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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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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류가 문명사회를 이룬 뒤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왔다. 오랫동안 국제사회에서는 침략행위를 비난했을 뿐 '범죄'로까지 보진 않았다. 전쟁의 통상적인 양상의 하나로 봤다. 이는 강대국들의 법학자들이 (약소국을 늘 침범해왔던 역사를 지닌) 자국의 입장에서 '침략'의 불법성을 모른 체 하거나 묵인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쟁포로를 학대하는 것이 지금은 전쟁범죄로 여겨지지만, 예전에는 노예로 팔아 전쟁비용을 충당하는 것을 비도덕적이라 생각하기는커녕 당연하다고 여긴 것과 마찬가지다.

뉘른베르크 재판이나 도쿄 재판은 전쟁범죄의 책임을 막연히 국가에게 물리는 것이 아니라, 전쟁지도부의 책임 있는 자리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개인에게 죄를 묻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 전문가들 사이에선 뉘른베르크 재판이 지닌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는 소리가 나왔다. 도쿄 재판도 마찬가지다. 지적되는 문제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법률적 문제'를 지녔다는 지적을 받았다. 다시 말해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다'는 '죄형 법정주의'의 기본원칙을 어겼다는 것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적용된 '평화를 깨뜨린 죄'(crimes against peace)와 '인도주의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는 그전까지 없던 법조항이었다. 그렇다면 뉘른베르크 재판은 (없던 관련 법조항을 새로 만들어 지난 범죄를 다스리는) 소급처벌을 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전쟁이 끝난 뒤 만들어진 사후법에 따른 소급처벌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뉘른베르크 재판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재판의 법률적 근거로 부전조약(不戰條約, 1928)을 꼽는다. 이 조약은 미 국무장관 프랭크 켈로그와 프랑스 외무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 두 사람이 적극 나서서 맺어졌기에 '켈로그-브리앙 조약'이라고도 불린다. 1928년 8월27일 프랑스 파리에서 15개국 대표가 모여 체결했다. 국제분쟁이나 외교적 갈등을 힘(전쟁)으로 해결하려 들지 말자는 것이 이 조약의 기본 이념이다(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독일·이탈리아·일본을 포함한 63개국이 이 조약에 가입한 상태였다). 

오늘날엔 이미 상식으로 굳어진 원칙, 다시 말해 '함부로 전쟁을 벌이면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는 원칙을 국제사회가 '부전조약'이란 이름 아래 합의한 최초의 조약인 셈이다. 전쟁을 포기하라는 뜻에서 '전쟁 포기 조약'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전쟁을 함부로 벌여선 안 된다는 원칙을 선언했을 뿐, 조약을 어길 경우 어떤 불이익(징벌)을 받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조항이 빠졌다는 한계를 지녔다. 

실제로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잇는 추축국들이 침략전쟁을 벌였을 때 말로만 비판했을 뿐이다. 현실적으로 전쟁 초반에 '부전조약'에 바탕을 둔 강력한 법적 제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쟁이 끝나고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국제군사재판이 열렸을 때 소급입법이 아니냐는 지적에 맞서, 전승국들이 '부전조약'을 법률적 근거로 내세운 것은 그나마 이 조약이 최소의 효용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변호사들은 부전조약은 선언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라며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고 형법도 없다'는 논리를 폈다. '소급 입법'에 따른 위법한 재판이라는 비판이었다. 로버트 잭슨 수석검사를 비롯한 검사들은 이렇게 반론을 폈다.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할 때 그 침략전쟁이 부전조약이라는 전쟁에 관한 국제법을 위반한다는 사실은 독일 지도자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을 테니, 이들에 대한 처벌은 소급처벌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뉘른베르크 재판이 법적 근거도 없이 제멋대로 전승국들이 '승자의 재판'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재판소가 문을 열 시점에서 이미 있는 국제법에 따라 침략국의 전쟁범죄를 다루는 것이라 주장했다(Richard A. Falk 외 편, <Crimes of War>, Random House, 1973, 96-98쪽 참조). 

'소급 입법' 지적에 대해 서구 지식인들의 다수 의견은 '문제가 없다'는 쪽이다.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등으로 잘 알려진 독일 출신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소급 입법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아보자. 

[(아렌트에게 전쟁에서의) 정의는 법을 요구하고 재판을 요구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것은 '사후법에 따른 소급적 재판은 아닌가'라는 논의에 대한 아렌트의 대답에 잘 나타나 있다. 그녀는 "제노사이드(genocide 대량학살)와 같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범죄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에는 정의 그 자체가 새로운 법률에 의한 심판을 요구한다"고 말함으로써 위의 논의를 비판한다. 따라서 '왜 책임자 처벌이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대해, 아렌트는 "범죄가 저질러지고 거기에 (헤르만 괴링 또는)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범죄자가 있다면, 정의가 심판을 요구한다.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간 사회의 조건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정의감이 상처받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다카하시 데츠야, <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역사비평사, 2000, 113쪽). 

▲ 러시아군 포로수용소를 살펴보는 하인리히 히믈러 나치 친위대(SS)대장. 히믈러는 도망치다 붙잡혀 독극물 캡슐로 자살했기에 뉘른베르크 법정엔 서지 않았다.
 

변호인들, "승자의 전쟁범죄는 다루지 않는가"

둘째, 뉘른베르크 재판소를 구성하는 재판부와 검찰부 모두 전승국 출신들로 구성했기에 중립성·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았다. 피고인들의 국적인 독일인 법조인 판검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에 '승자의 재판'이라는 한계를 재판부 구성에서부터 드러냈다.뉘른베르크 법정에서 피고인들의 독일인 변호사들은 모두 지난날 나치변호사협회에 소속됐던 개운치 않은 전력을 지녔다. 이들은 '승자의 전쟁범죄는 이 법정에서 다루지 않는가'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지적은 터무니 없는 지적은 아니다. 

바로 지난주 글(본 연재 30)에서도 살펴봤듯이, 뉘른베르크 재판소의 법적 기반은 런던협정(1945)이다. 정식 명칭이 '유럽 추축국 주요 전쟁범죄자 기소 및 처벌에 관한 협정 및 국제군사법원 헌장'인 이 협정 체결 과정에선 전승국 지도자들의 전쟁범죄 처리는 아예 거론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런던협정 문안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독일 쪽 변호인들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며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비판했다. 하지만 전승국의 입장에서 보면,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했으니, 패전국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로 규정한 런던협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폈다.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변호인들이 꼽은 승전국(연합국)의 전쟁범죄 가운데는 △드레스덴을 무차별 폭격하고(1945년 2월),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1945년 8월) 많은 비무장 민간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리고 소련의 독일 점령과정에서 특히 베를린에서 저질렀던 성폭행과 재산 강탈과 더불어, 발트해 3국과 폴란드 영토를 상당부분 자국 영토에 편입시킨 것도 전쟁범죄라고 주장했다. 

이런 지적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독일 변호사들로선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뉘른베르크 피고석에 선 전쟁범죄자들을 어떤 쪽에 무게를 두고 비판해갈 것인가를 두고 검사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다. 독일의 침략전쟁 그 자체에 집중할 것이냐, 아니면 유대인 학살 범죄에 집중할 것이냐는 논란이었다. 재판이 진행된 과정을 보면, 전자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렸다. 

로버트 잭슨 수석검사를 비롯한 검찰진은 300명 넘는 증인들을 법정으로 불러 나치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음모 과정을 밝히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홀로코스트(유대인의 대량학살)를 누가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는가도 물론 재판과정에서 다루었다. 강제수용소 운용과 유대인 학살 등 피고인 개별 범죄를 추궁하긴 했지만, 검사들은 나치 정권의 침략행위 자체가 지닌 위법성에 집중했다. 

▲ 알베르트 슈페어가 ‘히틀러의 건축가’로 신임을 받을 무렵의 사진. 슈페어는 전쟁 말기 군수장관을 지내며 군수공장에서의 강제노동 착취 등의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히틀러의 건축가' 슈페어 회고록 

'히틀러의 건축가'로 일컬어졌던 알베르트 슈페어(1905-1981)는 나치 전범자들 가운데 특이한 인물이다. 슈페어는 베를린과 뉘른베르크를 비롯한 독일 주요 도시에 엄청나게 큰 규모의 공공건물을 지었다. 그런 뛰어난 능력 때문에 히틀러의 총애를 받았고 1942년부터 1945년 패전 때까지 히틀러 가까이에서 군수장관을 지냈다. 그가 군수장관으로 있는 동안 독일 점령지에서 독일 본토로 군수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노예노동으로 죽고 다쳤다.

슈페어는 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죄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 헤르만 괴링(1893-1946)을 비롯한 다수 피고들이 자신들이 패자이기에 승자의 재판에 끌려나왔다고 여겼다. 하지만 슈페어는 "비록 독재체제였지만 그토록 끔찍한 행위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그렇게 법정에서 뇌우치는 모습을 보였고, 징역 20년형을 받았다.

20년을 꼬박 감옥에서 보내며 슈페어는 회고록을 냈다(Inside the Third Reich, 독일어 초판 1969년). 영역본 672쪽, 한글번역본 955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에서 프리체는 24명의 피고들, 특히 히틀러에 이어 2인자 행세를 하던 헤르만 괴링이 전범재판 기간 동안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를 세밀하게 적어 놓았다. 

감옥에 처음 갇혔을 무렵, 피고들 사이에 말을 주고받은 것은 엄격히 금지됐다. 마당에서 햇볕을 쐬며 걷는 시간에도 서로 떨어져 있어야 했다. 전쟁범죄에 대해 서로 말을 맞추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좀 지나자, 피고인들은 마당을 함께 거닐게 됐다. 미군 감시병들은 멀찍이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슈페어의 글. 

[초기 심문 때에는 피고의 외부 접촉이 차단됐지만, 이젠 분위기가 느슨해져서 함께 마당을 거닐며 감시자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재판, 기소, 국제재판소의 효력, 불명예에 관한 마음 깊은 분노에 대해, 그들의 의견을 마당을 돌며 듣고 또 들었다. 스무 명의 피고인 가운데 나와 입장을 같이하는 이는 한스 프리체 한 사람뿐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자이스-이크바르트도 내 생각을 이해하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논의 자체가 불필요한 시간낭비였다](알베르트 슈페어, 863쪽). 

글 끝에 슈페어가 말하는 '내 생각'이란 나치 히틀러 정권이 극악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1심으로 끝난 재판에서 슈페어는 징역 20년, 그와 생각을 같이하며 재판에서 반성적인 태도를 보였던 한스 프리체(독일 라디오 방송국의 뉴스 부문 국장, 선전 담당자이자 해설가)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하지만 같은 반성적 입장을 보였던 자이스-이크바르트(점령지 네덜란드의 국가판무관)은 교수형을 피하지 못했다.

괴링, "히틀러 정권의 전설 만들자" 

슈페어에 따르면, 대부분의 피고인들은 '독일이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승자의 재판에 붙들려와 있을 뿐'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고록에서 헤르만 괴링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보자. 

[재판에서 히틀러의 통치를 어떤 시각으로 해석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괴링은 히틀러 정권의 일부 행위(유대인학살 등)에 대한 입장 표명을 삼갔지만, 히틀러 편을 들고 나섰고, 우리 피고들의 유일한 희망은 이 재판을 기회로 삼아 히틀러정권에 대한 긍정적인 전설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주장했다](알베르트 슈페어,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 마티, 2007, 864쪽). 

슈페어는 괴링이 재판정을 선전장으로 만드는 식으로 독일 국민을 기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슈페어가 괴링에 대해 쓴 글을 더 보자. 

[(괴링은) 승리자인 적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50년만 지나면 그의 시신은 대리석 관에 뉘어지고 국가적 영웅, 순교자로 국민들의 추앙을 받게될 것이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도 비슷한 꿈을 꾸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운명이고 모두가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며, 예외는 없다고 괴링은 말했다. 변호를 위해 애를 쓰는 것도 소용없는 짓이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확인한 바이지만, 괴링은 그 어느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자신의 변호에 힘을 쏟았다](알베르트 슈페어, 864쪽) 

슈페어에 따르면, 괴링은 책임 회피, 교란작전, 부인 등의 방법을 사용하며 목숨을 건지기 위한 필사적인 싸움을 이어갔다. 다른 피고인들도 모든 죄를 히틀러에게 미루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는 괴링과 마찬가지였다. 전쟁범죄에 관련된 서류에 서명이 들어있다는 것을 검사가 보여주면, 조건반사적으로 히틀러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 했다. 

슈페어는 군수장관으로서 수백만 명을 강제동원했던 데 대한 집단 책임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법정에서 다른 피고들이 책임을 히틀러에게 돌리며 구차한 변명을 듣던 그는 너무 화가 치민 나머지 불쑥 '당신들은 엄청난 월급을 받는 우편배달부들이냐?"라고 외쳤다. 이 말은 당시 전세계 언론에 머릿기사로 보도돼 화제를 모았다. 이와 관련한 슈페어의 글을 보자. 

[나는 히틀러의 명령을 이행한 책임을 인정했다. 나는 (군수장관으로서) 모든 정부의 명령을 하부 조직에 전달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모든 지도부 인사는 (히틀러로부터) 받은 명령을 검증하고 판단해야 하며, 그 명령에 대한 공동 책임을 져야한다. 비록 그것이 강제에 의해 수행된 것이라도 말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히틀러의 범죄행위도 포함해서 집단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참사가 일어난 마당에 그 누구도 이 책임을 회피해선 안 된다. 만약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정권의 지도부는 분명 집단 책임을 열렬히 옹호하고 나섰을 것이다. 정권의 수장(히틀러)이 독일 국민과 세계 시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버린 이상, 나에게 그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있다] (알베르트 슈페어, 871쪽).

▲ 전쟁범죄자로 체포된 뒤 수감될 무렵에 찍은 헤르만 괴링 사진.

"독일인들은 죄 없다. 히틀러를 믿었을 뿐" 

9개월에 걸친 재판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나치 독일의 핵심 지도부였던 피고인들조자 잘 몰랐던 참혹한 전쟁범죄 사실들이 알려졌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여러 수용소의 참상이 동영상으로 보여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피고인들 사이에 겉으론 태연한 척 점잔을 빼면서도 동요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끝끝내 책임을 히틀러에게 미루고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진 않았지만,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을 들어보면, 몰랐던 사실에 충격을 받고 흔들리는 분위기가 전해진다.

히틀러의 변호사였고 폴란드 총독을 지냈던 한스 프랑크(교수형)는 재판 후반부에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뇌우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정치적 악은 파멸을 부른다"는 말로 히틀러를 비난했다. 반유대주의 주간지로 악명 높았던 <돌격수> 발행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교수형)도 최후진술에서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은 큰 잘못이라 지적했다. 

독일 육군 원수로 독일 국방군의 최고위급 장성인 빌헬름 카이텔(교수형)은 히틀러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으로 '예스맨' 소릴 들었지만, 최후진술에선 "다시 그런 범죄에 휘말려드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했다. 나치 독일의 전시 강제노동정책을 입안하고 이끌었던 프리츠 자우켈(교수형)은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범죄로 마음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피고인들의 우두머리 격인 헤르만 괴링조차도 처음의 기세등등하던 모습과는 달리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1946년 8월31일 법정에서의 최후진술에선 "집단학살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 납득하기 어렵다"는 말로 학살 행위를 마지못해 인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괴링은 곧 이렇게 말했다. 

"독일인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히틀러를 믿고 그의 권위주의 정부 아래에 있었던 독일인들은 (전쟁범죄에 관련된) 사건들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가 없다" (괴링을 비롯한 피고인들의 최후진술 관련 자료는 뉘렌베르크 재판소의 수석검사였던 로버트 잭슨 기념관인 '로버트 잭슨 센터' https://www.roberthjackson.org에서 검색 가능). 

▲ 뉘른베르크 재판의 피고인들을 수용한 감옥. 자살이나 자해를 막기 위해서 경비병들이 감방 앞에서 밀착 감시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괴링은 처형을 앞두고 자살했다.

비밀리에 강에 뿌려진 11명의 유골 

뉘른베르크 재판은 1945년 11월부터 재판이 열려 1946년 10월까지 1년 가까이 이어졌다. 1946년 10월15일 피고인 24명 가운데 22명에게 선고가 내려졌다(로버트 레이는 감옥에서 자살을 했고, 크루프는 몸이 아파 재판을 받지 못하다가 죽었다). 이들 22명의 피고 가운데 3명은 무죄로 풀려났고 19명에게 유죄가 선고됐다(교수형 12명, 종신형 3명, 징역 20년 2명, 징역 15년 1명, 징역 10년 1명) 

이 가운데 실제로 교수형이 집행된 피고는 모두 10명이었다. 전날 밤 몰래 숨겨둔 독극물 캡슐을 삼켜 자살한 헤르만 괴링, 그리고 행방불명된 상태라 궐석재판을 받은 마르틴 보어만(나치당 간부)을 뺀 나머지 10명은 1946년 10월16일 교수형으로 죽었다. 신분세탁을 하고 어디선가 은신 중인 것으로 여겨졌던 보어만은 1945년 5월2일 베를린을 탈출하다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1972년에야 뒤늦게 드러났다. 

전날까지 미군 경비병들이 농구 연습을 하던 교도소 체육관에 설치된 2대의 교수대에서 번갈아 처형이 이뤄졌다. 진행을 빨리 하기 위해 서두르는 바람에, 먼저 처형된 죄수가 밧줄 끝에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는데도 미군 헌병이 다음 죄수를 데리고 형장으로 들어섰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던 죄수도 있지만, 몇몇 죄수는 나치식 인사로 '지크 하일'(Sieg Heil, 승리 만세) 또는 '하일 히틀러'(Heil Hitler, 히틀러 만세)를 외치고 죽었다. 도쿄 전범재판으로 교수형 판결을 받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인 A급 전범들이 1948년12월23일 처형장에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를 거듭 세 번 외쳐댔던 것보다는 점잖았다고 말해야 될까. 

자살한 괴링의 시신과 처형된 10명을 합쳐 모두 11명의 나치 주요전범 시신들의 처리 방식은 소련이 바라는 대로 이뤄졌다. 소련은 '시신들을 불 태운 뒤 흔적도 남기지 말고 없애야 한다'고 했다. 땅에 묻혀서도 안 되고 전범들의 시신을 유족에게 인계해서는 더욱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적어도 2000만 명의 사망자를 내 독일에게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기에 다른 전승국들보다 적개심이 강했다. 

처형된 나치 전범들은 관에 실린 채 뮌헨의 한 화장터로 옮겨졌고, 가명으로 한꺼번에 태워졌다. 그리곤 비밀리에 뮌헨 가까운 이자르 강의 콘벤츠 지류에 뿌려졌다. 유족에겐 유골은 빠진 채 유품만 전해졌다(1948년 12월23일 도조 히테키를 비롯해 도쿄 재판에서 처형된 7명의 죄수들도 화장된 뒤 유골은 비행기에 실려 도쿄만 근처 바다에 뿌려졌다. 독일과의 차이라면, 일부 추종자들이 화장터의 남은 유골 부스러기를 긁어모아 몰래 보관하다가 몇 년 뒤 유족들에게 나눠 주었다). 

독일인들은 전쟁범죄 책임이 없을까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주요 범죄자들을 처형했지만, 독일 사람들은 어떤 눈길로 그 재판을 바라보았을까. 다음 주 글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재판이 마무리된 1946년 11월의 여론조사에선 6%만이 '재판이 불공정했다'고 응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재판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이면에는 지난날 나치 정권을 지지했던 '독일인의 집단적 죄의식'에서 풀려났다는 안도감이 깔려 있었다. 

그렇다면 나치 정권을 지지했던 다수의 독일인들은 전쟁범죄의 책임이 없을까. 이와 관련, 다음 주 글에서 실존철학자 카를 야스퍼스의 '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비롯해 '독일인의 집단적 책임' 문제를 다뤄보려 한다. 아울러 독일이 나치의 어두운 과거를 제대로 청산했는지, 이른바 '탈(脫)나치'를 이루었는지의 문제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독극물 자살 괴링 "히틀러 믿었을 뿐, 독일인은 죄 없다"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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