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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루엘은 존재한다!"…지방 소멸과 싸우는 사람들 이야기

▲피켓을 들고 기념 사진을 촬영 중인 '테루엘은 존재한다' 멤버들. 왼쪽부터 베아트리체 마틴(Beatriz Martin) 상원의원, 디에고 로라스 지메노(Diego Loras Gimeno) 의원 보좌관, 아마도 고데드(Amado Goded) 고문. ⓒ프레시안 취재팀
 
한예섭 기자/이상현 기자
[여의도 '바깥'의 정치 ②] '촌 동네' 상원의원의 질문 … "지역소멸의 '주체'는 누구인가"
 
"영어가 안 통하는데?"

스페인 동부 내륙지방, 작은 도시 테루엘(Teruel)의 첫 인상은 생소함이었다. 말 그대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은 유럽 취재 전 기간을 통틀어 처음 겪은 일이었다. 간단한 영어 질문에도 점원들은 난처한 듯 손을 저었다.

광활하고 붉은 황무지, 소박한 성당과 자그마한 구도심, 동양인은커녕 영어에도 익숙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이는 동부 관광도시 바르셀로나, 혹은 스페인 중심에 위치한 수도 마드리드에서 각각 내륙으로 약 400킬로미터(㎞)가량 들어오면 펼쳐지는 풍경이다.

서울에서 부산 정도의 거리지만, 고속철도(AVE)를 이용해도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대도시에서 테루엘까지는 4~5시간이 소요된다. 직행 노선이 없어 인근 도시 사라고사(Zaragoza)를 우회해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특히 마드리드와의 직통 노선이 없는 곳은 스페인 소자치주 중에서도 테루엘이 유일하다. 반면 70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AVE를 통해 2시간 30분 만에 이동할 수 있다. 

그야말로 '촌 동네', 테루엘주는 스페인 북동부 아라곤 광역자치주 내의 소자치주다. 서울의 24배 이상 가는 면적(1만4804제곱킬로미터)에 14만여 명의 시민이 흩어져 산다. 취재진이 방문한 테루엘시는 그 중 4만여 명이 모여 살고있는 테루엘주의 주도다. 공항과 역이 있고 소규모 관광 상권도 형성돼 있다. 

변방의 중심인 꼴이지만, 도시는 정확히 그 지점에서 정체돼 있다. 마땅한 주요 산업이 없는 상황에 지역 청년들의 선택은 공항 등 몇 없는 일자리에 취직하는 길과 아예 지역을 떠나는 길 정도로 한정된다. 대학이 없으니 많은 젊은이가 떠나고, 일자리가 없으니 다시 그중 많은 이들이 돌아오지 못한다. 인구의 유출은 다시 각종 사회 인프라의 투자 축소로 이어진다. 

낯익은 메커니즘에 도시의 인상이 생소함에서 익숙함으로 바뀌었다. 감소하는 인구, 황량하게 방치되고 있는 인구 대비 넓은 면적, 열악한 인프라와 지역을 떠나는 청년들까지, 테루엘의 모습은 한국에서 익히 보아온 도시들, 소위 말하는 소멸위기의 지방 도시들을 닮아있었다. 

▲테루엘주는 스페인 북동부 아라곤 광역자치주 내의 소자치주다. 서울의 24배 이상 가는 면적(14804제곱킬로미터)에 14만여 명의 시민이 흩어져 산다. 취재진이 방문한 테루엘시는 그 중 4만여 명이 모여 살고있는 테루엘주의 주도다. 공항과 역이 있고 소규모 관광 상권도 형성돼 있다. ⓒ프레시안 취재팀
 

"테루엘은 존재한다(Teruel Exist)" … 소멸과 싸우는 지역의 이야기

다만 이곳엔 한국의 지역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지역 정치인들이 있다. 베아트리체 마틴(Beatriz Martin)은 테루엘주에서도 시골 마을인 부에나(Bueña) 출신의 지역·여성 정치인이다. 

"전체 인구가 100명 남짓한 작은 고향 마을"을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고향을 떠나 살아야 했다. 12살 무렵 마을의 학교가 문을 닫으며 처음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인근 도시 사라고사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후엔, 상경하는 대신 "얼마 없는 지역의 일자리"를 선택해 고향 주에 남았다. 오전엔 BMW 대리점에서, 오후에는 테루엘 공항에서 일했다. 

그가 고향 마을 부에나에 정주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바로 '정치'였다. 2019년까지만 해도 "전혀, 아무런 정치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는 그는, 2022년 현재 테루엘 지역 유권자 그룹 '테루엘은 존재한다(Teruel Exist)' 소속 현직 스페인 상원의원이다. 

교육과 일자리 문제로 "청년이 고향에 정주하지 못하는 현실"을 몸소 체험해온 마틴은 소멸위기 지역의 청년이자 여성으로서 "지역소멸이라는 현실이 지역민인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끝없이 고민했고, 그 고민이 그대로 출마의 이력이 됐다. 

▲<프레시안>은 지난 8월 20일 스페인 아라곤주 테루엘 현지에서 유권자 그룹 '테루엘은 존재한다(Teruel Exist) 소속 베아트리체 마틴(Beatriz Martin) 상원의원을 만났다. 마틴은 지난 2020년 스페인 총선에서 테루엘 지역구의 상원의원으로 당선됐다. ⓒ프레시안 취재팀

'테루엘은 존재한다'의 창립 멤버이자 현직 고문인 아마도 고데드(Amado Goded)는 "지역현실에 대한 마틴의 고민과 정치에 뛰어들겠다는 의지" 단 두 요소를 "마틴을 스카웃한 이유"라고 밝혔다. 

마틴의 보좌관 디에고 로라스 지메노(Diego Loras Gimeno)도 마찬가지의 이력을 지녔다. 지난 2019년 마틴의 선거 캠프에 합류한 디에고에겐 "그 전까지 별다른 정치활동 경력이 전무"했다. 다만 대학 때문에 마드리드로 이주한 후에도 그는 고향살이를 꿈꿨고, 그래서 테루엘주에서 일어나는 시민운동에 꾸준히 참여했을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지역에 정주할 수 없는 지역민'으로서의 고민과, 그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정말로 그것뿐인가요?" 납득하기가 쉽지 않은 의원실의 '이력'에 질문을 던지자, 오히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 사람의 다소 독특한 정치행보엔 지역 시민운동의 맥락과 스페인 선거법이 보장하는 제도정치 내의 정치적 다양성이 함께 결합돼 있다. 

'테루엘은 존재한다'는 "지역소멸의 책임을 묻겠다"는 모토 아래 22년간 지속된 테루엘 지역의 '유권자 그룹(Agrupación de electores)'이다. 지역정당(local party)과 비슷해 보이지만 정당이 아닌 일종의 시민 연대체다. 스페인 선거법은 일정 규모 이상의 시민 서명이 충족될 경우 이들에게 특정 선거에 대한 입후보 자격을 부여한다.

지역민들의 이슈에 밀착하여 펼쳐온 시민운동은 오랜 기간 지역민들 사이에 "어마어마한 신뢰"를 만들어 냈다. 여기에 그 신뢰를 투표에 반영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 겹쳐져 마틴과 같은 '이력 없는 정치인'을 탄생시켰다.

1999년, 철도와 의료 헬리콥터, 정신건강 센터 등 지역 인프라의 확충을 주장해온 3개 시민운동 플랫폼과 지역 곳곳의 반상회 연맹체인 '이웃협회'가 모여 '테루엘은 존재한다'를 결성했다. "테루엘 전체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창립 과정"을 거쳐, 유권자 그룹은 기어코 "지역민들이 지역소멸 현상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를 부여했다.

바로 정치, 그것도 한 지역의 의사를 중앙에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정치로서의 정치다. 시민운동가가 아닌 상원의원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은 당위를 넘어 실질적인 효과를 지역에 선사한다.

▲<프레시안>은 지난 8월 20일 스페인 아라곤주 테루엘 현지에서 유권자 그룹 '테루엘은 존재한다(Teruel Exist) 소속 디에고 로라스 지메노(Diego Loras Gimeno) 의원 보좌관을 만났다. ⓒ프레시안 취재팀

마틴은 하원에서 올라오는 여러 제정 법률을 "오로지 '시골'의 관점에서 검토하고 수정하는 일"을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이라고 강조했다. 가령 2020년 팬데믹 국면에서 그는 "도시 중심으로 설계된 방역정책, 도시의 기업들만을 위해 책정된 기업 지원 기준들을 시골의 현실에 맞게 수정"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수행했다. 

"도시 사람들은 슈퍼마켓이라도 갈 수 있게 하면서 시골 사람들을 위한 예외 조항이 없는 방역정책"에, "노동자 수와 기업 규모만을 기준으로 책정돼 지역 기반 기업들에는 해당되지 않는 지원정책"에 제동을 걸어 법안을 새롭게 조정했다.

아마도 고문은 이러한 과정을 일종의 "싸움"이라 표현했다. 중앙이 표방하는 규모의 경제에 밀려 사라져가는 지역이슈를 끊임없이 환기하는 일. 30년 이상 지역운동에 매진해 온 그는 실제로 그 '싸움'을 통해 하나 뿐인 지역의 철도를 지켜냈고, 의료 헬리콥터를 끌어왔다. 

마드리드에서 테루엘까지의 4시간 철도 노선, 단 한 대의 헬리콥터로 운영되는 응급 의료 시스템 등은 대도시의 입장에선 있으나마나할 정도의 미미한 인프라겠지만 지역민들에게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변화"였다.

▲<프레시안>은 지난 8월 20일 스페인 아라곤주 테루엘 현지에서 유권자 그룹 '테루엘은 존재한다(Teruel Exist) 소속 아마도 고데드(Amado Goded) 고문을 만났다. ⓒ프레시안 취재팀

"소멸의 '주체'는 누구인가" … 중앙의 책임을 묻는 '비워진 스페인' 운동 

'테루엘은 존재한다'는 2019년 시작된 스페인 내륙 소멸위기 지역들의 연합 시민운동인 '비워진 스페인(España vaciada)'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국내에는 '텅 빈(Empty) 스페인' 운동으로 알려진 해당 활동에 대해 질문을 건네자 "전선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비어있는' 게 아니라 '비워지고 있는' 스페인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굳이 능동형 형용사를 사용한 이유는 지금 스페인이 '누군가에 의해서' 비어지고 있음을, 다시 말해 누군가에 의해서 지역이 사라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죠." 

그 '누군가'를 명확히 하는 데서 운동과 정치의 방향성이 선명해진다. 즉 "우리 지역만의 부흥이 아닌, 비워지고 있는 스페인의 모든 지역들"을 위한 정당한 권리회복이 이 운동의 목적이 된다. 아라곤 광역자치주 테루엘주의 상원의원인 마틴이 의회에서 카스티야 이 레온 광역자치주의 소리아주를 위해 목소리를 낸다. 국내로 치면 경상도 지역구 국회의원이 의회에서 전라도 지역의 소멸위기를 지적하는 셈이다. 

"우리는 같은 아라곤주의 대도시 사라고사보다, 건너편 주인 카스티야 이 레온의 소멸위기 지역 소리아의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더 가깝습니다. 함께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까요. 유감스럽게도 소리아에는 '테루엘은 존재한다'와 같은 지역을 대변하는 정치인이 없으니, 같은 입장의 도시인 테루엘 출신 의원이 그들을 위해 연대하는 건 당연합니다." 

▲1만4804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테루엘주의 면적 대부분은 광활하고 붉은 황무지로 이루어져 있다. 넓은 땅이지만, 현지 시민들은 "농업을 주요 산업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프레시안 취재팀

테루엘과 소리아의 정치적 연대는 특히 매년 각 지역 간의 예산 갈등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정된 지역예산을 '누가 더 많이 가져가는가'를 두고 지역과 지역이 싸우는 구도는 그간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지역 문제로 지적돼 왔다. (관련기사 ☞ "서울에 '착취'당하는 지역청년의 삶, 어떤 후보도 말하지 않는다")

테루엘과 소리아는 '더 많은 예산을 우리 지역에 달라'고 싸우는 대신, 혼자서는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한 두 지역 간의 연대를 통해 '지역을 위한 파이를 넓히자'고 주장한다. 연대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법을 발의하고 통과시킬 수 있는 힘도 강화된다. "지역 간의 연대가 지역정치의 강화로 이어지는" 순환구조가 만들어지고, 지역의 반대급부는 다른 지역이 아닌 '중앙'이 된다. 

아마도 고문은 이렇게 '중앙 대 지역'의 구도를 재편하는 일이야말로 중앙에 의한 '지역 악순환'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국가의 예산은 인구에 따른 투자가치로 정해집니다. 인구가 적으면 투자가치가 없다고 평가되고, 이는 지역 인프라의 몰락으로 이어지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인구는 더 줄고, 투자가치는 다시 줄어듭니다. 악순환이고, 모순이죠. 특정 지역을 넘어 모든 지역에 대한 투자 자체를 전향적으로 확대해 이 악순환을 깨야 지역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테루엘 역(Teruel Station)의 모습. 작은 역사에는 주말마다 고향을 찾는 소수의 시민들, 혹은 스페인 관광객들이 들락거린다. 과거 테루엘주의 주요 산업이었던 광산 채굴 산업 등이 중단되면서 테루엘주의 상위 자치구 아라곤 광역자치주는 테루엘을 지나가는 철도 노선을 폐지하려 했으나, 테루엘주의 시민 플랫폼들이 이를 막아냈다. ⓒ프레시안 취재팀

지역'들'의 정치를 통해 지역정치를 강화하는 일. 다만 이 아이디어에는 한 가지 선행조건이 필요하다. 테루엘과 소리아를 동시에 대의하는 의원을 한 명이라도 배출하는 일이다. 

아무런 정치 이력 없이도 '신뢰와 의지'를 갖춘 채 정치에 뛰어든 마틴의 존재 뒤엔 30여 년 동안 이어진 테루엘 지역의 시민운동이, 그리고 그 시민운동을 제도정치와 연결하는 스페인의 정치 제도가 배경으로 자리한다. 유권자 그룹은커녕 지역정당의 창당조차 법으로 금지된 한국의 선거제도로는 여의치 않은 게 사실이다. 

지난 9월 <프레시안>과 만난 백인식 진주같이 대표는 '지역정당의 창당'을 목표로 모인 국내 지역정당 네트워크의 경우에도 "지역정당 자체가 위법인 지금 상황에 이슈를 통한 연대 활동은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다"고 평했다. 정치의 형식이 정치의 내용적 확장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물론 한국의 입장에선 훌륭한 모델로 보이는 '테루엘은 존재한다'이지만, 이들 또한 의회에서의 힘, 언론노출도 등 여론을 만들어내는 힘이 "상원의원 한 명의 힘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고 말한다. 현존하는 방법은 하나, 연대의 저변을 더 넓혀내는 일이다. 마틴은 "언젠가는 한국의 지역과도 연대하고 싶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통역=한은아)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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