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갯소리로 "지나가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지역내총생산(GRDP) 전국 1위의 부자 도시 울산광역시가 청년층 신규 고용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장년 노동자, 퇴직자 중심의 늙은 도시가 되어 가고 있다.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양승훈 지음, 부키 펴냄)는 '대한민국 산업수도'라 불리는 울산의 위기를 통해 제조업과 수출을 중심으로 성장해온 한국 경제에 닥친 위기의 본질을 보여준다.
"2010년대 중후반 조선업이 어려워져 구조조정을 했을 때, 10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울산, 부산 등 동남권이 재채기를 한 거죠. 그랬더니 전국이 다 흔들렸습니다. 울산의 제조업이 흔들리면 전국의 제조업이 다 무너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특정 지역의 이야기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이야기입니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는 지난 1일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울산의 쇠락은 수출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의 미래와 직결된 문제라고 강조했다.
제조업 버리고 지식경제산업으로 가자?
양 교수는 울산은 일제강점기 석유 비축을 위한 기지로 출발해 1960-70년대 국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을 바탕으로 급성장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부, 기업, 노동자의 정성과 노력이 모여 이룬 "미라클"이다. 때문에 그는 '제조업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으니 지식 기반 경제로 이행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기를 든다. 한국은 제조업 세계 5대 강국일 뿐 아니라 국민총생산(GDP)의 27.1%를 제조업을 통해 번다. 총고용에서 제조업 비중은 25%로 OECD 국가 중 독일과 이탈리아 다음으로 높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제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와 IT 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의 종류와 성격이 굉장히 다릅니다. 제조업은 아무리 안 좋아졌다고 해도 일정 수준의 이상의 벌이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줄 수 있는 비전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 기반을 두고 다음 단계의 산업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중산층 시민들을 어떻게 경제적으로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고용의 차원에서 산업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R&D 예산 깎는 무도한 정부, 산업 생태계는 무너지고 있다
미국 바이든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등 정부 주도의 산업 정책이 다시 부활하는 시대에 윤석열 정부는 연구개발(R&D) 예산을 삭감하는 등 역행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양 교수는 우려했다.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계속 늘려왔던 알앤디 예산을 줄이려는 시도 자체가 굉장히 위험하고 일정 부분은 무도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현 정부가 대기업 중심의 정책과 소통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로 지적했다.
"기후위기와 관련한 대응책인 RE100(Renewable Electricity 100%,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자는 캠페인)에 있어 대기업들은 내버려둬도 자기들 물건 팔기 위해서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맞추겠죠. 문제는 거기에 납품하는 업체들 중엔 RE100이 뭔지도 모르는 업체들도 많습니다. 그럴 여력이 없거든요. 이런 거야말로 정부가 중기벤처부, 산업부 등이 선도적으로 끌고 나가면서 밑에서부터 단단하게 만들어야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그냥 대기업들이 잘하고 있다고, 그런 와중에 기저에 있는 생태계 자체가 무너지고 있어요."
동남권 메가시티 구상은 왜 지지부진한가
양 교수는 한 세대 전까지는 작동했던 '산업 가부장제'가 "미래 세대의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지역 중화학공업에 있는 모든 산업들은 남녀 비율이 97대 3 정도로 남성들만 채용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지역의 여성들은 결혼해서 육아와 가사를 담당하는 역할로 한정됐어요. 1987년 이후 이들 가족이 안정적으로 중산층이 되면서 이런 남성 외벌이 모델이 작동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중산층 가정의 높은 교육열로 자녀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가능하면 대학을 보냈습니다. 대학 나온 딸들의 일자리는 어떻게 될까요? 울산에서 여성의 커리어 패스라는 건 없습니다. 이젠 재생산이 가능한 모델이 아닌 거죠. 이 문제는 산업의 위기, 지역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인구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그는 과거와 달리 물리적 힘이 생산직 노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게 되면서 GM, 피아트 등 외국 자동차 공장에서는 여성들도 생산직으로 고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여성들과 청년층들을 붙잡을 수 있는 문화, 서비스 관련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선 동남권 메가시티(부산-울산-경남) 건설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울산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여성들과 청년들은 일차적으로 부산으로 갑니다. 그 다음이 수도권이죠. 동남권 메가시티 구상에 포함되는 도시들이 거리상으로 보면 통근이 가능한데 실제로는 통근이 가능하지 않아요. 부산으로 출근해 저녁을 먹고 돌아오려면 오후 9시가 넘으면 올 수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회생활이 안되는 거죠. 일차적으로 철도를 포함한 인프라 구축이 중요한데 지자체들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합의가 쉽지는 않은 상황입니다."
맨체스터, 피츠버그, 디트로이트, 그리고 울산
양 교수는 책에서 영국 맨체스터, 미국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 등 해외의 공업도시를 비교하면서 울산의 미래에 대한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맨체스터의 사례는 아주 간단하게 제조업 대공장이 노조와 갈등이 싫다고 철수를 하면 지역이 어떻게 망가지는가를 보여줍니다. 일자리라는 관점에서 영국 모델은 완전히 실패한 것이죠. 미국의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는 차이가 있습니다.
피츠버그는 철강 산업을 버리고 IT, 하이테크 산업을 유치했습니다. 그래서 도시 자체는 되살아났지만 지역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반대로 디트로이트는 원래 있던 자동차 산업의 일자리를 지키는 쪽으로 갔습니다. 외부적으로 보기엔 디트로이트는 쇠락했고, 피츠버그는 도시 전환에 성공했다고 보여지지만, 일자리의 측면에선 그렇지 않죠. 두 도시의 1인당 개인소득의 격차도 그렇게 크지 않아요."
그는 결과적으로 피츠버그의 인구는 감소했고, 인종 분리와 소득격차는 더 증가했다는 점에서 과연 성공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울산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양 교수는 정부가 제조업 육성이라는 산업정책 차원에서 지원을 하면서 각 지자체의 이해관계를 거중 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이를 통해 지자체가 눈앞의 이득과 손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실질적 협력이 가능해진다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제조업 벨트를 만들 수 있다고 역설했다.
"동남권을 잘 묶으면 제조업에 있어 어떤 구상을 하면 그것을 대규모 양산까지 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제조업 클러스터는 제가 보기엔 중국 선전 정도 밖에 없어요. 우리도 충분히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제조업 벨트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기획이 성공한다면? 당연히 한국 경제의 미래도 밝아진다. 이대로 울산이 쇠락하도록 둔다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반대 방향으로 치달을 것이다. 울산 디스토피아는 곧 대한민국 디스토피아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