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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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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썼건 잘못 썼건 나만을 위한 말하듯이 글쓰기 해법과 요령

‘나는 한글을 제대로 읽고 쓸 수 있는가?’라는 자문(自問)이 참 우문(愚問)이라고 생각됩니다. 여태껏 많은 글을 끄적거려왔지만 이런 생각을 해보기는 오늘 처음입니다. 물론 자답(自答)은 ‘읽고 쓸 수 있다’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돌이켜보니 스스로 한 자문 역시 우답(愚答)입니다. 이 자문에 쉽게 자답할 일이 아니라는 걸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습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수많이 펴낸 다양한 저작물들 중 ‘잘 쓴 글, 잘못 쓴 글’의 예문을 제시하고 그 장단점과 문제점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지적한 글쓰기 서평(書評)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내가 글을 잘 쓰려면 평소 어떤 의식(意識)과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며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근본적 해법과 요령(要領)을 제시한 글쓰기 요령에 대한 자문자답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글을 쓸 때 지녀야할 의식과 자세 및 요령 등을 나의 오랜 글쓰기 경험을 토대로 자세히 기술(記述)하렵니다. 내가 그동안 집필(執筆)해온 다양한 글들을 예문으로 제시함과 아울러 글쓰기프로젝트 수행과정에서의 재미있는 사례, 에피소드, 참고자료(參考資料) 등을 함께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실증적 글쓰기 요령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한글을 국어로 사용하는 대한민국에서 한글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하는 국민이 대다수라고 합니다. 앞으로 구체적 사례들을 적시(摘示)하겠지만 이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내가 단순히 문장문법에 관한 문제를 거론(擧論)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정작 사소하고 지엽적(枝葉的)인 문제입니다. 요지(要旨)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기본적인 글쓰기 능력과 글쓰기의 토대(土臺)가 되는 인문사회학적 소양(素養)과 지식이 한글도 제대로 읽고 쓰지 못 한다는 소릴 들을 만큼 형편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사람들이 글을 잘 쓰지 못하는 근본원인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냉철(冷徹)하게 지적한다면 우선 지적 역량과 지식과 사유 및 지혜가 부족한 탓입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문장기술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관한 폭넓은 지식, 정보, 사유, 경험 등을 쌓고 그것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근본적으로 이런 내공(內攻)이 부족하니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특히 문장을 이어가는 기술은 틈틈이 훈련(訓練)을 통해 익힐 수 있으나 글쓰기에 바탕이 되는 배경지식을 쌓는 일만큼은 아주 오랜 기간 부단한 공부가 뒤따라야 가능합니다. 

‘머리 나쁘고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은 동서고금의 진리(眞理)인 것을 누구나 다 아는 바입니다. 특히 글쓰기가 안 되고 글 읽는 안목(眼目)이 부족한 나는 예나 지금이나 어느 직장에서나 손발로 뛰고 몸으로 때우는 일 외엔 더 할 일이 없습니다. 그만큼 모르면 남에게 뒤처지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남들에게 보이는 글을 아무렇게나 막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 글을 쓸 땐 최대한(最大限) 잘 쓰려고 노력합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그야말로 자신의 지적 역량(知的力量)을 총동원하여 생산한 결과물이 바로 글입니다. 따라서 글을 읽어보면 글쓴이가 지닌 지식과 지혜의 총량(總量)과 수준을 한눈에 가늠할 수 있습니다. 특히 글은 100% 본인 능력의 산물입니다. 여느 일들은 열정과 노력만으로 또는 운이 좋아 망외(望外)의 성과를 거둘 수도 있겠지만 글쓰기는 다릅니다. 냉철히 말하면 지적 역량이 부족한 사람은 1년 내 끙끙거려도 단 한 페이지 완성(完成)된 수준의 글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지닌 지식과 지혜와 재능만큼 딱 그 총량과 수준만큼 쓸 수 있습니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아무리 좋은 말을 늘어놓아도 재미가 없어 남들이 읽지 않는 글은 자기 참고용(參考用) 메모에 불과할 뿐 글로서 무용지물(無用之物)입니다. 독자가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쓰는 것이야말로 글쓰기의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전문분야(專門分野) 학술논문이 아니라면 어렵고 재미없게 쓴 글은 모두 잘 못 쓴 글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흔히 음악, 미술, 기타 예체능 분야의 경우 선천적 재능(先天的才能)만으로도 일정 수준에 오를 수 있지만 글쓰기는 다릅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비단 타고난 감성이나 문장기술(文章技術)뿐 아니라 사회 다방면에 걸쳐 폭넓고 깊은 배경지식(背景知識)을 갖춰야 함이 필수요건(必須要件)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글쓰기학원 등에서 “무엇 무엇만 배우면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선전하는 얘기 따윈 다 뻥이고 허풍입니다. 글이란 그렇듯 단기간에 아무나 잘 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말은 찬물을 끼얹은 말이 아닙니다. 

글은 시작점(始作點)이 중요합니다. 어떤 글이든 반드시 도입부(導入部)에서 독자의 주목을 끌 수 있어야 합니다. 남다른 서술, 표현을 통해 독자의 호기심(好奇心)과 기대감을 촉발시킴으로써 다음 내용이 계속 읽고 싶어지도록 써야 합니다. 첫대목에서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거나 글에 대한 기대감(期待感)과 신뢰감을 주지 못하면 이후 내용을 잘 써도 호평받기 어렵습니다. 어디까지나 선입견(先入見)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글을 쓸 때 뭔가 그럴듯한 말과 멋진 문장을 지어내 남들에게 보여주려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다 시를 쓰고 연애편지 쓸 때나 필요할 뿐 일반 실용문(實用文)에서는 외려 유치하게 읽힐 때가 많습니다. 단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쉬운 어조로 솔직 담백(率直淡白)하게 서술하는 것이 글을 잘 쓰는 요령이고 글 쓰는 사람이 갖춰야할 기본자세(基本姿勢)입니다. 독자 입장에서도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한 화려한 글보다는 다소 서툴고 투박할지라도 꾸밈없이 솔직하게 쓴 글에 더 호감과 신뢰감(信賴感)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글을 써놓고 보면 몇 십 페이지에 달하는 긴 분량일지라도 핵심내용(核心內容)을 요약할 경우 한 페이지만으로 충분한 예(例)가 많습니다. 나머지 말들은 거의 불필요한 내용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처음엔 길게 썼더라도 퇴고과정(推敲過程)에서 대폭 줄이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쓰느라 고생한 것이 아까워 불필요한 내용을 그대로 두면 읽는 사람이 고역(苦役)입니다. 아깝더라도 과감히 삭제할 것은 삭제하고 수개할 것은 수개해야만 사람들에게 잘 읽기는 글이 됩니다. 글 쓰는 목적이 뭡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잘 읽기도록 하자는 것이 아닌가요. 

잘 읽기는 글은 단순히 문장문법(文章文法)에 대해 설명한 시중의 일반 글쓰기 참고서(參考書)들과는 성격이 크게 다릅니다. 지난 30년간 국내 공공기관(公共機關)과 각급 단체와 일반 기업 등 수많은 사회조직의 글쓰기 관련 프로젝트를 맡아 수행해온 한 지인이 자신이 직접 체험을 통해 얻고 쌓은 노하우와 실제 예문과 자료 및 재미있는 일화들을 특유의 직설화법(直說話法)으로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특히 직장업무와 관련하여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떤 글이 잘 쓴 글이고 어떤 글이 잘 못 쓴 글인지’, 실증적 사례와 예문, 답안을 제시함으로써 실용 글쓰기 지침서(指針書)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안 된 말로 우리나라 대다수 국민들의 글쓰기 능력수준(能力水準)이 너무도 낮고 근본 원인은 지적역량(知的力量)의 부족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특히 사무직인 직장인들의 경우 글쓰기 능력이 부족하면 원활한 업무수행(業務遂行)도 직장생활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때문에 평소 지적 역량과 글쓰기 능력배양(能力培養)에 적극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특별히 역설하고 싶습니다.  

나는 천생 누군가의 말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어릴 때는 물론이고 학교를 거쳐 회사에 다니는 내내 남의 말을 잘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눈치놀음 하나로 살아 왔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명심해 듣고 생각을 곰곰이 읽었습니다. 그것을 글로 썼습니다. 그분들의 말들을 참고로 연설문을 작성했습니다. ‘생각’을 ‘말’의 형태로 ‘쓰는’ 일을 하는 비서입니다. 나는 비서는 아니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씁니다. 내 말을 하고 내 글을 씁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내 글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말하고 씁니다. ‘관종(關種)’으로 ‘나’인 나답게 삽니다. 나는 말하듯이 쓴다는 말하기와 글쓰기의 비법을 알려주는 글을 전달하는 동시에 한 투명인간이 존재감을 찾아가는 편력(遍歷)의 기록을 펼쳐 보입니다. 

글을 쓰기 전에 읽는 이가 무엇을 궁금해 할 지 자주 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평소에 끊임없는 질문(質問)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묻지도 않은 것을 쓰는 것은 가렵지 않은 데를 긁어대는 것처럼 의미 없습니다. 나는 주로 네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모르는 내용(內容), 둘째, 의문(疑問), 셋째, 반문(反問), 넷째, 자문자답(自問自答)입니다. 

왜 글을 못 쓰겠다는 것인지 알 수는 있습니다. 잘 쓰기는 어렵지만 누구나 쓸 수는 있습니다. 게다가 이미 누군가 써놓은 글이 있습니다. 남과 다르게 쓰기는 어려워도 남처럼 쓰는 건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배우기나 본받기나 또는 흉내 내기나 베끼기나 거리끼지 말고 모방(模倣)해 보아야 합니다. 모방은 남의 글을 흉내 내는 좀 거시기한 말 같지만 기실은 글쓰기에서 아주 중요한 작용을 놉니다. 

그리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 남의 말을 거절할 때는 사과(謝過)의 말부터 먼저 합니다. 그리고 거절(拒絶)하는 이유를 차근히 말해줍니다. 이유가 합당하면 거절이 거절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거절하는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는 것도 방법입니다. 내가 역량이 부족해서 그 부탁(付託)을 들어줄 수 없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곧이곧대로 말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의(善意)의 거짓말도 필요하다는 말이 됩니다. 

글은 한정식(韓定食)이 아니라 일품요리(一品料理)여야 합니다. 백화점(百貨店)이 아니라 전문점이어야 합니다. 초점(焦點)을 잘 맞춘 사진 같은 글이 피사체를 잘 표현한 글입니다. 글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최대한 많이 얘기해야 합니다. 나는 글의 본질(本質)을 동기부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기부여는 누군가의 경험을 들을 때 그런 경험을 자신도 하고 싶을 때 나아가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을 닮고 싶을 때 가장 활발(活潑)하게 일어납니다. 

나는 글의 개요(槪要)를 짜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선 개요를 짜고 쓸 역량(力量)이 부족합니다. 개요를 짠다는 것은 글의 처음과 끝을 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나는 글의 최종 모습을 그릴 능력(能力)이 없습니다. 반대로 만약 내가 개요를 짤 능력이 있다면 머릿속에 완벽한 설계도(設計圖)가 있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굳이 작성할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疑問)입니다. 여기서 한마디 주의를 제시한다면 장편소설 같은 경우에 개요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장편소설을 쓰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개요는 필요치 않습니다. 시간낭비입니다. 

나는 항상 글을 이렇게 고칩니다. 우선 다양한 방식(方式)으로 고칩니다. 모니터로 보면서 고치고 출력한 종이에 끄적거리면서 고치고 소리 내어 읽으면서 고칩니다. 처음부터 보기도 하고 뒤에서부터 보기도 하고 그래도 만족(滿足)스럽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것을 흔히 말하는 퇴고(推敲)입니다. 

글쓰기 위기(危機)는 메시지로 관리됩니다. 위기 시 메시지 대응법(對應法)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렇게 조언합니다. 첫째, 사실과 현황을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공개합니다. 둘째, 사건이나 사태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셋째, 위기가 미칠 영향과 파장(波長) 등을 설명합니다. 넷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현재 취하고 있는 조치와 진행 상황을 알립니다. 다섯째, 앞으로 사태(事態)를 해결해나갈 방안과 각오를 밝힙니다. 여섯째, 구성원들이 해야 할 일을 소상히 알리고 협조(協助)를 당부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관종(關種)입니다. 관종과 눈치꾼은 한 끗 차입니다. 내가 중심이고 주체이면 관종이고 누군가의 대상이고 객체이면 눈치꾼입니다. 말하고 쓰는 사람은 주체이고 읽고 듣는 이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씁니다. 내 말과 글이 나인데 말하고 쓰지 않으면 누가 나를 알 수 없습니다.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과연 세상에 존재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는 투명인간(透明人間)처럼 살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말 잘 듣고 남의 비위(脾胃) 맞추며 살기 싫습니다. 내 말과 글을 더 많은 사람이 듣고 읽기를 원합니다. 나 역시 또한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말하고 쓸 때 가장 자기답습니다. 

때로는 침묵(沈默)은 말의 바탕과도 같습니다. 뭐든지 그릴 수 있는 바탕이고 가능성입니다. 말은 내뱉고 나면 되돌릴 여지(餘地)가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도저히 침묵하기 어려운 말이 있으면 글로 써야 합니다. 글은 소리가 없습니다. 글은 거짓이 없습니다. 다만 쓰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글이 진가(眞假)는 가려집니다. 

뛰어난 말과 글은 사람의 마음을 훔치고 상황을 주도(主導)합니다. 반대로 형편없는 말과 글은 갈등(葛藤)을 낳고 기회를 날려버립니다. 가정, 학교, 회사에서 이런 일을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보고 겪습니다. 어떤 스펙보다도 말과 글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중요하다는 것은 글쓰기의 기본기가 기본 바탕으로 되어야 한다는 설명이 첨가(添加)됩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 필요한 말과 글이 다릅니다. 그래서 구체적(具體的)이고 자세한 지침이 꼭 필요합니다. 내가 상황별로 말하기 방법을 구분해 제시하고 필수 요소들을 세분화(細分化)해 글쓰기 방법을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가령 칭찬(稱讚)할 때와 혼낼 때는 물론이고 부탁할 때와 제안할 때의 디테일한 차이까지 구분(區分)해 각각에 알맞은 말하기 방법을 소개하는 식입니다. 글쓰기 방법을 설명할 때는 메모 몇 개를 모았더니 책 한 권이 나오더라는 식으로 경험(經驗)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자세하고 빈틈없이 꼼꼼함을 살립니다. 

따라서 나는 말하듯이 쓴다는 읽고 이해(理解)하기에 쉬울 뿐 아니라 이 책 한 권만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말하거나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품게 합니다. 완독(玩讀)할 필요도 없습니다. 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작가라면 읽는 식으로 글쓰기를 활용(活用)해도 좋습니다. 허지만 누구나 알지만 절대 쉽지 않은 그래도 한 번은 꼭 배워야 할 ‘말하듯이 쓰는 법’이 말하듯이 쓴다는 구성은 자못 도발적(挑發的)입니다. 생각한 대로 말이 되고 말하는 대로 글이 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요. 필경 한 손 안에 꼽힐 것입니다. 

나는 말하듯이 쓴다는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일단 말하듯이 말해보고 말한 대로 써보라고 강조(强調)하는 것입니다. 말이든 글이든 모두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이때 “말을 못 하는 사람은 없다. 잘하지 못해도 누구나 할 수는 있다.” 그러니 말로 읊어보고 그걸 받아 적자는 것입니다. 글쓰기 방법을 고민하고 전하는 데 집중(集中)하던 내가 말하기 방법까지 영역을 확장(擴張)한 이유입니다. 

책은 일단 말해야 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정리(整理)합니다. “첫째, 생각을 얻는다. 둘째, 생각이 정리된다. 셋째, 반응을 미리 알 수 있다. 넷째, 글의 호흡과 운율(韻律)을 가늠할 수 있다. 다섯째, 하면 할수록 내용이 늘어난다.” 이렇게 쓴 글은 독자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구어체(口語體)를 바탕으로 해 읽기 편하고 반응이 좋은 내용만 남았으며 그래서 꾸미기보다는 핵심으로 직입(直入)하기 때문입니다. 

우스갯소리로 군대 이야기는 밤새 해도 모자란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습니다. 직장(職場)에서 겪은 이야기, 배우자와의 이야기, 반려동물과의 이야기, 하물며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 등이 모두 그것입니다. 말하듯이 쓰기만 해도 ‘저자(著者)’가 될 수 있다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말하듯이 쓴다는 최고의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나의 특별한 말하기와 글쓰기 방법을 나는 말하듯이 쓴다는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기와 글쓰기 방법을 설명합니다. 게다가 나는 여느 한국 사람처럼 듣고 따르는 데 익숙한 삶을 살았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쓰기 영역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읽기 또는 듣기 영역입니다. 나는 잘 받아들이기만 했습니다. 이러한 평범함은 독자가 더 쉽게 더 몰입(沒入)해서 글을 읽게 합니다. 

물론 마냥 삶은 평범하지만은 않습니다. 나는 학교를 나온 후 ‘백수건달’이 된 우연한 기회에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쓰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남의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누구보다 잘나기 위해 노력(努力)했지만 이제는 어제의 나가 비교 대상(比較對象)입니다. 어제의 글보다 오늘의 글이 낫습니다. 말하고 쓰는 사람은 주체이고 읽고 듣는 이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씁니다. 바로 이 특별함이 읽는 사람에게 좋은 동기부여(動機附輿)가 됩니다. 

말하듯이 쓰는 법에는 많은 장점(長點)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나는 그렇게 쓰지 않을까요.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듣고 따르는 데 익숙합니다. 나 본인도 그랬음을 고백(告白)합니다. 그런데 혼잣말이라도 열심히 해보니 말과 글이 늘었습니다. 나는 말하듯이 쓴다는 것은 평생 눈치 보며 말하지 않고 산 나의 지난날 흔적을 끄집어 낸 말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평범(平凡)한 나의 입이 트이고 글이 통하게 되는 과정을 담은 생생한 기록(記錄)입니다.  

나는 이 글을 모두 내가 경험한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방법으로 소개합니다. 읽히는 이의 듣는 삶이 말하고 쓰는 삶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솔직히 썼습니다. 다소나마 도움이 되셨다면 에너지 넘치는 힘으로 간주(看做)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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