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감정을 존중한다
나는 나의 감정에 대하여 퍽 애착심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오장육부 (五臟六腑)중에 마음을 가장 으뜸으로 꼽고, 칠정 중에 사랑을 제일로 여긴다.
말이 난김에 하는 말이지만 어떤 사랑이든 거기에는 꼭 좋아하는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 사람의 감정이란 처음 만남으로 시작하여 자주 만나게 되고, 빈번한 만남에서 점차 좋아하다가 나중엔 사랑하게 된다. 나는 천성적으로 보름달같은 여자들을 보면 첫 눈에 확 끌리고 곧잘 빠져든다.
그렇다고 고운 여자만 보면, 게걸스런 개 남의 죽그릇 넘겨다보듯 그런 속되고 치사한 인간이 아니다. 다만 나의 눈에 꽂히고 마음에 와닿는 보름달 같은 여자라면 좋겠다는 의향(意向)이다. 그러니 굳이 여자들의 얼굴을 가지고 그 어떤 평가도 내리고 싶진 않다. 대체로 여러 모양의 여자들의 생김생김 가운데 다 저마다의 특유한 미점(美點)이 있어 서로가 서로를 대신할 수 없는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름달 바라보듯 고운 여자가 좋아 끌리게 된 계기가 있다. 사실 나의 원초적 본능이 여색을 밝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춘기 때 꿈에 늘 보아왔던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 보름달과 똑같게 생긴 이유에서이다. 그래서 이성에 눈 뜨게 된 날부터 점찍은 여자들의 얼굴은 모두 보름달같은 여자들이었고, 결국 보름달처럼 환하다는 평(評)을 듣는 여자와 어설프게 풋사랑을 나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사랑 함자를 모르던 시절의 유치한 불장난이라 할까.
한때 사랑이란 간판을 들고 아무나 만나고 다니다가 종당엔 흐지부지 끝낸 여자들의 얼굴이 거의다 보름달처럼 생겼었다. 가는 곳마다 부옇게 코 떼우고 낭패상이 되어지만 시종일관 풀이 죽지 않았다. 오히려 보름달처럼 얼굴이 동그란 여자를 기어이 찾아 만나볼 오기가 더 살아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보름달 같은 여자에만 미친놈처럼 집착한 것은 다 꿈에 만난 보름달같이 생긴 여자탓이다. 실로 나란 놈은 한심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 오죽하면 "넌 가질 수 없는 물건이나 쫓아다니는 바보"란 소리를 들었을까. 혹시 가설해서 내가 초승달이나 상현달, 또는 하현달과 같은 여자들과 만나서 죽자살자하고 지냈더라면 운명이 확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말려도 한사코 가는 것이 세월이요, 싫어도 자꾸 먹는 것이 나이다. 인생을 모르고 여자를 몰라 마신 쓴 고배는 오로지 나의 우매(愚昧)에서 비롯되었다. 반숭건숭이 사람 죽인다고 하루 아침에 갑자기 보름달 같이 동그란 얼굴의 여자들이 ‘소외’당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젠 보름달 같은 여자보다 초승달 같은 요염한 여자들을 더 선호한다. 하여간 그놈의 "整形"이 동그란 보름달까지도 막 칼질하여 초승달로 뜯어고치는 희비의 세상이 왔다. .
내가 여자에 한(恨) 비슷한 감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랫동안 보름달같은 여자를 좋아한 것이 죄라면 죄가 되어 흔히 세상에 유행되는 그런 사랑을 원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다시 마음에 드는 여자와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보름달이 아니라 조각달이라도 좋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동그란 얼굴의 여자가 못내 그립다. 그리고 깊이 사랑한다. 예전에 못다한 사랑에 충실하면서...
남녀의 만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헐뜯지 말아야 한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따지지도 말고 묻지도 말아야 한다. 남녀의 자유로운 만남은 서로의 나이도 국적도 지내온 환경도 가리지 않는다. 다만, 남자건 여자건 어떤 사람과의 만남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즉, 만남의 선택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안목 그리고 지적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또 다른 품격이다. 결국 사랑은 위대하고 고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