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知止)는 자신의 분수에 넘치지 아니하도록 그칠 줄을 안다는 뜻이다. 出典: 장량(張良)의 지지(知止)
알 지(知)는 화살 시(矢)와 입 구(口)가 결합한 형태(形態)로 화살이 과녁을 꿰뚫듯 어떤 상황을 판단(判斷)하고 해결하여 말(口)할 수 있는 능력이 '지식(知識)'에서 비롯된다는 뜻을 담는다. 또 인지적(認知的)인 '앎'에 시간(日)과 연륜이 더해지면 '지혜(智)'가 된다고 여긴 고대인(古代人)의 인식 세계가 엿보인다. 과녁처럼 우리 앞에 놓여 해결(解決)을 기다리는 복잡한 문제를 단번에 꿰뚫을 수 있는 '지식(知識)'은 무엇일까? 공자(孔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앎'이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고 하였다. 최소한 과거에는 배움의 기회가 없거나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 부지(不知)에 대한 솔직(率直)한 자기고백(自己告白)이 쉬웠다.
그칠 지(止)자는 발 꼴을 본뜬 상형자(象形字)로 발이 움직여 일정 지점(地點)에서 '그치다(止)'라는 뜻의 글자이다. 지(止)자는 '그치다'라는 뜻이지만 실제 뜻은 '가다, 이동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 지(止)자가 부수(部首)로 쓰인 글자들 역시 “움직여 이른 후 그치다”라는 의미(意味)가 스며있다. 또한 지(止)자는 이래 표처럼 다른 부수(部首)와 만나 14 개의 새로운 부수(部首)를 만든다. 그러니 이들 부수(部首)들도 결국(結局) 움직이는 동작(動作)이 스며있다. 여기서 지(止)자는 사람의 발목 아래를 그렸으며 일반적(一般的)으로 알려진 '그치다'의 정적(靜的)인 의미(意味)보다는 '움직이다, 이르다' 등의 동적(動的)인 의미(意味)에 가깝다. 단지 동적(動的)인 행동(行動)의 결과(結果)로 정적(靜的)인 순간(瞬間)에 이른 상태(狀態)라고 할 수 있다. 그칠 지(止)는 발의 모습(模襲)을 본 따 만든 글자이다. 그칠 지(止)는 발로 걸어간다는 뜻도 있고, 반대(反對)로 발을 땅에 붙임으로서 정지(停止)한다는 뜻도 있다. 또한 지나온 자취(迹)라는 의미(意味)도 가진다. 서든지 가든지 우선(于先)은 발이 있어야 한다. 발이 있어야 일어 설수도 있고, 또 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서다', 혹은 '그치다'라는 뜻의 '지(止)'자나 '갈 지(之)자가 갑골문(甲骨文)에서는 둘 다 발의 모습(模襲)에서 나왔다. 갑골문(甲骨文)의 '발가락, 뒷꿈치, 발목'을 그린 발(疋)'자가 금문(金文)에서는 '辵'의 모습(模襲)으로 되었다가 지금의 '설 지, 혹은 그칠 지止)가 된 것이다. '갈 지(之)' 자는 똑같은 발 모습(模襲)의 뒷꿈치 부분(部分)에 횡선(橫線)인 땅, 혹은 출발선'ㅡ'이 그어져 있어서 '막 걸으려 하는 동작(辵)을 나타내고 있다. 금문(金文)의 '㐄', '夂' 등의 모습(模襲)이 되었다가 지금(只今)의 '之'자로 된 것이다. 갑골문(甲骨文)이 발견(發見)되기 전에는 '屮'자나 '㞢'자만 보고 땅에서 풀이 솟아나는 모습(模襲)으로 추정(推定)하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선다(止)'혹은 '간다(之)'라는 뜻으로 보더라도 둘 다 '발(止)'의 모습(模襲)에서 나왔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참고(參考)로 '다리 족(足)'자가 갑골문(甲骨文)에서는 정갱이까지 그린 '갑'의 모습(模襲)이었다가 금문(金文)에서는 ''의 모습(模襲)으로 바뀌면서 밑 부분(部分)이 '발 지(止)'와 같은 변화(變化)를 보이고 있다는 데서도 잘 알 수 가 있을 것이다.
분수를 지켜 너무 탐내지 않음(知足)과 분에 넘치지 않도록 그칠 줄을 아는 일(知止)을 뜻한다.
장량(張良)은 정치가, 군사전문가이며, 유방(劉邦)을 도와 항우(項羽)를 제압하고 한(漢)왕조를 연 창업공신이다. 자는 자방(子房),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소하(蕭何), 한신(韓信)과 함께 한나라 건국의 삼걸로 불린다. 삼걸 중 소하가 행정업무에 주력하고, 한신이 전쟁에 주력(主力)할 때, 장량은 유방의 브레인으로 활약했다. 즉 초한(楚漢)전쟁 중에 가장 유방과 오랜 시간 같이 있으면서, 그의 결정 하나하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장량이라는 것. 때문에 어떤 조직 보스의 가장 믿음직한 측근을 "장자방(張子房)"이라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유방은 장량에 대해 "진중에서 계략(計略)을 꾸며 승리를 천리 밖에서 결정지었다."고 평가했다.
장량(張良)의 선조는 한(韓)나라 귀족이다. 조부 한개지(韓開地)는 한소후(韓昭侯)와 선혜왕(宣惠王) 및 양애왕(襄哀王) 밑에서 상국(相國)을 지냈고, 부친 한평(韓平)은 리왕(釐王) 및 도혜왕(悼惠王) 밑에서 상국을 지냈다. 도혜왕 23년 장량의 부친 평이 죽고 그리고 20년 후인 기원전 230년에 한나라는 진(秦)나라의 침략으로 망했다. 그때 장량은 아직 나이가 어렸음으로 한나라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 한나라가 망했을 때 장량의 집에는 가노가 300여 명이나 있었으나, 동생이 죽었을 때 장례(葬禮)도 치르지 않고 전 가재(家財)를 털어 자객을 구해 진왕을 암살(暗殺)하여 한나라에 5대에 걸쳐 상국(相國)을 지낸 그의 조부와 부친을 위해 한나라의 원수(怨讎)를 갚으려고 했다.
장량이 회양(淮陽)에서 예(禮)를 배운 후에 동쪽으로 여행하다가 창해군(倉海君)을 만나서 장사 한 사람을 얻어 그를 위해 120근의 철퇴를 만들었다.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수(巡狩) 나왔을 때 장량과 창해역사는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저격했으나, 뒤따르던 부거(副車)를 잘못 맞추었다. 진시황이 대노하여 천하에 수색령(搜索令)을 내려 자객이라고 의심나는 사람들을 매우 급하게 붙잡아 들였는데 이것은 모두 장량(張良)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장량이 이름과 성을 바꾸고 하비(下邳)로 도망가 숨었다.
장량이 하비에 머물며 협객이 되었는데 그때 항백(項伯)이란 사람이 살인하여 죄를 얻자 장량이 그를 구해 숨겨주었다. 그리고 10년 후에 진섭(陳涉) 등이 기병하자 장량도 역시 젊은이 100여 명을 모았다. 그때 경구(景駒)가 스스로 초나라의 대리왕이 되어 유읍(留邑)에 머물렀다. 장량이 경구를 찾아가던 도중에 패공(沛公)인 유방(劉邦)을 만났다. 그때 패공은 휘하에 수천의 무리를 이끌고 하비(下邳)의 서쪽을 공략하고 있었다. 장량은 패공의 휘하에 들어갔다. 장량이 패공에게 자주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유세하자 패공은 좋아하여 그때마다 장량의 계책을 실전에 사용하곤 했다. 장량이 다른 사람에게도 태공병법에 관해 논했으나, 패공 외는 아무도 깨닫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장량은 속으로 생각했다. “패공(沛公)은 아마도 하늘이 낸 사람일 것이다.” 장량은 패공을 따르기로 하고 경구(景駒)에게 가지 않았다.
패공이 설읍(薛邑)에 가서 ‘항량(項梁)는 항우(項羽)의 숙부’을 접견했다. 그때 항량은 이미 초왕(楚王)으로 회왕(懷王)을 세우고 있었다. 장량이 항량에게 말했다.
“이미 초나라 왕실의 후손을 찾아 왕으로 세우셨으니, 한(韓)나라 왕실의 후손들 중 횡양군(橫陽君) 성(成)이 어진 이름을 얻고 있어 그를 한왕(韓王)으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를 한왕으로 세워 한나라의 잔존 세력들을 규합(糾合)하시기 바랍니다.”
항량이 장량을 시켜 한성(韓成)을 찾아 한왕으로 세우라고 했다. 장량은 한왕 성(成)의 사도(司徒)가 되어 그와 함께 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한나라 땅을 공략(攻略)하여 몇 개의 성을 얻었으나, 그때마다 즉시 반격(反擊)한 진나라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장량과 한왕 성은 영천(穎川) 일대에서 정처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패공이 낙양에서 남쪽으로 나아가 환원산(轘轅山)으로 진격했을 때 장량도 군사를 이끌고 그의 뒤를 따라 출전하여 한나라 땅의 십여 개 성을 함락시키고 양웅(楊熊)의 군사를 격파했다. 패공은 이어서 한왕 성에게 양책(陽翟)에 머물며 지키라 명하고 자기와 장량은 남쪽으로 나아가 완성(宛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무관(武關)으로 들어갔다. 패공이 2만의 군사로 요관(嶢關)에 있는 진나라 군사들을 공격(攻擊)하려고 하자 장량이 계책을 내어 말했다.
“진나라 군대는 아직도 그 세력이 강하여 결코 가볍게 보시면 안 될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 진나라 장수들은 모두 장사꾼 출신들이라, 장사꾼은 이(利)로써 유혹하면 마음이 쉽게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패공께서 일단 보루를 지키면서, 사람을 앞서 보내 5만 명의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고, 산봉우리에는 모두 깃발을 빽빽이 꽂아 의병(疑兵)을 세우고, 다시 역이기(酈食其)에게 금은보화를 주어 진나라 진영으로 보내 적장들을 달래 항복을 권유하시기 바랍니다.”
과연 진나라 장수가 이에 호응하여 패공의 군사와 연합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여 함양(咸陽)을 습격하려고 했다. 패공이 진군과 함께 함양을 공격하려고 하자 장량이 다시 말했다. “아마도 그 계획은 진나라 장수 혼자만의 생각이라 혹시 그 부하 군사들이 명령을 받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진나라 군사들이 장수의 말을 따르지 않게 되면 필시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니 차라리 그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공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에 패공이 즉시 군사를 이끌고 진군을 공격하자, 진군은 크게 무너졌다. 도망가는 진군의 뒤를 추격하여 남전(藍田)에서 다시 싸웠다. 진나라 군사들은 결국은 남전에서 와해되고 패공은 함양에 입성해서 진왕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았다.
패공이 진나라 궁궐로 들어가 보니 그 궁실에는 휘황찬란(輝煌燦爛)한 휘장, 옥이나 금으로 만든 개와 말 모양의 노리개, 천하의 진기한 보물 그리고 수천 명에 달하는 미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에 마음이 동한 패공이 마음속으로 궁궐에 머물려고 했다. 번쾌(樊噲)가 궁궐 안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간했으나 패공은 듣지 않았다. 그래서 장량이 나서서 말했다.
“진(秦)나라가 포학무도했음으로 해서 패공께서 이곳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무릇 천하 사람들을 위해 진나라의 남은 포악한 잔적들을 제거하려면 마땅히 청렴(淸廉)하고 검소한 것을 그 본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어떤 일을 행하는 데는 이롭고, 성분이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다’라고 했습니다. 원컨대 패공(沛公)께서는 번쾌의 간언을 받아 들여야 하실 것입니다.”
패공은 장량의 말을 받아들여 함양성에서 나와 패상에 주둔했다. 항우가 이윽고 홍문(鴻門)에 이르러 패상의 패공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항백(項伯)이 야음을 틈타 패공의 진영에 당도하여 아무도 몰래 장량을 만나 그곳을 빠져나가자고 했다. 장량이 듣고 항백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한왕(韓王)을 위해 패공에게 파견된 사람입니다. 오늘 일이 급하게 되었다고 나 혼자 도망친다면 그것은 의가 아닐 것입니다.”
장량이 즉시 패공에게 달려가 그 일을 고했다. 패공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장차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패공께서 함곡관으로 군사를 보내 항우를 막으려고 하셨는데 정말로 항왕(項王:항우)에 반기를 들려고 하신 것입니까?” “어떤 천박하고 무지한 놈이 나보고 말하기를 함곡관에서 제후군을 막게 되면 진나라 땅은 모두 차지할 수 있다고 했소. 그래서 내가 그의 말을 따른 것이오.” “그렇다면 패공께서는 지금 항우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패공이 한 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결코 항우와 대적할 수 없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장량이 항백을 억지로 패공 앞으로 데려와 회견을 시켰다. 항백을 접견한 패공은 그에게 술잔을 올려 축수를 하고 그들 자녀들을 혼인시켜 인척 관계를 맺기로 했다. 항백은 초군의 진영으로 돌아가 패공이 감히 항우를 배반할 생각을 하지 안 했으며, 단지 함곡관에서 제후군에게 항거한 것은 도적들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해 주었다. 뒤이어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이 배반하여 항우에게 유방이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한다고 밀고하자 항우는 크게 격분하여 유방을 공격하려 한다. 이때 장량은 유방을 설득하여 항우에게 가 사죄하게 하는데, 이것이 유명한 '홍문연(鴻門宴:홍문에서 열린 연회)'이며 장량은 여기서 유방을 먼저 피신시킨 뒤 스스로 항우와 범증(范增)에게 대신 사죄를 함으로써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한(漢) 원년 기원전 206년 정월 패공이 한왕(漢王)이 되어 파(巴)와 촉(蜀)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한왕(漢王)이 부임하러 갈 때 장량은 한왕을 전송했다. 한왕은 포중에서 장량을 한(韓)나라에 돌아가게 했다. 장량이 한왕과 헤어지면서 말했다.
“왕께서는 잔도(棧道)를 지나간 다음 반드시 불태워 절대 관중이나 중원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는 마음을 밝히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항왕(項王:항우)의 마음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한왕은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지나온 잔도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장량이 항왕(項王)에게 말했다.
“한왕(漢王)이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잔도를 불태워 길을 끊은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그곳에서 중원이나 관중으로 나올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장량은 이어서 항왕(項王)에게 제나라 왕 전영(田榮)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편지를 써서 고했다. 항왕은 서쪽의 한왕(漢王)에 대한 걱정을 떨쳐 버리고 그 군사로 제나라를 공격했다. 이로써 항우의 시선을 북쪽의 제나라로 돌리게 하여 유방이 힘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항왕은 결국은 한왕(韓王) 성을 죽였다. 장량이 도망쳐 한왕(漢王)에게 돌아왔다. 한왕 역시 그 동안 한중에서 나와 삼진왕(三秦王:장한, 사마흔, 동예)를 격파하고 관중을 평정하였다. 한왕(漢王)에 의해 성신후(成信侯)에 봉해진 장량은 함곡관을 나와 동쪽으로 진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는 한군(漢軍)에 종군했다.
천하가 초, 한으로 나뉘어 계속 싸움이 일자 장량은 구강왕 영포(英布), 제나라 장수출신의 팽월(彭越), 한나라의 대장군 한신(韓信) 세 사람을 천거하여 각기 왕으로 삼은 뒤 이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부려야 한다고 진언했다. 한나라와 초나라는 오랜 싸움 끝에 홍구를 경계로 화평을 맺게 된다. 이때 장량은 한왕(漢王) 유방에게 초나라를 계속 공격할 것을 진언하여 유방은 군대를 거느리고 광무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때 한신, 팽월, 영포는 참전하지 않았으며 이에 유방은 크게 패하고 만다.
낙심한 유방이 장량을 불러 책망하자 장량은 황송해 하며 답했다. "천하를 얻은 뒤, 그들에게 베풀 것을 약조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이 오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땅히 그들에게 봉작을 준 후에야 군대를 움직일 것입니다." 이에 유방이 한신, 팽월, 영포를 왕에 임명하자 그들은 즉각 군대를 이끌고 와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해하(垓下)에 몰아넣었다. 이때 장량은 한(漢)나라 군대에서 초나라 출신의 병사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초가(楚歌)를 가르친 뒤 부르게 한다. 이를 들은 초나라 군대는 크게 동요하였으며, 마침내 800여명의 용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결국 항우는 패하였고,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여 마침내 포위망을 뚫고 동쪽으로 달려가 오강(烏江:지금의 안휘성 화현(和縣))에 이르렀다. 항우는 오강을 빨리 건너라는 사공의 권유를 뿌리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漢) 6년 기원전 201년 정월, 항우를 멸하고 공신들에게 논공행상을 했다. 장량은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가 싸워 세운 공이 없었음에도 한고조(漢高祖:유방)가 일부러 장량이 세운 공에 대해서 언급했다.
“군중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내어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이것이 자방이 세운 공로이다. 장량으로 하여금 제나라 땅의 3만 호를 스스로 골라서 봉읍으로 갖게 하라!” 이에 장량이 사양하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저의 계책을 받아 주셨고, 다행히 저의 계책은 적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이룬 공이 아니라 폐하의 배려로 인한 일이라, 저는 단지 유현(留縣)에 봉해지는 것만으로 과분하온데, 어찌 감히 제가 3만 호의 봉지를 바라겠습니까?”
그래서 장량은 유(留) 땅을 봉지로 갖는 유후(留侯)가 되어, 고조(高祖)를 따라 도읍 관중에 들어가 살았다. 그러나 그는 원래 몸에 잔병이 떠나지 않았던 허약한 체질이었기 때문에 도인(道引)의 술(術)을 행하며 오곡(五穀)으로 음식을 먹지 않으며, 일 년여 동안을 대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고조(高祖)가 여후(呂后:유방의 황후)의 아들인 태자를 폐하고 척(戚)부인의 아들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대신 세우려고 했다. 대부분의 대신들이 부당함을 간했지만 아무도 굳게 결심한 고조(高祖)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이를 두려워한 여후는 어찌할 줄 모르고 곤혹스러워했다. 어떤 사람이 여후에게 말했다. “유후(留侯)는 원래 계책을 잘 내어, 황제께서는 그의 말을 잘 듣습니다.” 여후가 그의 동생 건성후(建成侯) 여택(呂澤)을 보내 대책을 말해 달라고 했다. “옛날 황제께서 여러 번에 걸쳐 위급한 상황에 처하셨을 때, 저의 계책을 채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천하가 안정되었고, 또한 황제께서 사랑하는 아들이 있어 태자를 바꾸려 하고 계십니다. 그 일은 황실이 골육 간에 일어난 문제라 나와 같은 사람 백 명이 간한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여택이 장량에게 한사코 계책을 마련하라고 위협하며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은 계책을 마련해 주어야겠소.” “이 일은 말로 다투어 이루어 낼 수 없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 하겠소. 황제께서 지금까지 초빙하려 했으나 얻지 못한 네 사람(상산사호:商山四皓)이 있소. 황제께서는 그 네 사람을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황제께서는 이미 그 분들이 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니, 그 분들을 모셔오면 태자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윽고 그 네 사람(상산사호:商山四皓)이 여후(呂后:유방의 황후)의 부름에 응해 도성에 당도하자 건성후가 문객으로 삼아 그의 부중에 머물게 했다.
한(漢) 12년 기원전 195년 고조(高祖)가 반기를 든 경포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도성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태자를 바꾸려고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장량이 간했으나 마음을 바꾸지 않자, 태부 숙손통이 고금의 일을 예로 들어 죽음을 각오하고 태자의 일을 간했다. 고조가 짐짓 숙손통의 간언을 받아들이는 척 했으나 여전히 태자를 바꾸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윽고 군신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술을 돌릴 때 태자가 곁에서 수행했다. 그때 그 네 사람의 은자들도 태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이가 이미 80이 넘어 하얀 수염과 눈썹에 의관이 매우 위엄이 있었다. 황제가 보고 괴이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저 네 사람의 노인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네 노인들이 차례로 앞으로 나오면서 자기들은 동원공(東園公), 각리선생(角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이라고 했다. 황제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몇 년에 걸쳐 초빙했으나 모두 나를 피해 달아나 버리더니, 지금은 무슨 연유로 내 아들을 스스로 찾아와 사귀고 있는 것이오?” 네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선비들을 업신여겨 저희들은 욕됨을 피하기 위해 폐하로부터 도망쳐 몸을 숨긴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가 가만히 들어보니 태자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선비들을 공경하고 사랑해서 세상 사람들은 태자를 위해 목숨이라도 걸어 모시려하고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저희들이 태자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번거롭겠지만 공들은 태자를 잘 이끌어 주기 바라오.”
네 노인이 고조(高祖)에게 축수를 올리고 총총걸음으로 물러갔다. 고조가 척(戚)부인을 불러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네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태자를 바꾸고 싶으나, 저 네 사람이 태자를 보좌하고 있으니, 그것은 이미 태자의 날개가 자라버렸음이라! 이제는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고조가 결국 태자를 바꾸지 못한 것은 모두 장량이 네 사람의 은자를 태자의 손님으로 초빙하게 한 것 때문이었다.
장량은 그 즈음에 늘 말하곤 했다. “오늘 이 세 치 혀로 황제의 스승이 되고 만호의 봉읍을 받았으며, 그 지위는 열후(列侯)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포의(布衣)로 시작한 사람으로는 지극히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라 나는 이것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 세상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적송자(赤松子: 신농(神農) 때의 우사(雨師)로서 후에 곤륜산에 입산하여 신선이 되었다 함)의 뒤를 따라가 노닐고자 한다.” 장량은 선식을 배워 오곡을 먹지 않았고, 도인(道引)을 행하여 몸을 가볍게 했다. 이윽고 고조(高祖)가 세상을 뜨자 여후(呂后)가 장량의 은혜를 생각하고 강제로 음식을 먹게 하면서 말했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감이, 마치 흰 망아지가 문틈으로 지나가는 것과 같이 찰나의 일과 같은데, 어찌 그와 같이 스스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장량은 부득이 선식을 중단하고 억지로 음식을 먹었다. 그 후에 그는 모처에 은거했는데 8년 후(기원전 187년)에 죽었다. 그의 말년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도 설이 한 곳이 아니다. 하나는 무릉원 장가계요, 또 하나는 묘가 있는 지금의 하남성 동혼현(東昏縣) 서남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해 살다가 죽은 뒤 그 곳에 묻혔다는 설이 있다.
장량은 유방의 핵심 참모가 되어 전략적인 지혜로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장량의 역할은 유방과 함께 하며 그의 모든 결정에 영향을 미친 부분이었다. 소하는 전쟁이 벌어지는 내내 관중에 있었고, 한신은 별동대를 이끌고 있어 전쟁 중 유방과 같이 있던 시간은 적었지만, 장량은 계속해서 유방의 옆에 머물며 그의 크고 작은 모든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 장량은 자잘한 몇 번의 전투보다도 대국적인 흐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장량으로 인해 유방은 진나라 백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팽성 전투에서 최악의 대패를 당한 바로 그 시점에서, 장량의 건의로 경포와 팽월 등과 연대를 더욱 강화하여 오히려 우군을 더 끌어들여 항우를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역이기(酈食其)의 봉건제를 거절하도록 한 것은 이후 한나라의 정치 판도에 매우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며, 개국 초기에 있을 공신들의 반란과 반발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던 것도 장량의 덕택이었다. 제국의 수도를 관중 지방에 있게 한 것도 장량의 공이었다.
이렇게 장량은 단순히 전투에서 이기는 계책만을 알고 있던 모신(謀臣)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장량의 진면목, 즉 경세가 혹은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이야기가 있다. 유방이 항우를 앞질러 관중에 입성했을 때다. 그는 약탈을 일절 금하고, 장악하고 있던 관중 땅을 항우에게 내주자고 주장했다. 또 점령군으로서 은혜를 베풀면 인심을 얻게 된다는 정치적 계산도 했다. 장량은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는 큰 그림을 그렸다. 병법에도 공심위상(攻心爲上:상대의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상책)이 최고의 전략이라고 했다.
주목할 것은 장량이 유방을 보좌한 방식이다. 급할 때 장량은 유방이 식사 중이라도 거침없이 들어가 진언했고, 식탁에 있던 젓가락을 들고 이것저것 가리키면서 알기 쉽게 설명했다. 사기(史記)에 남아 있는 사실이다. 장량에게 또 하나 돋보이는 점이 있다. 그는 유방을 둘러싸고 있던 고향 출신인(소하, 조참, 주발 등) 이른바 ‘패(沛)마피아’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고 한나라 건국 후 ‘패(沛)마피아’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공신들이 팽(烹)당할 때 장량만은 온전히 살아남았다.
그는 들 때와 날 때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멈출 줄 안다'는 뜻의 ‘지지’(知止)를 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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