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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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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안 바뀐다? 마음을 바꾸는 건 한 순간이다"

▲ 환경운동 작가 최성각이 쓴 <산들바람 산들 분다>(오월의봄 펴냄)과 <욕망과 파국>(동녘 펴냄).
 
 
글 : 박승옥 햇빛학교 이사장 
[기고] 기후위기, 에세이를 재발견하다…최성각의 <산들바람 산들 분다>·<욕망과 파국>
사람 마음이 바뀌는 건 한 순간이다

사람의 삶은 이야기다. 흔히 쓰는 한자 말로 서사가 곧 삶이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서사극을 마주하면서도 각각의 내용 전체는 잘 모른다. 오해와 갈등의 세상사는 그래서 필연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젖을 먹고 울고 웃고 똥 싸고 옹알이 하고 기고 서고 말하는 등 행동을 통해 생존해 나간다. 수십억 년 전 이 지상에 생명체가 나타나면서부터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다. 즉, 함이 삶 그 자체다.

아기의 눈귀코입살갗 그리고 뇌는 자기 몸 안과 밖의 느낌과 10의 수십승에 달하는 엄청난 정보를 수용하고 분석하고 분류해서 체계화하기 시작한다. 이 체계화가 인식이다. 포유류인 호모 사피엔스 아기의 학습과 인식은 성인이 되기까지 십여년 이상을 오로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과 헌신이 담긴 양육 속에서 이루어진다. 노년에 들어서면 급격이 줄어들긴 하지만 새로운 학습과 인식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감각기관 중 시각의 비중이 약 70%에 이른다. 눈과 귀 2개의 감각기관을 통해 다양한 서사를 압축해서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영화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이유다. 

언어로 소통하고 교류하는 사람의 인식과 세계관이란 언어로 기록된 엄청난 양의 성장 기록이자 자기 행동과 인식의 역사 이야기다. 대한민국에는 5000만의 살아 있는 도서관이 걸어 다니고 있는 셈이다. 

느낌과 인식을 포함하여 사람은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고 자신의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다. 사람의 마음, 이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삶과 세상을 기적 같은 사랑과 자비의 서사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오물 투성이의 쓰레기로 만들 것인가? 그 선택은 오롯이 지금 여기 이 순간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달려 있다. 칼을 들고 묶여 있는 사람의 밧줄을 끊어줄 것인지, 그 사람을 칼로 찌를 것인지는 오직 한 순간 마음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떻게 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붓다는 중생은 다섯 가지 개념의 다발이란 뜻의 오온 또는 오취온(五取蘊, panca upadanakkhanda)을 자신의 삶으로 여기고 살아간다고 설파했다. 오온을 언어로 구성된 서사의 집적물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는 요한의 선언도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삶이란 어떤 절망과 지옥 같은 세상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밝은 희망과 자비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소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기후위기에 적응하고 극복하기 위한 기후체제 전환은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을까. 1992년 리우기후정상회의로부터 3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개발과 성장의 온실가스 배출 체제는 전혀 변함이 없다. 아니 오히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더 강화되었다. 정치인들은 여전히 기후변화 중얼중얼중얼을 되풀이하면서 끝잆이 회의만 하고 있고 끝없이 입에 발린 거짓 성명서나 발표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도돌이표 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된다.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고 두세 사람의 마음이 바뀌고 수십 명의 마음이 바뀌고 수백 수천 명의 마음이 바뀌고 이윽고 수십만 수백만의 마음이 바뀌면 된다. 그러면 기후혁명이 일어나고 개발과 성장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오늘도 범람하는 쓰레기 문자들 

오늘도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수많은 이미지와 서사들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말의 폭우와 초대형 말 태풍은 현실세계보다 디지털 미디어 세계에서 더 빠르게 더 세게 눈덩이처럼 불어나 쳐들어온다. 우리 모두는 사실상 말과 글의 홍수 속에 떠내려 가고 있는 기후난민들이다. 

폭우에 강남의 반지하방에서 숨진 일가족 3명의 서사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냐며 가로, 세로, 높이 1m 철구조물에 시너통을 들고 들어가 용접해 버린 뒤 스스로를 가둔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 유최안의 이야기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대신 온통 더많은 돈과 권력을 둘러싼 투쟁의 쓰레기 언어들만 난무한다. 

2008년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견했던 마이클 허드슨은 일갈한다. 

"이제까지 노벨 경제학상은 기본적으로 쓰레기 경제학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아마도 폴 새뮤얼슨이야말로 20세기 최악의 쓰레기 경제학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자유무역을 전면 실시한다면, 즉 관세를 매기지 않고 정부가 산업 보호에 나서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경제적으로 평등해진다, 또는 최소한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보다 공평해진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놓았다. 물론 실제 현실은 이와 정반대다."(☞ 관련 기사 : <프레시안> 8월 10일 자 '경제전쟁의 핵심은 미 금융자본의 착취 종식')

그런데 그런 쓰레기 가운데는 눈에 번쩍 띄는 글과 말을 발견할 때가 있다. 우리는 그런 글과 말을 접하면 노아의 방주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한 편의 새로운 실험, 에세이가 사람을 바꾼다

돈오(頓悟)라는 말이 있다. 어느 순간 문득 깨닫는다는 뜻이다. '유레카'라는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우리 말로는 무릎을 탁 친다는 말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한편의 글을 읽고 무릎을 탁 치며 그래 바로 이거야 하는 순간을 경험한 사람은 돈오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은 견해의 우물 안에 갇혀 좀처럼 안 바뀌지만, 어느 한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다.

우연히 읽은 최성각의 칼 폴라니에 대한 글이 그런 돈오의 경험을 일깨워준 에세이였다. 책을 읽되 저자의 삶을 보면서 읽어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는 글이었다. 

에세이의 본래 뜻은 '새로운 시도'라고 한다. 기존의 관습을 깨고 과감하게 새로운 서사를 보여주는 글을 에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탁월한 작명이었다. 지금은 이런 말을 잘 쓰지 않지만 일부에서 에세이를 잡문이라고 번역한 것은 정말로 우매하기 그지 없는 무식과 오만의 소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구에서도 대학의 논문까지 폭넓게 에세이라고 지칭하는 판에 말이다. 

에세이는 시와 소설 이외에 거의 모든 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다만 본래 뜻그대로 새로운 실험 정신을 보여주는 시도가 들어있다면 좋은 에세이로 사람들의 무릎을 아프게 내리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물이 스미는 것처럼 잔잔한 감동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책벌레의 빈둥빈둥 산촌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최성각의  <산들바람 산들 분다>(오월의봄 펴냄), '나는 환경책을 읽었다'는 부제가 붙은 <욕망과 파국>(동녘 펴냄)은 내게는 에세이를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만든 에세이집이었다. 한 번 책을 편 뒤 손에서 놓지 않고 완독한 것은 내게는 드문 일이었다. 

여느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물까치 떼의 여느 때보다 한 옥타브 더 높은 울음 소리를 관찰하다가 인간 중심주의를 기후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이끌어내는 탁월한 이야기 솜씨에 나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날 물까치 떼 수십마리가 시끄럽게 작가의 집 마당에 찾아온다. 알고보니 어떻게 알았는지 창고 처마 아래 깊숙이 숨겨둔 고양이 밥을 수렵채취하기 위해서였다. 물까치 떼들은 귀신같이 장미 넝쿨을 헤치고 들어가 배를 채웠다. 물까치들의 고양이 밥 도둑질은 한 열흘 정도는 아무 탈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물까치 한 마리가 고양이에게 잡혀 죽어 마당에 널브러졌다. 고양이의 사냥 능력과 점프 능력을 오판한 결과였을 것이다. 

물까치들은 죽은 동료의 시체 위를 선회하면서 고함과 비명을 질러댔다. 라고 작가는 이해했다. 작가는 물까치들의 집단 선회와 요란한 고음의 울음소리를 애도와 장례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작가가 목격한 광경은 놀라운 것이었다. 수십 마리의 물까치 떼가 차례로 마치 가미카제의 검은 폭격기처럼 마당에 잔뜩 웅크리고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고양이를 공격했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나는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전두환의 계엄군에 의해 살해된 시민들의 주검을 보고 총을 든 시민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민군의 저항은 다른 차원에서 일종의 집단비행이었다. 

과학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진리를 작가는 본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작가다 

기후위기의 원인은 이산화탄소와 메탄같은 온실가스라고 과학은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인류가 만든 기후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다른 데 있다. 

기후위기의 원인은 다름아닌 인간의 탐욕이다.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라는 인간 중심주의다.

지구 생태계는 닫힌 계다. 인간의 서식지가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다른 생명체의 서식지는 파괴되고 당연히 멸종으로 치닫는다.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다른 생명체를 포식하면서 코로나 대유행 사태는 예견된 것이었다. 앞으로 또다른 바이러스가 사람들에게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후위기의 해결책은 결코 과학이 아니다. 사람의 탐욕을 멈추는 것이다. 우리는 그야말로 탐욕인가 자살인가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탐욕을 극대화시키는 자본주의 산업화, 자본주의의 개발과 성장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기후위기는 호모사피엔스를 멸종으로 이끌지도 모른다. 물론 진화는 때로 단기간에 적응 선택을 이끌어 내기도 하고 인류는 뛰어난 적응력으로 생존에 성공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는 생태순환의 삶,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탐욕을 멈추기 위해서는 우선 나부터 멈추어야 한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설국열차를 멈춰 세우고 열차에서 내려 먼저 나를 돌아보는 지관(止觀)과 스타치오(statio)의 성찰이 필요하다. 멈춰선 곳에서 세상을 보고 옆의 이웃을 바라보는 통찰이 필요하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방법은 삶에 대한 통찰이 담긴 에세이를 읽는 것이다. 나는 붓다의 말씀이 기록된 니까야도 예수의 생애를 말씀으로 기록한 성경도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직접 글로 쓰거나 말로 녹음하는 ‘글쓰기와 말하기’야말로 내 삶과 세상을 바꾸는 에세이다. 마음을 바꾸는 첫걸음이다. 기후정치를 바꾸는 출발점이다. 

에세이 읽기와 글쓰기, 말하기는 사람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밥을 먹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삶의 핵심이다. 심하게 말하면 책읽기와 글쓰기를 하지 않는 삶은 그저 미디어가 하라는 대로 욕망하고 하라는 대로 옷입고 하라는 대로 생각하는 체제의 노예일 뿐이다. 

에세이를 읽자. 에세이를 쓰고 말하자. 라고 나는 강하게 주장하고 싶다. 

* 이 글은 웹진 <나비>의 '기후@나비'에 동시 게재됩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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