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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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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육먹고 노예로 팔던 전쟁포로 '잔혹사', 현재도 반복된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전쟁 직전인 우리가 아즈텍을 무시할 처지인가
전쟁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기 어렵다면, 적어도 전쟁범죄가 없는 세상이 바람직하다. 전쟁범죄를 제대로 처벌해 본보기를 삼지 않으면 지구촌 평화는 없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비롯한 여러 유혈 분쟁지역에서 크고 작은 전쟁범죄가 알게 모르게 벌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국제사회의 대응은 미약하기만 하다. 전쟁에 관한 국제법을 어긴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처벌을 비껴왔다. 지금껏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전쟁범죄자로 기소된 이들은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 약소국의 지도자들뿐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보다 근본적으로, 전쟁범죄는 왜 그치질 않고 일어나는가. 전쟁범죄는 막을 수 없는 ‘전쟁의 필요악’인가. 전쟁범죄자들은 어떤 논리로 그들의 범행을 합리화하는가. 이런 문제의식 아래 앞으로 1년 동안 매주 토요일에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를 싣는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 주요 분쟁지역들을 취재 보도해온 필자는 전쟁범죄를 둘러싼 여러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짚어볼 계획이다. <프레시안>은 이 연재를 통해 지구촌 평화의 소중함을 독자들과 함께 되새기고자 한다. 

전쟁포로를 노예로 삼고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것은 오늘의 잣대로 보면 해선 안 될 일이다. 동양 서양 가릴 것 없이 옛사람들은 전쟁포로 학대를 분명히 ‘전쟁범죄’로 못 박은 현대의 국제형사법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전쟁포로를 노예로 부리거나 노예시장에 내다팔아 전쟁비용을 메우곤 했다. 

2500년 전 동방의 제국 페르시아의 잇단 침공에 맞서며 ‘문명 민족’이란 자부심을 지녔던 그리스 도시국가의 시민들도 많은 노예를 부렸다. 자유민보다 노예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이를테면 스파르타의 경우 ‘헤일로타이’란 이름의 노예 숫자가 일반 시민보다 2배 넘었다. 시민들의 자유로운 일상은 따지고 보면 노동 착취와 비인간적인 학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 소유 

고대 그리스의 노예들은 대부분이 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들과 그 후손들이다. 그 시절 전쟁포로나 노예는 인권은커녕 살아있어도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480년은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살라미스 해전이 벌어졌던 해다. 출정을 앞둔 그리스 함대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포로 3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면서 승리를 기원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두 차례에 걸친 펠로폰네노스 전쟁(1차 기원전 460~445년, 2차 기원전 431~404년)에서도 포로와 관련된 전쟁범죄 기록이 나타난다. 펠로폰네노스 전쟁은 널리 알려졌듯이 아테네를 맹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맹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벌어진 오랜 유혈분쟁이다. 2차 펠로폰네노스 전쟁 때인 기원전 416년, 아테네는 지중해에 있는 작은 도시국가 멜로스를 포위 공격했다. 스파르타에 우호적이긴 하지만 중립 노선을 걷던 멜로스에게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에 들어와 아테네의 속국이 되라고 윽박질렀다. 

"신들의 세계에서 강력한 신이 약한 신을 지배한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자연 법칙은 우리가 결정한 것도 아니고 처음 이용하는 것도 아니다. 옛날부터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입장 바꿔 당신들뿐 아니라 누구라도 우리 아테네와 같은 강대국이 되면 우리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리스 고대역사가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기록한 이 말은 아테네 쪽에서 밀로스 쪽 협상대표단에게 했던 협박의 핵심 내용이다. 국제정치의 분석 잣대에서 다른 무엇보다 힘(power)이 있느냐 없느냐를 중요하게 여기는 냉엄한 현실주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약자인 멜로스가 끝내 강자 아테네의 요구를 거부하자, 아테네 원정군은 멜로스를 점령한 다음 성인 남성들을 모두 죽이고 아녀자들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아테네 사람들이 "우린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거야"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을까. 물론 일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다수는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타임 머신을 타고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인들을 만나 “당신들은 전쟁범죄를 저질렀어!”라고 비난한다면, 그리스 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전쟁범죄라는 데 선뜻 동의하지 않을 듯하다.

노예 소유는 아테네의 자연스런 일상이었고, 그 시대를 살았던 철학자 플라톤도 노예를 부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예 노골적으로 노예제를 옹호하는 글들을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론에 대해선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80-283쪽) 참조하기 바람). 

▲ 로마-카르타고 전쟁의 끔찍한 순간을 담은 판화. 16세기 독일 화가 하인리히 알데그레버 작품. ⓒ미 샌프란시스코 순수예술미술관
 

로마와 카르타고, 돌아가며 전쟁범죄 저질러

기원전 3세기,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로 침공했던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도 아테네 사람들처럼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자연 법칙’을 믿었다.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전쟁 무렵인 기원전 216년 칸나에 전투에서 절묘한 포위전술로 로마군에게 큰 치욕을 안겼다. 로마군 전사자 7만 명, 포로 8000명인데 비해, 카르타고 군은 전사자 5500명에 그치는 압승을 거두었다. 한니발은 로마에게 포로 몸값 지불을 포함한 강화 조건을 내밀었지만 거절당하자, 8000명의 로마 포로를 그리스 쪽에 노예로 팔아넘겼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2 한니발전쟁> 한길사, 202-205쪽 참조)

앞의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21세기의 잣대로 그 때의 일을 잰다면, 한니발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한니발은 전쟁의 속성상 승자는 전리품을 챙길 권리가 있고, 포로를 노예로 넘긴 것은 승자의 권리를 행사한 것으로 여겼다. 거꾸로 로마가 이겼다면 카르타고 사람들이 노예가 됐을 것이다. 칸나에 전투 70년 뒤에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제3차 포에니전쟁 끝 무렵인 기원전 146년, 로마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장군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잿더미로 만든 뒤 어린이를 포함한 5만 명을 노예로 끌고 갔다. 

그뿐 아니다. 로마 군대는 카르타고를 ‘그라운드 제로’로 만들었다. 성벽이나 신전, 주택 건물을 모조리 파괴하고 땅바닥을 가래로 고른 다음 소금을 뿌렸다. 군사력의 밑바탕이 되는농사를 아예 못 짓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고의적인 환경파괴는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심각한 전쟁범죄다. 고대 로마제국을 상대로 지중해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카르타고는 그 뒤로 다시 못 일어섰고,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환경파괴와 관련한 전쟁범죄에 대해선 따로 다룰 예정임).

 

원시인이 포로를 잡으면 어찌할까 

그리스 로마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는 어땠을까.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원시시대엔 노예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노예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착취할만한 정치사회적 조직이 이뤄지질 못했고, 낮은 생산력과 한정된 자연자원 때문에도 노예를 부리기가 어려웠다. 작은 단위의 씨족이나 부족이 전투를 벌여 적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해도 처리 문제로 머리가 아파질 뿐이다. 

"마을로 데려온 포로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주로 그를 잡아온 쪽의 능력, 즉 노예노동을 흡수하고 규제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그 사회가 국가형성 이전의 정치제도를 가졌는냐 아니면 국가형성 이후의 정치제도를 가졌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마빈 해리스, <식인문화의 수수께끼> 한길사, 209-210쪽) 

미국의 대표적인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에 따르면, 노예가 등장한 것은 약 5000년 전 지구상에 초기 형태의 국가가 생겨난 뒤의 일이다. 기원전 3300년부터 기원전 1500년 사이에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황하지역의 상(商)나라 등이 이른바 ‘시원적 국가’에 해당된다. 이들 지역에선 전쟁과 노예를 그린 그림들이 발견되곤 한다. 처음엔 남자 전쟁포로들을 모두 죽이고 다루기 쉬운 여자와 어린이를 노예로 썼고, 국가가 강력해짐에 따라 남자들을 노예로 부렸다.

노예가 없던 원시시대와 관련해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져본다. 만약에 당신이 5만 년 전이나 10만 년 전 어느 씨족(또는 부족)의 족장인데, 이웃 씨족(또는 부족)과의 전쟁에서 포로들을 잡았다면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일까. 당신의 마을로 데려가 가둬 놓는다면? 포로를 먹이고 재우고 감시하는 비용이 들 것이다. 풀어준다면? 자기 마을로 되돌아가 힘을 키운 다음엔 다시 공격해올 가능성이 높다. 

노예로 부려먹기도 어렵고, 가둬 놓지도 못하고, 풀어주는 것도 어렵다면? 선택 가능한 결론은 죽이는 것이다. 해리스도 "보통은 그 포로들을 집단의 일부로 흡수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포로를 적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기에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풀이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포로를 죽인 뒤 먹는 행위이다. 

▲ 메소포타미아 남부(지금의 이라크)에서 4천 년 전 번성했던 수메르(Sumer) 왕국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 창을 든 3명의 병사들과 왕(가운데)이 피 흘리는 전쟁포로들을 바라보고 있다. ⓒ런던 대영박물관

아즈텍 사람들이 인육 먹은 까닭 

문화인류학자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끔찍한 식인 행태(cannibalism)는 영양 문제와 직결된다고 여긴다.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많은 경우 식량난에 시달렸다. 특히 들판에서 먹이를 구하기 힘든 겨울철 나기가 큰 문제였다. 따라서 단백질 보충은 원시인들이면 누구나 지녔던 절실한 과제였다. 전쟁포로를 죽여 먹는 행위는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 시대의 잣대로 보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오늘날 카니발리즘은 브라질 같은 곳에선 일종의 상업화된 놀이로 바뀌어 표현되지만, 20세기에도 식인 문화를 지닌 종족이 발견되곤 했다. 이를테면 미국 인류학자인 토비어스 슈니바움은 1969년 <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가라>(Keep the River on Your Right)라는 제목의 짧은 견문기를 펴냈다. 여기에 식인 제사 풍습을 지닌 페루 밀림의 원주민 아라큼부트(Arakmbut)와 함께 지냈던 이야기가 나온다. (훗날 슈니바움은 아마존 밀림에서 선교사를 만난 뒤로 실종돼 그가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문화인류학자 해리스는 <식인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멕시코 아즈텍 문명의 특이한 제사 문화가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즈텍 제국은 테노치티틀란(오늘날의 멕시코시티)을 수도로 삼고 1200년 무렵부터 300년쯤 번성했으나, 1520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끌던 스페인 침입자들 때문에 무너졌다. 아즈텍 제국의 지배자들은 전쟁포로들을 피의 제물로 바치곤 했다. 특히 대기근 등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신을 달랜다는 명분으로 큰 규모의 제사를 올렸다.

해리스가 세밀하게 전하는 내용을 읽다보면 기괴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수백 명의 포로들이 피라미드 제단 위로 끌려오면, 신관들은 칼로 심장을 꺼내 제단 위의 화로에 넣어 태웠다. 죽은 포로는 피라미드 돌계단 밑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졌고, 그곳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아즈텍 제국의 귀족, 군인, 관료 등 지배계층)이 ‘식재료’로 챙겨갔다. 전쟁포로들이 단백질 공급원으로 된 데엔 척박한 자연환경도 한몫했다. 해리스에 따르면, 아즈텍 제국이 자리잡은 멕시코 지역은 1만 년 전 홍적세를 겪으면서 사냥할 초식동물이 많지 못했기에 종교적 제사 형식으로 끔찍한 식인 관행이 자리 잡게 됐다.

 

"우리가 아즈텍 무시할 처지 아니다" 

아즈텍 제국의 식인 제사는 너무나 끔찍한 전쟁범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코르테스를 비롯한 유럽 침입자들이 16세기에 아즈텍 제국의 신관들보다 더 잔혹한 방식으로 중남미 원주민들을 집단 노예화하고 끝내는 절멸시켰는가도 함께 짚어볼 문제다. 요즘도 ‘인디안’이라 잘못 일컬어지기 일쑤인 미국 원주민들을 집단 학살하고 ‘보호구역’이란 이름의 불모지로 내몰았던 19세기 미국 정부들의 잔혹행위도 마찬가지다. 이런 비판적 문제의식과 같은 맥락에서 해리스는 서구인들이 아즈텍을 흉볼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전쟁 규모는 선사시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커졌고, 특히 기독교가 주요 종교인 국가들은 무력 분쟁을 일으켜 높은 사상자 수를 기록했다. 전선에 방치되어 썩어가는 시쳇더미나 (아즈텍의 제사 뒤) 잔치에서 먹기 위해 토막낸 시체나 전부 죽은 사람의 시체인 것은 마찬가지다. 오늘날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서 허우적대는 우리가 아즈텍족을 무시할 처지가 아니다." (<식인문화의 수수께끼> 244쪽) 

 

약소민족을 짓누르는 현대판 노예제도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도 노예제를 일상으로 받아들였던 시대는 고대사가 됐고, 지금 우리는 21세기 살고 있다. 전쟁포로를 노예로 팔아넘기거나 학대하고 심지어 ‘식재료’로 처분하던 옛 전쟁에서의 악습들은 오늘날엔 심각한 전쟁범죄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인식의 변화는 매우 느리게 진행돼 왔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노예는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끝으로 생각해볼 점 하나. 현대의 전쟁이 포로를 노예로 삼지 않을 뿐 더욱 교묘한 형태로 사실상 패전국민 전체를 집단 노예화 하는 일은 없을까. 이를테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군사적 억압과 인권 침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스라엘은 1948년 제1차 중동전쟁과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차별 통치하는 한편으로 유대인 정착민 숫자를 늘려왔다. 

지금 이스라엘 감옥에는 팔레스타인 정치범이 4700명쯤 갇혀 있다. 팔레스타인 쪽에선 이들을 ‘전쟁포로’로 여긴다. 민족해방 투쟁 과정에서 사로잡혔다고 보기 때문이다. 감옥 안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입을 위장복이나 군화 같은 것을 만들라고 강요받는 팔레스타인 죄수들은 현대판 노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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