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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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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비평]

마르께스와의 대담(對談)

마누엘 뻬레이라 [쿠바작가]

 

"작가와 겸손(謙遜)"

작가가 글을 쓰려고 앉을 때에는 세르반떼스 Miguel de Cervantes Saavedra, 로뻬 데 베가 Lope de Vega ,께베도 Francisco Quevedo보다 더 잘 쓰겠다고 야심만만하게 마음먹어야 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으시죠?

 

마르께스: 작가라는 직업에서 겸손이 대단한 미덕(美德)으로 과대평가되는 것 같아요. 평범하게 쓰려고 작정한다면 결국 평범한 수준의 작가가 되고 말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앞의 위대한 본보기들을 모두 뛰어 넘겠다는 세계적인 야망이 요구된다고 믿어져요. 사실 누구나 대가들(제 경우에는 소포클레스, 도스도예프스키 등등)에게서 글쓰기를 배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들만큼 쓰기를 바라지 않겠어요? 그들에게 치명상(致命傷)을 입힐 수 있을 정도로 잘 쓰겠다고 결심해야죠.

 

그렇다면 자기의 스승들을 파괴해 버릴 때까지 그들과 싸워야 된다는 레지스 드브레 [1941- , 프랑스의 작가, 혁명가. 체 게바라 Che Guevara와 함께 남미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복역. 미테랑정부에서 제3세계 담당 특별보좌관 역임.]의 말에 동의하시나요?

 

마르께스: 언제나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포크너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저의 문제는 그를 모방(模倣)하는 것이 아니라, 식은 땀 흘리게 만드는 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를 파괴(破壞)하는 것이라고 대꾸하죠.

 

그러면 세르반떼스는요?

 

마르께스: 아닙니다. 세르반떼스가 저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성경(聖經)은 어떻습니까?

 

마르께스: 성경은 물론이죠. 성경이야기에 관련된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성경에는 수줍음이 없다는 뜻인가요?

 

마르께스: 그렇고 말고요. 성경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들은 절대로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아요. 성경이 한 작가에 의해서 씌어졌다고 가정합시다. 그가 <겸손>할 턱이 있겠습니까? 그는 신이 만든 세계보다 더 좋은 세상을 창조(創造)할 속셈이었죠. 이건 정말 멋들어진 싸움이었어요.

 

그는 신을 본보기로 삼은 셈이군요.

 

마르께스: 그는 오히려 신의 본보기를 뛰어넘으려고 했죠. 오늘날의 작가들은 문학상을 목표로 삼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원칙적으로 문학상은 다른 방식으로 알려지기 어려운 가치들을 발견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죠. 또 실질적으로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문학상의 획득을 위하여 쓴다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마감 전날에 서둘러 내갈기는 식이 되거든요. 그래 세르반떼스나 셰익스피어보다 뛰어나려고 애쓰는 작가가 아니라 그날 운이 제일 좋은 사람이 受賞者가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문학상 경쟁에 참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나요?

 

마르께스: 왜요, 두 번 있었죠. 첫번째는 <토요일 다음의 하루 un día después del Sábado>라는 단편이었습니다. 1954년이었던가요. 꼴롬비아에서 전국 단편소설 대회가 열렸는데 응모작들의 수준이 매우 낮아서 조금 괜찮은 작품들을 찾느라고 야단이었어요. 그때 한 친구가 찾아와서 너에게는 식은 죽 먹기야. 아무거나 보내도 우승은 틀림없어. 그렇게 형편없는 것들에게 상을 줄 수는 없잖아”. 그래서 전에 써 놓았던 단편을 보냈고 상을 탔죠. 두 번째는 소설 <불길한 시간 La mala hora>이었습니다. 이건 파리에서 시작했다가 도중에 잘 되지 않아서 그만 두었어요. 58년에 까라까스 Caracas에 도착해서 다시 계속했지요. 그 사이에 저로서는 가장 잘 썼다고 생각되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El coronel no tiene quien le escriba>를 발표했죠. 이건 허풍이 아닙니다.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을 먼저 써서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El coronel no tiene quien le escriba>를 읽히게 만들걸 그랬어요. 사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El coronel no tiene quien le escriba>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거든요. 그건 그렇고 <불길한 시간 La mala hora>은 조금씩 썼어요. 유럽에서 까라까스로 돌아왔을 때에는 원고를 둘둘 말아서 넥타이로 묶어 두었죠. 아마 그게 마지막 넥타이였을 거예요. 더 이상 메고 다니지 않았으니까요. 그때 메르세데스와 결혼했는데 그녀가 집안을 정리하다가 그 넥타이로 묶인 원고 두루마리를 발견했어요. 이게 무어냐고 묻더군요. 그래 소설인데 아무 쓸모가 없으니 다시는 더 생각하지 말도록 버리는 게 낫겠다고 대답했죠. 남미로 돌아온 저로서는 카리브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때마침 쿠바는 혁명직전이라서 새로운 계획들을 품고 있었거든요. 메르세데스는 조금 생각해 보더니 아니라고 말하며 원고를 그대로 두더군요.

 

그러면 그 소설은 메르세데스 덕분이군요.

 

마르께스: 실상 제 소설들은 전부 메르세데스 덕택입니다.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이 그 대표적인 실례지요. 어쨌든 그녀가 <불길한 시간 La mala hora>을 내버리지 않아서 저는 그걸 거의 완성시켰지만, 영 자신이 없었어요. 61~62년엔 멕시코 시티에 있었는데 어떤 친구가 찾아와서 첫 번째와 영락없이 똑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꼴롬비아에서 지금 전국문학대회를 열었는데 형편없는 것들만 들어온다. 그러니 네가 내면 틀림없다> 그래 메르세데스에게 넥타이로 묶은 원고(原稿)를 가져 오라고 했죠. 그건 제목이 없어서 <무제>라는 제목으로 보내 상을 탔어요. 상금이 3천 달러였는데 마침 둘째 아들 출산비(出産費)가 밀려 있었거든요. 하늘에서 굴러 떨어진 셈이죠. 이렇게 꼭 두 번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문학상에 반대한다고 여기지는 마세요. 그것이 목표가 되면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마르께스: 좋습니다. 그 작품은 제가 오랫동안 심사숙고(深思熟考) 했던 소설입니다. 모든 소재와 전체구조(全體構造)가 준비되었는데 어조가 떠오르지 않더군요. , 나 자신이 내 이야기를 믿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믿게 만들 수만 있다면 작가의 머리에 떠오르는 아무거나 이야기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믿을 것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우선 자기 자신이 믿느냐는 점이죠. 그런데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을 시작할 때마다 제가 믿지를 않는 것이었어요. 그때 어조가 문제라는걸 알아차렸고 골머리를 썩이다가 우리 할머니께서 가장 환상적이고 터무니 없는 일들을 전혀 자연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투가 제일 그럴 듯 하다고 확신되더군요. 전문적인 관점에서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의 본질은 바로 그 절대로 자연스러운 어조가 아닐까요.

 

글을 쓰실 때 누구에게 읽어보라고 원고들을 차례차례 보여주시는 습관이 있으신가요?

 

마르께스: 결코 없습니다. 단 한 줄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결심은 미신만큼 강해요. 왜냐하면 문학이 정말 사회의 산물이라고 여기지만 문학적인 작업은 절대로 개인적, 더구나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이 글 쓰는 일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당신은 완벽하게 혼자이며 보호도 없어요. 꼭 바다 한복판에서 난파당한 사람이죠. 혹시 도움이 되지나 않을까 해서 누구에게 원고를 보여준다면 오히려 엄청난 해를 입거나 당황할 뿐입니다. 아무도 당신이 글 쓸 때 머리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모르거든요. 그대신 제 친구들을 진력나게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뭘 하나 쓸 때마다 그것에 대해서 마구 떠들고 다니죠.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수 십 번씩 다시 합니다. 한 번은 같은 이야기를 세 번이나 매번 다르게 또 더 완전하게 했다고 말들을 하는데 저는 통 그런 기억이 없었어요. 저로서는 그들의 반응에 따라 이야기의 강점과 약점을 구별 할 수 있지요. 이렇게 떠벌리고 다님으로써 저 자신에 대해 평가를 내리며, 이것이 암흑 속에서 저를 인도한다고 믿어집니다.

 

메르세데스가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에 참여(參與)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마르께스: 사실입니다. 메르세데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아까뿔꼬 Acapulco [태평양 연안(沿岸)에 위치한 멕시코의 휴양도시]에 가고 있는데 길 한가운데에서 별안간 그렇다!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알았어, 아이들에게 얼음을 구경시키려고 데려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겠어요. 그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시작해서 계속 그런 어조로 이야기 해야지. 즉시 멕시코 시티로 돌아와 앉아서 쓰기 시작했죠.

 

아까뿔꼬에는 안가셨군요.

 

마르께스: , 메르세데스는 당신, 미쳤어요했지만 견뎌냈어요. 정말 누구도 그녀가 참아냈던 그런 광증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도 못할 겁니다. 일단 자리에 앉자 이야기는 폭포처럼 터져 나오더군요. 항상 시작이 제일 어려운 법이죠. 소설의 첫 번째 문장이 문제, 길이 나아가서 전부를 결정한다고 믿어집니다. 글이 나가는 속도와 내면에서 치밀어 오르는 강도로 볼 때, 여섯 달이면 끝나겠더군요. 그런데 넉 달이 지나자 동전 한 닢도 안 남아 버렸어요. 별 수 없이 <불길한 시간 La mala hora>의 나머지 상금으로 샀던 자동차를 저당 잡히고 메르세데스에게 말했죠. “이게 전부야. 나는 계속 써야겠어.” 여섯 달이 아니라 열 여덟 달이 걸렸고 집세가 아홉 달치나 밀렸는데 메르세데스는 아무 소리도 안 합디다. 집주인에게 미리 아홉 달 치까지 밀릴 거라고 다짐해 두었다 나요. 나중에 그 소설이 야단법석을 일으키자 집주인이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마르께스 선생, 제가 그 책과 관련되었다고 말해 주신다면 정말 영광이겠습니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저에게 종이 5백 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메르세데스가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언제나 종이 5백 장이 꼬박꼬박 준비되어 있었거든요. 그 때는 글 쓰는데 상당히 규칙적인 리듬이 생겨서 작업능률이 거의 일정했었죠. 저는 파지를 엄청나게 내는 편입니다. 언제나 직접 타이프로 치는데 글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또는 오타가 나더라도 단순한 실 수가 아니라 창작성의 오류라는 느낌이 들어요. 일종의 악습이죠. 조금 더 길거나 완전한 문장 하나 때문에 종이를 자꾸 갈아대니까 파지는 계속 쌓여가지요. 그래 한 장을 다 채우면 손으로 교정을 보고 전부 깨끗하게 다시 새로 칩니다. 한 번은 열두 장 짜리 단편 하나에 파지가 5백 장이 나더군요. 전동 타자기는 종이를 무지무지하게 먹어치워요.

 

항상 전동타자기를 사용하십니까?

 

마르께스: 그렇습니다. 일단 전동 타자기로 시작하게 되면 아주 물이 들어 다른 식으로는 글이 나가질 않아요. 전동 타자기는 쓰여지는 것과 자기자신 사이의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 줍니다.

 

수동보다는 생각하기가 훨씬 더 어렵지 않을까요?

 

마르께스: 천만에요. 많은 작가들의 전동 타자기에 거부감을 느끼는 까닭은 작가나 예술가가 비참하고 배가 고파야 생산할 수 있다는 그 낭만주의의 신화 때문입니다. 수 많은 혁명동지들도 그렇게 여기는 모양인데 오히려 정반대라고 확신됩니다. 저의 경우에는 가장 좋은 환경에서 제일 잘 쓸 수 있으며, 배 고플 때 더 잘 쓴다는 소리는 맞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예술가들이 너무 가난하다 보니까 그게 마치 본질적인 조건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 같아요. 더구나 젊었을 때에는 글이 줄줄 나오니까 무슨 요령이 없더라도 괜찮지만, 나중에 그런 유창함이 사라지면 요령 없이는 곤란하거든요. 한창 때에는 저도 낮에는 신문기사, 밤에는 소설, 이런 식으로 설쳤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어요. 한나절 동안에 기껏해야 몇 줄 쓰면 그만입니다. 이럴 때 전통 타자기 같은 것들이 크게 도움이 되죠.

 

헤밍웨이의 교훈(敎訓)

그 말씀은 헤밍웨이를 생각나게 만드는 군요. 문제는 상당수의 작가들이 헤밍웨이가 아니라 그 번역가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헤밍웨이를 영어로 읽지 않고 번역가들의 흉내를 내거든요. 언어의 폭발적인 가능성을 무시한 짧은 문장들과 쓸모 없는 대화의 남발은, 당신도 지적하셨듯이 스페인어와 연극에 심각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습니다.

 

마르께스: 헤밍웨이는 아주 좋은 소설가가 아니라 뛰어난 단편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헤밍웨이의 단편들은 귀감이죠. 그의 소설들은 그 구성이 별로 좋지 않다는 의견에 저도 동감입니다. 절름발이 소설들이죠. 그 반면 그의 단편은 어떠한 곳에서도 본보기로 군림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헤밍웨이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설이나 단편보다는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그의 충고와 계시들이라고 믿어집니다.

 

그의 방법말씀인가요?

 

마르께스: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문체나 철학이 아니라 문학적인 기교와 방법에 대해 교훈을 남겼어요. 아마 거기에는 위험스럽고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요. 사실 그는 지나치게 기교를 의식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의 충고는 최상입니다. 그 중 하나가 빙산이죠. 매우 간단한 것 같은 단편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전체에 근거한다는 말입니다. 즉 짤막한 단편 하나를 쓰기 위하여 필요한 연구, 요소, 소재들의 양은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죠. 그건 그렇게 크면서도 물밑 부분의 8분의 1 밖에 안 되는 빙산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게다가 한층 더 중요한 의미가 또 있어요. 결국 갑자기 튀어 나온 예외적인 천재가 아닌 바에야 문학 전체를 모르고는 좋은 문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젊은 작가들은 이 진리를 명심해야 되겠어요. 자발성 또는 창의력을 과신한 나머지 문학적인 소양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은 배워야 되는 학문이며, 단편 하나 하나 밑에는 만년 동안의 문학이 버티고 있어요. 그리고 이런 문학을 알려면 그때는 정말 겸손과 겸양이 요구되죠. 글쓰기를 방해하는 겸손은, 문학 전체를 공부하고 도대체 그 만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를 아는데 쓰여져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우리가 어느 시대에 위치하고 인간의 역사를 얼만큼 이해하는지를 인식하여, 성경에서부터 시작된, 이걸 계속 할 수 있거든요. 다시 말해서 문학은 대학에서가 아니라 다른 작가들을 읽고 또 읽음으로써 배워집니다. 헤밍웨이의 또 다른 충고제일 힘든 일은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는 일산 작업에 관계됩니다. 특히 나이가 들고 유명해져 자신의 작업에 대해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될수록 쓰기 시작하는 순간이 더욱 어려워집니다. 백지 앞에서의 고뇌는 저에게 밀실공포증 다음으로 가장 끔찍했는데, 헤밍웨이의 충고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진이 빠졌을 때 오늘 일을 끝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여력을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미리 모든 계획을 준비했다가 다음날 거기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은 또 그 다음날을 위하여 남겨두는 식이죠. 이러면 긴장과 고민이 크게 줄어 들어 작업이 훨씬 수월해져요. 헤밍웨이는 분명 거대한 작가는 아닙니다. 게다가 그는 쉽게 쓰는 작가가 아니면서도 그런 인상을 주기 때문에 위험해요. 그의 간결성은 사실 굉장히 공들여진 것이죠. 그렇지만 헤밍웨이가 권고하는 작업방식은 정말 중요하다고 믿어집니다.

 

헤밍웨이의 언어구사는 어떻습니까?

 

마르께스: 글쎄요. 저도 번역판으로 읽었으니까요.

 

헤밍웨이 작품의 분위기, 배경은요?

 

마르께스: 그는 쿠바에 오래 산 덕으로 카리브의 작가가 될 뻔했었죠.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그 자신이 온통 문학이론이고 그의 작품이 그 이론에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서인도제도의 작가들을 위한 이론 아니면 어떤 문학정신이 있을까요.

 

마르께스: 각자가 자기 자신의 현실과 함께 작업해야 됩니다. 이건 불가피해요. 자기 자신의 현실, 자기 자신의 경험과 함께 작업하지 않는 작가는 잘못입니다. 착각하고 있는 셈이죠.

 

아까 포크너에 대해 언급하셨는데요. 포크너가 묘사한 미국 남부의 풍경들은 콜롬비아의 해안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마르께스: 그럼요. 포크너는 카리브의 작가입니다.

 

그럼 헤밍웨이의 경우와 다르겠군요?

 

마르께스: 분명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헤밍웨이의 단편 <폭풍후>는 환상적이죠. 바다 진열창 속의 그 여객선은 놀랄만큼 아름다워요. 그래도 무엇인가가 그에게 브레이크를 걸고 있어요. 헤밍웨이는 자신을 내맡기지 않습니다.

 

자신을 상상력에 내맡기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마르께스: 그렇습니다. 그가 문학에서의 엄격성이라는 이론을 확립시켰기 때문이죠. 그는 엄격성의 교황입니다. 요약하자면 직업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헤밍웨이의 충고들은 대단히 귀중해요. 그렇지만 그가 유일한 본보기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습니다.

 

스페인어 문학

 

스페인어 문학에 대해서

마르께스: 먼저 문학이라는 인류의 유산을 연장시키려면 반드시 그 뒤에 있는 만년을 알아야 됩니다. 스페인어 문학에 대해서 저는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세르반테스와 악자소설 Novela picaresca [17세기 초 스페인에서 유명한 소설장르]은 매우 좋아하죠. 저는 그러나 <라사릴요 데 또르메스 Lazarillo de Tormes> [1554년에 <라사릴요 데 또르메스의 일생, 그의 성공과 불행>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됨. 그 작가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음. 악자소설의 효시. 떠돌이 젊은이가 살기 위하여 도둑질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는 내용. 전 유럽에 번역되어 크게 성공함.]에 더 관심이 있어요. 현대소설의 혁명으로 인정되는 내면독백 (內面獨白)은 조이스의 업적이라고들 하죠. 과연 조이스는 세계문학의 기념비이며 그가 구사한 내면독백은 그 솜씨와 효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버지니아 울프의 내면독백이 더 좋아요. 이 분야에서 조이스와 울프 누가 먼저인가를 가리기는 매우 어렵죠. 그런데 현실적으로 내면독백이 처음으로 사용된 작품이 바로 <라사릴요 데 또르메스 Lazarillo de Tormes>입니다. 물론 조이스나 울프에게서 만큼 의도적이고 결정적이지는 않지요. 라사릴요의 작가는 순전히 기술적인 필요성 때문이었거든요. 악한 보다 더 약으려고 애쓰는 장님 이야기니까 그 생각의 흐름을 독자에게 드러내야 되겠죠. 따라서 유일한 방법은 그때까지 없었던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일이고, 그걸 지금은 내면독백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라사릴요 데 또르메스 Lazarillo de Tormes>를 철저하게 알지 않고는 좋은 소설을 쓰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요. 그러나 스페인어 문학에서는 시가 더 중요하다고 믿어집니다. 저 자신의 문학적 소양도 근본적으로 시적입니다. 먼저 시를 통해서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 사실 누녜스 데 아르세 Nuñez de Arce [1834-1903, 스페인의 정치가, 시인, 극작가. 철두철미한 도덕주의자로서 시대의 갈등을 낭랑하게 반향하는 시들로 당대를 풍미했으나, 오늘날엔 시인으로 보다는 극작가로 더 평가 받음.]와 눈물 짜는 시들을 거치지 않고는 랭보나 발레리에 도달 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엉터리 시를 대단히 좋아하고, 스페인어 문학에서 소설보다 시를 더 좋아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족장의 가을 El otoño del patriaca>은 루벤 다리오에게 바쳐진 소설이어서 그의 시가 그대로 나오기도 하며 또 다리오의 문체로 씌여졌죠. 그건 다리오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눈짓들로 가득 차있어요. 저로서는 독재자들의 시대에 루벤 다리오처럼 위대한 시인의 모습을 알고 싶었거든요. <족장의 가을 El otoño del patriaca>에서 암시된 그의 싯구들을 찾아보는 일도 재미있겠죠. 더구나 루벤 다리오는 그 소설에 실제로 등장하지요. “너의 하얀 손수건에는 머리글자들이 있었지. 네 이름자가 아닌 빨강 머리글자들이, 내 사랑아”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의 한 인물은 문학이 사람을 비웃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 중에서 최고라고 말합니다.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El coronel no tiene quien le escriba>, <족장의 가을 El otoño del patriaca>등을 분석해 본다면 빈정거림, 기분풀이, 작업의 기쁨과 행복이 무수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죠. 왜냐하면 문학에서 또 다른 무엇에서건, 그걸 하면서 행복하지 않거나 최소한 그것이 행복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면 위대한 일을 하나도 못하지 않을까요.

 

상상력과 현실

레메디오스가 하늘로 올라가는 부분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을 최근에 직접 분석하신 적이 있는데요. 결국 문학적인 신비의 핵심은 시에 다름아니라고 하셨죠. 그래서 당신이 상상보다는 관찰을 더 중시한다고 여겨지는데요.

 

마르께스: 사실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상상력을 너무 들먹거리는 것 같아요. 상상력을 현실, 바로 현실은 글자 그대로 다시 다듬는 아주 특별한 혹은 특별하지 않은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모든 글에는 현실적인 근거가 있고 그걸 한줄 한줄 증명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실에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마르께스: 제가 쓴 이야기에는 모두 현실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공상인데, 월트 디즈니가 공상이면 저는 절대로 흥미가 없습니다. 저에게 티끌만큼의 공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부끄럽게 여길 겁니다.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 Mauricio Babilonia의 노랑 나비들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을 예로 들어 보죠. 다들 굉장한 공상이라고 말했어요. 맙소사 공상이라니! 여섯 살 먹었을 때 아라까따까 Aracataca [콜롬비아의 마을, 마르께스의 고향.]의 집에 전기 기사가 올 때 마다 할머니는 나비를 쫓아내려고 애쓰셨어요. 이건 신비라기 보다는 비결입니다. 요술장이가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를 설명해 줄 때는 마술보다 훨씬 더 마술적입니다. 그게 마술이라면 더 쉽기 때문이죠. 기술적인 속임수, 손재주이니까 마술보다 더 어렵다는 말입니다. 할머니는 하얀 나비를, 노랑 나비가 아니라, 쫓아내면서 빌어먹을, 전기 기사가 올 때마다 이 나비가 집으로 들어와그것이 저에게는 항상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래 그걸 문학적으로 다시 다듬었죠. 처음에는 현실에서처럼 하얀 나비들이었는데, 저 자신이 그걸 믿지 않았어요. 노랑 나비들이라고 했더니 저도 믿고 다른 사람들도 믿더군요. 이처럼 현실에서 문학으로의 전환은 시적인 방식들에 의해서만 설명될 따름입니다. 레메디오스가 하늘로 올라가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예요. 원래는 그녀가 레베카 그리고 아마란타와 함께 수를 놓고 있다가 홀연 눈을 들더니 없어져 버렸다는 식이었어요. 거의 영화적인 수법이죠.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그녀가 너무 땅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 그녀는 육체와 영혼이 함께 올라간다고 결정했지요. 더구나 어떤 부인이 손녀가 새벽에 도망갔는데 그녀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 부인은, 사람들의 웃음에도 아랑곳 없이 찬란한 빛 등등을 보았다면서 만약 성모 마리아가 승천했다면 왜 자기 손녀가 못 그러겠냐고 반문하더군요. 바로 이점에 착안했죠. 마리아 신화의 문학적인 해결이 그녀가 육체와 영혼으로 승천했다는 것이라면 내 인물의 문학적인 해결도 그렇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지만 그런 결론이야 아주 쉽게 얻을 수 있어도 그걸 쓰는 일, 독자가 믿도록 문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은 끔찍하기 짝이 없죠.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보아도 레메디오스를 하늘로 올려 보낼 수단이 없었어요. 그건 시적으로만 가능하더군요. 그래서 머리나 식힐까 하고 마당으로 나왔더니 바람이 굉장히 부는데 이웃집 여자가 홑이불들을 널고 있어요. 집게를 써도 홑이불들이 마구 날라가는 것이었어요. 그걸 도와 주다가 홑이불에 싸여 승천하는 레메디오스를 생각해냈죠. 그랬더니 그녀는 육체와 영혼이 함께 잘도 올라 가더군요

 

하느님께서도 막지 못하셨겠군요. (웃음)

 

마르께스: 그렇습니다. 레메디오스는 마치 배의 돛 같았죠. 그녀가 올라가는 것을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유럽의 초현실주의가 가소로울 정도로 가장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는 이곳 카리브라고 불리는 지역의 수수께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르께스: 저는 카리브와 브라질을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카리브의 수수께끼는 바로 카리브의 역사, 융합 현상 속에 있어요. 우리들 안에서 흑인 성분이 있죠. 카리브에서 발견되는 인종의 융합은 정말 환상적입니다. 마르티니크 [서인도제도의 프랑스령() ]에서 우유빛 살갗에 커다란 초록색 눈과 금발의 흑백 혼혈 여자를 보았어요. 정말 기상천외(奇想天外). 또 쿠라사오 [서인도제도의 네덜란드령 섬]에는 영국인에 혼합된 흑인들이 있어요. 이렇게 카리브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고 정신없게 만들지요.

 

브라질은 어떻습니까?

 

마르께스: 브라질도 자연적인 지리조건으로는 카리브에 다름없죠.

 

그렇다면 지도를 고쳐야겠군요.

 

마르께스: 재미있는 생각이군요. 카리브의 문제는 유럽에서 할 수 없는 짓들을 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역사적인 결과는 엄청났죠. 해적들은 오페라 극장에 가려고 자기 여자들 이빨 속에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곤 했었어요. 상상 좀 해보세요. 그 광기를! 또 하나 카리브에서 신기한 점은 (제가 항상 주목하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이야기하는데) 사물들 사이의 공간이에요. 바로 그것이 카리브를 나머지 세계로부터 구별시키죠. 식당의 탁자들은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 보다 서로 더 떨어져 있어요. 공간에 대한 광란이랄까요……

 

어쩌면 더위 때문이겠죠?

 

마르께스: 그럼요, 삶을 살기 위해서죠!

 

집에 들어가 보면 응접실에 흔들의자 네 개와 거대한 공간, 이런 식이죠.

 

탐정소설

다시 문학이야기로 돌아가서, 탐정소설은 어떻습니까?

 

마르께스: 절반까지는 신나게 재미있죠. 탐정소설은 꼬았다가 다시 풀어버리는 놀이입니다. 꼬는 것은 멋진데 풀면 시들하거든요. 기발한 탐정소설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죠. 왜냐하면 조사자 자신이 살인자였거든요. 그 다음으로는 디킨스 Charles Dickens<에드윈 드러드의 수수께끼 The Mystery of Edwin Drood (1870)>가 있죠. 디킨스가 그걸 끝내기 전에 죽어서 범인이 누군지를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탐정소설의 유일한 결점은 수수께끼를 조금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건 신비를 드러내서 파괴하기 위한 문학입니다. 비범한 오락인 셈이죠.

 

헐리우드쪽에서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을 영화화 하겠다는 제안은

 

마르께스: 처음에는 백만 페소를 제시하더니 지금은 2백만 페소까지 올렸대요. 소설을 엉망으로 만들어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의 이야기, 레메디오스의 이야기 등등, 일종의 신문소설로 고칠 속셈이더군요. 제가 거절한 까닭은 사람들이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상상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돈이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에 필요불가결하게 되는 날 계약에 응하죠. 그 전에는 안 됩니다.

 

독재자 환 고메스 Juan Gomez [1857-1935, 베네수엘라의 독재자. 1908-1935 집권하면서 전설적인 악명을 남겼음.]<족장의 가을 El otoño del patriaca>의 족장과 가장 닮았다고 믿어지는데요. 그 작품이 자서전(自敍傳)적인 소설이라는 단언은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될까요?

 

마르께스: 꼭 한마디만 하겠다는 조건으로 대답하겠습니다. 권력의 고독에 견줄만한 것은 영광의 고독뿐입니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Crónica de una muerte anunciada>

 

지난 198151<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Crónica de una muerte anunciada>가 출판된 날 내 최고의 소설, 내가 제일 잘 통제할 수 있었던 소설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의 엄청난 성공 이후에는 그런 주장이 무모하지 않을까요?

 

마르께스: 언제나 최신작이 최대 작이라고 믿는 법이지요. 그렇지만 이번 소설은 제가 원했던 것을 정확히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흔히 쓰다 보면 소설이 작가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죠. 인물들이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놀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느 소설에서도 이번 작품에서 만큼 절대적인 지배권을 구사한 경우가 없었어요. 아마 주제와 두께 때문이죠. 거의 탐정소설처럼 빈틈없는 구조의 주제에다가 매우 짧은 소설이거든요. 저는 대만족입니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요전까지의 최대 작은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이 아니라,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El coronel no tiene quien le escriba>예요. 지금은 분명 저의 최대 작이 이것이라고 믿습니다.

 

비평가들도 동의할 까요?

 

마르께스: 비평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티끌만한 의심의 여지도 없어요.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Crónica de una muerte anunciada>는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마르께스: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꼴롬비아의 조그만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있었죠. 저는 그 비극의 인물들과 아주 가까이 있었어요. 그때는 단편들을 발표했었지만 아직 소설은 없었지요. 즉시 굉장히 중요한 소재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머니가 그걸 아시고 몇몇 주인공들이 살아있는 한, 쓰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당시에는 그 사건이 그대로 끝났다고 여겨졌지만 계속 발전해서 그 후에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졌어요. 만약 그때 썼더라면 이야기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많이 놓칠 뻔 했죠.

 

쓰겠다고 결심하신 때는 언제죠?

 

마르께스: 5년 전 <족장의 가을 El otoño del patriaca> 다음에 그 주인공들이 죽었을 때였습니다. 현실에서 태어난 이 소설이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점은 흥미 있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신문기사적인 수법도 사용하셨나요?

 

마르께스: 현지 보고기사의 기법을 써먹었죠. 그러나 소설 속에는 그 비극이나 인물들에서 출발점과 구조밖에 남지 않았어요. 모든 것이 시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물론 주인공들은 자기를 알아보겠죠. 그러나 제가 관심 있는 점 또는 제 생각으로 비평가들이 주목해야 될 점은 현실과 문학작품 사이의 비교라고 믿어집니다.

 

어떤 대담에서 폭력이 그 소설의 주제라고 말씀하셨다죠.

 

마르께스: 그런 기억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모든 작품들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라틴아메리카, 특히 꼴롬비아에서 폭력은 역사 전반에 걸친 현상이며 스페인으로부터 전해진 것입니다. 폭력은 바로 우리 역사의 산파(産婆)입니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글쓰기를 중단하셨다가 같은 이유로 다시 시작하셨는데요, 라틴아메리카의 정치현실 속에서 작가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마르께스: 작가의 혁명적인 의무는 무엇보다 잘 쓰는 일, 우리의 동일성을 추구하는데 기여할 문학의 창조가 아니까요.

 

마지막으로 현재 진행중인 작품 아니면 집필 계획이 있으신가요?

 

마르께스: 지금으로서는 주제가 전혀 없습니다. 좀 생겼으면 좋겠군요. (편집자주: 이 후 마르께스는 198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콜레라가 창궐하던 시절의 사랑 El amor en los tiempos del cólera(1985)>, <미로속의 장군 El general en su laberinto(1989)>, <12편의 순례자의 이야기들 Doce cuentos peregrinos(1992)>, <사랑과 또 다른 악마들에 관하여 Del amor y otros demonios(1994)>, <납치 일기 Noticia de un secuestro(1997)>,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Memoria de mis putas tristes(2004) 등을 연속으로 발표했다.)

 

마누엘 뻬레이라, 마르께스와의 대담, 마가진느 리테레르, 8111월호 게재, 번역 송기형 (경기대 교수), 문예중앙 (文藝中央), 1983년 여름호, pp. 499-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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