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번에 “나는 왜 블로그에 글을 쓰는가?”에서 언급(言及)했다시피 어떤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어딘가 채 말하지 못한 미흡(未洽)한 점이 있는 것 같아 오늘 이렇게 다시 글을 보충(補充)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어떤 글에 전념(專念)하다보면 때론 꼭 해야 할 말을 놓치는 순간이 있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또 까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탈락(脫落)된 부분을 재차 완비(完備)함을 보완(補完)하려고 합니다.
나는 글을 쓰는 순간부터 눈을 뜰 수 있고 또 눈을 크게 떠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대해 원하지 않습니다. 글이란 일종의 자유로운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상에 의해 믿는 근저(根底)에는 감정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나의 자유의 특수한 파동(波動)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자유를 흡수하거나 은폐(隱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가 그 자신에 대하여 자기를 계시(啓示)하기 위해 택한 자유의 존재 방식 자체입니다.
앞에서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내가 글에 대하여 느끼는 애착(愛着)이나 성향이 없다면 단지 그것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로 하여금 생명이 있게 하는 것은 나의 애착이나 성향(性向)입니다. 그러나 상상된 대상에 고유한 성질인 반작용(反作用)에 의해 나의 애대나 존경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은 글의 행위가 아닙니다. 나의 애대(愛戴)나 존경이야말로 글의 행위에 지속성(持續性)과 객관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방문자의 감정은 결코 글에 의해 지배(支配)되지 않고 어떤 외부적인 현실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 속에 있는 영원한 샘이며 다른 말로 하면 고매(高邁)한 감정입니다. 나는 자유를 원천으로 삼고 자유를 목적으로 여기는 감정을 고매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은 고매한 마음의 훈련(訓練)입니다. 내가 방문자로부터 요구하는 것은 추상적인 자유의 적용이 아닙니다. 방문자의 전인격적이 갖는 자질입니다. 그 정념(情念)과 편견 그 공감 그 성적(性的)인 기질 그 가치의 단계입니다. 다만 그 인격은 고매한 마음을 갖고 자유는 인격의 모든 부분에 침투합니다. 하여 그 감수성(感受性)의 가장 어두운 부분까지도 변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방문자의 정신의 적극성(積極性)은 대상을 더욱 잘 만들어내기 위해 수동적이 되지만 이 수동성은 반대로 행위가 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이로 인하여 자기를 최고의 경지까지 높입니다. 냉혹(冷酷)하기로 이름난 사람들이 상상외로 불행한 이야기에 눈물을 찔끔거리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것은 읽는 동안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자유를 감추지 않고 살아왔던들 그들이 되어 있을 그런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글 쓰는 사람은 이와 같이 방문자의 자유에 대하여 글을 쓰며 방문자에게 그 작품을 존재하게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그치지 않고 독자가 그의 부여한 신용(信用)을 돌려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자기의 창조적인 자유를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방문자 측에서도 상대적으로 반대의 호소(號召)를 하여 글 쓰는 작자 측의 자유를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글에 관해서는 벌써 하나의 변증법적 역설(辨證法的 逆說)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방문자가 될 수 있는 내가 자기의 자유를 의식할수록 나는 타인의 자유를 의식하게 됩니다. 또 글 쓰는 작자가 나에게 요구할수록 나도 글 쓰는 작자에게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물에 매혹(魅惑)을 느낄 때에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없으면 눈 아래서 나무들이나 숲이나 대지나 풀들 사이에 이루어진 관계가 전혀 존재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색채의 균형이나 바람이 일으키는 운동이나 형태(形態)의 조화 속에 찾아볼 수 있는 합목적적(合目的的)인 외관은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하고 내 눈 아래 있습니다. 요컨대 존재(存在)가 이미 있을 경우에만 나는 그 존재를 거기 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설사 신(神)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신의 우주적(宇宙的)인 배려와 내가 바라고 있는 특수한 광경 사이에는 순수한 언어상의 연결 이외의 다른 어떤 연결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나를 매혹(魅惑)하기 위해 자연이 풍경을 만들었다거나 자연이 나로 하여금 그 풍경이 마음에 들도록 하였다고 말한들 그것은 대답 대신에 문제를 제기하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이 푸른빛과 초록색의 결합을 자연이 원했는가?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주적인 섭리라는 관념은 어떤 특수한 의도(意圖)의 보증도 되지 않습니다. 풀이 초록빛을 띤 것은 특히 지금과 같은 경우에 생물학적인 법칙이나 특수한 항수(恒數)나 지리학적인 결정론(決定論)에 의해 설명될 수 있습니다. 물이 푸른빛을 띤 것은 강의 깊이나 토지의 성질이나 흐름의 속도에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색채의 배합은 설사 그것이 자연의 의지(意志)라고 하더라도 대지에 내놓은 것이며 두개의 인과론적 계열(系列)이 합쳐진 결과로 요컨대 우연의 사실입니다.
합목적성(合目的性)은 고작해야 겨우 문제로 삼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모두가 가설(假設)입니다. 어떤 목적도 명령의 행패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창조자가 원한 그런 목적은 있지 않습니다. 자연미(自然美)가 우리의 자유에 호소하는 일은 없습니다. 숲이나 형태 또는 운동 속에는 어떤 질서(秩序)와 같은 것이 있으며 따라서 호소하는 일은 없습니다. 숲이나 형태 또는 운동 속에는 어떤 질서와 같은 것이 있으며 따라서 호소라고 착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나의 자유를 유혹(誘惑)하는 듯싶지만 그것은 눈앞에서는 곧 사라져 버립니다.
눈이 경치의 질서를 돌아보기 시작하자마자 호소는 사라지고 나와 방문자만이 남게 됩니다. 이 색깔을 제2의 색깔과 결합시키느냐, 제3의 색깔과 결합(結合)시키느냐 하는 것은 나의 자유입니다. 나무와 물, 혹은 나무와 하늘, 나무와 물과 하늘과의 어느 것을 결합시키느냐 하는 것도 나의 자유입니다.
나의 자유는 기분에 따라 움직입니다. 풍경 속에 새로운 관계를 세우는 데 따라서 처음에 나를 유혹한 풍경의 객관성(客觀性)이라는 착각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나는 사물에 의해 막연하게 묘사된 약간의 주제(主題)를 꿈꿉니다. 자연의 현실은 벌써 나의 몽상(夢想)을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한순간 의식(意識)된 자연의 질서는 누구의 손에 의하여 나에게 제출된 것은 아니며 따라서 참된 의미의 질서는 아닙니다.
나는 이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나 자신의 꿈을 고정(固定)시킵니다. 그것을 컴퓨터 화면이나 종이 위에 묘사(描寫)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자연의 풍경 속에 나타난 목적이 없는 합목적성(合目的性)과 타인의 시선 사이에 나 자신을 삽입(揷入)합니다. 나는 목적이 없는 합목적성을 타인에게 전하는데 이와 같이 전해짐으로써 그 합목적성은 인간적인 것이 됩니다.
이 경우에 글이란 상상의 발로(發露)이며 상상한 것만이 변모됩니다. 그것은 모권가족(母權家族)의 칭호와 권력의 이양과 비슷합니다. 모권 가족에서 모친은 이름을 갖지 않지만 숙부와 생질 사이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개자(仲介者)입니다. 사라져 가는 이 환영을 내가 파악합니다. 내가 그것을 타인에게 제출합니다. 그들을 위해 그것을 해방시켜 재고(再考)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신뢰하여 바라볼 수 있습니다. 환영은 그리하여 지향성(志向性)을 갖게 됩니다. 나 자신은 주관성과 객관성의 한계(限界) 안에 멈춰 있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사람에게 전하는 객관적인 질서를 결코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방문자는 확실한 방법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멀리 나아갈수록 나는 방문자보다 그만큼 앞질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방문자가 글의 다른 부분 사이에서 각각의 장(章)이나 말 사이에 맺는 관계가 무엇이건 방문자에겐 그런 관계가 분명히 의도(意圖)된 것이라는 보증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절대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각 부분 사이에 마치 은밀(隱密)한 질서가 있는 듯이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창작(創作)이 언제나 방문자를 앞지르게 되며 매우 아름다운 무질서는 예술적인 효과의 하나입니다. 즉 그것도 하나의 질서(秩序)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글은 연역(演繹)입니다. 그 움직임의 근저는 과학적인 연역의 근저가 자연의 의지 속에 있다고 오랫동안 믿어온 것처럼 나의 의지 속에 있습니다. 유연(柔軟)한 힘이 나를 인도하고 나를 최후의 페이지까지 지탱시켜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의도(意圖)를 파악하기가 쉽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나의 의도는 추리(推理)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글에는 하나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추리가 글 속에 나타나는 미(美)는 결코 우연의 결과는 아니라는 커다란 확신에 의해 지탱(支撑)되어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나무와 하늘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다만 우연에 의해서입니다. 반대로 글 속에서 주인공들이 어떤 탑(塔)이나 감옥 속에 갇혀 있고 어떤 정원을 산책하는 것은 서로 독립된 인과론적 계열(因果論的 系列)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다 깊은 합목적성(合目的性)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공원은 그것이 어떤 정신 상태와 조화되고 그 정신 상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혹은 그 정신 상태를 심한 대조에 의해 부각(浮刻)시키기 위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신 상태 자체가 풍경과의 관계에서 상상되었습니다.
거기서는 인과 관계(因果關係)가 외형적인 것이며 원인이 없는 인과 관계라고나 할 성질의 것으로 합목적성 쪽이 보다 깊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방문자인 내가 원인의 질서 아래 목적(目的)의 질서가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은 글을 쓰면서 거기 있는 대상의 원칙(原則)이 인간적인 자유라는 신념을 갖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념(情念)에 의하여 정념 속에서 썼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그와 같은 나의 신념은 곧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몰론 나도 글을 쓰면서 내가 정념에 의해 움직였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결의는 나에게 있어서 자기의 감동에서 한걸음 후퇴시키게 될 것입니다. 내가 쓰면서 나의 감동(感動)을 자유롭게 하는 것처럼 나는 나의 감동을 자유로운 감동으로 변형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작가의 태도는 고매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글쓰기란 나와 방문자 사이에 맺어진 고매(高邁)한 마음의 조약입니다.
그 각자가 타자(他者)를 신뢰하고 타자에게 기대하며 상대가 그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만큼 상대방에게 요구합니다. 그와 같은 신뢰 자체가 고매한 마음씨입니다. 무엇인가가 나로 하여금 방문자가 자기의 자유를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방문자로 하여금 내가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였다고 믿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방문자와 내가 서로 상대방을 믿는 것은 자유로운 결단에 의한 것입니다. 나와 방문자 사이를 내왕하는 변증법(辨證法)은 그때에 성립되는 것입니다. 읽을 때에 나는 요구합니다. 요구가 충족되면 그때 읽고 있는 것은 나로 하여금 나에게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촉구(促求)합니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나의 요구는 내가 나의 요구를 높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리하여 나의 자유는 자기를 나타냄으로써 타자(방문자)의 자유를 계시(啓示)하는 것입니다.
미적(美的)인 대상이 현실적 혹은 현실적이라 부르는 글이지만 형식적 글이냐 하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글에 있어서는 자연의 관계가 역전(逆轉)됩니다. 글의 전경(全景)에 있는 내용은 우선 인과론적 연쇄(連鎖)의 결과로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과관계는 착각(錯覺)입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한 인과관계의 명제(命題)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합목적성(合目的性)에 의해 지탱되어 있습니다. 내용이 잘 잠재해 있다면 그것은 글의 그 밖의 부분이 그 형태와 색깔을 그 전경(全景)에 놓이기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시선은 현상적(現象的)인 인과 관계를 통하여 그 대상의 깊은 구조(構造)로서의 합목적성(合目的性)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합목적성을 초월해서 그 원천이며 토대인 인간적인 자유에 도달하게 됩니다.
언뜻 보면 그것이 화폭이 아닌가 할 정도로 철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재(素材)의 빛이나 광채, 인동(忍冬) 내용의 오묘함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성수반(聖水盤)의 돌처럼 갈고 닦은 오렌지빛 색깔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나는 자신이 느끼는 쾌감을 통하여 그 합복적성(合目的性)이 형체나 색깔 속보다도 오히려 소재(素材)에 의한 상상에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됩니다.
거기서는 실질(實質) 자체와 파편을 주워 모은 것이 뒤섞여 여러 가지 형체의 존재 이유가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적인 존재는 아마도 나를 절대적 창조에 보다 가까이 인도(引導)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무한한 자유와 만나게 되는 것은 소재(素材)의 수동성(受動性) 자체 속에서이기 때문입니다. 글의 한계는 묘사된 대상 혹은 부각된 또는 이야기한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이 세계의 깊은 곳에서 의식되는 것처럼 글에 의해 표현(表現)된 대상도 내심 세계의 깊은 곳에 나타납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이 지은 장편 소설 ‘파브리스(Fabrice)’의 모험배경(冒險背景)에는 1820년의 이탈리아가 있으며 오스트리아가 있고 프랑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브라네스가 점치는 별과 끝으로 대지(大地)전체가 있는 것입니다. 화면은 우리들에게 들, 혹은 화병(花甁)을 보여 주지만 그것은 전 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입니다. 보리밭 사이를 자나가는 불그레한 길을 우리는 반 고호가 그린 것보다도 더 멀리 그 앞의 보리밭 사이까지 그 빛나는 구름 아래까지 바다에 흘러드는 개울까지도 더듬어 갑니다. 우리는 들판과 대지(大地)의 존재를 지탱하는 깊은 합목적성(合目的性)을 무한을 향해 세계의 끝까지 확대합니다.
이처럼 창조적인 행위는 약간의 대상을 만들어냄으로써 혹은 다시 만들어내는 데서 세계의 전체적인 갱신(更新)을 목적 삼습니다. 다양한 글이나 책은 존재의 전체를 재현(再現)하고 그 전체를 관찰자의 자유에 대하여 대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글을 읽는 목적은 있는 그대로 보이도록 이 세계를 재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세계의 근원(根源)이 나의 자유 속에 있는 것처럼 재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창조하는 것은 관찰자의 눈을 통해서만 객관적인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재현이 축복(祝福)받는 것은 관찰의 힘, 특히 독서의 의례(儀禮)에 의한 것입니다.
앞에서 제기된 문제는 여기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타인의 자유에 호소하지만 그것은 타인이 상호간에 요구를 받아들여 존재의 전체를 다시 나에게 속하게 하는 동시에 나를 우주 속에 포용(包容)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앞으로 좀 더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다른 모든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어떤 감동을 줄 것을 목적삼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留意)해야 합니다. 그 감동은 보통 미적 쾌락(美的 快樂)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을 미적 환희(歡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타나는 것은 작품이 완성되어 있다는 증거이며 나는 그것을 앞에서 말한 고찰(考察)의 빛에 비추어 검토하려고 합니다.
내가 나를 창조하는 이상의 기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방문자의 경우에는 의식(美意識)과 일체가 되며 그 구성 요소가 서로 타자를 견제(牽制)하여 분리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수단과 목적, 다시 목적과 수단이라는 실용성(實用性)을 당분간 보류하는 초월적·절대적인 목적을 인식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따라서 또한 호소 혹은 같은 의미이지만 가치의 인식과 분리(分離)할 수 없습니다.
그 가치에 대하여 내가 갖는 방위적인 의식(方位的 意識)에는 필연적으로 나의 자유의 비방위적 의식(非方位的 意識)이 수반됩니다. 이것은 자유가 그 자체에 대하여 분명해지는 것은 자기를 초월하려고 하는 요구에 의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자유 자체에 의한 자유의 인식은 환희(歡喜)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비명제적(非命題的)인 의식구조(意識構造)에는 의식의 또 하나의 구조가 수반(隨伴)됩니다.
실제로 글이 창조인 이상 나의 자유는 단지 순수한 자율성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적극성으로도 나타납니다. 또한 따라야 하는 고유한 법칙(法則)을 자기에게 줄 뿐만 아니라 대상을 구성하는 존재로서의 자기를 파악(把握)하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비로소 본래의 미적(美的)인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즉 창조된 대상이 창조하는 나에게 대상이 됩니다.
내가 창조하는 대상을 향수(享受)하는 것은 그 경우뿐입니다. 향수라는 말은 쓰는 작품의 방위적 의식(方位的 意識)에 적용되지만 그야말로 우리가 미적 환희의 본질적인 구조(構造)에 접해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 방위적(方位的)인 향수(享受)에는 비방위적(非方位的)인 의식이 따르며 대상이 본질적인 동시에 그 비방위적인 의식도 역시 대상에 대하여 본질적입니다.
나는 미적의식(美的意識)의 이와 같은 형태를 정확한 감정이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가장 강한 미적 감동에 엄숙한 적막을 주는 그 감정은, 주관성과 객관성의 엄밀한 조화에서 비롯됩니다. 한편 미적 대상은 본래 상상된 것을 통하여 도달(到達)해야 할 목표로 정한 세계입니다. 미적인 환희에는 세계가 가치이며 나의 자유가 수행해야 할 과제라는 방위적 의식이 따릅니다. 나는 그 의식을 인간적인 기도(企圖)의 미적 수식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보통 세계는 나의 상황의 지평선(地平線)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무한한 거리, 여건의 종합적인 전체, 그리고 장해와 도구(道具)의 미분화(未分化)의 집단으로서 나타나지만 결코 우리의 자유에 대한 요구로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미적인 환희는 본래 비아(非我)인 것을 회복하여 내면화하려고 하는 의식(意識)의 수평선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어진 것을 명령으로 바꾸고 사실을 가치로 바꿉니다. 세계는 나의 일이며 내 자유에 동의하는 본질적인 기능은 그 무조건적인 운동 속에 우주라는 유일한 절대적인 대상을 존재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구조는 그 누군가의 자유로운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협정(協定)을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한편의 글은 나의 자유를 신뢰하고 작가의 자유에 요구하는 인식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미적인 쾌락(快樂)은 그 자체가 가치로 느껴지며 타자에의 절대적인 요구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인 이상 모든 사람들은 같은 작품을 읽고 동일한 쾌락을 느낄 것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자유 속에는 전체 방문자(訪問者)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높은 자유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또 외부의 세계이기도 한 하나의 세계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미적 즐거움 속에서 방위적 의식은 세계를 그 전체에서 상상(想像)하는 의식입니다. 그 세계는 존재(存在)하고 동시에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서 완전히 나에게 속하며 동시에 나에게 속하지 않으면서도 나에게 속할수록 나에게 속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비방위적(非防衛的)인 의식은 그것이 일반적인 신뢰와 요구와의 대상을 만들어내는 한 현실에 모든 자유로운 인간의 조화(調和)된 전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세계를 발견하는 동시에 그 발견을 독자들의 고매한 마음이 수행해야 할 과제로서 제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존재의 전체에 본질적인 것으로서 인식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의식에 구원을 청하는 일입니다. 또한 그 본질을 방문자와 나 사이에 놓인 인물을 통하여 살아가려고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현실적인 세계는 행위에 있어서만 제시되며 세계를 개변하기 위해 세계를 초월해야만 세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세계를 초월하기 위한 움직임 중에서 세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나의 세계는 깊이를 잃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바와 같이 이야기 속에서 어느 하나의 대상의 존재의 밀도(密度)가 보증되는 것은 그 대상을 위해 바쳐진 묘사(描寫)의 수나 깊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대상과 여러 가지 인물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 대상이 자주 취급되어 버림을 받을 경우에 인물이 그들 자신의 목적을 향해 그 대상을 초월하면 그 대상은 그만큼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블로그 글의 세계는 즉 사물과 인간 전체에 대해서도 그 세계가 최대의 밀도를 보여 주기 위해서는 독자가 그 세계를 발견하려는 창조(創造)가 상상적인 행위 속에 밀착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독자가 그 세계를 변경시키려는 경향을 가질수록 그 세계는 생기를 얻게 됩니다. 사실주의 오류(誤謬)는 현실적인 것을 관상(觀想)에 의해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결과 불편부당(不偏不黨)한 화면(畵面)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지각(知覺)자체가 불공평하고 다만 명명(命名)이라는 것만을 두고 보더라도, 그것이 이미 대상(對象)의 수식(修飾)이므로 그런 것이 가능할 수 없습니다.
우주에서 자기가 본질적인 존재이기를 바라는 내가 그 우주가 내포하고 있는 부정(不正)에 있어서도 자기가 본질적인 존재이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부정에 있어서도 본질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부정의 창조자(創造者)가 되기를 인정할 경우에도 부정을 초월(超越)하여 부정을 말하려는 운동 속에서만 부정의 창조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블로그를 찾는 측인 방문자도 내가 부정의 존재를 창조하여 유지해 나갈 때에 그 책임(責任)을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모든 기술은 나를 강요(强要)하며 그가 발견한 것을 창조하게 합니다. 즉 강제적으로 나를 공법자(共犯者)가 되게 합니다. 그리고 우주는 나와 방문자 두 사람이 자유로이 결합된 노력에 의해 지탱됩니다. 그런데 나는 그 우주를 나의 중개(仲介)에 의해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는 그 자신의 규율(規律)까지 인간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나의 자유에 의해 모든 부분이 침투(浸透)되고 지탱된 것으로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그것이 그 본래의 진정한 모습으로 참으로 목적의 도성(都城)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거기 이르는 단계(段階)여야 하며 한 마디로 말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세계는 나를 억눌러 버리는 파괴적인 덩어리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목적의 도성(陶成)을 지향하는 그 자기 초월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표상(表象)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글은 그 묘사하는 사람이 아무리 고약하고 절망적이라고 하더라도 고매한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너그러운 마음은 교훈적인 연설(演說)이나 덕이 있는 인물에 의해 표현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미리 생각해 둔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훌륭한 감정(感情)이 좋은 글을 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主張)은 옳습니다.
그러나 고매한 마음은 글의 올(緯)이며 거기서 사람들이나 사물이 재단(裁斷)되는 헝겊이어서는 안 됩니다. 주제(主題)가 무엇이건 일종의 본질적인 경쾌성(經快性)이 곳곳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작품이 결코 자연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요구이며, 선물이라는 것이 상기(想起)되어야 합니다. 이 세계가 그 부정(不正)과 함께 나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내가 그 부정의 본성 즉 금지(禁止)되기 전의 낭비의 본성을 발견하고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나의 세계가 가장 깊이 나타나는 것은 방문자의 검토에 있어서이고 찬탄(讚嘆)에 있어서이며 분노에 있어서입니다. 고매한 사랑은 그 세계를 유지한다는 서약이고 고매한 분노는 그것을 변경(變更)시킨다는 서약이며 찬탄은 그것을 모방(模倣)한다는 서약입니다.
문장과 윤리는 설사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미적 명령(美的 明令)의 밑바닥에는 윤리적인 명령이 깔려 있는 것을 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자는 글을 쓴다는 고통(苦痛)을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 자체도 방문자의 자유를 의식(意識)하기 때문이며 방문자는 블로그를 찾는 것만으로도 나의 자유를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글은 어느 면으로 보나 나의 자유에 대한 신뢰(信賴)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방문자와 내가 자유를 인식하는 것은 다만 자유가 표현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므로 글은 그것이 나의 자유를 요구하는 한 세계의 상상에 의한 표현이라고 정의(定義)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쁜 글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세계가 아무리 어두운 빛깔로 되어 있더라도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이 그 세계 앞에서 그들의 자유를 느끼기 때문에 묘사(描寫)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은 오직 좋은 글과 나쁜 글뿐입니다. 나쁜 글이란 방문자에게 아첨하여 환심을 사려는 글이고, 좋은 글이란 방문자에의 요구와 신뢰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내가 자유로운 방문자와의 일치를 구하여 그들의 세계를 보여 줄 때에는 언제나 보다 많은 자유에 의해 침투된 모습으로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당연(當然)합니다. 내가 불러일으키는 고매한 마음의 해결이 부정을 눈감아 주는 데 이용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문자를 경제화 도구로 삼으려는 시도(試圖)는 나의 글 자체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경제화(奴隸化) 하려는 비뚤어진 생각은 그 사람의 파렴치(破廉恥)한 행위이고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글을 쓸 자격(資格)이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인간은 경제적 추구만을 위해 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 글은 나의 생각 안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제도인 사실주의와 긴밀히 연결(連結)되어 있습니다. 한쪽이 위협을 느끼게 되면 다른 쪽도 위협(威脅)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을 펜으로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펜을 놓을 수밖에 없는 날이 닥쳐오면 나도 이 무기(武器)를 놓아야 합니다.
방문자들이 어떻게 해서 내가 되었는지, 방문자들이 가르친 의론(義論)이 무엇이거나 글은 방문자를 싸움 속에 내던지게 마련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유를 원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방문자들이 내 블로그를 찾는 이상 좋든 나쁘든 간에 나는 이미 속박(束縛)되어 있습니다.
그럼 내가 왜 속박되어 있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회 확률을 보장(保障)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긴 쉬운 일입니다. 문제는 배신(背信)을 앞둔 바다의 성직자(聖職者)처럼 관념적(觀念的)인 가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수호(守護)해야 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자유이고 나는 정보를 제공하는 가치에 전념(專念)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설명 상 매우 단순(單純)한 것 같지만 그러나 아무도 나에게 묻고 있지 않은 또 하나의 문제와 결부(結付)되어 있습니다. 즉 나는 왜 블로그에 글을 쓰느냐? 하는 추궁(追窮)에 어떤 해답을 줄 수 있는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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