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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의 용인철학(用人哲學)을 분석해보면 4종류의 인재를 중용한다는 평가

: 백가잡평(百家雜評)

근대사의 풍운인물로 원세개(袁世凱)는 논쟁의 대상이다. 사학자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정설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용인의 각도에서 본다면, 원세개는 거의 일치하여 찬양받는다. 심지어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보다도 훨씬 높은 평가를 받는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원세개의 수하에는 인재들이 넘쳐났다. 예를 들어, 단기서(段祺瑞), 조곤(曹錕), 서세창(徐世昌), 당소의(唐紹儀), 오패부(吳佩孚), 양사이(梁士詒)등이 있다. 감탄스러운 점이라면 이들 인재들 가운데, 출신이 각양각색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집안출신, 명문집안 출신, 수재출신등등. 그래도 최종적으로는 큰 성취를 이룬다. 예를 들어, 단지귀(段芝貴)는 잡역부에서 민국상장에 이르고, 조곤은 베를 팔던 가난한 출신이 민국대총통에까지 오른다.

 

기실, 이것이 바로 원세개의 용인철학이다. 아래에서는 원세개의 용인철학을 살펴보자. 특히 4가지 종류의 사람을 원세개는 대거 중용했다. 주목할 사항은 지금까지도, 원세개의 용인철학은 배울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원세개의 용인철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원세개의 3가지 사람됨에 대한 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혹은 인재를 부리는 도리이다.

 

(1) 한번은 원세개가 만주족고관인 증숭(增崇)의 집을 방문했다. 증숭의 어린아들이 나와서 인사를 한다. 원세개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서, "동생은 무슨 책을 갖고 싶어? 내가 보내 줄 수 있는데..." 그러자 어린아이는 몇 가지 책을 애기했다. 모두가 그저 원세개가 아이에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원세개는 한 상자의 책을 보내주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2) 원세개는 수하가 좋아하는 것을 머리에 새겨두었다. 한번은 원세개가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홍소대제(紅燒大蹄)가 나왔다. 그는 요리를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시종에게 한그릇을 담아서 풍국장(馮國璋)에게 보내주라고 한다. 원세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요리는 풍장군이 좋아하는 것이다. 보내줘서 그도 한번 맛을 보게 해줘라." 확실히 이렇게 하니 풍국장이 원세개에게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3) 원세개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원가를 따지지 않고 돈을 썼다. 완중추(阮中樞)는 이홍장이 '크게 쓰지는 못할 재목'이라고 평가받았으나, 나중에 이홍장이 원세개에게 추천한다. 그런데 마침 순천부윤으로 발령나는 바람에 원세개의 수하가 아니게 되었다. 그래도 원세개는 막료의 기준으로 그에게 급여를 준다. 그리하여, 원세개는 완중추의 충성심도 받아낸다.

 

결론적으로, 원세개는 사람으로서 처신을 잘 했다. 처신을 잘했다는 것을 일을 성공시켰다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을 잘 썼다는 것을 말한다. 원세개는 천하에 있는 종류의 사람들은 반드시 중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첫째, 현재 쓸모 있는 인재이다. 예를 들어, 단기서 같은 경우는 원세개가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인재였다.

둘째, 현재는 쓸모없어 보이지만, 장래에 크게 쓰일 인재이다.

셋째, 현재는 그저 놔두고 마음만 사놓지만, 나중에 관건적인 순간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인재이다.

넷째, 쓸모없어 보이지만, 잘 기르면 인재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세개의 수하에는 인재가 많았다. 행정, 군정, 경찰, 재정, 교육, 외교등 분야의 인재가 넘쳐났다. 근현대중국에 많은 인재를 배출해주었다. 원세개는 이 점에서 중국에 공이 있다.

 

당시, 사람들의 원세개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사람을 쓰는데 사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없다. 친척중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먹을 것은 마련해 주지만, 권한있는 자리는 주지 않았다." 원세개의 곁에 친척들 중 권력을 가진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원세개의 사후에 자녀에게 관직 하나 남겨준 것이 없다. 이것은 충분히 이 점을 설명해준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을 쓰는데 있어서 아무도 원세개에 비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원세개의 친족 중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어서 자리를 안배해주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청말민초의 풍운인물들 중에서, 원세개는 독보적인데, 그것이 우연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용인철학과 비교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홍장은 사람을 쓸 때 출신지역을 따져서, 고향사람을 중용했다.

 

증국번은 사람을 쓰면서 유가도덕을 중시한다. 그래서 많은 장군들이 그와 반목하여 원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원세개의 용인에서는 지역도 따지지 않고, 도덕도 따지지 않았다. 그는 겸수병축(兼收幷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군인이든, 깡패이건, 장삿군이건, 청년학생이건, 이익을 쫓는 자이건, 아편쟁이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저 위의 4가지 기준에만 부합하면 중용했다. 그는 진정으로 유재시거(唯才是擧)를 해낸 인물이라 할 수 잇다.

 

원세개의 용인철학(用人哲學)과 4종류 인재

 

근대사의 풍운인물로 원세개(袁世凱)는 논쟁의 대상이다. 사학자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정설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용인의 각도에서 본다면, 원세개는 거의 일치하여 찬양받는다. 심지어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보다도 훨씬 높은 평가를 받는다.
作為近代史上的風雲人物,袁世凱是爭論的對象。 史學家對他的評估至今尚無定論。 但是,如果從龍人的角度來看,三個圓幾乎一致地受到讚揚。 甚至比曾國藩、李鴻章的評估還要高。

모두 알고 있다시피, 원세개의 수하에는 인재들이 넘쳐났다. 예를 들어, 단기서(段祺瑞), 조곤(曹錕), 서세창(徐世昌), 당소의(唐紹儀), 오패부(吳佩孚), 양사이(梁士詒)등이 있다. 감탄스러운 점이라면 이들 인재들 가운데, 출신이 각양각색이라는 것이다.
眾所周知,袁世凱手下人才濟濟。 如段瑞、曹昆、徐世昌、唐儀、吳佩甫、梁思怡等。 令人佩服的是,在這些人才中,出身各式各樣。

가난한 집안출신, 명문집안 출신, 수재출신등등. 그래도 최종적으로는 큰 성취를 이룬다. 예를 들어, 단지귀(段芝貴)는 잡역부에서 민국상장에 이르고, 조곤은 베를 팔던 가난한 출신이 민국대총통에까지 오른다.
出身貧寒,出身名門,出身秀才等等。 但最終還是會取得很大的成就。 例如,段貴從勤雜工到民國商長,趙坤賣麻布的窮出身到民國大統。

기실, 이것이 바로 원세개의 용인철학이다. 아래에서는 원세개의 용인철학을 살펴보자. 특히 4가지 종류의 사람을 원세개는 대거 중용했다. 주목할 사항은 지금까지도, 원세개의 용인철학은 배울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其實,這就是元三個用人哲學。 下麵我們來看看元三用人哲學。 特別是袁世凱重用了4種人。 值得注意的是,到目前為止,元三個容忍哲學仍然值得學習。

원세개의 용인철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원세개의 3가지 사람됨에 대한 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혹은 인재를 부리는 도리이다.
在討論袁世凱的用人哲學之前,先來看看袁世凱的三種為人的故事。 或者說是使喚人才的道理。

(1) 한번은 원세개가 만주족고관인 증숭(增崇)의 집을 방문했다. 증숭의 어린아들이 나와서 인사를 한다. 원세개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서, "동생은 무슨 책을 갖고 싶어? 내가 보내 줄 수 있는데..." 그러자 어린아이는 몇 가지 책을 애기했다. 모두가 그저 원세개가 아이에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원세개는 한 상자의 책을 보내주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1)有一次,袁世凱拜訪了滿族高官曾嵩的家。 曾嵩的小兒子出來打招呼。 袁世凱牽著孩子的手,說:“弟弟想要什麼書?我可以給你送去…” 於是小朋友講了幾本書。 大家都以為只有三個孩子對他和藹可親。 可是,第二天袁世凱送去了一箱書。 他自己說的話是一個遵守的人。

(2) 원세개는 수하가 좋아하는 것을 머리에 새겨두었다. 한번은 원세개가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홍소대제(紅燒大蹄)가 나왔다. 그는 요리를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시종에게 한그릇을 담아서 풍국장(馮國璋)에게 보내주라고 한다. 원세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요리는 풍장군이 좋아하는 것이다. 보내줘서 그도 한번 맛을 보게 해줘라." 확실히 이렇게 하니 풍국장이 원세개에게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2)袁世凱把手下喜歡的東西刻在了頭上。 有一次,袁世凱在家吃飯,紅燒大帝來了。 他覺得菜做得不錯,叫侍從盛一碗給馮國璌送去。 袁世凱這樣說:“這道菜是馮將軍喜歡的,送他去嘗嘗吧。” 確實這麼做了,馮國榮不得不感激袁世凱。

(3) 원세개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원가를 따지지 않고 돈을 썼다. 완중추(阮中樞)는 이홍장이 '크게 쓰지는 못할 재목'이라고 평가받았으나, 나중에 이홍장이 원세개에게 추천한다. 그런데 마침 순천부윤으로 발령나는 바람에 원세개의 수하가 아니게 되었다. 그래도 원세개는 막료의 기준으로 그에게 급여를 준다. 그리하여, 원세개는 완중추의 충성심도 받아낸다.
(3)袁世凱不惜花錢。 不計成本地花錢。 阮仲秋認為李鴻章是“寫得不大的材”,後來李鴻章向袁世凱推薦。 但是正好被任命為順天府尹,所以不是元三個手下。 即便如此,袁世凱還是以幕僚的標準給他發薪水。 囙此,袁世凱也得到了阮仲秋的忠誠。

결론적으로, 원세개는 사람으로서 처신을 잘 했다. 처신을 잘했다는 것을 일을 성공시켰다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을 잘 썼다는 것을 말한다. 원세개는 천하에 있는 종류의 사람들은 반드시 중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總而言之,袁世凱作為人處事很好。 處事好不只是成功了,而是用人好。 袁世凱認為天下這類人必須重用:

첫째, 현재 쓸모 있는 인재이다. 예를 들어, 단기서 같은 경우는 원세개가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인재였다.
第一,是現在有用的人才。 例如,短期書籍是袁世凱急需的人才。

둘째, 현재는 쓸모없어 보이지만, 장래에 크게 쓰일 인재이다.
第二,雖然現在看起來沒用,但將來會大有作為的人才。

셋째, 현재는 그저 놔두고 마음만 사놓지만, 나중에 관건적인 순간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인재이다.
第三,現在只是放下心來,以後不是關鍵時刻就不使用的人才。

넷째, 쓸모없어 보이지만, 잘 기르면 인재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다.
第四,看起來沒用,但如果培養得好,就能成為人才。

그렇기 때문에, 원세개의 수하에는 인재가 많았다. 행정, 군정, 경찰, 재정, 교육, 외교등 분야의 인재가 넘쳐났다. 근현대중국에 많은 인재를 배출해주었다. 원세개는 이 점에서 중국에 공이 있다.
囙此,袁世凱手下人才眾多。 行政、軍政、警詧、財政、教育、外交等方面的人才氾濫。 近現代中國培養了大批人才。 袁世凱在這一點上對中國有功勞。

당시, 사람들의 원세개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사람을 쓰는데 사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없다. 친척중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먹을 것은 마련해 주지만, 권한있는 자리는 주지 않았다." 원세개의 곁에 친척들 중 권력을 가진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當時,人們對袁世凱的評估是這樣的:“用人沒有私交。親戚中有人來找,都會給準備吃的,但沒有給人讓座。” 在袁世凱身邊的親戚中,找不到有權的人。

원세개의 사후에 자녀에게 관직 하나 남겨준 것이 없다. 이것은 충분히 이 점을 설명해준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을 쓰는데 있어서 아무도 원세개에 비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원세개의 친족 중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어서 자리를 안배해주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袁世凱死後,沒有給子女留下一個官職。 這充分說明了這一點。 從古至今,用人無人能比得上袁世凱。 當然,也有可能是三個親屬中沒有能力安排座位。

청말민초의 풍운인물들 중에서, 원세개는 독보적인데, 그것이 우연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용인철학과 비교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홍장은 사람을 쓸 때 출신지역을 따져서, 고향사람을 중용했다.
在清末民初的風雲人物中,袁世凱獨樹一幟,並非巧合 和別人的用人哲學相比,完全可以瞭解。 有趣的是,李鴻章用人講究出身,重用了老鄉

증국번은 사람을 쓰면서 유가도덕을 중시한다. 그래서 많은 장군들이 그와 반목하여 원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원세개의 용인에서는 지역도 따지지 않고, 도덕도 따지지 않았다. 그는 겸수병축(兼收幷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군인이든, 깡패이건, 장삿군이건, 청년학생이건, 이익을 쫓는 자이건, 아편쟁이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저 위의 4가지 기준에만 부합하면 중용했다. 그는 진정으로 유재시거(唯才是擧)를 해낸 인물이라 할 수 잇다.
曾國藩用人講究儒家道德。 囙此,很多將軍與他反目成仇。 但在這三個容忍中,既不講地域,也不講道德。 他可以說是兼收並蓄。 所以不管是軍人,流氓,商販,青年學生,追逐利益的人,還是烟鬼。 只要符合以上4個標準就重用。 他可以說是真正做到了唯才是舉的人物。

 

袁世凯处理二十一条已使中国利益最大化

 

[导读]当时中国很弱弱国无外交谈判是很困难的但袁世凯还是在二十一条上为中国争取了很多权利袁世凯在二十一条上已经使中国利益最大化了

 

绞尽脑汁把损失降到最低

袁氏后人更大的质疑是影片中关于袁世凯签署二十一条的情节片中称“191559为实现称帝梦想袁世凯秘密接受了丧权辱国的二十一条

 

电影里说的根本不符合历史的原貌我祖父根本没有签署二十一条我们家有我祖父亲自朱批的二十一条原件文化大革命中我们献给了国家但我们家族中很多人有这份原件的复印件当时我祖父绞尽脑汁地把中国的损失降到了最低但还是背着卖国求荣的骂名至今已经将近100年了现在很多历史资料也已经开始解密这件事在这种情况下还拿过去的眼光来拍这样一部电影怎么行而且电影作为一种传播工具对老百姓说这些有好处吗袁家诚向记者表示

 

在公开信中袁氏家族联谊会也称袁世凯没有签署所谓的二十一条这是历史的史实现在史学界对这方面的研究已相当广泛和深入很多史料尽在眼前,《袁世凯朱批21原件就保存在天津博物馆内即将出版的袁世凯全集会让人们了解更多历史真相

 

而对袁氏后人的这一说法董哲的回应是,《建党伟业这部电影有其特殊性既要尊重历史同时也要留有一定艺术创作空间而对袁世凯签署二十一条的问题他称初中课本就有定论

 

记者查阅由人民教育出版社历史室编著的初级中学教科书中国历史第三册关于二十一条的表述是第一次世界大战爆发时日本借口对德国宣战出兵中国山东强占胶济铁路和青岛袁世凯竟然不敢反对日本得知袁世凯想当皇帝急需取得日本支持1915由驻华公使向袁世凯提出灭亡中国的二十一条并暗示说若开诚交涉则日本希望贵大总统再高升一步经过几个月的讨价还价袁世凯几乎全部接受了日本的要求

 

二十一条的历史真相究竟如何成为两造争执焦点事实上二十一条并未全盘照签最后签署的修正案已经与最初的二十一条有很大区别现今已有不少历史资料为证1915525日正式签署的这个条约中日方提出的第五号七款已被删除第三号两款变成了一条换文第四号改由袁政府自行发表声明

 

而自191518日本驻华公使日置益向袁世凯递交二十一条至最终签署其间也有相应历史资料证明袁世凯政府采取了拖延泄密刺探日方底线利用公众舆论助力外交等等方式努力减少损失

 

袁世凯当时对二十一条的反感也有其朱批为证据曹汝霖时任外交部次长回忆他收到的袁世凯批阅件上有这样的文字针对合办矿业可答应一二处须照矿业条例办理愈少愈好可留予国人自办针对建造铁路须与他国借款造路相同铁路行政权须由中国人自行管理日本只可允以管理借款之会计审核权惟须斟酌慎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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