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나의 물과 뭍을 호령하는 사자와 악어 각자의 홈그라운드가 아닌 곳에서는 생존에 위협 암사자 무리에 저항했지만 배 보이는 순간 '게임 끝'
프로스포츠 선수들만 홈그라운드를 선호하고 어웨이경기를 꺼리는게 아닙니다. 승부를 가리는 차원을 떠나서 먹지 않으면 먹히는 야생에 내던져진 짐승들일수록 홈그라운드에 대한 집착은 강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야생은 적당한 모험을 용납하지 않거든요. 죽이거나 죽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사바나 파워랭킹에서 최상위권에 포진한 맹수들도 마찬가지예요.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권능이 미치지 못하는, 멀고 먼 원정지역으로 향하는 순간 순식간에 한끼식사 고깃덩어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오늘의 이야기 주인공인 비련의 나일악어처럼요.
암사자 무리가 악어를 집단 사냥하고 있다. /유튜브
사자는 다소 과장된 별명이긴 하지만 ‘백수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압도적 파워와 피지컬, 그리고 조직력까지 갖추고 있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뭍’에서만 적용되는 권능입니다. 사실 개별 개체의 힘과 덩치로는 코끼리나 물소에도 밀릴 정도죠. 하물며 물에서는 어떨까요? 여긴 사자의 출입금지구역입니다. 사바나의 강과 늪지에는 양대 괴수인 하마와 악어가 떡하니 버티고 있거든요. 자칫 물속에 들어가서 이들의 신경을 건드렸다간 하마의 일격에 허리뼈가 두동강 나거나 악어의 회전공격 데스롤(death roll)에 너덜너덜 생체분해되고 말거예요. 영국 BBC 야생매체인 사이언스 포커스 매거진이 매긴 야생동물 치악력 순위 톱텐에서 악어 3대천왕인 아프리카 나일악어·호주 바다악어·미국 미시시피악어가 금·은·동메달을 휩쓸었습니다. 그 다음 4위가 하마예요. 그 최강 치악력 그룹의 일원인 나일악어가 오늘 비련의 주인공이 됐어요. 우선 동영상부터 보실까요?
암사자 무리가 악어를 집단 사냥하고 있다. /유튜브
악어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반세기에 한 번 볼까말까한 진기한 광경이 포착돼 남아프리카 야생전문 포털 레이티스트 사이팅스(Latest Sightings)에 소개됐어요. 맞붙을일이 좀처럼 없는 사자와 악어가 생사의 현장에서 맞붙은 겁니다.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스와 LA다저스의 대결처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시카고 불스의 경기처럼 상상조차 어려운 비현실적 경기가 성사됐어요. 악어가 본바닥인 뭍으로 나가는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 반대로 사자가 물가로 들어서는 일은 어지간해선 보기 힘들고요. 이 혈투를 성사시킨 동력은 ‘굶주림’이었습니다. 암사자의 협업사냥은 사자 무리를 지탱시켜주는 힘입니다.
어린 새끼 사자가 어미와 함께 사냥한 고기를 먹고 있다. /Africa Geographic X. Royal Madikwe X
끈끈한 조직력으로 다져진 암사자들의 헌신적인 희생 덕에 새끼들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수컷들은 여기저기 사진의 씨를 뿌릴 흘레파워를 충전합니다. 그러려면 먹어야 해요. 살아 숨쉬는 뭐든요. 임팔라·얼룩말·누 같은 주식거리들이 보이지 않으면 대안도 찾아야 합니다. 한입거리에 불과한 새끼 혹멧돼지 사냥에도 진심인 까닭입니다. 동영상이 촬영된 곳은 야생동물 풍부하기로 이름난 아프리카 잠비아 카푸에 국립공원입니다. 제법 어린 새끼들도 아우른 한무리의 암사자들이 협업으로 포획하려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악어였습니다. 삐뚤빼뚤 엇갈려 아래위로 솟은 이빨을 한 전형적인 크로커다일인 나일악어였습니다. 덩치로 봐서는 아직 성적으로 성숙하지도 않은 어린 놈으로 보여요. 아침나절부터 내리쬐는 햇살에 일광욕으로 신체를 덥히고 있거나, 얕은 물가를 어슬렁거리며 사냥 준비를 하다가 떼로 몰려든 사자들에게 붙잡힌 것으로 보입니다. 사자와 악어가 근접 조우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래 동영상(Latest Sightings facebook)처럼 기본적으로 데면데면하게 스쳐지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악어가 사자의 포식현장을 헤엄쳐 지나가고 있다. /페이스북
사자들이 악어까지 공략한다는 것은, 그만큼 정상적인 사냥이 쉽지 않다는 방증으로 보입니다. 오죽하면 악어를 건드렸겠습니까. 그러나 어렵게 포착한 먹잇감이니 피를 봐야죠. 눈에 보이는 것만 1대 13입니다. 게다가 뭍으로 끌려나온 악어의 움직임은 굼뜰 수 밖에 없어요. 여기가 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자떼들이 어어어 하는 사이에 사자 다리통을 냅다 덥석 물고 몸통을 회전축 삼아서 뱅그르르 돌려서 우두두둑 끊어내며 데스 롤 공격을 성공시킬 수도 있었을텐데요. 이 공격의 여파로 선혈이 뿜어져나오며 늪가를 붉게 물들이면, 저 멀리 떨어져있던 다른 나일악어들을 광분시키면 그야말로 악어에 의한 사자떼 대학살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을텐데요.
입을 벌리고 일광욕을 취하고 있는 나일 악어. /Kenya Geographic
하지만 악어는 사자들의 홈그라운드에서 십여마리의 암사자들에게 둘러싸여있습니다. 하지만 사자에게 물려가도 정신만은 차린다고 악어는 최대한 정자세를 취하며 방어태세에 돌입합니다. 사실 철갑처럼 단단한 악어의 등갑은 이빨과 치악력 못지 않은 훌륭한 무기이자 방어수단입니다. 동물 치악력 순위 10위에도 들지 못하는, 상대적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턱힘을 가진 사자로서는 아무리 협업을 한다해도 악어의 가죽을 드드드득 벗겨내는게 쉽지 않습니다. 이 것만 뚫어내면 그 안에 들어있는 생생하고 야들야들한 내장과 살점으로 든든히 속을 채울텐데, 사자들의 속이 타들어갑니다. 배는 곯아오고 눈은 뒤집힙니다. 오래 이어질 것 같은 대치 상태는 비교적 허무하게 종료됐습니다. 장시간 대치에 지졌는지, 긴장이 풀렸는지 악어가 너무나 쉽게 아랫배를 드러내고 말았거든요. 악어핸드백 가죽을 연상시키는 보들보들하고 허여멀건한 아랫배가 사자들에게 노출되는 순간 게임은 그자리에서 끝났습니다.
사자에게 잡아먹히고 남은 악어 몸뚱이. /safariguideafrica
우툴두툴하고 숯검댕같은 색깔에 철갑같은 비늘로 덮여있는 악어의 등과 달리 배쪽 비늘은 밝게 빛나고 보드랍습니다. 이곳에 바로 총배출강이 위치해있거든요. 총배출강이란 소화시킨 변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배설, 흘레붙을 때 맞대는 생식기관까지 모두 품은 관이자 구멍입니다. 이곳이 없으면 대를 이어 번식도 할 수 없고, 배설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없어선 안될 부분이예요. 하지만 총배출강을 품은 아랫배는 치명적인 급소랍니다. 몸이 뒤집히고 배가 훤히 드러나는 순간 사자떼에 둘러싸인 가련한 어린 악어의 지상에서의 운명은 여기서 종료됩니다. 악어의 배를 노리는 건 다른 종류의 포식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악어는 서로 잡아먹으며 최강자를 생존시키는 냉정하고 잔혹한 종족의 전통이 있습니다. 동족의 배는 자신의 배를 불릴 수 있는 최적의 공격 포인트예요. 악어들이 데스롤을 통해 동족을 잡아먹는 동영상(Diócesis de Juigalpa facebook) 을 잠시 보실까요? 이들은 배를 허공으로 드러내며 고깃덩이를 찢어내는 동시에 자신의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포식자이지만 언제 식사 파트너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악어들이 데스롤 방식으로 동족을 잡아먹고 있다. /페이스북
이제 급소를 침탈당한 악어는 그 보드라운 악어 뱃가죽이 사자 이빨에 속절없이 우두두둑 벗겨지겠죠. 그 속의 것들이 순식간에 쏟아져나왔을 겁니다. 그 싱싱한 내장들은 순식간에 사자들에게 물리고 뜯기고 조각나서 마파람에 게눈감추듯 사라졌을테고요. 이날 어미 사자들의 피의 성찬에 동참한 새끼 사자들은 일찌감치 피맛을 봄과 동시에 굶주림을 면하려면 고귀함 따위는 버리고 뭐든 먹어야 한다는 걸 경험칙으로 배웠을 겁니다.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가 언젠가 필요하면 본능적으로 악어 사냥에 나설 테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