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방자여 진퇴유여(收放自如进退裕如)란 거두고 놓음을 자유로이 하고 나아가고 물러섬을 여유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즉 인격 수양에 따르는 흉금(胸襟)을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또한 문장의 실력을 지칭(指稱)하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채색을 더하기 위해서는 한 점의 티도 없는 깨끗한 비단 바탕이 먼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고 공자(孔子)는 말하였습니다. 흰 바탕이 있어야 고운 채색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그 채색(彩色)을 더욱 선명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제의 바탕이 확고하게 정립(正立)된 글이어야 내용을 제대로 나타내 보일 수 있고 그 문장이 사리에 맞게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글의 지엽적인 부분에만 마음을 쓴다면 그 글은 따분해져서 이미 생명을 잃고 사람들에게서 버림받게 됩니다. 이는 비단 글에만 해당(該當)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온갖 일에 다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거짓 없고 작위(作爲)도 없는 순일(純一)한 인심(人心)의 회복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흔히 내가 서술한 문장 중에서 사실에 대한 해석(解釋)이 너무 간략한 것이 흠이 되어 조리가 정연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문장이란 너무 간략한 것보다 너무 자상한 것이 오히려 낫고 너무 엉성한 것보다는 차라리 너무 치밀한 것이 낫다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알아야 깨쳐야 합니다. 그리고 고금의 문자를 유념(留念)해서 자세히 보아 돌려서 표현하거나 바로 이어서 표현하는 등의 묘리를 터득(攄得)한 뒤에 문장을 지어야 흠이 없게 됩니다.
호학(好學)하였다는 공자의 애제자 안회(顔回)의 백발이나, 하룻밤 편집으로 천자문을 펴낸 주흥사(周興嗣)의 백발에서 보이듯 일반적으로 백발은 혼신(渾身)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이자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이처럼 문장은 백발이 될 때까지의 시간 속에 갈고 다듬은 탐구의 결정체(結晶體)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노력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를 모르며 내공(內功)을 닦기 위해서는 끊어지면 끊어졌지 굽어들지 않는 불굴의 정신입니다. 따라서 털이 뽑히고 머리가 갈리고 몸이 더러워지는 와중에도 묵묵히 본분을 다하여 문필(文筆)의 업을 이루어냅니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은 장년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문인이 되어 수많은 서책을 더욱 섭렵하면서 “동사강목(東史綱目)”이라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서(史書)를 남겼습니다. 그 외에도 평생을 학문에 정진(精進)하며 수십여 종의 저작을 남겼으니 하나의 저술을 완성하기 위해 백발이 될 정도로 공들였던 선배들의 노력을 아마도 남다르게 경외(敬畏)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그런 노력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힘 안들이고 ‘문장을 잘 짓는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글짓기를 마치 꿈에 네뚜리로 알고 문장 ‘文’자도 모르면서 오히려 자신만을 내세우고 자신의 말만 하려고 듭니다. 그래서 인터넷문화는 날이 갈수록 시끄럽고 혼란스러워지기만 합니다. 이런 혼란(混亂)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노력파(努力派)’들이야말로 세상을 떠받치는 토대며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긴 세상은 더욱 넓어지고 사람들이 추구(追求)하는 가치는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하지만 남들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여전히 용납(容納)받기 어렵습니다. 정해진 인생의 경로를 벗어난 사람은 여전히 별종 취급(取扱)을 받습니다. 견문이 좁은 탓에 인생의 정답이 하나 밖에 없다고 믿는 탓입니다.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습니다. 다양한 가치(價値)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공존(共存)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또한 유용한 인재를 적시 적소(適時適所)에 등용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책무(責務)이기도 합니다.
물론 요즘 편리하게 흔히 이용하는 모든 서비스는 이미 누군가가 남모를 공력(功力)을 들여 이루어 놓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편리함 이면에 깃들어 있는 노고를 그저 간과(看過)하며 소중히 여길 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주위에는 늘 조용히 도움을 주는 수많은 인재(人才)들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심신이 지치고 괴로울 때 빛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밤을 지새우며 글을 쓰는 중에 무심코 본 창밖의 달일 수도 있고 집에 돌아오는 길목에 핀 목련(木蓮)일 수도 있습니다. 땀 흘린 뒤 마시는 시원한 맥주이거나 애견의 부드러운 털이거나 갓난아기의 해맑은 미소(微笑)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소리 없는 벗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자기를 알아봐주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미켈란젤로를 질투하던 브라만테는 꾀를 짜냅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이니 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망신이나 큰 벌을 당할 줄 알고 교황 율리우스 2에게 미켈란젤로를 추천합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성당의 둥근 천장에 그림을 그리라고 미켈란젤로에게 명령합니다. 당연히 미켈란젤로는 제가 조각가일 뿐 그림을 모른다고 다시 생각해달라고 간청(懇請)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미켈란젤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율리우스 2세로 부터는 돈 한 푼도 받지 못했고 본업도 아닌 시간만 허비하면서 혼자서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고된 노동 끝에 그는 이 작품을 마쳤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 벽화(聖堂壁畫)이며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일화에서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시기하며 교묘하게 혹사(酷使)시키는 브라만테의 갑질이 만연(蔓延)된 현 세태가 겹쳐 보여 씁쓸합니다. 당대의 위정자(爲政者)를 염두에 두고 기술(記述)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과 인간 사회의 본질에 관한 통찰(洞察)이 두루 담겨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 비추어 볼만 한 점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숱한 비리와 범죄, 차별과 혐오, 재난과 참사 앞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을 악인(惡人)으로 몰아 희생양을 삼습니다. 자신은 바르다고 자처함으로서 그 책임을 회피(回避)하며 나아가 합심해서 그것이 공론(公論)인 양 여론을 조성합니다. 그러나 비리는 권력자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닙니다. 범죄는 범죄자의 일탈(逸脫)에서만 기인한다는 말은 얼토당토하지 않은 망발(妄發)입니다. 성별과 인종과 빈부와 지역과 성적취향(性的趣向)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서 어느 누가 감히 자유로운 것이라고 운운(云云)할 수도 없습니다. 재난과 참사의 책임은 과연 그것을 촉발(觸發)한 당사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피력(披瀝)하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발생하는 비리와 범죄, 차별과 혐오, 재난과 참사는 어느 하나도 예외(例外)적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이미 만연하고 팽배(澎湃)한 것이 우연한 기회에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은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를 내린 관행(慣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것은 약자를 궁지로 몰아 영원히 도태(淘汰)시키는 비정한 풍토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소수자에 대한 아무 근거 없는 편견으로부터 저질러집니다. 어떤 것은 그저 편의와 이익을 좇아 원칙과 절차를 무시하는 안일(安逸)함으로부터 기인됩니다. 매일 일간지에 대서특필(大書特筆)되는 사건과 사고나 언제 어디에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들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함께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불편한 진실과 당연한 책임을 마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그것을 악인의 예외적인 것으로 몰아넣고 심지어는 작은 잘못을 크게 부풀려 억지로 악인(惡人)을 만들어내고 맙니다. 그에게 온 사회가 함께 져야 할 막중한 책임(責任)을 오롯이 덧씌우기도 합니다. 그를 통해 자신은 당면한 책임을 회피하고 그 잘못된 관행과, 풍토와, 편견과, 안일함에서 편의를 취하고 이익을 얻습니다.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도 책임도 없는 양, 그만 제거하면 온 세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정의로울 양 합심(合心)해서 악다구니를 씁니다. 그렇다면 과연 진짜 악인은 누구일까요. 말치 않아도 국민들은 불 보듯 환히 압니다.
그러니 이미 드러난 사건을 기회로 자신이 악인이 아닌가를 뼈저리게 반성(反省)하고 우리 사회가 악한 사회가 아닌가를 통렬(痛烈)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평온한 마음에 풍파를 일으키고 안온(安穩)한 삶을 위태롭게 하더라도 이러한 자성(自省)이야말로 진정 바른 사람이 되고 바른 사회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이를 사악한 자로 몰고 자신은 바르다고 자처하며 동류(同類)를 불러 모아서 힘이 약한 자를 몰아세우고 없는 죄를 만들어 씌우고 올바름을 추켜세우는 사람을 도리어 죄인으로 낙인을 찍어 단두대(斷頭臺)에 올려놓는 바로 ‘바름을 해치는 자’들이 살판 치는 세상이 됩니다.
참으로 혼란하고 어수선한 시국(時局)입니다.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홀로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배역(配役)이 정지되고 무대의 불이 꺼진 뒤 찾아오는 급격한 고독함에 시달리는 시간이 많아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독(孤獨)함에서 몸을 돌려 허깨비 같은 마음을 타파하고 나의 현묘(玄妙)함을 마주하고 몰입(沒入)한다면 이 또한 비바람 치는 듯한 이 시국에 작은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모두의 일상이 정지 상태(停止狀態)입니다. 이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냥 끝나기만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모든 것을 바이러스 탓으로 돌린 채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불행은 잠깐의 걱정일 뿐이라는 믿음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할 뿐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정지된 일상은 미래를 준비하는 축적(蓄積)의 시간으로 바뀔 것입니다.
세기의 ‘미증유(未曾有)’인 이 역병(疫病)은 우리 일상을 잠식(蠶食)한 지도 벌써 몇 달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부재(不在)를 이야기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언제나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일들 발걸음을 옮겨 찾아가면 늘 그 자리에 있던 것들을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늘 여전해서 당연하게만 여겼던 일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별세계(別世界)를 구경하고도 일상을 그리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요즘 같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여태껏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일상이 몇 배는 더 소중하게 느껴질 법합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모두가 사소한 일상을 공유(共有)하면서 지금의 사태를 잠깐 동안의 여행으로 기억할 날이 왔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 인류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大流行)이라는 금세기 최악의 재난을 맞이하여 평범한 일상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 재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는 ‘화(禍)’가 아닌 ‘재(災)’로 받아들여집니다. ‘재’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이처럼 상황의 부득이함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 ‘재’에 당당히 맞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위생 수칙의 실천이 바로 그 방법입니다. 재난 앞에서 ‘나 하나쯤 괜찮겠지’라며 요행을 바라는 태도는 결코 용납(容納)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아 ‘한강의 기적’을 이룰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