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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조조(曹操)

[삼국지 인물사전 - 조조(曹操)] 


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曹魏 太祖 武皇帝 曹操, 155년 음력 6월 3일 ~ 220년 음력 1월 23일)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자는 맹덕(孟德)이며 훗날 위가 건국된 이후 추증(追贈)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卓越)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諸侯)들을 연달아 격파(擊破)하고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魏)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조조(曹操)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과 시인 두보(杜甫) 는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스스로 능력으로 천하를 평정(平定)한 공은 이전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평가(評價)했다. 이후 조조(曹操)는 위대한 영웅으로 평가되었는데 당(唐)나라와 북송시대(北宋時代) 때까지도 조조는 영웅으로 칭송(稱頌)받다가 960년 남송시대가 접어들면서 역적(逆賊)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당시 남쪽 지방에 있던 남송은 삼국 시대의 촉(蜀)을 연상시키는 정치적 입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지리적 정치적으로 유사(類似)한 촉나라의 손을 들어주고 촉나라를 압박했던 위나라를 폄하(貶下)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관중(羅貫中) 삼국지연의 때문에 더욱더 역적(逆賊)이라 평가받았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중화민국(中華民國)으로 접어들면서 재평가 받으며 영웅이라 다시 칭송받았고 조조의 사당(祠堂)을 새로 짓도록 하고 중국 사람들에게 다시금 조조(曹操)는 영웅으로 재평가 되었으며 현재는 많은 나라에서도 자신의 실력으로 시대를 선도(善導)한 풍운아라는 재평가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조조(曹操)의 생애

출생
사실 조조(曹操)는 처음부터 환관(宦官)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가신인 하후돈(夏侯惇), 하후연(夏侯淵)과 함께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으로 환관인 중상시 조등(曹騰)의 양자인 조숭(曹嵩)의 아들이다.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에 따르면 전한 시대 유방(劉邦)의 심복으로 재상을 지낸 조참(曹參)의 후손인 조등(曹騰)은 환제 때 중상시(中常侍)를 맡았다. 이에 대해 "후한서(後漢書)" '조등전(曹騰傳)'에 조참(曹參)의 후예라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조참 후예설(後裔說)을 위(魏)의 선양(宣揚)을 윤색(潤色)하고 조씨 가문을 격상(格上)시키려는 데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조등(曹騰)이 환관이라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숭(曹嵩)을 양자로 삼았다("삼국지" '무제기'에 인용된 '조만전'의 일설에 따르면 조숭이 본래 하후씨이며 하후돈(夏侯惇)의 숙부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환관(宦官)의 손자라는 열등감(劣等感)이 나중에 조조(曹操)의 인물상이나 생활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황건적의 난
184년 조조(曹操)가 30살 때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난다. 이때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영천(潁川)에서 황건적을 토벌하고 이 공적으로 제남(濟南)의 상(相)으로 승진하고 거기에서 그는 역시 강력(强力)한 법을 세워 뇌물(賂物)과 향락(享樂)에 물든 상급 관리 8할을 파면(罷免)하고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나 미신 부류를 모두 금지(禁止)시킨다. 그 후 동군태수(東郡太守)로 임명되지만 부임하지 않고 돌연 사퇴(辭退)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사냥과 독서(讀書)를 즐기며 은거 활동에 들어갔다.

금성의 한수(韓遂)와 변장(邊章)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수도 방위를 위해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임명된다. 그 무렵 영제가 죽고 대장군 하진(何進)과 원소(袁紹)는 환관 주살을 계획한다. 그런데 황태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동탁(董卓) 등 각지의 제후를 소집하여 황태후에게 압력(壓力)을 행사하려고 했다. 조조(曹操)는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제후들을 부르지 않더라도 환관의 우두머리만 처형(處刑)하면 될 뿐 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면 일이 탄로나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조조(曹操)가 예상한 대로 동탁이 아직 도착하지 않는 사이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주살(誅殺)되고 만다. 또한 환관들도 원소에게 모두 주멸(誅滅)되고 이 와중에 실권은 동탁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권력을 장악한 동탁은 조조(曹操)에게 협조를 구하지만 조조는 거절하고 성을 탈출(脫出)했다.

189년(중평 6년) 12월, 조조(曹操)는 사비를 털어 군사를 모으고 원소(袁紹)를 맹주로 하는 반동탁 연합군(反董卓聯合軍)에 가담하여 분무장군(奮武將軍)을 맡는다. 그런데 동탁군이 워낙 강력했으므로 산조(酸棗)에 집결해 있던 여러 제후들 중 누구도 선뜻 선두에 나서지 못했다. 조조(曹操)는 장막(張邈)과 힘을 합쳐 형양(滎陽)에서 동탁군과 싸웠고 적장 서영의 부대를 물리는 데 성공했다. 산조(酸棗)로 돌아온 조조(曹操)는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제후들에게 동탁을 격파(擊破)할 전략을 제시했지만 이는 연합군의 모든 제후들이 유기적으로 협력(協力)한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했고 단지 유력자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일 뿐이었으며 심지어는 맹주(盟主)인 원소(袁紹)조차 연합군 내부의 견제로 수송로(輸送路)가 차단당해 꼼짝할 수 없었을 정도였던 연합군에게 이런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한편 연합군의 맹주 원소(袁紹)는 손쉬운 방법으로 동탁(董卓)을 견제하고자 했다. 바로 기존 황제를 시해(弑害)하고 동탁에게 옹립(擁立)되었다는 명분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당시 황실의 정통성에 도전(挑戰)하여 명망 높은 유우(劉虞)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려던 것이었는데 원술(袁術) 등이 중심이 되어 이와 대립(對立)했고 이때 조조(曹操)도 원소와 일시적으로 대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계책(計策)은 유우(劉虞) 본인의 거절로 실패하게 되었고 이후 구심점(求心點)을 잃은 연합군은 사실상 해산(解散)되고 만다.

동탁 제거와 서주 공략까지
이때 조조(曹操)가 동탁(董卓)을 친 것이 계산된 행동으로 ‘자신이 패할 것을 뻔히 알고도 불구하고 오직 황제를 구출(救出)하기 위해 홀로 뛰어들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인망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얻었다. 원술(袁術)은 손견(孫堅) 등을 앞세워 화웅(華雄)을 쓰러뜨리는 무훈(武勳)을 세우고 있었다. 물론 순욱(荀彧)이 그를 그토록 예우하던 원소를 따르지 않고 굳이 조조(曹操)를 따른 예의 경우 당시 황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등 노골적인 패권주의(覇權主義)를 보여온 원소와 달리 조조(曹操)가 황실의 권위를 회복시킬 것이란 기대를 가졌으리라 추측(推測)할 수 있다. `이 무렵의 조조의 행보를 지나치게 미화(美化)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보는 부류(部類)가 있었으나 중원재사와 형주(荊州), 서주(徐州), 양주(揚州)에 걸쳐 둔피(遁避)하였던 유생 중의 다수가 조조(曹操)의 근거 있는 야망(野望)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더군다나 `양-패 사이에서 진인이 나타난다`는 참설(讒舌)까지 유행하였다)

이후 원소와 제휴한 조조(曹操)는 191년(초평 2년) 동군에 침공(侵攻)한 흑산적을 연주 전투에서 토벌하고 원소(袁紹)의 대리 교서(통감 등에서는 矯制라고 하여 비난하였다)에 의하여 동군 태수(東郡太守)로 임명된다. 192년 4월, 동탁(董卓)이 여포(呂布)에게 살해된다. 같은 해 청주의 황건적(黃巾賊) 100만 명이 연주에 침공(侵攻)해 왔다. 당시 연주목(兗州牧)이었던 유대(劉岱)는 이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고 만다. 평소 조조(曹操)와 가까웠던 제북상 포신(鮑信)은 조조를 연주목으로 추대했다(구주춘추 등 기타 주석서에서 진궁). 

조조(曹操)는 황건적(黃巾賊)과 싸워 포신(鮑信)이 전사하고 오른손에 화상을 입어 동료 누이(婁異)에 의해 말에 올라타 구조(救助)되는 등 상당히 박전(搏戰)했다. 직후 사기가 땅에 떨어지자 조조(曹操)가 친히 상벌(賞罰)에 대하여 확언(確言)을 주며 적의 퇴로를 예상하여 기병(奇兵)을 풀어 상하로 대파(大破)하였다. 본기의 원문에 의하면 적의 둔영(屯營)까지 다다랐다고 하니 하늘을 찌르는 기세였을 것이다. 이후 조조(曹操)는 이들과 협상해 자기의 세력으로 영입(迎入)하고 그 가운데 정예 병력을 선발해 ‘청주병’으로 불렀다. 황건이었던 백성 백만 구(口)와 병사 30만을 흡수(吸收)해 기반을 얻은 조조(曹操)는 이때부터 반동탁의 영수(領袖)로 기주(冀州)에서 군림했던 원소에 대하여 자신의 치소 연주(兗州)에 할거(割據)하며 중원 구출의 야심을 드러내었다.

같은 시기 원소(袁紹)와 원술(袁術)의 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원소는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와 연합했고 원술은 유주(幽州)의 공손찬(公孫瓚)과 서주(徐州)의 도겸(陶謙)과 손잡아 서로를 견제(牽制)했다. 이때부터 다른 모든 세력과 마찬가지로 원소의 영향 아래 있던 조조(曹操)는 인접해 있던 도겸(陶謙)과 싸우기 시작했던 듯하다. 또 조조(曹操)는 원소(袁紹)와 연대해 각지에서 원술연합군(袁術聯合軍)을 격파하자마자 스스로 용병(用兵)하여 마침내 원술이 본거지를 버리고 양주(楊州)로 도망가게 하였다(5차례 싸워 모두 추격하였다). 이 직후에 도겸은 재차 연주 동쪽 태산군에 침공했고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崇)이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조(曹操)는 193년부터 194년(흥평 원년)에 걸쳐 2차례 도겸(陶謙) 정벌에 나서 서주 땅에서 지나가는 족족 적의 대항 의지를 말살(抹殺)시켜갔다.

"후한서(後漢書)"에는 “주민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개와 닭 등 가축(家畜)도 가차 없이 도살(屠殺)하였다. 이 때문에 사수(泗水)는 흐름을 멈추고 말았다.”

조조(曹操)가 서주(徐州)를 공격하는 사이에 친우였던 장막(張邈)과 연주(兗州)를 지키던 진궁(陳宮)은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여포(呂布)를 연주목으로 내세웠다. 조조(曹操)는 복양(濮陽)에서 궁지에 빠지고 어이없으리만치 전국을 휩쓴 메뚜기의 피해로 갑병까지 타격을 입지만 2년에 걸친 공방 끝에 마침내 연주를 평정(平定)하는 데 성공한다. 실제로 둔전병(屯田兵)을 데리고 다니던 중 흉년(凶年)을 만나 먹을 것을 찾으러 가고 남은 병사는 고작 1천도 셀 수가 없었다고 하니 피해(被害)가 극심하였다. 그러나 이 부대로 여포가 이끄는 진궁(陳宮)의 구원군 1만을 대타격하고 치중을 획득하였다. 손자병법(孫子兵法) 주석에 따르면 논밭 근처 제방에서 적을 도발하여 역격(逆擊)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96년(건안 원년)에는 헌제를 옹립(擁立)하여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수도를 낙양(洛陽)에서 허창(許昌)으로 옮긴다. 그와 함께 여러 개혁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조지와 한호("진서(晉書)" 선제기에서는 사마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해 농경을 전문으로 하는 농민을 널리 모집하여 허도(許昌) 주변에서 농업에 종사시켜 곡물 100만 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전쟁에 없어서는 안 될 식량을 충실히 마련하여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基盤)을 쌓는다.

이때 유비(劉備)가 여포(呂布)에게 하비(下邳)를 빼앗겨 조조(曹操) 밑으로 도망 온다. 참모 정욱(程昱)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남아있을 인물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제거(除去)할 것을 진언하지만 조조(曹操)는 다만 유비에게 먹을 것을 하사(下賜)하였다.

관도대전과 적벽대전
197년 조조(曹操)는 완(宛)에 출진하여 장수(張繡)를 항복시키지만 나중에 그는 조조를 배신(背信)한다. 이 싸움에서 조조가 패하고 맏아들 조앙(曹昻)과 조카 조안민(曹安民), 부하 전위(典韋)가 전사한다. 이때 조조는 맏아들 조앙의 죽음보다도 전위(全禕)의 죽음을 더 슬퍼했기 때문에 아내와 이혼(離婚)하게 된다. 198년 조조(曹操)는 장수(張繡), 유표(劉表)의 연합군을 안중에서 격파(擊破)하고 하비(下邳)에서는 여포(呂布)를 사로잡아 처형한다. 다음해에는 원술(袁術)을 토벌하고 장수(張繡)를 다시 굴복(屈伏)시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원술 토벌(袁術討伐)에 유비(劉備)를 파견한 일이 문제가 된다. 역시 서주자사 차주(車胄)가 유비의 반란군에 습격(襲擊)을 당하고 만다. 별일 없었다는 듯이 조조(曹操)가 친히 출진하여 유비를 격파(擊破)하고 버림받은 처자식을 붙잡음과 동시에 관우(關羽)를 항복시켰다. 원소가 발밑으로 도망쳐온 유비에게 잠자리를 하나 내어주었고 마침내 원소와 천하를 놓고 자웅(雌雄)을 겨루게 된다.

원소와 천하 패권(覇權)을 다투는 전초전은 먼저 백마에서 치러졌다. 여기에서 조조(曹操)는 원소의 부하인 맹장 안량(顔良)과 문추(文醜)를 죽이는 등 활약했지만 점차 전황(戰況)이 불리해지고 아군의 군량이 고갈(枯渴)되어 그 대담한 조조(曹操)도 마음이 약해진다. 그래서 순욱(荀彧)에게 허도로 귀환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상담을 구했는데 순욱은 격려(激勵)의 답장을 보내와 그곳에서 버티게 한다. 마침내 원소(袁紹)의 모사인 옛 친구 허유(許攸)가 투항하고 고시와 오소에 있는 원소의 심장부인 병참사령부(兵站司令部)를 습격하기를 진언한다. 조조(曹操)는 오소 기습전에 앞서 원소의 본진 습격에 대비해 방비(防備)를 단단히 한 다음 원소군으로 위장한 5천의 특공대를 이끌고 잠입시켜 오소의 식량과 군수물자(軍需物資)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림으로서 형세는 역전하여 원소군(袁紹軍)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때 몰수한 전리품(戰利品) 중에서 원소와 내통하고 있었던 조조의 부하의 편지가 무더기로 나왔다. 조조(曹操)는 “원소의 대군을 상대로 해서 나 자신조차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편지를 읽지 않고 모두 소각(燒却)하고 내통한 자들은 용서(容恕)해주고 대신 그 일은 전부 불문(不問)에 부쳤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북진을 계속하여 원씨 잔당 세력을 철저히 격파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따르면 이때 조조(曹操)는 군사를 몰아 장성을 넘어 모돈(冒頓 또는 묵돌)을 죽였다고 한다. 모돈은 기원전 209년부터 기원전 174년까지 흉노의 선우(大族長)를 지냈던 사람으로 조조와는 4백년 가까이 시차가 있는 인물이다. 조조(曹操)의 모돈 살해는 나관중(羅貫中)이 삼국지연의에서 꾸며낸 이야기다.

원소(袁紹) 토벌 이후 중국 대륙의 최강자(最强者)로 자리매김한 조조(曹操)는 208년 승상(丞相)의 지위에 오르고 3공의 지위를 없앴으며 이미 대장군이 되어 있었기에 ‘대장군 대승상'(大將軍 大丞相)으로서 공식적으로 후한 조정의 정권과 군권을 모두 장악(掌握)하였고 형주(荊州)의 유종(劉琮)을 항복시켜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유비와 손권(孫權)의 연합군과 대치하다가 군을 물리게 되었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이 일어나기 전 아들인 조비(曹丕)가 미리 화용도(華容道)를 정비하고 오림(烏林)에 도착하여 조조(曹操)가 수월하게 퇴각하였다고 한다. 주유(周瑜)는 적벽에서 지나치게 거대해진 조조(曹操)의 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고 수월하게 형주(荊州)와 촉을 병합하려 하였지만 조비의 길 정비로 인해 기대한 것의 10분의 1만큼의 성과(成果)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손권(孫權)과 유비 연합군이 때려 부순 조조(曹操)의 병선은 거의 대부분 형주의 병선들이고 불길에 놀라 도망친 병사들은 원래 조조(曹操)의 청주병이 아닌 유표(劉表)의 수군이었을 뿐이다. 이후 중국 대륙은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의 삼국 시대에 접어들어 완전한 통일(統一)의 꿈이 멀어지지만 조조(曹操)의 우세한 세력 기반은 변하지 않았다.

역시 참전군 대부분(참모 장군 포함)이 역질(疫疾)에 감염되었으며 재정비를 위해 군을 물린 후 주유(周瑜)의 화공으로 서로 연결되어있는 선박이 화재를 입었다는 “후한기(後漢紀)”의 서술이 그나마 틀린 곳이 적은 것으로 추정해야할 뿐이다.

삼국정립과 죽음
210년에 조조(曹操)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구현령(求賢令)과 술지령(述志令)을 공포(公布)한다. “구현령”이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능 있는 사람이면 인재로 등용(登用)하는 것이다. “술지령”에서는 수여받은 4현 3만 호 가운데 3현 2만 호를 황제에게 반환(返還)하고 제위 찬탈 등 야망이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제도다. 조조(曹操)는 213년 위공(魏公)으로 책봉(冊封)되었고 조조는 자신이 저축한 어마어마한 재산들을 모두 기부(寄附)한다. 그는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많은 재산(財産)을 기부함으로써 훌륭한 군주(君主)로 거듭났다. 그 영향을 받아 조조(曹操)를 섬기고 있던 고위 관직층 신하들도 자신들이 저축(貯蓄)한 재산을 모두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나누어주었다.

211년 마초(馬超)와 한수(韓遂) 등이 관중(關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曹操)가 토벌에 나섰다. 마초(馬超) 등이 산과 요새(要塞)에만 있을 뿐 견벽거수(見辟擧守)로 일관하자 서황(徐晃)의 진언을 옳게 여기고 진(津)을 건너는 척하며 대기(待期) 중이던 병사로 그들을 습격하여 대파(大破)하였다. 또한 이때 흙을 쌓아올려 성벽(城壁)을 만들고 물을 뿌려 하룻밤 사이에 얼음성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가후(賈詡)의 이간책으로 마초(馬超)와 한수(韓遂) 사이가 벌어지게 하여 적을 물리치고 관중(關中)을 평정했다는 기록은 모두 사실이다. 212년 오나라 정벌(征伐)에 나서고 다음해이다. 이때 다시 군사를 일으킨 마초(馬超)를 토벌, 215년에는 한중(漢中)의 장로(張魯)를 항복시키는 등 매년 지칠 줄 모르고 반란군을 상대로 무승부 없이 정벌(討伐)을 완수하였다.

216년 조조(曹操)가 위나라 대국왕(魏大國王)에 봉해지면서 훗날 위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지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헌제(獻帝)는 사실상 허수아비였으며 이 무렵 후한의 실권자는 조조(曹操)였으나 전 세계의 첫 번째 최고 계급인 대천황(大天皇)이 되지는 않고 주문왕(周文王)을 따른다는 고사를 이상하리만치 확고하게 지키며 위왕(魏王)으로 붕거(추숭 전 훙거. 추숭 후 붕어)하였다.

217년에는 손권(孫權)과 다시 싸우고 219년 한중(漢中)에 숨은 유비(劉備)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잠자코 있던 사이에 동소(董昭)의 헌책과 손권(孫權)의 부탁을 응낙(應諾)하고 형주의 관우부대를 괴멸(壞滅)시킨다. 관우(關羽)가 죽은 이듬해인 220년 1월 23일에 조조(曹操)가 낙양(洛陽)에서 향년 66살의 나이로 서거(逝去)했다.

조조(曹操)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逸話)가 있다. 건시전(建始殿)을 지을 때 탁룡사(濯龍祠)의 신목(神木)을 베자 나무에서 피가 흘러 이를 본 조조(曹操)가 기절하고 말았다든가 배나무를 옮겨 심을 때 뿌리에 상처(傷處)가 나 피가 흐르고 이것을 본 후 병상(病床)에 눕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아들 조비(曹丕)가 위나라 대국왕(大國王)에 오르자 조비는 아버지 조조(曹操)를 무왕(武王)으로 추증하였다가 헌제에게서 선위(禪位)를 받고 위나라 대천황(大天皇)으로 즉위하자 다시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증(追贈)하였다.

한편 문인으로서도 뛰어났던 조조(曹操)는 훗날 아들 조비(曹丕), 조식(曹植)과 함께 당대의 7문학계의 이름 있는 사람들이라 해서 삼조(三曹)라 불렸으며 부자 3인을 세 명으로 묶는 이른바 삼소(三蘇)등은 여기에서 모티프를 따왔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문학적 업적
조조(曹操)는 정치와 군사뿐만 아니라 문학(文學) 방면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손자병법(孫子兵法) 전문에 남기는 주석 작업을 끝마치고 난 그는 소박한 민요였던 악부(樂府)를 공식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定着)시켰고 꾸준히 당시의 최고 시인의 한명으로 꼽히고 있었다. 그의 작품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단가행(短歌行)", "구수수(龜雖壽)" 등이나 주석으로 전해지는 동도가사(東道歌辭) 등 수십이 있다.

조조에 대한 평가

인물평
능력에 따른 인재 채용
조조(曹操)는 군사(軍事), 학문(學問), 무예(武藝), 내정(內政) 모두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 노래 등 풍류에도 매우 뛰어났다. 또한 통솔력(統率力)도 굉장하고 수하를 감동시키는 방법에는 타의 추종(追從)을 불허했다. 또한 인격 면에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당시에는 파격적(破格的)인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選拔)하였는데 그 기준이 바로 ‘능력’이었다. 어떠한 분야를 막론하고 한 가지 분야(分野)에 뛰어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신분이 아무리 천하다 해도 조조(曹操)는 크게 인정해줬다. 또한 아내를 고를 때도 능력을 보고 정하였는데 최하급 신분인 기녀(妓女)였던 변씨도 능력을 인정(認定)받아 아내가 되었다.

하지만 가끔가다 의심이 지나치기도 했다는 것을 결함(缺陷)으로 들 수가 있겠다. 주불의(周不疑)가 위협이 될 것이라면서 또 조충(曹沖)이 죽은 이래로 그를 부릴 자가 없다라는 일반인들이 감당(勘當)하기 힘든 이유를 들어 말하면서 주불의를 자기 사람으로 쓰게 해달라는 조비(曹丕)의 간청도 거부하고 주불의(周不疑)를 제거하였다. 조조군 내의 가장 핵심적(核心的)인 두뇌인 사마의(司馬懿)도 의심한다.

주문왕(周文王)을 본받아 자신이 제위(帝位)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후대 조비(曹丕)에 이르러 자신이 지켜온 주공(主公)과 같은 이미지를 조비가 이해하지 못하고 한실의 제위를 찬탈(簒奪)했다는 오명(汚名)이 계속 쫓아다녔고 명분론(名分論)과 정통론(正統論)이 득세하던 시기에는 자식의 일로 인해 명성(名聲)이 더럽혀지기도 하였다. 나관중(羅貫中)의 연의에 이르러서는 간교(奸巧)한 악인의 상으로 그려지기도 하였고 경극(京劇) 도중 조조역의 배우가 죽는 경우도 있었다.

복권(復權)
현대에 와서는 중국의 모택동(毛澤東)과 곽말약(郭沫若) 등이 조조(曹操)의 단점을 배제하고 영웅으로서의 진취성(進就性)을 평가하면서 조조의 복권에 대한 움직임도 상당히 압도(壓倒)하는 형국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시대를 맞아 삼국지가 수많은 소프트웨어로 판매되는 과정에서 조조(曹操) 자신의 문무겸전적(文武兼全的) 인물상은 조비(曹丕)의 일로 인하여 퇴색(退色)되지 않고 오롯이 인식되고 있다. 또 조조의 중원 평정(中原平定)을 중심으로 삼는 교과 과정(課程)은 항상 빠지는 일이 없어 ‘중원 구출’의 분위기(雰圍氣)는 여전하다.

영화 적벽대전
영화 적벽대전(赤壁大戰) 2에서 조조(曹操)는 리더십이 뛰어난 지도자로 설명된다. 전염병(傳染病)으로 지친 군인들을 위로하여 전쟁에서의 승리의지를 갖게 한다. 또한 문학에 뛰어나서 조조(曹操)의 시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였다.

당대의 평가
동시대 사람 중 유명한 두 사람은 조조(曹操)를 서로 상반되게 평가했는데 양국(梁國) 사람인 교현(橋玄)은 그를 두고 치세의 무협도(武俠徒)이자 난세의 대영웅으로 좋게 평가했지만 여남(汝南) 사람인 허소(許劭)는 그를 두고 치세의 능신(能臣)이자 난세의 간웅(奸雄)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인 장제(張悌)는 참칭 국가의 신하인 신분으로 “위나라 백성들이 조조(曹操)를 따르는 것은 그 위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조조(曹操)가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해 다소 신뢰성(信賴性)이 떨어진다.

진수의 평가
진수(陳遂)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에서 평하기를,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合理的)으로 일에 대처했으며 구악을 염두(念頭)에 두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대처해 사람을 등용(登用)했다는 의미로 간주되고 춘추시대(春秋時代) 패자의 덕목이라는 견해를 정곡(正鵠) 가운데로 찔러 일치하는 것이다.

후대의 평가
후조(後趙)를 세운 석륵(石勒)은 동탁 암살(董卓暗殺)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반동탁 토벌대의 선봉(先鋒)을 맡았던 위무제(魏武帝)와 대승상 조조(曹操)에게 죽을 것을 두려워하며 임관(任官)하고 대신들과 사사로이 교제하였던 사마의(司馬懿)를 한데 묶어 평가하길 저 중화인(中國人)인 조조(曹操)나 사마중달(司馬仲達) 부자처럼 남의 고아나 과부(寡婦)를 속이며 잔꾀를 부리고 온갖 아첨(阿諂)을 일삼으며 천하를 빼앗는 일은 자신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시인이자 정치가(政治家)였던 두목(杜牧)은 “조공(曹操)은 손무(孫武)의 병법 13편에 주석을 달아 후세에 전했다.”고 하면서 조조(曹操)의 군사적 재능을 칭찬(稱讚)했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조조(曹操)를 간신이라고 하는 것은 봉건정통관념(封建傳統觀念)이 만들어낸 것으로 반동사족(反動士族)들이 봉건정통을 유지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라고 하면서 조조(曹操)의 복권(復權)을 말한 바 있다. 그는 조조의 제도 개혁과 둔전제(屯田制) 등의 정치적 공적과 탁월한 군사재능 그리고 조조(曹操)의 문학 재능을 칭찬하면서 조조를 공식 석상(公式席上)에서만 32번 언급하여 마오쩌둥이 가장 많이 언급한 역사인물이 조조(曹操)라고 한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제위태조문"에서 조조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조조(曹操)는 난세가 만들어낸 영웅으로써 뛰어난 군주(君主)로다. 나 이세민(李世民)은 많은 백성들과 제장들에게 역사상가장 뛰어난 군주라고 말하지만 “이는 말도 안되는 것이로다. 나 태종(太宗)은 다른 군주와 비교한다면 내가 뛰어나지만 무제(曹操)와 비교를 할 수가 없노라“

“위무제(曹操)는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인물로 나라가 혼란(混亂)에 빠졌을 때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나라를 지탱하는 “큰 기둥으로서의 면모(面貌)를 보여주었다. 천하를 평정한 공은 이전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연의의 평가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악인(惡人)의 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나관중은 조조(曹操)를 당대의 민중이 가지고 있던 조조(曹操)에 대한 반감이 들어 있는 전승(傳承)과 민간 설화 등을 이용하고 변방 익주(蜀)의 인사들을 대부분 우국지사(憂國之士)와 충의지사(忠義之士)로 묘사함으로써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조조(曹操)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삼국지연의" 내에서 자아내고 있다. 또한 조조를 악인으로 나타내기 위해 우스꽝스럽고 경망스러운 때로는 인신모독(人身冒瀆)에 가까운 묘사도 쓰고 있다. 하지만 이문열이 평역(評譯)한 "삼국지(민음사)"에 나오는 조조(曹操)는 자신을 위해 죽은 군인들을 위해서 그 가족들에게 밭을 줌으로써 생계에 지장이 없도록 배려하는 훌륭한 지도자로 묘사(描寫)되며 법을 잘 지킨 지도자였다. 조조(曹操)는 농민들에게 해를 주지 않도록 말을 타고 보리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는데 그만 자신의 말이 보리를 밟았다. 법을 어김을 부끄럽게 여긴 조조(曹操)는 자신의 목을 자르려고 하려다가 참모(參謀)들의 조언에 따라서 자신의 목을 머리카락으로 대신하니 군인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지를 아니하고 또한 군법(軍法)을 두려워하였다.

이는 당대 송(宋나)라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면 알 수 있는 사실로 삼국지연의의 조조(曹操)는 실존인물 조조보다 실존인물 칭기즈칸(成吉思汗)에 더욱 많이 닮아있다. 당시 송나라 사람들은 원나라의 잔인(殘忍)함에 대단한 증오심(憎惡心)을 품고 있었으며 원(元)나라의 시조인 칭기즈칸을 대놓고 욕할 수 없어서 칭기즈칸 대신 자기네 역사에 등장하는 조상 중 한 명인 조조(曹操)를 욕하며 칭기즈칸에 대한 화풀이를 조조(曹操)에게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이러한 민심을 반영한 삼국지연의에서 조조(曹操)는 원나라와 칭기즈칸(成吉思汗)에 대한 분노와 증오(憎惡)를 혼자 짊어져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당연히 악인(惡人)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었다.

조조의 무덤 진위여부 논란
문물국이 허난성 안양현 안펑향 시가오쉐촌에 있는 동한시대(東漢時代)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조조(曹操)의 무덤이 발굴(發掘)되었다. 중국 학계의 따르면 무덤의 크기는 지하 15m에 위치한 이 무덤은 갑자(甲字)형태의 구조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경사진 내부 묘도(墓道)를 따라 내려가면 앞뒤에 규모가 큰 쌍실(雙室)과 4개의 측실(側室)을 갖추고 있었으며 길이 39.5m, 넓이 9.8m에 전체 면적이 740㎡로, 그 규모는 비교적 작았다고 한다. 그동안 수차례 도굴(盜掘)됐음에도 이 무덤에서는 금을 비롯한 각종 보석 200여 점이 출토(出土)됐으며 조조(曹操)가 사용하던 창과 조조(曹操)가 사용하던 돌베개 등의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한 남성과 여성 2명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遺骨)이 발견됐는데 이 남성의 유골은 사망 당시 60세 전후였던 것으로 감정(鑑定)되었으며 여성 2명은 각각 사망 당시 40대 초반과 20대 중반으로 감정되었다. 이는 조조(曹操)가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점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유골이 조조의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성급한 결론과 “위무왕(威武王)”이라고 새겨진 두 비석은 현장에서 발굴(發掘)된 것이 아니라 공안국이 도굴꾼들을 체포(逮捕)해 압수한 과정에서 가짜가 만들어질 가능성 있는 등 의문을 제기(提起)하였다.

조조의 무덤 공식인정
2010년 1월 29일 중국 국가문물국(中國國家文物局)은 “조조(曹操)의 고분을 발굴하고 학술적인 검증(檢證)을 거쳐 연구 성과를 발표한 절차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고고학계(考古學界)의 규칙에도 부합(附合)한다”라고 말하며 조조(曹操)의 무덤인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認定)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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