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일의 원인이나 내용을 따지고 파고들어 철저히 파악(把握)한 후 독자에게 자세히 알려주는 노력의 결과물(結果物)입니다. 그러자면 험한 언덕을 오르듯이 처음에는 글쓰기를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옮겨 써야 합니다. 나중에는 한 곬으로 흐르는 물처럼 마음을 쏟아 부어 거침없이 써내려 갈 수 있습니다. 냇물이 점차 강물이 되어 굽이굽이 감돌아 결국 바다로 흘러가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글도 자주 쓰다보면 나의 생각을 나타낸 것이 신통(神通)하게 바라는 대로 꼭 맞아떨어지게 지어집니다.
글쓰기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을 좋아하도록 노력하는 목적(目的)을 위해서 힘을 다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생각은 표현(表現)할 때 이루어지고 따라서 생각이 표현으로 이루어지면 멋진 글이 드디어 완성됩니다. 흔히들 글을 잘 짓는 사람을 하늘에서 받은 천작(天爵)이라 합니다. 하여 사람의 힘을 가하지 않고 하늘의 조화(造化)로 만들어진 글이라고 아주 경탄(敬歎)을 합니다. 그만큼 남에게서 존경을 받을 만한 타고난 재간을 가졌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당연 저는 이 견해에 단호히 반론(反論)을 제기합니다. 천재란 1%의 영감에 99%의 노력이라는 것을 모두 다 아는 기정사실(旣定事實)이라 여기에서 구구히 설명을 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선천적(先天的)으로 타고난 뛰어난 재주와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 간혹 있다는 것만을 확실히 인정합니다. 아무리 학식이나 능력이 뛰어난 대부분 사람의 성공 뒤에 피타는 노력(努力)과 심혈이 스미어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물며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생겨난 것처럼 그 어떤 결과물이던지 다 피땀이 흐른 흔적(痕迹)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력 없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글짓기는 향후(向後) 보아야 할 것이 많고 들어야 할 것이 많고 생각할 것이 많은 영원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 과제를 풀어나가는 길에는 의연히 찬반논란(贊反論難)이 많을 것이고 시비논쟁(是非論爭)이 치열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전문가들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여기서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글이란 짧은 편폭(篇幅)에 많은 내용을 담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본문이 안고 있는 내용의 중요성, 창작의 독창성, 창조의 주체성, 예술의 감수성과 세부묘사에 대한 재치 있는 구성, 그리고 뛰어난 단어구사력(單語驅使力)을 종합적으로 사용하여 비교적 성공적인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순풍에 돛 단 격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학문의 집대성, 지식의 원천, 정보의 지남, 학술의 열쇠인 학업을 늦출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한마디 개괄해서 말하면 글짓기는 영혼수선공(靈魂修繕工), 정신치료사(精神治療師)로서의 인류사회를 인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흥미로운 학문입니다.
문장은 아주 작은 편폭으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인 문화위기를 비교적 진실하고 심각하게 조명할 수 있습니다. 이제 더는 묵과(默過)할 수 없는 사명감을 지니고 날로 황폐해지는 인터넷문화에 대한 관조(觀照), 사회 밑바닥 인생을 영위하는 최하층(最下層)에 대한 관조가 바로 우리 문학의 주제이자 주체여야 합니다. 반면에 가짜뉴스, 허위정보, 퇴폐적 저급문화를 깡그리 척결(剔抉)해야 합니다.
어느 학자는 사람들에게 ‘백과전서(百科全書)의 모든 내용을 다 알 필요 없이 자료를 찾는 방법’을 알기만 하면 족(足)하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실패작(失敗作)이 죽은 걸작보다 낫다. 하나의 고상한 실패가 수많은 저속(低俗)한 성공보다 훨씬 낫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문장법칙(文章法則)을 깨닫고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은 용기(勇氣)와 힘 때문만은 아닙니다. 만일 한 사람이 실패를 참을 수 있고 또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인간은 힘을 가진 자보다 훨씬 더 인간다워질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성공에서 보다는 실패에서 더 많은 지혜(智慧)를 배웁니다.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발견함으로써 해야 할 것을 가끔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을 아마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바보는 때때로 어려운 것을 쉽게 생각해서 실패하고 현명한 자는 때때로 쉬운 것을 어렵게 생각해서 실패한다’고. 손자병법(孫子兵法) 36계 중 27번째 계책의 제5조 ‘병전계책(兵典計策)’에는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행동을 채취(採取)하지 말지언정 모르면서 아는 척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 구름 속에 숨은 우레와 번개처럼 의도(意圖)를 감추고 침착해야 한다’. 참 아주 많은 계시를 주는 명언입니다.
언어로 표현된 모든 사상은 위력(威力)이 큽니다. 그 영향력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때문에 사상의 힘은 도덕적인 이끌림으로써 위대해지며 확고해지는 것입니다. 간단명료(簡單明瞭)하게 표현된 힘 있고 강한 문장은 인생을 보람되게 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합니다. 언어로써 표현된 진리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강한 힘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언어는 항상 싹을 틔우는 씨앗이고 사물을 계시하는 힘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끔 이야기로 엮어지는 하나하나의 말의 결과는 무한합니다.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은 진실(眞實)로 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리석고 무능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산야나 길거리의 돌이나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생활의 외관(外觀)도 볼 수 있습니다. 물질적(物質的)인 무엇이나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가식 없는 진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공중에 가득 차 있으며 우리들의 주위에 산재(散在)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녕 알아보지 못합니다.
진실이란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발(啓發)이 그 조건으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계발의 기초는 교육의 가르침입니다. 즉 인생의 의의와 사명(使命)을 확실히 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글을 쓰려면 언제나 올바르게 행해야 합니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 대하여 각별히 올바르게 행해야 합니다. 올바르게 행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허위(虛僞)를 가르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칸트의 사고나 헤겔의 사고(思考)는 같습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그들의 인성을 키우기 위해서 어떠한 것을 덧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만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현재 글 쓰는 사람이 믿고 있지 않는 것을 가르친다면 많은 사람들은 의아(疑訝)하게 여기고 있는 진실을 신성(神聖)하다거나 반대할 수 있는 진실이라고 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마음 은밀(隱密)한 곳에서 진실에 속하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남을 아는 사람은 총명한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아는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남을 이기는 사람을 강합니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마음이 굳셉니다. 판단(判斷)으로 모든 것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다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다 착하지는 않습니다. 또 정당(正當)한 일을 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어떠한 글을 쓰던지 간에 자기 자신의 언행(言行)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글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 골짜기의 물의 흐름이 계곡을 지배하며 제멋대로 흐르기 위해서는 곬보다 그 흐름이 낮아져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글 쓰는 사람은 여느 사람들보다 고결(高潔)해지려면 언행에 있어서 남보다 주의를 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을 종용(慫慂)할 때는 뒤로부터 종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때문에 글 쓰는 사람들이 일반인들보다 높은 경지(境地)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자기보다 훨씬 앞서 있어도 사람들은 별로 거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글 쓰는 사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설사 비난하고 혹평(酷評)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더 좋기 때문입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살아가는 동안 배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 지혜가 생기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이란 계속되는 한 변화합니다. 육체적인 힘은 약해지고 정신적인 힘은 커지는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어리석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경험은 큰 과실(過失)을 바르게 인도해 줄 것입니다. 스스로 자연법칙을 깨닫고 그 흐름에 따라 내 몸 안에 있는 불순물(不純物)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힘들이지 않고 아무렇게나 써도 거작(巨作)이나 대작이 탄생하리라는 허황한 망상(妄想)을 꾸지 말아야 합니다. 즉 어리석은 일생을 그나마 거짓으로 보내면서 진지한 아무 노력도 없이 천작(天作)이 내려지리라 생각하고 모든 것을 좋게 해 줄 때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자기완성을 추진하고 있는 도중에 결코 중지(中止)하면 안 됩니다. 만일 글 쓰는 사람이 스스로의 마음보다도 외부세계에 대해 더 흥미(興味)를 느끼게 되는 일이 있다면 그때 바로 그대는 걸음을 멈추고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세월은 쉬지 않고 시간은 그대 옆을 스쳐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대는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다면 그대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다 잃고 맙니다.
문학이나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배워야 할 대상의 하나밖에 없는데 바로 그것은 글쓰기입니다. 글짓기의 여러 가지 양상과 그 변화에 대해서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모든 다른 대상들은 이와 연결되는 가지와 같은 것입니다. 모든 학문도 이에 연결되는 한 가지입니다. 글 쓰는 사람의 사상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이 세상 구석구석에까지 퍼져나갑니다. 만약 그 사상에 위대한 뜻이 담겨져 있다면 말입니다. 내 사상은 나의 정신적인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여러 곳에서 그 모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육체는 일정한 어떤 시간에 또한 일정한 곳에서만 발견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글쓰기에 있어서 어떤 내용이던 간에 항상 일치한 목표(目標)가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언제나 명료한 것, 쉽게 이해되는 것, 가장 실질적인 것 등등은 모두 육안적인 것인데 우리들의 감정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런 것은 모두 다 불투명(不透明)한 것, 난해한 것, 모순투성이인 것, 그리고 가장 비실재적(非實在的)인 것입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정신적인 것뿐입니다. 모든 육체적인 것은 다만 눈에 보일 뿐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것을 정신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책임(責任)을 가진 사람을 작가라고 칭합니다.
마지막으로 노력이라는 단어에 초점(焦點)을 맞춰보면 절대로 부정적이지 않는 단어이고 살면서도 꼭 필요한 그런 마음가짐과 행동입니다. 한 편으로는 단순한 노력만큼으로는 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 것 때문에 좌절(挫折)하고 실망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노력은 절대로 결과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단지 시간차이(時間差異)일 뿐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은 운으로만 요행(僥倖)을 바라며 살 수는 없습니다. 노력과 경험을 통해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아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