岳岩 최학근
내가 머물었던 자리를 비워도 누구 하나 뜨끔해하거나 아쉬워하지 않는다. 세상(世上)은 자기에게 이해타산(理解打算)이 없으면 남에 대해 종래로 곁눈을 팔지 않는다.
참담(慘憺)하고 어색(語塞)하고 난감(難堪)한 국면(局面)을 타개(打開)하려면 이 자리를 잠시(暫時) 비우는 것이 현명(賢明)한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순간(瞬間)의 빗나간 처사(處事)를 되돌리려면 일정한 시간이 소요(所要)된다.
침묵(沈默)은 나약(懦弱)의 근성(根性)이다. 인내(忍耐) 역시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는 한낱 졸렬(拙劣)한 태도(態度)다. 또한 경계심(警戒心)이란 비겁(卑怯)할 때 드러나는 표현(表現)이다.
워낙 세상엔 만만한 일이 없다. 오로지 당신(當身)이 능력(能力)과 재간(才幹)을 솜씨 있게 익힐 때라야 남이 업수임을 당하지 않는 법(法)이다.
문뜩 의구심(疑懼心)이 드는 건 협소(狹小)한 안광(眼光)으로 다른 사람을 비하(卑下)하는 사람을 살펴보면 대체로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허풍쟁이들이다. 아직도 케케묵은 노예근성(奴隸根性)으로 정신(精神)을 못 차리는 것 같다. 이런 사람은 늘 사처(四處)로 쏘다니며 뒤에서 남의 지적(指摘)질만 일삼는 자들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아부(阿附)로 굽신거리며 자기보다 센 사람 앞에선 고양이앞 쥐가 되어 비굴(卑屈)하게 아양을 떨어가며 구차(苟且)한 삶을 영위(營爲)한다.
남을 가르치려면 우선 먼저 자신(自身)의 훈계(訓戒)하는 말투부터 고치라고 권고(勸告)하고 싶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누구와 말을 하면서 자꾸 쓰는 “네가 먼저 그러길래”라는 말이다. 한 두 번의 경험(經驗)과 짧은 지식(知識)으로 자신이 마치 무성(茂盛)한 재목(材木)인양 하면서 남들의 풀을 죽이고 으스대는 알량한 태도(態度)를 거두어 들이고 좀 겸손(謙遜)하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계기(契機)가 되었으면 좋겠다.
장자(莊子)가 말했듯이 ‘인생(人生)의 최고 경지(境地)는 자적(自適)하여 즐기는 절대적(絶對的)인 정신자유(精神自由)이지 물질적(物質的) 향수(享受)나 허위적(虛僞的)인 명예(名譽)’가 아니라고 했다.
이 말씀이 내가 그토록 바라고 하고싶던 속심말이기도 하다... 악암(岳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