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숟갈에 반찬 한 젓가락, 국 한 입. 이 비율을 잘 맞추기 위해선 양을 정확하게 계산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맛있는 반찬이 왠지 모르게 자꾸 아까워서 나중에 먹으려고 미뤄둔다. 계란말이와 차돌된장찌개, 시금치 무침이 먹음직스럽게 놓여있으면 시금치 무침으로만 우선 배를 채우는 거다. 배고플 때 먹어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란말이와 찌개에 들어있는 차돌박이는 꼭 나중에 먹는다. 그러다가 밥이 부족해 남은 몇 숟갈은 짜게 해치운 적도 수없이 많다.
안주도 예외는 없다. 연어를 두고도 양파에 하얀 소스로만 한 입을 채우기도 하고, 육회가 한 접시 가득 놓여있어도 한두 점 겨우 집는다. 그래 놓고 술병이 비워질 때라야 양껏 먹는다. 좋은 것을 아껴두려는 성질*은 이상하게 식탁 앞에서 잘 발현된다. 자꾸 아껴둬서 뭘 하고 싶은 걸까. DNA에 저장과 비축에 대한 본능이 새겨져 있기라도 한 걸까.
어렸을 땐 필기구를 엄청 좋아했는데, 이 고약한 성질은 공책에 대해서도 유별나게 발현되었다. 샤프처럼 계속 쓸 수 있는 건 상관없었다. 공책은 무척 마음에 드는데 페이지를 다 써버리면 더는 못 쓴다는 게 골자였다. 그래서 마음에 꼬옥 드는 색상의 공책은 좋아하는 과목에 썼다.
나만의 규칙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색상의 공책은 흥미가 생기지 않는 과목에 썼다. 그래서 영어와 사회는 보통 보라색 혹은 진한 초록색 공책이었고, 수학과 과학은 선물 받거나 학교 앞에서 나눠주거나 하며 받은 노란색 혹은 주황색 공책을 썼다. 기억도 흐릿한 걸 보니 과학은 공책이 아예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엔 수학 공책으로 보라색을 쓰기도 했다. 좋아하는 색상의 공책이라도 써야 조금이라도 더 공부할 것 같은 생각에. 하여간 이상한 습관이었다.
나는 이런 성향이 나만 있는 줄 알았다. 매번 뭔가를 아껴 먹고 있으면 맛이 없냐는 질문을 받아왔었기에. 맛이 별로야? 아니, 완전 맛있는데. 근데 왜 이렇게 안 먹어. 아껴 먹고 있는 거야. 팍팍 먹어, 더 시키면 되지. 하지만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 한정된 양이다. 1인분을 더 주문하는 순간 양이 과다해져서 한 숟갈에 담긴 효용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음식물 쓰레기만 더 만드는 셈이다. 그러면 앞에 앉은 사람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퍼’ 먹는다. 아니, 이 맛있는 걸 어떻게 안 아끼고 마구 먹을 수 있지?
글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수년간 써온 수많은 문장과 소재들은 전부 ‘나와의 대화’ 채팅방 혹은 갤러리의 심해에 가라앉아있다. 아껴둔다고 저장해둔 건데 언제쯤 발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 글 말고 다음에 써야지, 이 문단에 말고 다른 문단에 끼워야지, 하며 미룬 문장도 몇백 자나 될까. 발굴할 수는 있을까. 심지어 지금 쓰고 있는 이 이야기도 연초부터 아껴두다가 이제서야 꺼내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글감을 아껴두는 경우엔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이 글감으로 뭘 쓰려고 했는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분명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소재였는데 다시 보니 영 매력적이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밥과 반찬의 비율을 맞추는 것처럼 소재와 기억의 유통기한도 잘 계산해야 한다. 잘 해내지 못하면 그냥 잊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고, 나는 아무것도 보고 듣고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그래서 이 ‘아껴두려는 성질’에 대해서는 지금 쓴다. 비록 한겨울에 마주한 글감을 가을에서야 쓰고 있긴 하지만 이정도면 비교적 덜 묵힌 편이다. 좋아하는 식재료든 글 재료든 아껴두다가 유통기한을 넘겨서 쓰지도 먹지도 못하고 버리기까지 하는 사람이니까.
김인철, 류은지가 같이 쓴 <좋은 것을 아껴두려는 성질>을 보며 엄청난 위안을 받았다. 이 희한한 성질머리가 내 고유의 것이 아니었다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니. 정말 다행이다.
가령 새싹 비빔밥을 시켜 먹는다고 하자. 맛있는 나물과 새싹이 어우러진 밥그릇을 필두로 내 테이블을 점령하다시피 한 일련의 반찬 접시들 중 나는 메인 반찬은 늦게 늦게 아껴먹으려 하는 성향을 보이곤 한다. 새싹 비빔밥 한 숟갈, 그 후에 게장 한 입... 아니야 아니야 일단 어묵부터 처리하자. 그리고 새싹 비빔밥 한 숟갈, 그 후에 내가 좋아하는 파김치 한 줄기... 아니야 아니야 일단 양파조림부터 처리하자. 뭐... 이런 식이다. 결국 어묵이나 양파조림으로 채워진 위는 바라고 원했던 양념게장이나 파김치를 위한 공간은 마련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위액과 함께 소화되고 마는 것이다. (P.52) - 《좋은 것을 아껴두려는 성질》 中
이 문장을 본 순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나만 이럴 리가 없잖아! 그리고 거울 치료가 된 건지 요즘은 식탁 앞에서는 최대한 계산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맛있는 반찬 먼저 한 입, 그리고 덜 맛있는 반찬 한 입. 제육볶음과 콩나물 무침이 있으면 제육을 먼저 한 입, 그리고 콩나물을 한 입. 그다음은 양파 장아찌 하나 먹어주고, 그러고 또 제육 한 점. 밥이 너무 남는 날엔 그냥 남아있는 반찬들로 삼삼하게 마무리한다.
밥을 심심하게 마무리하는 법을 익힌 뒤로 신기하게도 모든 걸 적당히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점심시간에 들어간 카페에 대기 줄이 길어도 그냥 그러려니, 원래 사람 많잖아, 하고 넘기고, 지나가던 행인과 부딪히면 불현듯 나던 짜증도 덜 올라오고, 버스에 사람이 많아도 그러려니 한다. 뭐든 내 계산대로, 마음대로 되는 것은 적으니까. 어떻게든 내 입맛에 맞추려던 것들을 포기하니 많은 게 편해졌다.
성질이 행동과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하지만 반대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역으로는 참이 될 수 없는 논제 같았달까. 올해 초 겨울 냅다 떠났던 고성 여행 중에 건진 책 한 권에서 이런 교훈을 얻을 줄이야.
이어폰에서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부류의 노래가 나오면 무조건 다음 곡으로 돌리고 봤는데, 요즘엔 굳이 곡을 넘기지 않는다. 기분과 얼추 맞으면 듣는 거다. 적당히 먹고 넘기기, 적당히 흘려듣기, 적당히 맞추기. 내 수많은 추구미 중에 ‘만사에 여유로운 듯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어쩌면 이 상에 가까워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마음에 드는 색상부터 쓰느라 사무실 책상 위엔 하늘색과 흰색의 필기용 메모지와 푸른 계열의 플래그용 포스트잇만 남아있지만 최근 산 채소 중에서 가지, 감사, 버섯 등의 좋아하는 재료들은 진즉에 다 해치웠다. 아껴두다 기한을 넘겨서 먹지도 쓰지도 못하고 버리는 일은 앞으로 적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