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宋時烈) : ‘1607 (선조40년) ~ 1689(숙종15년)’ - 부 : 송갑조(宋甲祖) - 호 : 우암·화장동주(號=尤庵·華障同主) - 시호 : 문정(文正) - 본관 : 은진(恩津) - 주요저서 : 송자대전(宋子大全) - 동구 소제동에 살았음.
나라이름 송(宋)자는 집(宀) 안에 나무(木)로 만든 조상(祖上)의 위패(位牌)를 모셔 놓은 모습(模襲)이다. 성(姓)이나 나라이름으로 사용(使用)되는데, 송(宋)씨 집안은 제사(祭祀)를 잘 지내고, 송(宋)나라는 제사(祭祀)를 잘 지내는 나라로 짐작(斟酌)된다. 송(宋)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 송(宋)씨 시조는 상(商)나라(殷 은나라) 30대 왕 제을(帝乙)의 장자(長子) 미자계(微子啓)다, 왕위를 동생 신(辛)에게 빼앗겼다. 배다른 동생 신이 바로 상(商)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이다. 주(周) 무왕(武王)이 난을 일으켜 상(商)나라를 멸하자 미자계(微子啓)는 상나라 백성을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주(周) 무왕이 상나라 수도 호경에 식읍을 주어 유민(遺民)들을 관리케 하였다. 미자계(微子啓)가 제후로 봉해진 나라가 바로 송(宋)나라였으며, 이후 700여 년간 존속(存續)하다가 기원전 286년경에 제(濟), 위(魏), 초(楚)의 연합군(聯合軍)에 의해 멸망(滅亡)하였다.
때 시(時)는 뜻을 나타내는 날 일(日) 부(部)와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 관청(官廳) 시(寺)가 합(合)하여 이루어진 형성자(形聲字)다. 시(寺)는 지(之)와 통(通)하여 '가다'의 뜻을 나타낸다. 진행(進行)해 가는(寺) 해(日), '때'의 뜻을 나타낸다. 시(時)자는 형부(形部)인 해(日)와 성부(聲部)인 ‘절 사(寺)’자가 ‘시’로 전음(轉音) 된 형성자(形聲字)이다. 성부(聲部)인 사(寺)자는 ‘때 시(時)’자의 본의(本意)를 담고 있다. 사(寺)자는 촌부(寸部) 글자로 형부(形部)인 마디(寸)와 성부(聲部)인 ‘발 지(止)’자가 ‘사’로 전음(轉音) 된 형성자(形成字)이다. 인간(人間)들은 이 중에서 년(年), 계절(季節), 월(月), 순(旬), 일(日), 시(時), 분(分), 초(秒) 따위로 시간(時間)으로 구분(區分)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시간(時間)의 단위(單位)인 시(時)는 예전에 하루의 원(園)을 12지에 따라 12등분하였으니 자시(子時)에서 시작(始作)하여 해시(亥時)를 지나며 한 바퀴 도는 동안 온갖 길흉화복(吉凶禍福)이 결정(決定)된다고 믿었으니 예전 사람들은 때와 날의 시일(時日)을 봐가며 무슨 일을 해도 했다. 이런 습속(習俗)을 단순(單純)히 미신(迷信)이라 여길 수 있지만 대자연(大自然)의 끊임없이 변(變)하는 시(時)에 대한 엄밀(嚴密)한 규칙(規則)에 순응(順應)하려는 겸손(謙遜)함마저 어리석다고 하지는 못한다.
더울 열(熱)의 구성(構成)은 심을 예(埶)와 불 화(灬)로 이루어졌다. 예(埶)는 언덕 육(坴)과 둥글 환(丸)으로 구성되었다. 륙(坴)은 버섯 록(圥)과 흙 토(土)로 구성되었는데, 그 의미(意味)는 버섯(圥)이 솟아 오른 것처럼 땅(土)이 돋아 오른 ‘언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여기서 환(丸)은 묘목을 잡고 있는 사람의 손이 변한 것이다. 즉 나무를 손으로 잡고(丸) 흙을 돋우어(坴)심는 모습(模襲)을 담고 있다. 또한 변화(變化)된 자형 역시 나무를 심을 때는 묘목을 중심으로 흙을 둥글게(丸) 언덕(坴)처럼 북돋아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화(灬)는 불꽃을 뜻하는 화(火)의 변형(變形)이다. 화(火)는 타오르는 불꽃을 본뜬 상형글자로 주로 자형의 하부에 놓일 때는 연화발이라 하여 ‘화(灬)’로 쓰기도 한다. 따라서 열(熱)의 전체적인 의미는 고대인들의 농업방식인 화전(火田)의 풍속(風俗)이 반영(反映)되었는데, 즉 나무나 곡식을 심기(埶)에 앞서 잡목이나 잡풀 등을 불태운(灬)다는 데서 ‘열기’ ‘뜨겁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송시열(宋時烈, 160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2일) ~ 1689년 7월 19일(음력 6월 3일))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이다. 조선국 중추부영사 등을 지냈다.
그는 주자학(朱子學)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領袖)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이언적, 이이, 이황, 김집, 박세채와 함께 인신(人臣)으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이다.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성래(聖來),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교산노부(橋山老夫)·남간노수(南澗老叟)·화양동주(華陽洞主)·화양부자(華陽夫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 1633년(인조 10) 경릉참봉(景陵參奉)으로 출사하여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吏曹判書), 의정부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행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예송 논쟁 때 그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여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었으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차남의 예에 따라 상복은 기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남인과 오래 시비가 붙게 되었다. 당초 1차 예송에서는 허목과 윤휴의 3년 복설을 이견으로 받아들이다가 윤선도가 그의 본심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라 비난하고, 허목이 그의 사형(死刑)을 주장하면서 남인과 적대하게 된다. 그는 윤선도와 함께 효종과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尹善道)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이는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예송 논쟁 당시 송준길, 김수항과 함께 서인의 영수였으며,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덕원부, 거제도 등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에 유배(流配)됐으나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원자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를 반대하다가 숙종(肅宗)의 진노와 남인의 사주로 국문을 받으러 오던 중 경상북도 상주에서 사사된다. 1756년(영조 32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가 그를 성인(聖人)으로 추숭하여 송자, 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서인 성리학파(性理學派)의 종주로 송시열(宋時烈) 역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김기하,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을 길러냈으나, 이 중 윤증과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絶交)하였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노론(老論)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고 유고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된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이는 1787년(정조 11년) 정조가 “송자대전(宋子大全)”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이로써 송자는 동양 철학의 본류인 유학의 시조인 공자와 유학을 새롭게 해석한 주자를 계승하여 조선 유학을 집대성(集大成)했음은 물론 심오한 동양 철학의 체계를 최종적으로 정립한 역사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회 이상 등장한 조선이 배출한 최고의 대학자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피폐해진 조선이 이를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진경시대를 여는데 이론적 배경과 방향타를 제시한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정치사상계를 통일하여 지배원리(支配原理)를 제공한 조선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송이창,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의 문인이다.
조선시대의 도학가(道學家)요 대 정치가인 송시열(宋時烈) 선생은 이 고장에 많은 제자와 일화를 남기신 분이다. 선생은 선조 40년(1607)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리(忠淸北道 沃川郡 九龍里)에서 송갑조(宋甲祚)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뛰어나게 장대하여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며 여덟살 때부터 친척 되는 송이창(宋爾昌)에게 글을 배웠다. 송이창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아버지인데 그때부터 선생은 자기보다 위인 송준길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일생을 두고 학문과 정치생활(政治生活)에 있어 그와 고락을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다.
선생은 22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인조8년(1630)에 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친 그는 연산에 은거하는 당대의 거유(巨儒)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사계(沙溪)는 율곡의 으뜸가는 제자로서 예학(禮學)의 일인자이다. 우암은 이로써 율곡의 학통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1년 뒤에는 사계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 다시 배워 학문을 대성했다.
이러한 당대 굴지의 학자 부자(父子)에게 정주(程朱)의 학을 배운 우암이 그것을 평생의 귀감으로 삼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인조11년(1633)선생은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合格)하였다. 그 시험의 문제는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한다.’라는 철학적 문제였다.
선생은 태극음양(太極陰陽)의 이치와 천지근원의 조화를 논한 문답식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때 시험관인 대제학 최명길(崔鳴吉)은 무릎을 치며 「일찍이 드물게 보던 선비가 생겼으니 이제 중국의 도학은 우리 동방으로 왔다. 」하고 극구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선생의 명성은 사방에 펼치게 되었다. 그해 10월에 경릉참봉(敬陵參奉)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이 많은 어머니를 떠나 먼 곳에 머물 수 없다고 하여 곧 돌아오고 말았다.
인조13(1635)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되니 봉림은 즉 후일의 효종으로 선생과의 인연은 이렇게 해서 맺어졌던 것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매(1636)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어가(御駕)를 모시고 갔다가 성이 함락된 후에는 이내 벼슬을 내놓고 향리 회덕으로 돌아왔다.
효종이 즉위하자(1649) 다시 부름을 받아 진선(進善) 집의(執義) 등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책을 건의하는 등 활약을 하였다. 그때부터 선생은 효종과 특히 정분이 두터웠다.
효종은 정치기강(政治紀綱)을 바로잡고 정부의 새로운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당시 김자점일당을 몰아내고 학문과 행실이 맑고 깨끗한 학자들을 불러서 썼다. 조정에 나온 선생은 정치를 바로잡는데 있어서 절대 필요한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왕에게 아뢰었다. 이는 대략 임금의 덕을 함양하고 기강확립을 서둘러 국력을 기른 뒤에 북벌을 도모하자는 내용의 13개 항목이다.
이때 김자점은 파면을 당한 뒤로 불평을 품고 역관 이덕장을 시켜 청나라 조정에 무고를 하였다. 그리고 인조의 능지(陵誌)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아울러 고발하였다. 이 능지는 선생이 지으신 것이었다. 당시는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무력으로 굴복시킨 때라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던 시대이다.
효종은 선생에게 내리는 교지(敎旨:사령장)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고, 선생도 그와 같이 하였던 것이다. 이는 청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이며 오랑캐를 정벌(북벌)하여 병자의 치욕을 씻고자 한 군신간의 맹약이며 주체의식의 발로였다. 이로 인하여 청의 압력이 가하여지자 선생은 자진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향리에 은거한 선생은 윤선거, 이유태, 유계 등 학우들과 서원에 모여 학술을 토론하고 돌아가신 옛 사계선생이 저술한 의례문해(疑禮問解)를 교정하며 혹은 율곡·조헌·사계등 선유들의 연보나 행장을 기술하여 학계의 공적을 추모하였다.
효종 9년(1658) 다시 부름을 받은 선생은 찬선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승진하였다. 선생이 효종의 부름을 받은 때는 50세였다. 이때 그는 평생 배운 바를 국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을 총애(寵愛)하던 효종이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예송논쟁으로 시끄러워졌다. 이 예송문제는 처음에는 예설 즉 복제의 시비요, 학설의 시비논쟁(是非論爭)인 듯 하던 것이 뒤에 우암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당쟁은 그 어느 한 사람의 공과보다도 그 시대가 안고 있었던 정치제도(政治制度) 및 제반제도와 사회, 경제적 모순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겠다. 그러므로 어느 한 사람에게 주도(主導)되었던 것 같이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보여 진다.
효종 승하 후 벼슬을 물러난 선생은 그 뒤 다시 부름을 받아 조정의 중요관직(重要官職)을 거쳐 우상, 좌상에까지 이르렀으나 뜻은 항상 산천에 있었다.
푸른 물은 성낸 듯 말이 없구나
청산은 찡그린 듯 말이 없구나
조용히 자연의 뜻을 살피니
내 세파에 인연함을 싫어하노라
선생은 74세 되던 해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에 은거하였다. 숙종15년(1689) 선생 83세에 왕세자(경종)가 책봉(冊封)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사약(賜藥)을 받으니, 일세를 풍미(風味)하던 큰 별이 떨어졌다.
선생의 학문은 대체로 율곡선생(栗谷先生)의 이론을 계승하였으나 견해를 달리 한 점도 적지 않았다. 선생은 궁극적으로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사학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선생은 28세부터 82세까지 50년간에 걸쳐 소명과 임명을 받은 것이 무려 109회이고 이에 응한 것은 26회밖에 되지 않는다. 또 888책으로 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이 삼천 번 이상 나오는 것은 선생 한 사람뿐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당시의 큰 사건이든 작은 일이든, 아니면 좋은 일이었든 나쁜 일이었든 간에 선생이 관여(關與)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당대에 선생이 차지했던 위치(位置)가 중요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이 행동한 바와 생애 자체가 기복이 심하고 파란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나 뒷날에 선생의 언행을 적어 비평(批評)한 많은 글들이 그를 찬양(讚揚)하기도 하고 헐뜯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이 너무나 양극을 이루어 선생의 참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선생의 분명한 퇴진은 ‘대의 성취’와 ‘대의의 지킴’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숙종20년(1694)에 신원이 되었고, 문묘(文廟)를 비롯해 많은 서원에 배향(配享)되어 후세 학자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사사 (賜死)
남인은 그를 한성부로 압송해 국문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남인 정승인 의정부영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이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다’면서 ‘성상께서 참작해 처리하라’고 권하자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사사하라고 명한 것이다. 숱한 논란의 중심에 있던 83세의 노구(老軀)는 결국 사형으로 끝났다. 9년 전 허적과 윤휴의 사형을 남인들이 정치보복(政治報復)으로 여긴 것처럼 송시열(宋時烈)의 사형 역시 김수항과 서인들은 정치보복으로 여겼다. 지도자를 잃은 남인이었지만 송시열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은 계속되었다. 그는 의금부(義禁府)에 가서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죽으리라고 장담하였다.
6월 3일 육지에 도착하자 수많은 문도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죽림촌사(竹林村舍)에서 자손들과 질손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썼다.
아래는 그 유서 내용이다.
“주자(朱子)는 음양(陰陽)·의리(義利)·백흑(白黑)을 판단하는 데 있어 용감하고도 엄격하기가 마치 한 칼로 두 조각을 내듯 하여 감히 조금도 의위(依違 마음이 확정되지 않아 이럴까 저럴까하는 것)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대학(大學)“ 성의장(誠意章)의 일이다.
이러했기 때문에 그가 끝내 아성(亞聖)의 지위에 이르러 만 길이나 되는 굳은 절벽과 같은 자세로 공(功)이 만세에 미쳤으니, 도리어 자사(子思)·맹자(孟子)보다도 더 훌륭한 점이 있다. 그러나 지성으로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함이 아니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이것이 바로 ”대학“에서 격물(格物)·치지(致知)를 반드시 먼저 가르친 이유이다.
대체로 선·악의 사이에 의위(依違)하는 자는 끝내 반드시 음(陰)과 리(利)와 흑(黑)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대개 인정(人情)이 이를 편안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음과 양이 있고, 일에는 의[義]와 리[利]가 있으며, 물건에는 백과 흑이 있는데,(음-양, 흑-백은”논어論語“의‘자리가 바르지 못함[席不正]’과, ”소학小學“의‘사악한 맛[邪味]’을 가리킴) 이는 일상생활 속에 늘 서로 접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경계하여라. 엎어진 전철(前轍)을 가까이서 보면 두려운 마음이 더욱 깊은 법이니, 너희들은 이윤(尼尹; 윤선거)을 보지 않았느냐. 흑수(黑水; 윤휴)가 주자(朱子)를 공척(攻斥)할 때에, 윤선거가 처음에는 대체로 이리저리 망설이다가 끝내 그와 심신(心神)이 융회(融會)되어 겉으로는 배억(排抑)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그를 도와 세력을 이루어서 마침내는 큰 화(禍)가 하늘에 창일하고 가국(家國)이 패망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물리치되 죽도록 미워하기를 마치 원수처럼 여기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다. 처음에는 털끝만큼의 어긋난 것도 나중에는 천리 거리만큼 어긋나게 되는 것인데, 더구나 처음부터 크게 어긋난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그 사람[渠 윤선거]인들 종말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찌 알았겠느냐. 애석하기 그지없다.
나는 변변치 못한 하찮은 사람으로 망녕되이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배척한 일을 본받아,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누구든지 그를 죄줄 수 있다는 교훈을 독실히 믿은(篤信)한 소치로 결국 유배되는 참사(慘事)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후회(後悔)하지 않는다. (주: '黑水'(검은 물)는 여강(驪江)을 비하하는 말이다. 여강가에 살았던 윤휴를 욕하는 말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지독한 증오심이 담긴 말이다.)
대체로 흑수(黑水)는 ‘공자(孔子)의 이름도 못 부를 것(諱)이 없다.’ 하였고, 주자를 공척하는 것을 사업(事業)으로 삼았으며, "자식으로서도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다" 하여 ‘성모(聖母; 현종(顯宗)의 비(妃)이며 숙종(肅宗)의 어머니인 명성왕후(明聖王后)를 헐뜯고 공격(侵毁)’하였다. 그 여파가 서로 서로 이어져 마침내는 공자를 조롱하고 업신여긴[譏侮] 말을 시제(試題)로 삼아 대성전(大成殿) 아래 내거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효묘(孝廟)의 세실(世室)을 너무 빨리 작성했다고 칭탁하여 기의(譏議)를 하였고, 성모(聖母)도 재차 비방을 입어 선인(宣仁)의 화(禍)가 있게 되었으며, 양현(兩賢;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성무(聖廡; 문묘文廟)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은 성모를 높여 두둔하다가 끝내 죽임을 당하였고, 타우(打愚, 이상李翔)는 흑수(黑水)가 윤이흠(尹以欽)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 것을 분개하게 여기다가 방금 투옥(投獄)되었다. 그리고 광해군(光海君)의 폐모(廢母)를 극력 찬성했던 자는 은혜를 입어 방환(放還)되었고, 그리고 감히 말하지 못할 대사(大事)는 또한 차마 말할 수가 없다. 내가 진정 이때에 죽었더라면 이것이 욕(辱)이 될지, 당연한 일이었을지는 모르겠다. 주자가 선성(先聖, 공자)의 소상(塑像)이 허리가 끊기고,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도학(道學)이 금제(禁制)를 받는 때를 당했을 적에, 주자를 베 죽이자는 소장(疏章)이 끝내 한탁주(당시의 권력자, 주희를 탄압함)의 무리에게서 나왔고, 조자직(趙子直; 송宋의 재상 조여우趙汝愚)·여자약(呂子約; 여조검呂祖儉)·채계통(蔡季通, 채원정蔡元定; 이상 둘은 주희의 친구) 등 제현(諸賢)이 서로 이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도, 주자 문인(門人) 중에는 혹 안면(顔面)을 바꾸어 (한탁주 편에 붙어) 과거(科擧)를 보기도 하였다. 어떤 이가 주자에게 화를 당하지 말고 남몰래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우회적으로 충고(諷諫)하자, 주자가, "내가 만일 만 길이나 되는 절벽처럼 굳게 서 있다면 어찌 우리 도(道)를 빛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또 우돈장(遇遯章; 한탁주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문)을 지었는데, (길흉을 점쳐 보고, 죽을까 두려워) 비록 이 글을 상소하지는 못하였지만 오히려 (짓고 나니) "가슴 속이 후련하다." 하였으니, 결코 후회하지 않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대체로 주자의 학문은 이치를 궁구하고 심성(心性)을 존양(存養)하여 이를 몸으로 실천해서 확충(擴充)시키는 것을 주(主)로 삼고, 공경[敬]으로써 시종(始終)을 통관(通貫)하는 공(功)으로 삼았던바, 임종시(臨終時)에 이르러 문인(門人)에게 진결(眞訣)을 주었으니, 즉 "천지(天地)가 만물(萬物)을 내는 것과 성인(聖人)이 만사(萬事)에 대응하는 것은 곧음[直]뿐이다." 하였고, 다음날 문인이 또 청(請)했을 때는, "도리(道理)가 다만 이러할 뿐이니, 모름지기 괴로움을 극복하고 굳게 지켜야 한다."하였다. 대체로 공자는, "사람이 사는 것은 곧음뿐인데, 곧지 못하게 사는 것은 요행히 재앙을 면한 것일 뿐이다." 하였는데, 맹자가 호연(浩然)의 기(氣)를 기른 것도 다만 이 직(直) 한 글자뿐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자·맹자·주자 세 성인이 똑같은 법칙(法則)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글을 읽어서 이치에 밝지 못하면 곧지 못한 것을 곧게 여기는 자도 있는 것이다. 우리 사문(師門)의 교훈은 이러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선덕(先德 조상의 덕)으로 말하자면, 유씨(柳氏) 할머니가 어린 시절 굳은 절행(節行)을 지킨 일과, 쌍청부군(雙淸府君, 송유宋愉)이 자취를 감추고 은둔한 일과, 서부부군(西阜府君, 송귀수宋龜壽)이 금조(禽鳥) 같은 미물을 감동시킨 효성과, 문충공(文忠公)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 선생이 목숨을 버리고 충성을 다한 것과, 이씨(李氏) 할머니가 얼첩(孽妾)을 사절한 일과, 습정(習靜, 송방조宋邦祚) 선생이 간흉(奸兇)한 무리를 척절(斥絶)하다가 비명횡사한 일과, 나의 선부군(先府君)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 선생이 몸을 돌보지 않고 절개를 세워 포전(褒典)이 빛난 것과, 충현공(忠顯公) 야은(野隱, 송시영宋時榮)이 대의(大義)를 부식(扶植)하여 백세를 용동시킨 일 등은 모두가 주문(朱門; 주자의 문하)의 정법(正法)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아, 너희들은 힘써야 한다. 법도(法度)를 가까운 데서 보면 공(功)을 거두기가 쉬운 것이니, 너희들이 모름지기 가까이는 선덕(先德)을 지키고 멀리는 주문(朱門)을 본받는다면, 나는 죽더라도 저승에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숭정(崇禎) 기사년(1689, 숙종15) 6월 3일에 선암(仙巖)의 죽림촌사(竹林村舍)에서 쓰다.”
국문 받기 위해 상경하던 6월 3일 정읍에서 만난 금부도사(禁府都事)가 건넨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이한다. 제주도를 나와 정읍에 이르자 이미 사약(賜藥)이 내렸으므로 제자 권상하(權尙夏)·김만준(金萬埈)의 손을 붙잡고 뒷일을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다. 송시열(宋時烈)은 임종 때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손을 잡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곧이어 권상하에게 자신이 소장(所藏)하고 있던 서적과 의복을 그에게 유품(遺品)으로 물려주었다.
6월 3일 도성에 3배를 올린 뒤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이한다. 당시 그의 나이 83세였다. 송시열은 여든세살이라는 아주 많은 나이에 사망을 했다는 점이 그것도 사약(賜藥)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 아주 특이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대신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대신은 역적이 아니면 사형당한 전례가 없었는데 송시열은 역적이 아니라 죄인들의 수괴(首魁)라는 애매한 죄명으로 사형을 당했고 그것도 국문(鞫問)을 당하기 위해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정읍에서 서둘러 사약을 마신 점이 상당히 특이한 죽음이다. 조선후기의 역사서, 연려실기술에는 송시열(宋時烈)의 죽음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두 개의 기록(記錄)이 실려 있다.
김재구의 조야회통을 보면 송시열(宋時烈)은 오직 바를 직자 한자로 후손들을 가르쳤다. 죽기 전날 밤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더니 죽는 날 밤에는 규성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 빛이 지붕 위에 뻗쳤다. 규성은 문운, 즉 학문을 상징하는 별이다. 그러나 나량좌의 명촌잡록을 보면 사약을 받던 날 송시열(宋時烈)은 효종과 명성왕후의 어찰을 빌어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리를 뻗고 바로 드러누웠다. 종시 마시지 아니하니 약을 든 사람이 손으로 입을 벌리고 약을 부었는데 한 그릇 반이 지나지 못해 죽었다고 되어 있다. 죽음에 임한 그의 모습은 목숨을 구걸(求乞)하는 소인배였다는 것이다.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고 하는 것은 연려실기술 자체가 사서고 연려실기술을 이긍익이라는 사람이 이 역사서를 쓰면서 자기의 주장(主張)보다는 당시 상반된 주장을 동시에 실음으로써 객관화(客觀化)하려는 데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 든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솔직담백(率直淡白)하였고,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輩出)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사사되기 직전 그를 광양에서부터 정읍까지 육로로 도보수행하던 권상하가 들어가 결별의 인사를 하자, 송시열은 그의 손을 잡고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실천하고 도를 밝힐 것과 항상 '곧을 직'을 행실의 사표로 삼아야 된다고 유언하였다.
“내가 일찍이 아침에 도(道)를 깨닫고 저녁에 죽기를 기대하였는데, 지금 끝내 도를 깨닫지 못한 채 죽게 되었다. 앞으로는 오직 치도(致道)만 믿는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위주로 삼고 사업은 마땅히 효종(孝宗)의 대의(大義)를 위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은 권상하에게 결별을 고하는 유서를 남겼는데 여기에서 ‘곧을 직(直)’ 자의 의의에 대해 거듭 설명, 누누이 강조하며 유도(儒道)의 맥을 이으라는 유언을 그에게 남겨주었다.
그가 사사될 무렵 하늘에서 문곡성(文曲星)이 떨어지고 해일이 일었다는 전설, 그가 사사(賜死)될 때 하늘에 일식 혹은 월식(月蝕)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놀랐다는 전설이 있다. 한편 남인들은 그가 사약을 받지 않으려고 효종과 현종의 유필을 핑계 삼아 억지 부렸다는 전설(傳說)을 지어냈다.
송시열(宋時烈)이 사사되자 숙종은 희빈 장씨 소생 원자 균을 세자로 책봉(冊封)하고, 희빈 장씨도 왕비로 격상시킨다.
이미 숙종은 후궁 장씨를 왕비로 올린다고 선포했으므로 장씨가 사실상 왕비였으나 숙종 14년에 사망한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왕비책봉식만 거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숙종은 재위 16년(1690) 6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그해 10월 22일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정권을 노린 남인과 왕비 자리를 노린 장옥정의 결합이 성공한 것이었다.
사사된 송시열의 시신은 대전 회덕으로 운구(運柩)되었고, 대전과 서울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숙종실록”은 “송시열의 상(喪) 때 서울 남문 밖 우수대(禹壽臺)에 모여 곡한 사람이 수천 명을 넘었는데, ‘각자 그 종 5, 6인씩만 내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20년 4월 1일)”고 전한다.
그 후 5년 만에 다시 서인이 집권하자 신원(伸寃)되어 조정에서 관작을 복구하고, 1694년 수원(水原), 정읍(井邑), 충주(忠州) 등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 뒤 문정(文正)의 시호를 내렸다. 1697년 송시열, 송상민, 권상하의 위패를 모신 남간사(南澗祠)를 건립했다.
생전의 행적에 대해서 칭송과 비방이 엇갈리지만 서인 정권 하에서 영조(英祖)에 의해 문묘(文廟)에 종사되고, 세손 시절부터 그를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효종(孝宗)의 묘정에 추향(追享)되었다. 또한 정조는 그를 공자, 맹자, 순자, 한비자, 주자에 버금가는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추대하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였다. 대전광역시 동구 소제동에 있던 우암 별당 기국정을 1926년 남간정사에 옮겼다. 대전시는 남간정사 옆에 우암사적 공원을 조성하여 공원 안에 남간사(南澗祠)를 새로 지어 위패 등을 모시고 있다. 장판각에 ‘송자대전’ 목판이 보관되었다.
1756년(영조 32) 2월 23일 왕명으로 증(贈) 의정부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그해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성균관(成均館) 문묘에 종사되었다.
후일 송시열(宋時烈)을 높이 평가한 정조가 친히 편찬한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에서 정조는 송시열을 마침내 주자에 비견될만한 성현의 반열(班列)에 올랐다. 또한 송시열을 비난하는 것은 공자와 맹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못 박아 그에 대한 비판을 금지했다. 1863년 이전까지 송시열(宋時烈)의 주장에 공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후 송시열(宋時烈)의 제자와 문도들은 송시열을 송자(宋子)라 부르며 공식화했지만 영남의 남인들은 이의(異意)를 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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