쟁기간이 가장 길었던 군사집단이 된다. 장개석과 계계의 갈등은 공산당이 승리할 때까지 이어진다. 장개석이 대만으로 패주한 후에야 끝이 난다. 이를 보면 당시 양영태의 문제에 대한 판단이 정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친 장작림의 의발을 이어받은 장학량은 동북의 옥토에 웅거하고 있어, 장개석의 남경정권의 핵심통치구역에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서히 도모해도 되었다. 그래서 양영태는 외교수단을 사용할 것을 건의한다. 이를 통하여 우환을 사라지게만들면 되는 것이다.

 

"각개격파"를 하되 효과적인 '삭번책'을 내놓은 후, 양영태는 장개석에게 원교근공, 조호이산, 차도살인, 부저추신등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장개석이 그후에 '삭번책' 방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양영태는 중시받는다.

 

1931년, 장개석은 양영태를 파격적으로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비서장에 임명한다. 양영태가 제출한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는 장개석이 채택한 이 시기의 집정방침이었다. 장개석의 '공농홍군'포위포벌에 공로가 있어, 양영태는 다시 국민당 제5기 후보중앙위원에 당선된다.

 

이 시기에 명목상으로 전국통일을 완성한 장개석은 자신의 체제내의 '삭번'을 하면서, 공산당을 상대했다. 그러다보니 업무에 두서가 없었다. 양영태는 적시에 장개석에게 건의한다. 시종실을 두어, 공문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장개석이 비준한다. 시종실이 건립된 후, 장개석은 일처리가 아주 편해진다. 이후 전국각지에서 오는 보고서, 서신, 건의, 청시(請示)등 각종 공문은 모두 시종실로 모였다. 시종실이 다시 장개석에게 보내어 결재받는다. 그러나 문건이 너무 많아서, 장개석의 시간을 많이 빼앗게 된다. 양영태는 이 모습을 보고는 다시 아이디어를 낸다: 먼저 받은 문건전보를 정리할 후 문건의 요점을 정리하고, 처리의견을 제출하며 일종의 공문보고양식을 만들어낸다. 그 후에 경중완급을 나누어 장개석에게 보내어 결재받는다. 이 방법은 과연 효과가 있었고, 장개석의 업무효율은 크게 제고된다.

 

시종실의 권력은 갈수록 커졌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비서장인 양영태는 장개석의 수석군기대신이 된다. 많은 군정요원들이 장개석을 만나려면, 양영태를 거쳐야 했다. 이 시기는 양영태등을 핵심으로 하는 국민당 정학계(政學係)가 대거 팽창한 단계이다. 봉강대리직급의 관료들 중에서 정학계가 거의 3분의 1을 점한다. 당시 "성부주석(省府主席)은 열중의 아홉, 행영주임(行營主任)은 다섯중 셋"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정학계는 정부를 장악했을 뿐아니라, 진과부, 진입부형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CC계로부터 당무대권도 배앗아 온다. 이렇게 하여 양자간의 갈등은 격화되고, 투쟁은 지속된다.

 

호한민(胡漢民)등 국민당원로도 양영태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CC계, 황포계와 연합하여 양영태 및 그의 조종하에 권세가 커진 정학계를 공격한다. 장개석은 각파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양영태의 직무를 조정하여 공격을 피하게 할 생각을 가진다. 1935년 12월 17일, 장군(張群)은 외교부 부장이 되고, 장개석은 양영태에게 호북성정부주석을 맡게 한다. 다음해 1월에는 성보안사령관을 겸직하게 한다.

 

누구도 생각지 못하게, 그후 1년도 되지 않아, 양영태는 목숨을 잃는다. 1936년 10월 25일 오후, 양영태는 한구 강한관 성정부전용부두에서 암살당한다. 도대체 누가 양영태를 암살했을까? 원래 애국청년의 자발조직인 '중화청년항일서간단(中華靑年抗日鋤奸團)'이 한 일이다.

 

모두 알다시피, 정학계는 친일적이다. '양외필선안내'는 바로 양영태가 내놓은 방침이다. 그래서 양영태는 '중화청년항일서간단'의 암살대상이 된 것이다. 양영태가 장개석의 곁에 있을 때는 경비가 삼엄해서 접근할 수 없었지만, 장개석을 떠나서 지방으로 오게 되니 그들은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암살임무를 집행한 사람은 진기초(陳夔超와 공백주(龔柏舟)였다. 도망과정에서 진기초는 돼지를 잡는 백정에게 허리를 붙잡히고, 공백주는 남경까지 도망친 후에 붙잡힌다. 진유광(陳有光)은 나중에 귀주의 산으로 도망쳐 숨는다. 진기초와 공백주는 사형판결을 받는다. 집행하기 전에, 일본비행기가 무한대공습을 한다. 중경으로 가는 도중에 공백주는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구하고, 진기초는 중경까지 압송된 후 총살당한다.

 

양영태가 암살된 후, 장개석은 그를 그리워했다. 일찌기 시종실의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양영태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힘을 많이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같은 류의 말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장개석이 양영태를 잃은 것은 조조가 곽가를 잃은 것과 같다.

蒋介石第一謨士--杨永泰

杨永泰,男,1880年出生于广东茂名高州大井镇大坡山村,字畅卿,国民党高级官员,蒋介石首席智囊,政学系的巨人,北京政法专业学校毕业。

杨永泰曾任广州《广南报》编辑、广东咨议局议员。
1912年任中华民国临时众议院议员并加入国民党。次年任国会参、众两院宪法起草委员会,与沈钧儒等组织宪法党。
1914年在上海创办《正谊》杂志,并与黄兴等组织欧事研究会。
1918年后任广州军政府财政厅厅长、广东省长。1927年任南京国民政府军事委员会参议。
1936年10月25日,赴汉口日本领事馆宴会返回时,在江汉关轮渡码头被人开枪狙击身亡。译有《外交政策》《现代民主政治》等。
 
 
早年经历
杨永泰,1880年出生于广东茂名高州地区一个殷实之家。他早年受过严格的封建正统教育。
17岁时,考中广东茂名高州地区秀才。
21岁,杨永泰考入广州高等学堂,开始接受系统的西方近代教育。一年后,他又从广东转入北京政法专门学校学习法律。毕业后,他回到广州出任《广东报》记者、编辑。
很快,杨永泰便以文笔流畅、思维敏捷、立论深刻、思想活跃闻名于珠江两岸。
随着资历和才华的日渐长进,杨永泰开始涉足政坛。在孙中山积极掀起反清革命的同时,各省也发起了立宪运动,纷纷成立省谘议局,要求实行君主立宪。杨永泰在这场风潮中,积极支持君主立宪,并利用手中的舆论阵地,撰写了许多文章,竭尽全力为立宪运动摇旗呐喊。功夫不负有心人。
1908年,风华正茂的杨永泰以自己的能力、才华和鲜明的政治态度,当选为广东省谘议局议员。
结识蒋介石
1912年,杨永泰当选为中华民国临时国会议员,前往北京就职。1914年春,袁世凯废掉国会,杨永泰被迫离京南下,来到上海,与国会议员谷钟秀等创办《正谊》杂志。这年夏天,他与黄兴等人又组织了欧事研究会
1915年12月,蔡锷等人在云南发动护国战争,从云南、广西起兵,分别攻入四川和广东。1916年春,宣布独立的云南、贵州、广西、广东四省在广东肇庆组成了以唐继尧岑春煊为正副抚军长的肇庆军务院。正在上海主持报务的杨永泰投笔从戎,回广东参加护国运动。杨永泰回到广州后,入滇军将领李烈钧幕中,旋出任李烈钧两广护国军(第二军)司令部下属财政局局长。因杨永泰是广东人,门生故旧很多,筹备粮草很有门路,再加上他善于交际,颇有活动能量,故滇军将领很倚重他。肇庆军务院成立后,李烈钧又推荐他出任军务院财政厅厅长。
袁世凯死后,黎元洪继任中华民国大总统,段祺瑞出任内阁总理。军务院取消,民初国会重新恢复。以张耀曾李根源、谷钟秀等人为代表的旧国民党人组织政学会,杨永泰也参与了会章的起草,成为政学会的一名重要成员。
1917年7月,张勋复辟失败后,段祺瑞重新上台执政。段为实现独裁统治,拒不恢复《临时约法》和国会。孙中山举起了护法运动的旗帜,从上海南下广州,组织护法军政府。北京的国会议员纷纷南下广州,组织非常国会。
护法军政府成立后,孙中山对杨永泰很是信任和重用的。他内定杨永泰出任护法军政府财政厅厅长。杨永泰当时也满口答应,并十分感激孙中山的信任。政学会的张耀曾、李根源等人听说后,立即劝杨永泰说:“孙中山没有实力,是个空架子。以你的才华,如投靠西南实力派,定会前途无量。”
杨永泰虽足智多谋,但缺乏政治眼光。看到政学会都投靠了西南军阀,孙中山在广东的势力远远没有滇桂军阀势力强大,心里便动摇了。所以孙中山几次催他就职财政厅厅长时,他支支吾吾,迟迟不就。
杨永泰的这种投机态度,令孙中山周围的国民党人十分反感。
1917年秋,护法军与段祺瑞的北洋军阀激战于湖南、陕西、河南、山东等十余省。正当护法战争胜利进行时,控制了湘、川两省后的陆荣廷、唐继尧在政学会骨干的支持下,突然一反孙中山的护法号召,通电同意与北洋军阀进行议和。紧接着,西南实力派联合改组军政府,排挤孙中山,把护法军政府原来实行的大元帅首领制改为七总裁合议制,孙中山为七总裁之一。孙中山愤而辞职,离开广州前往上海。
1926年夏开始的轰轰烈烈的北伐战争,震撼了中国,也震颤了杨永泰的心扉。面对外面世界的剧烈变化,杨永泰萌动了结束蛰居生涯、重新寻觅进身之阶的念头。
1927年蒋介石下野之后,杨永泰向桂系李宗仁白崇禧上了一份万言书,陈述他对中国时局的看法和对现时政治的主张,表达了要跻身政坛的强烈愿望。李、白读完了这份万言书后,对杨永泰的才华十分敬佩,但又十分鄙视杨永泰的为人。他们认为:一个投靠过北洋军阀,投靠孙中山,也投靠过西南军阀的政客,在政治上靠不住!
这样李宗仁、白崇禧对杨永泰不予理睬。刚要出山便遭到了冷遇,杨永泰对新桂系自然十分恼怒。
执意要东山再起的杨永泰并没有灰心。他略施小计,便在南京政府交通部部长王伯群手下,谋了个顾问的职位。
杨永泰是一位非常聪明的政客,早在广州护法军政府时期,力图保持与各方面关系融洽。他一方面与政学会成员保持密切的关系,另一方面与滇军中级将领熊式辉等人又十分要好。与政学会成员的要好,使他日后成为新政学系首领之一;与熊式辉等人的要好,使他日后投靠蒋介石有了台阶。
熊式辉,江西安义人,比杨永泰小三岁,在护国战争中结识了杨永泰。他倾慕杨永泰的才华,两人结为挚友,为后来形成国民党内部的新政学系奠定了基础。在北伐战争中,熊式辉与他的好友赖世璜率国民革命军第十四军转战江西,投靠了蒋介石。
1928年春,蒋介石卷土重来时,任命熊式辉任淞沪警备司令。自此,熊式辉成为蒋介石的心腹之一。
正是通过政学系熊式辉的直接引荐,才华横溢的杨永泰才结识了蒋介石,并深受蒋的重用,得以施展其盖世才华。
1928年的春天,刚刚复出的蒋介石踌躇满志,准备第二次北伐。一天,他与时任外交部部长的盟兄黄郛闲谈。蒋介石痛感自己幕中人才匮乏,尤其缺乏足智多谋、运筹帷幄的“谋士”。所以他恳请黄郛结束政客生涯,跟自己共建“党国”。
对蒋介石的秉性十分了解的黄郛,对蒋介石说:“海内有奇才杨畅卿先生,胸罗经纶,足以佐治,凡吾所能者,畅卿无不能,畅卿所能者,有时吾还不及,国家大计,望公商之。”
在蒋介石的印象中,黄郛是最有才华的佐政之才,如果没有这位盟兄制定的“离俄清共”之计,哪会有今天的南京政权呢?而这位才华横溢的盟兄却说当今海内还有比他更杰出的幕中高手,怎不令他重视呢?
杨永泰真有这么大的本领,居然令黄郛如此郑重地向蒋介石引荐?蒋介石半信半疑。在北洋政府时代,杨永泰可不是一般的“名士”,他是政学系的首领之一,是民初政坛上曾活跃一时的风云人物。对于这样一位风云人物,长期在南方活动的蒋介石也有所闻,却并不是非常了解;但长期在北方军政界活动并一度担任北洋政府总理高职的黄郛,却是一清二楚。
1932年,当蒋介石亲赴武汉指挥对鄂豫皖苏区第四次“围剿”时,杨上万言书,阐述“攘外必先安内”的理论,提出“安内”(即“剿匪”)必须“三分军事,七分政治”的主张,得蒋赏识,立即擢用为鄂豫皖三省“剿匪”总司令部秘书长,随蒋来汉赴任。杨在所辖区建立行政督察专员制度,在各县实行“保甲法”,并提出“整饬吏治,综核名实,信赏必罚”,以提高行政效率,加紧镇压人民。在任军事委员会委员长南昌行营政治厅厅长时,加紧训练人员、整顿保甲、修筑公路、实行新生活运动等具体政治“剿匪”措施,由此备受蒋介石青睐,遂与熊式辉、张群等成为政学系的核心人物。
1935年3月任军事委员会委员长武昌行营秘书长,11月为中国国民党第五届中央候补执行委员,12月任湖北省政府主席。次年1月兼任湖北省保安司令。杨坚持“攘外必先安内”的方针,整顿湖北保甲制度,编整团队,“剿匪”、“清乡”。督促开展武昌市政建设,把省政府门前从平湖门阅马场的平阅路翻修为水泥路面,改名为“彭刘杨路”;扩宽东厂口至大东门的马路,命名为“熊廷弼路”;开辟文昌门越紫阳湖往通湘门的沙石马路,命名为“张之洞路”;兴建武昌长街大马路(即今民主路);在蛇山抱冰堂南面兴建湖北省图书馆大楼。
同年10月25日,赴汉口日本领事馆宴会返回时,在江汉关轮渡码头被人开枪狙击身亡。译有《外交政策》、《现代民主政治》等。
逼迫长征
中原大战后,蒋介石踌躇满志,举兵南进,开始向中共领导的革命根据地大举进攻。然而三次“剿共”连连败北。
杨永泰认真分析了前三次“剿共”失败的原因,发现蒋的失策在于把红军看成与北洋军阀一样的军队。实际上,红军绝非乌合之众,而是一支不怕死、不受抚、不感恩、不惧威的真正“党军”。
红军的最大不同是实行政治建军,兵民一体,上下同心,因此必须采取新的策略才能“剿”灭。红军既然是靠政治起家的,那就来个“政治剿匪”——“三分军事,七分政治”。
杨永泰派人向蒋呈递了一份“万言书”,陈述了自己对于“剿共”的意见:“吾随先生出师,细观江西诸地,渐觉共党不足为虑。所难之点为共党与‘匪区’民众结为一家,两者合手,实为一严重问题。民众与共党合为一家,在于吾地方官吏风气日下,致使民众为共党所利用。”
杨永泰的下面几句话更是一下子说到了蒋介石的心坎上:
我之所言新的谋略,意即剿共实行三分军事,七分政治。所谓七分政治,在吾,则加强对匪区民众管理,加强对匪区民众宣传,澄清吏治,务使土豪恶霸横行乡里者灭绝。对贫穷困苦弱孤者,给予救济,对匪区民众日常生活给予指导和帮助。这样,渐使匪区民众日益脱离共党,不为共党所左右。达此目的,即剿共不愁也。
所谓三分军事,在下大力于上述诸务中,然后派重兵对匪区共党实行严厉的围剿,务使除恶务尽,不留后患。
同时对投诚者,要给予宽大和出路,实行先生之剿抚兼施。吾认为,如实行三分军事,七分政治,变军事剿共为政治剿共,不出一年,会初见成效。 
蒋介石对“万言书”大为赞赏。1932年4月,蒋到汉口主持鄂豫皖三省“剿共”军事,决定破格提升杨永泰为鄂豫皖“剿共”司令部秘书长,令其随行前往武汉。这样,杨永泰正式成为蒋介石的帐前军师。
杨永泰的“三分军事,七分政治”方针可谓老谋深算。蒋介石照此实施,立即在“围剿”鄂豫皖苏区中显示了威力。由于张国焘的指挥错误和政治上未能适应蒋介石的新策略,没有采取应变措施,致使红军被迫撤出鄂豫皖根据地,向西退去。
蒋介石大喜过望,对杨永泰更加言听计从。他立即移营江西,全力“围剿”中央苏区。
1933年5月7日,蒋介石改“行辕”为军事委员会委员会长行营,任命杨永泰为南昌行营秘书长,全权总揽政治事务。杨永泰负责的第二厅专营“政治剿共”,所以南昌行营上下又称杨永泰为“七分厅长”。
第四次“围剿”准备不充分,蒋介石并未得手。尽管如此,他对杨永泰的方针并没有动摇,而是马上组织第五次“围剿”,调集50万重兵对付江西中央苏区
杨永泰提出的“三分军事,七分政治”在第五次“围剿”中得到了充分的发挥和运用:他组织求是通讯社,专办行营新闻发稿工作;组织努力剧团和奋斗文艺社,作为“剿匪”前线的“文化标兵”;实行军人独裁,强化保甲组织,严厉实行连坐制,对苏区民众实行所谓“软化、分化、感化”政策。更狠的是,杨永泰建议蒋介石对苏区实行严格的经济封锁。国民党利用军队、行政官员、各省党部以至基层党部、各地乡绅等,组成严密的网络系统,要与红军打一场“政治战”、“经济战”和“立体战”。
仅一年多时间,这些措施便收到奇效,逼迫中央红军挤出苏区,进行长征。杨永泰因谋划“剿共”有功,当选为国民党第五届候补中央执行委员。
夺取四川
1934年底,中央红军主力长征进入西南,蒋介石派大军尾随于后。
蒋介石因追剿红军入川,发现这一带山川险要,川西平原富饶,不愧为“天府之国”,如果将来中日开战,这里无疑是最好的战略大后方。于是他产生了借追剿红军之机派中央军入川的想法。
杨永泰看出蒋的意图,趁机建议:“应撤销南昌行营,改设重庆行营,一来可以继续追剿‘共匪’,二来中央军队可以入川,达到统一四川的目的。”蒋介石听从其言,很快撤销南昌行营,任命杨永泰为武昌行营秘书长,伺机图川。
号称“巴壁虎”的四川实力派刘湘对蒋早有防备。他积极组织力量围剿红军,并以此阻止蒋军入川,但遭到红军反击,损兵折将。刘湘无奈,只好跑到南京,请求蒋介石给予经济和武器方面的援助,并声明不要蒋的军队。
蒋介石本打算就此派中央军10个师入川,不料刘湘有拒绝军队入川的前提条件——杨永泰审时度势地献上良策:“目前要先抓到刘湘,答应给钱给军械,不派兵,只要求派遣一个没有武装的参谋团驻重庆,协助川军计划作战。”
贺国光率参谋团随杨永泰一到四川,便如同孙悟空钻进铁扇公主肚子里一般,施展“掏心计”。第一招,便是帮刘湘把四川省政府组建起来,然后拟出一道通电,告示四川大小首脑立即交出防区,拥护四川统一。
大小军事首脑怎敢违抗,纷纷复电表示拥护,乐得“巴壁虎”合不上嘴。
杨永泰趁机建议:打破防区划分,重新划定18个行政专署,由省政府派人担任专员;原来的地方官立即调动,由省府重新任命,对原来官员进行专门培训。这个建议立即被刘湘采纳,通令照办。但刘湘哪里知道,杨永泰对督察专员的任命,尽力安排亲蒋人士担任;省政府与委员长行营合办的各种县政训练班,也成了杨永泰控制地方的一大法宝。
趁着“巴壁虎”一打盹的光景,杨永泰把四川省地方官员的后备队伍抓到了手中。
随后,杨永泰借川北驻军田颂尧与红军作战失败之际,“杀鸡儆猴”,将他撤职查办,树立了蒋委员长的权威。
1935年夏,驻川参谋团改为重庆行营,蒋介石任行营主任,杨永泰为秘书长兼第二厅厅长,管理政治、法规大事。面对这样一招“换汤换药”之计,刘湘急得团团转却毫无办法。
杨永泰向蒋介石建议,仿照办庐山军官训练团的办法,整训川军军官,以便控制川军。1935年7月,蒋介石在四川峨眉山开办军官训练团,自任团长,并调心腹干将陈诚任副团长,分批训练川军营以上军官。杨永泰经常到训练团讲话,对川军进行拉拢分化。训练团刚结束,一些川军将领便倒向蒋介石一边。杨永泰眼见蒋介石的势力已经在四川扎了根,便建议蒋介石派军政部部长何应钦到重庆召开“川康整编会议”,逼迫川军撤防裁兵,实现川军国家化,川政中央化。
至此,刘湘追悔莫及。抗战爆发后,蒋介石调刘湘率川军东下作战,刘湘则与韩复榘合谋倒蒋。事情败露,蒋介石一通训斥,“巴壁虎”口吐鲜血,命丧黄泉。
蒋介石在杨永泰的谋划下,最终将四川牢牢控制在自己手中。
派系斗法
在国民党内,杨永泰以政学系首脑著称。当时,人们将张群、黄郛、杨永泰、吴铁城、熊式辉、王世杰吴鼎昌张嘉璈翁文灏等人称为新政学系。与国民党的CC系、黄埔系等不同,这些人并没有一定的组织,也没有政纲,只是松散的联盟。他们对蒋介石忠心耿耿,且大多学有所长,精于政务,才华出众,足智多谋,深为蒋介石器重。
作为蒋介石最宠信的幕僚,杨永泰有着很大的权力。所有国民党重要军政文电,都须经杨永泰先行过目,然后才能呈蒋;许多军政要人来见蒋介石,也须经杨永泰安排。
杨永泰这种权倾一时的地位,自然引起国民党内其他派系和权贵的嫉恨,尤其是陈果夫陈立夫为首的CC系。
1933年1月,陈立夫、陈果夫等人谈起政学系的“暴发户”:“蒋委员长怎么看上这位首鼠两端的杨永泰。杨永泰有何能力,还不就是会投机吗?”
1934年6月,南昌机场发生大火,蒋介石刚从意大利购买的霞飞式轰炸机被烧毁10多架。蒋大为震怒,命令行营调查科科长邓文仪负责调查。邓文仪接受了CC派的10万美金贿赂,于调查后宣布大火为意外事故。
杨永泰对这个结论十分怀疑,当即请示蒋介石,与戴笠联合再度进行秘密侦破。结果真相大白,这乃是一场重大纵火案,主犯为航空署长徐培根。徐盗用公款套购黄金,亏空无法弥补,遂放火烧毁库房以销毁帐目。不料天气炎热,大火失控,致使飞机被烧。蒋介石听了杨永泰的报告,下令将徐培根枪毙,免去邓文仪的职务。
杨永泰的这一做法极大地触动了CC系的利益。CC系于是纠集所有不满杨永泰的势力,群起而攻之。
从1928年起,国民党党务大权便集中在二陈为首的CC系手中,形成了“蒋家天下陈家党”的格局。随着国民党内各反蒋势力的荡平,蒋介石越来越无法容忍二陈把持党务的现状,力谋削弱CC系的权力。
在第五次“围剿”中,杨永泰向蒋介石提出了集中党、政、军力量于“剿匪总部”的建议,蒋认为这是削弱CC系的好机会,便接受了杨永泰的建议,把豫、皖、鄂、赣四省国民党组织变更,省市党部设主任委员,由当地军政大员兼任。
杨永泰的这一招,把原来的省党部执行委员和监察委员一起打入了冷宫。各县设书记长,又把原执行委员和监察委员一起“送客”。不论省或县都由书记长负全责,工作报告直接上呈“剿共总部”党政处。这样一来,湖北、河南、安徽、江西四省国民党省、市组织由CC系手中转到政学系手中,CC系的政治地位一落千丈,成为当地军政首脑的附庸。
CC派遭此打击,当时却敢怒不敢言。因为杨永泰这一辣招是以蒋介石名义去办的,并已由国民党中常会追认为合法。
陈果夫出任江苏省政府主席时,民政厅厅长一职陈决定派自己的心腹余井塘担任,可没想到名单报到蒋介石手上后,杨永泰在蒋介石身边轻描淡写地说了一句:“这不成了CC的王国?”蒋本来就不满江苏省政府CC色彩太浓,听了杨的话后更加生气,决定“留中不发”。
这可急坏了陈果夫。他素知蒋的习性,只要“留中不发”,一定是表明他持有不同的意见。他赶忙电呈蒋介石:“如有更适当胜任者,请钧座直接指定。”
本来这是陈果夫作的一个姿态,可没想到正中杨永泰的圈套。杨永泰向蒋推荐自己的心腹辜仁发替换余井塘。蒋遂即电告陈,一切照准,唯民政厅厅长改由辜仁发担任。
陈果夫收到电报,顿时傻了眼:一省中除省主席和秘书长外最重要的民政厅厅长一职,转眼落入了杨永泰手中!陈果夫大失颜面,恨得咬牙切齿。他提出要“清君侧”,下决心整垮杨永泰。
扬子江畔
1935年10月,行政院院长汪精卫在国民党四届六中全会上遇刺,杨永泰颇想乘机爬上这一高位,进一步施展自己的才华,但遭到以二陈为首的CC系的坚决反对。
组阁的愿望落空了,杨永泰决定辞去秘书长之职,准备出国考察。正是用人之际,蒋介石岂能放他出国?蒋没有理会杨的辞呈。
蒋介石虽知杨永泰对自己忠心不贰,但为了平衡各派利益,决定将杨调出。早在南昌大火案发前,蒋介石就打算让杨永泰出任南昌党政军联合办事处秘书长。
杨永泰闻讯后声泪俱下地对蒋说:“一定是有人向先生进了谗言才至于此,在此国家危机时刻,我决不离开委员长半步!”蒋介石听后大为感动,只好留杨永泰继续在任。
当蒋介石调张群任外交部部长后,便决定发布命令,任命杨永泰为湖北省主席。
杨永泰离开蒋介石身边,出任封疆大吏,在许多人看来是杨失宠的信号。其实调开杨永泰,固然是蒋为平息国民党内部对杨不满所采取的措施,但也更是蒋介石用心良苦的一招。
虽然蒋介石也感到杨永泰有操纵越权的形迹,但他对杨的忠诚和才能是十分欣赏的。蒋曾对人说:“我生平用人,第一重道德,第二重才具。杨畅卿这个人,办事有相当才具,其它方面就不要求全。”
杨永泰还未到鄂上任,便遭到了CC系各省省实力派的迎头反对。CC派的走卒窜入省内一些学校,大肆宣传政学系是“亲日派”,挑动学生上街游行。学生们听到政学系的卖国消息,义愤填膺,到街上游行,高呼“打倒政学系”、“打倒杨永泰”、“反对杨永泰接任省主席”等口号。一时间,武汉反杨赴任之声颇高。
蒋介石闻讯勃然大怒,电令湖北绥靖公署主任何成浚:“据报湖北省党部借学生提出打倒杨永泰的口号,向政府示威。如果属实,仰将该党部及其负责人一律军法从事,具报为要。”为支持杨永泰,蒋介石不惜对二陈开刀了。
湖北省党部的CC分子慌了手脚。“十人团”的老大、湖北省党部常委刘鸣皋立即前往何成浚处,声明“打倒卖国贼杨永泰”这个口号与省党部无关,是学生在游行中自发喊出来的。
蒋介石平息了CC系的倒杨风潮后,杨永泰带着一种无法形容惆怅怅,离开南京,逆江而上。但陈立夫恨杨入骨,一旦离开蒋介石的庇护,杨永泰迅速走向了自己的末日。
1936年10月25日,杨永泰应邀赴日本驻汉口领事馆宴会,宴会结束后,在汉口经汉关乘专用轮渡码头准备回武昌时,突然冲出一个刺客,向其连开数枪,杨应声而倒。
奄奄一息的杨永泰对左右侍卫说:“吾早知必有今日,身已许国,为国而死,夫复何恨?所可惜者,有志未逮,国祸方长耳。”说完,这位蒋介石的“诸葛亮”便咽了气,终年56岁。
蒋介石得知杨永泰被刺杀后十分震惊。他一面急电湖北省政府给予杨永泰以公葬待遇,一面责令组织秘密侦查厅,尽快破案。不久,秘密侦查厅宣布刺杨案已破,凶手陈燮起(真名谭戎轩)系受原国民党中央宣传部部长刘庐隐指使。刘在上海被捕后,被判处10年徒刑。
杨永泰遇刺案,是国民党历史上继廖仲恺遇后的第二二起重大谋杀案。这个案件实际上是二陈为首的CC系一手策划的,却拿胡汉民派的刘庐隐做了替罪羊。
杨永泰跟随蒋介石多年,出谋划策,铲除“诸侯”,逼走“共党”,为蒋家王朝立下了汗马功劳——这样一位旷世奇才,却成了国民党派系争斗的刀下冤魂,不能不令蒋介石唏嘘叹息。
各派恩怨
1935年冬,日本军阀侵华日亟,蒋介石在舆论压力下,不敢公开满足其得寸进尺的无理要求,但又惮于公开决裂,深感外交问题十分棘手。经过郑重考虑,乃将善于周旋应付的湖北省政府主席张群调任外交部长,遗缺调南昌行营秘书长杨永泰接充。因杨在行营时专横跋扈,与国民党各派系积怨甚深,只好将其外调,缓冲一下。于是走马换将,张去杨来。其实都是“政学系”当权,换汤不换药。
遇刺身亡
杨到湖北接任省主席,武汉学生强烈反对。虽然军警当局尽力保护,但爱国青年积愤难消。翌年,杨永泰被刺,全国震惊,蒋介石令军警当局限期破案。但关于幕后主使者及发案时间,言人人殊,极不一致,至今仍有疑问。现虽时隔半个多世纪,事过境迁,不过,雪泥鸿爪,留其一星半点,仍为必要。
关于杨永刺的原因原因,有的说是胡汉民亲信国民党中宣部长刘芦隐所指使;有的说是“复兴社”邓文仪因报复而派人所为;还有的说是,C.C因权力之争,下令“特一科”(特务处第一科)干的。甚至“湖北王”何成浚也因支持过湖北省党部发动学生反对杨永泰就任湖北省主席而涉嫌。互相猜疑的结果,使得国民党内部有关领导层彼此怀疑,造成了混乱。最后还是军统局查明此案是爱国青年自发组织“中华青年抗日锄奸团”所为。他们纯真赤诚,热血满腔,不满于政治腐败,特别是对亲日派丧权辱国之行径更为痛恨。大家自筹经费,购买枪支,准备刺杀亲日派头目黄郛、张群、杨永泰等人。那天在刺杨现场捕获谭戒轩(化名陈燮起),后来又捕获了掩护谭戒轩行刺的龚柏舟。国民党为免扩散影响,令司法机关以普通刑事罪处理。到1938年尚未判决,时值武汉战局紧张,乃将谭等二人押解后方。途中龚柏舟跳水脱逃。谭戎轩被押到恩施监禁。抗战胜利前清理积案,谭被高等法院判处裁决而裁决了。
任职经历
1915年任上海《中华新报》主笔,反对袁世凯称帝。
1917年至1920年先后任护法军政府财政部长、广东省财政厅长、广东省长。
1922年任北京国会参议院议员、善后会议财政善后委员会副委员长,为政学系首领之一。
1927年任南京国民政府军委会参议。
1931年任军委会秘书长。
1933年接任军委会委员长属下的南昌行营秘书长。
1934年任国民党豫、鄂、皖三省"剿匪"司令部秘书长。嗣任军委会武昌行营秘书长、四川行营秘书长、国民党候补中央执委。
1936年10月25日在汉口码头被CC派暗杀。译著有《外交政策》、《现代民主政治》等,被蒋称为“当代卧龙”。
轶事典故
说杨永泰是蒋介石的“诸葛亮”,一点都不过分——他初出茅庐,便献策蒋介石“三分天下”;一道“出师表”,就逼迫工农红军移师西去。蒋介石对他言听计从。不曾想,权重一时的他最后居然血染扬子江畔,做了国民党派系争斗的冤鬼。
杨永泰早年追随孙中山投身民主革命,后离开孙中山加入政学会,先后出任广东省财政厅厅长、广东省省长。但随着政学会的风消云散,他只好蛰居上海,常常为有奇才而无处施展暗自叹息,为未逢“明主”而黯然神伤。
1928年初,通过政学系黄郛和熊式辉的引荐,杨永泰结识了蒋介石。杨自幼接受严格的旧式教育,又曾留学日本,接受过系统的西式教育,故“既擅文事,又长武备;既懂立法,又精行政”,加之对于“天下大事”观察已久,故与蒋介石见面之初便发表了宏韬大略:
当今天下,广西第七军横行两湖,李济深负隅两广,白崇禧收编了唐生智残部三个军,称霸一方,三分天下有其一,如勾结冯、阎,则南京无法立足。好在桂系的政敌俞作柏能拆李宗仁的台,唐生智也可以收回旧部为辞进逼白崇禧,再用重金收买冯玉祥的大将韩复榘、石友三等,则李宗仁、白崇禧的势力就不难瓦解。
冯玉祥
杨永泰将其“削藩”策略概括为:以经济方法瓦解冯玉祥的第二集团军,以政治方法解决阎锡山的第三集团军,以军事方法解决李宗仁的第四集团军,以外交方法对付张学良东北军
蒋最头疼的军阀问题,被杨永泰数语道破。蒋介石顿时心明眼亮,对杨永泰肃然起敬,任命杨为国民政府军事委员会参议。由一个草居在野的政客,一跃而入蒋总司令的“卧榻之侧”,杨永泰成了蒋介石的“首席智囊”。
完成北伐之后,蒋介石即着手实施杨永泰的“削藩”谋略。
1928年7月中旬,蒋在北平召开军事善后会议。国民党各路“诸侯”冯玉祥、阎锡山、李宗仁、白崇禧等参加会议。蒋介石提出了《整理军事方案》和《军事意见书》,冠冕堂皇地提出整编军队,裁减兵员,其意图是削弱其他三个集团军的兵力,壮大自身势力,等待时机,各个击破。冯玉祥、阎锡山诸人开始均沉默不语,后来极力抵制。
蒋介石仅想利用这次机会试探一下各路“诸侯”的态度,当然是无果而终。
杨永泰向蒋介石建议:利用北伐结束之机,采取“调虎离山”之计,将这些人明升暗降,调到南京,以便解除兵权。蒋介石接受了杨的建议。
1928年8月8日至15日召开的国民党二届五中全会上,蒋介石任命冯玉祥为行政院副院长兼军政部部长、阎锡山为蒙藏委员会委员会长兼内政部部长、李宗仁为军事参议院院长,并希望三人长住南京,共商国是。
接着,杨永泰建议蒋尽快召开编遣会议,“杯酒释兵权”,用政治方式削去“诸侯”兵权。1929年初春,编遣会议召开,但出乎蒋的意料,各路“诸侯”在裁兵问题上互不相让,争论不休。尤其是冯玉祥,称病请假,消极对抗,致使蒋抱极大希望的会议草草收场。
1929年3月,蒋桂战争爆发。蒋介石先把同桂系站在一起的李济深诱到南京加以软禁,任命陈铭枢陈济棠统治广东,然后委派唐生智携巨款去天津活动老部下李品仙倒戈反桂,不用一兵一卒便使白崇禧仓皇出走。接着,蒋介石统率大军直捣武汉。
为了实施武力进攻与政治瓦解相结合的策略,杨永泰秘密来到香港,与受桂系排挤的俞作柏洽商。他凭着三寸巧舌说服了俞作柏,并许诺:“如果俞将军活动李明瑞、杨腾辉倒桂成功,中央委你为广西省主席,省府委员由你决定。”
杨永泰陪俞作柏来到南京后,蒋介石立即委任俞为“国民革命军总司令部上将参议”,由杨永泰协助到汉口,与桂系第四集团军第七师师长李明瑞秘密接触。当蒋介石的中央军与桂军一交火,桂军前敌总指挥李明瑞便阵前自动脱离战斗,致使桂军一败涂地。李宗仁、白崇禧退守广西。蒋介石率各路大军齐向广西合围,桂军大败。李、白二人被迫逃到香港。
就这样,杨永泰协助蒋介石首先平定了桂系。
蒋桂战争接近尾声时,冯玉祥统率西北军单独反蒋。蒋介石再次采用杨永泰的计策,用经济手段瓦解冯玉祥的军队。1929年5月22日,冯玉祥部下韩复榘由洛阳发出“养”电,力主维护和平,拥护中央。蒋介石大喜过望,立即复电韩复榘,令其指挥所有驻陕甘宁部队,委任石友三为讨逆军第十三路总指挥,并送现款500万元作为犒赏。“银弹”的威力迅速见效,5天后冯玉祥被迫宣布下野
1930年3月,鹿钟麟商震、白崇禧、张发奎等第二、三、四集团军57个将领通电全国,一面历数蒋介石十大罪状,一面推举阎锡山为陆海空军总司令,联合反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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