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22~24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브릭스(BRICS) 정상회의가 열린다. 올해 정상회의에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는 세계의 다극화 흐름 속에 브릭스의 외연 확대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현재 브릭스 5개국의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42%를 차지한다. 5개국이 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6%,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달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8년까지 브릭스의 세계 경제성장 기여도가 G7의 기여도보다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에는 브릭스에 신규 회원국으로 가입하거나 옵서버가 되려는 나라들이 늘고 있다. 현재 브릭스 의장국인 남아공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22개국이 공식적으로 가입을 신청했고, 20여 개국이 비공식적으로 가입에 관심을 표명했다. 이 나라들은 브릭스가 추진할 것이라고 알려진 '공동통화'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경제뉴스 속의 브릭스
국내 주요 언론은 브릭스 정상회의 개최 사실과 그 의미를 어떻게 전하고 있을까. 우선 보도 자체가 많지 않다.
브릭스 정상회의, 아프리카 협력 강화에 초점…"마크롱은 초대 안해" 23.08.08 뉴스1
베네수엘라, 브릭스 가입신청… 中-러의 ‘反美연대 확장’에 합류 23.08.03 동아일보
베네수엘라, 브릭스 가입 신청… 中·러시아 영향력 확대 촉각 23.08.02 조선비즈
"브릭스, 달러 의존 낮출 방안 논의" 23.07.24 매일경제
푸틴, 내달 브릭스 정상회의 갈까…남아공 "안 오는 게 베스트" 23.07.16 한겨레
<사우디·이란도 브릭스 합류 논의…中 주도 '反서방 연대' 강화> 23.06.02 서울경제
<뉴스1>은 <AFP> 통신 등을 인용해, 이번 정상회의가 '브릭스와 아프리카'라는 주제를 다룰 것이고 브릭스의 '외연 확장'에 대해서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매일경제>는 중국 <환구시보> 보도를 인용해,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회원국 간 무역 거래 시 달러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이 논의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남미의 대표적 '반미' 국가인 베네수엘라가 브릭스 가입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부각했다. <동아일보>는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 중심 '일극 체제' 세계 질서의 '다극 체제' 재편을 꾀하면서 브릭스를 그 핵심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분석했다. <조선일보>는 베네수엘라가 브릭스 회원국이 될 경우 "중국과 러시아 등에는 더욱 힘이 실릴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브릭스를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기구로 바라보고 경계하는 두 신문의 시각은 미국 주류 언론 매체들의 시각과 닮아 있다.
그밖에 브릭스 정상회의에 관해 최근에 나온 보도는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 영장이 발부된 상태인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회의 참석 여부에 관한 것이 많았다.
브릭스 정상회의에 관한 분석이나 전망은 별로 없고, 간단한 외신 인용이나 주변적인 사실에 관한 보도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브릭스의 확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제 통화질서의 변동에 관해서는 보다 깊이 있는 논의가 있을까?
경제뉴스 속의 '탈달러'
'탈달러'라는 검색어를 입력했더니 맥쿼리그룹의 분석가가 내놓은 전망에 관한 기사가 맨 위에 떴다. 기사는 최근 피치의 미국 국가 신용등급 강등이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의 탈달러화 움직임에 기여할 것이라는 맥쿼리그룹의 전망을 소개하고 있었다.(맥쿼리 "피치의 美 신용 강등, 달러화 패권에 타격 줄 것" 23.08.03 연합인포맥스)
이 기사에서 말하는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의 '탈달러화'"란 무엇일까.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미국은 러시아를 국제 금융결제 시스템인 SWIFT에서 배제했다. EU 국가들은 러시아의 원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줄였다. 그 결과 에너지 생산 대국인 러시아는 에너지 수요가 큰 중국과 교역을 늘렸는데, 러시아가 미국 주도 결제 시스템인 SWIFT를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중국의 결제 시스템인 CIPS를 사용했다. 결제 통화는 중국의 위안화와 러시아의 루블화. 올해 3월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이뤄지는 교역의 약 3분의 2는 이미 위안화와 루블화로 이뤄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미국이 러시아에 가한 금융 제재가 달러의 막강한 지위를 뒤흔드는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그동안 브레튼우즈 체제와 페트로달러 체제를 거치며 달러는 기축통화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렸다. 달러는 압도적인 군사력과 함께 미국의 유일 패권국 지위를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미국은 달러라는 수단으로 세계의 부를 흡수하는 동시에 미국의 뜻을 따르지 않는 나라들을 제재하고 압박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가하면서 그간 누적된 모순과 반발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G7 바깥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은 자신들도 언제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고 달러의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영원한 것은 없다? .. 막강한 지위 누리던 기축통화 '흔들흔들' 23.05.29 매일경제
그때도 흔들렸지만... 달러가 80년 '기축통화'인 이유는 23.06.22 머니투데이
글로벌 중앙銀 "'기축통화' 달러 지배력, 앞으로 10년은 변화 없다" 23.06.28 서울경제
"너 같으면 중국 돈 쓸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밝힌 '달러패권' 23.07.09 매일경제
'脫달러' 가속하는 인도, UAE 이어 인니와도 '자국통화 무역결제' 검토 23.07.18 조선일보
中 위안화 결제비중, 첫 달러 추월 23.07.25 서울경제
남미, 中 위안화 거래 확대... 브라질.아르헨 이어 볼리비아도 23.07.29 뉴시스
달러화의 지위 변화는 국내 언론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라서 보도가 산발적으로 나온다. 큰 그림을 파악하려면 이런 기사들을 일일이 찾아서 퍼즐 조각처럼 짜 맞춰야 한다.
달러의 대안을 찾는 나라들
사실 올해는 국제 통화와 관련된 굵직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먼저 1월에는 대표적인 산유국으로서 페트로달러 체제의 주요 축인 사우디아라비아가 "달러 외 통화로 석유를 거래할 의사가 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3월에는 중국해양석유공사가 프랑스 토탈에너지를 거쳐 UAE에서 액화천연가스(LNG)를 수입하면서 위안화로 결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어 6월에는 국영 인도석유공사를 비롯한 인도 정유사들이 러시아 원유를 구입하면서 위안화로 결제했다. 석유 거래를 달러화로만 해야 한다는 '페트로 달러'는 이미 무너졌다.
지난 3월에는 룰라 브라질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브라질과 중국의 교역에 헤알화와 위안화를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달러 부족과 물가 급등에 시달리던 아르헨티나는 4월부터 중국에서 상품을 수입할 때 위안화로 결제했다. 중국은 탈달러화를 추구하는 국가들과 잇따라 양자 협정을 체결하며 위안화 사용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중국의 대외 거래에서 위안화 결제가 48%를 차지해 달러 결제(47%)를 최초로 넘어섰다.
인도는 자국 통화인 루피화의 힘을 키우기 위해 일찍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루피화로 빠른 결제가 가능한 시스템인 통합결제인터페이스(UPI)를 구축해 놓았다. 인도는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등 18개국과 루피화로 교역 결제하는 방안을 이미 실행하고 있거나 앞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아세안의 움직임도 눈에 띈다. 지난 3월말에 열린 아세안 재무차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주된 의제는 미국 달러화, 유로화, 엔화, 파운드화 의존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아세안은 회원국들끼리 교역할 때 달러보다 역내 화폐를 이용하고, 중앙은행간 직거래로 빠르고 편리하게 결제하는 시스템을 마련할 계획이다. 아세안이 역내 통화 협력을 가속화하는 것은 지정학적 리스크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이렇게 중요한 논의가 이뤄진 회의였지만 국내 언론의 보도는 '정부, 아세안+3 재무차관 회의서 다자 통화스와프 논의'라는 제목의 <연합뉴스> 기사 1건밖에 없었다.
중동과 아프리카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이란은 러시아와 교역할 때 달러가 아닌 루블화를 사용하기로 했다. 올해 5월 이란은 인도네시아와 교역할 때 달러를 거치지 않고 양국의 통화로 직접 결제하기로 합의했다. 7월에는 인도와 UAE도 달러 대신 루피와 디르함으로 결제하기로 합의했다. 이라크는 지난 2월부터 중국과 교역할 때 위안화로 직접 결제를 허용했으며, 자국 화폐인 디나르의 가치가 계속 추락하자 지난 5월에는 달러 거래를 전면 금지했다. 이라크가 달러 거래를 금지했다는 사실은 국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달러 부족이 심각한 케냐는 지난 3월 사우디와 협정을 체결해 미국 달러 대신 케냐 실링으로 석유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수단은 러시아와 자국 통화로 거래하는 방법을 협의하는 중이다. 지난해 외채 위기를 맞이했던 가나는 UAE 등에서 석유를 수입할 때 달러 대신 금으로 대금을 지불했다.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사용할 새로운 통화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동아프리카공동체(EAC)는 '동아프리카 실링'이라는 지역화폐를 창설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아프리카 수출입은행과 협의하는 중이다. 16개국이 모인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와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도 공동통화를 고려하고 있다. 물론 공동화폐 구상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벽이 많다. 그래서 아프리카 국가들은 브릭스 공동통화가 창설될지 여부에도 높은 관심을 보인다.
변화의 방향은 정해졌다
외신을 뒤져보면 국경 간 교역에서 달러를 사용하지 않고 결제하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 언론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신흥국들 중심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서 우리가 아직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변화의 방향은 이미 정해진 것 같다. 무역 결제에서 위안화 또는 자국 통화를 사용하는 나라가 많아질수록 달러화 수요는 감소할 것이다.
금융 전문가들은 결제통화로서가 아닌 준비통화로서 달러화의 역할 때문에 달러화의 독보적인 지위가 당분간 유지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미국 채권시장만큼 규모가 크고 유동성이 풍부한 채권시장을 가진 다른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세계 각국의 외환보유고에서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도 감소하는 추세였다. 달러화 비중은 지난해 4분기 기준 58%로 여전히 절반을 넘지만, 향후에는 더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10년쯤 후에는 어느 한 국가의 통화가 달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통화의 다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이번 브릭스 정상회의를 계기로 우리도 시야를 넓히고 다양한 가능성을 살필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