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그리는 여자들에 대한 책이 나왔다.'
얼핏 애매한 설명이다. 한국사회에서 만화는 무엇이고 여자는 무엇이기에 '만화 그리는 여자'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나? 만화인으로 살다가 인권기록활동가가 되어 책을 쓴 저자 박희정의 개인적인 고백에서 답을 찾는다. 여성 만화가 5인의 인터뷰를 담은 책 <그리고, 터지다>의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세상이 궁금했다. 만화가 좋았던 건 세상에 대한 낯선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궁금해서 만화를 하고 싶었고, 지금도 만화를 그리고 있는 여자들이 있다. 유년의 가난 속에서, 또한 인권활동 현장에서 차별을 마주하고 산 작가에게 만화는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어디에든 갈 수 있다고 격려하는" 친구이자, 차별로 점철된 현실세계는 알려주지 않았던 낯설고 새로운 길로의 안내자였다.
저자를 비롯한 이 여자들의 '만화 그리기'는 그 자체로 현실의 차별을 뚫어내야만 쟁취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저자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맏딸로서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집안을 일으키는 대신, 앞날이 불투명한 만화가의 꿈을" 키운 일을 "배반"이라고 표현한다. 이후 그는 만화가 대신 인권활동가의 삶을 살게 됐지만, 만화를 계속 그린 이들에게도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1990년대에 데뷔해 인상적인 작품들을 그려낸 여성 만화가들의 근황이 궁금했다. 그들 중 여전히 만화를 그리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변하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해서라거나, 작가로서의 수명이 다했다는 말은 나에게 충분한 해명이 되지 못했다. … 인상적인 작품을 남긴 여성만화가들에 대한 충분한 연구, 좋은 평론, 깊이 있는 인터뷰가 많지 않다는 게 슬프다. 그것은 '역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니까. 2010년대 이후 웹툰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요즘에도 사정은 비슷하거나 더 나빠보인다."
국내 여성서사 웹툰의 대표 작품으로 꼽히는 <카산드라>의 작가이자, 대학 동아리에서 저자와 함께 만화가의 꿈을 키웠던 동료, 그리고 이 책의 첫 번째 인터뷰이인 이하진 작가의 이야기는 저자가 이 '만화 그리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기획한 이유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한 여성이 재능을 펼친다는 것은 얼마나 복잡한 사회적 그물을 뚫고 이루어지는 일인가."
고전서사 <일리아스>를 여성서사로 재해석해 탄생한 <카산드라>의 주인공 카산드라에 대한 저자의 이 말은 만화가인 동시에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누군가의 아내이기에 '만화가 곧 투쟁'인 삶을 산 이하진 작가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신화나 역사서가 그렇듯 남성중심적으로 쓰인 <일리아스>에서 배제된 여자들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만화로 되살린 이하진 작가의 작업기와도 겹쳐진다.
"카산드라는 기획 단계에서 불가로 판정됐어. 여성 주인공 카산드라와 그를 돕는 남성 주인공 데메우스를 내세웠는데, 소년지 주독자는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 주인공은 안 된다는 거야. 전쟁물은 더더욱 그렇대. 남성 판타지를 충족시켜야 하는 콘텐츠 생산의 공식인 거지. 그래서 접었어." - 책 <그리고, 터지다>의 이하진 작가 인터뷰 중
인권기록활동가라는 직업적 특수성을 살려 섬세하면서도 명확하게 담아낸 책 속 이하진 작가의 삶은 <카산드라> 속 카산드라의 이야기가 왜 기어코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 과정을 독자들에게 생생히 전달한다.
만화를 그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작가의 삶,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이어진 장기간의 휴재, 작품 수출을 위한 번역조차 중단해야 했던 사정 등 만화와 웹툰 플랫폼 공지로만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작가의 친우이자 성실한 인터뷰어인 저자의 평가에 아주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된다. "이하진과 만화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있다"는 말이다.
"난 개인적으로 겪은 일들을 모티브로 삼는 작가라서 동시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녹여 넣은 게 아니라 그냥 내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내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건 나와 같은 일들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겠지. 나도 현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니까." - 책 <그리고, 터지다>의 이하진 작가 인터뷰 중
그런가 하면 저자는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이어진 콘텐츠 시장 내의 '여성서사 논쟁'에 대해서도 고민과 성찰을 담아낸다. 가령, 강하고 능동적인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페미니즘이 될 수 없는 걸까? 성적 대상화와 이성애 로맨스는 페미니즘 서사와 양립 불가능한 이야기들인가? 동화 '인어공주'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다시 쓴 웹툰 <해오와 사라>의 송송이 작가는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여성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여성이지만 여성이기 전에 '자기(自己)'인 면도 있어요. 자기의 욕망이 올바른 여성이라고 말해지는 것들과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여성들의 이야기인 거죠." - 책 <그리고, 터지다>의 송송이 작가 인터뷰 중
페미니스트 서사 <아갈리아의 딸들>도 마법소녀 만화 <세일러문>도 "진짜 좋아한다"는 송송이 작가는, '여성'이면서 '자기'인 캐릭터들의 서사 <해오와 사라>를 통해 판의 중심에서 배제돼온 여성들에게 '해방'이란 무엇일까 고민한다. 가령 작품 속 무대인 우도는 여성이 마주한 억압을 보여주는 공간적 상징물이지만, 어떤 캐릭터는 그곳을 떠나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두지 않는다. 저자는 이렇게 평한다.
"송송이는 여성을 특정한 방식과 내용으로 규정하고 등급화하는 시선에 저항한다. 해방이란 단어는 하나지만, 그것은 단 하나의 길로 규정될 수 없다. 가령 섬 안에 머무는 소박한 삶을 택한 복순에게는 이 선택이야말로 '야망'의 실현이다."
어떤 독자는 복순의 삶을 '패배적인 결말'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복순이 "아직 자기 욕구를 발견하지 못한" 여성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실패한 삶은 아니라는 것"이 작가가 내린 결말이다.
결국 여성서사를 더 자유롭게 하는 것은 "여성서사를 도식화하고 등급화하는 콘텐츠 소비자의 태도"가 아니라, '여자들이 득시글한 이야기' 속에서 "내가 세계의 일원임을 인식하되, 사회가 부여한 역할과 규범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스스로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발굴하고 전달하는 노력이었다.
책 <그리고, 터지다>는 이하진, 송송이 두 웹툰 작가를 비롯해 <안녕 커뮤니티>의 다드래기 작가, <봄이와>의 소만(천정연) 작가, <똥두>의 국무영 작가까지 총 5명 여성 작가의 작품과 고민, 그리고 삶의 모습을 잔잔하지만 치열하게 담아낸다.
책이 소개하는 작품들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있는 이라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지만, "교과서 여백을 낙서로 채우던 소녀들이 만화가가 되는 여정"은 아예 이들 작품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그 자체로도 충분한 재미를 준다.
특히 유무형의 계급 아래 "납득할 수 없는 세계"를 터뜨리고 싶은 야망을 간직한 이들에게는 이 책 속의 이야기들이 새로운 길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굳이 만화의 형태가 아니어도 , 불균등한 시장을 뚫고 기어이 세상에 나온 '이야기들'은 모두 의미를 지닌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저자가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만화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자기 말을 가질 자격이 있다. 그러니 당신의 이야기를 그리면 된다. 나는 그 이야기를 기다린다." - 책 <그리고, 터지다>의 서문 중, 박희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