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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손권(孫權)

[삼국지 인물사전 - 손권(孫權)] 

오태조 대황제 손권(吳太祖 大皇帝 孫權, 182년 음력 5월 18일 ~ 252년 음력 4월 16일)은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오나라의 초대 황제로 자는 중모(仲謀)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사람이다. 손견(孫堅)의 차남으로 손책(孫策)의 동생이며. 200년에 형 손책이 급사(急死)하자 오후(吳侯)의 자리에 올라 강동(江東)을 다스렸다. 수성(守成)의 명수로 평가되고 있다.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시호는 대황제(大皇帝)이다.

생애
손권(孫權)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 손견(孫堅)은 갓 태어난 그의 풍모(風貌)를 보고 고귀(高貴)한 위치에 오를 상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초평 3년(192년)에 아버지 손견(孫堅)이 전사하고 원술(袁術) 밑에서 몸을 의지하고 있던 손책(孫策)이 강동에서 궐기(蹶起)하자 손권은 형을 따라 각지를 전전하였다. 손권(孫權)은 명랑하고 도량(度量)이 넓고 생각이 깊으면서 동시에 결단력(決斷力)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손책(孫策)은 책략을 세울 때 항상 손권과 상의(相議)하였고 그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여 손책 자신도 그에게 못 미친다고 말했다.

손권(孫權)은 겨우 15살(196년)에 양선현(陽羨縣)의 수장(首長)이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뒤 추천을 받아 봉의교위대행(奉義校尉代行)이라는 직무를 맡게 된다. 하지만 이때의 손권은 상당히 경박하여 공금횡령(公金橫領)을 일삼았는데 이 때문에 일찌기 장소는 손책(孫策)에게 손책을 빼닮은 손견(孫堅)의 3남 손익(孫翊)을 후사로 택하라고 조언(助言)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손책은 이 말을 묵살(默殺)하고 손견의 차남인 손권(孫權)을 자신의 후사로 선택했다. 199년(건안 4년) 손권은 손책(孫策)을 따라 여강태수(廬江太守) 유훈(劉勳)을 쳐서 격파하고 더욱 진군해 사이(沙羨)에서 황조(黃祖)를 격파했다. 그러나 200년에 손책(孫策)은 허공(許貢) 휘하의 자객(刺客)에게 습격당해 26세로 단명(短命)하고 만다. 손책은 후사를 19세의 손권에게 부탁(付託)했다. 손권(孫權)은 형의 죽음을 슬퍼해 울음을 그치지 않았는데 손책의 장사(長史)였던 장소는 그를 격려해 상복(喪服)을 벗게 하고 말에 태워 진영을 시찰(視察)하도록 했다. 훗날 손권은 손견(孫堅)을 무열황제(武烈皇帝)에 추증했지만 손책(孫策)은 장사환왕(長沙桓王)으로 추증했다.

당시 오나라가 지배(支配)하던 지역은 회계(會稽), 오군(吳郡), 단양(丹楊), 예장(豫章), 노릉(盧陵) 등이었지만 그들 군에서도 험준(險峻)한 오지까지는 복종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군신 관계도 제대로 정착(定着)되지 않아 항상 사태를 주시하면서 주군(主君)을 물갈이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주유(주유(周瑜)와 장소(張昭)는 손권(孫權)이 장차 대업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이라고 예견하고 정성을 다해 그를 섬긴다. 그리고 장소(張昭)를 스승으로 예우(禮遇)하고 주유(周瑜), 정보(程普), 여범(呂範) 등을 군사지휘관에 임명하며 노숙(魯肅)과 제갈근(諸葛瑾) 등 우수한 인재를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그들을 각지에 파견해 불복종 지역을 토벌(討伐)할 것을 명했다. 조조(曹操)는 손책(孫策)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손권(孫權)을 공격하려 했지만 오나라의 사자로 허도(許都)에 머물고 있던 장굉(張紘)은 오히려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며 조조를 설득(說得)했다. 그래서 조조(曹操)는 손권을 토로장군에 임명하고 회계태수(會稽太守)를 겸임시켰다.

202년 원소(袁紹)를 격파한 조조(曹操)는 손권(孫權)에게 편지를 보내 자식을 인질(人質)로 보내도록 요구했다. 손권은 주유(周瑜)와 어머니 오씨 부인과 상의(相議)한 뒤 결국 인질을 보내지 않았다. 같은 해 오씨 부인이 서거(逝去)했다.

203년 손권(孫權)은 황조(黃祖)를 토벌하러 나서 그 수군을 격파(擊破)했다. 하지만 거성(莒城)을 함락(陷落)시키지 못한 사이에 산악지대(山岳地帶)의 불복종민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회군(回軍)해 진압하였다. 207년에도 황조(黃祖)를 공격해 많은 사람들을 포로(捕虜)로 끌고 왔다. 208년 봄에 손권(孫權)은 또다시 황조를 공격했다. 황조는 수군으로 손권의 침공(侵攻)을 저지하려 했지만 여몽(呂蒙)에게 격파되었다. 그리고 능통(凌統), 동습(董襲) 등이 정예병을 이끌고 공격했기 때문에 거성(莒城)은 마침내 함락되었고 황조는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손권(孫權)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손권은 이 과정에서 황조의 부장이었던 감녕(甘寧)도 얻게 된다.

같은 해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가 죽자 조조(曹操)는 형주를 침공하고 유표의 후계자 유종(劉琮)은 조조에게 항복한다. 남쪽으로 도망 온 유비(劉備)는 제갈량(諸葛亮)을 손권(孫權)에게 사자로 보냈다. 손권은 개전(開戰)과 항복(降伏)을 놓고 결단하지 못했는데 제갈량에게 설득당해 유비와 동맹을 체결(締結)하여 조조와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 무렵 조조로부터 “이번에 수군 80만의 군세를 정비(整備)하여 그대와 오나라 지역에서 사냥을 하고 싶다”라는 편지가 당도했다. 군신들은 항복하지 않으면 토벌(討伐)하겠다는 조조의 최후통첩(最後通牒)으로 알고 두려워했다. 장소(張昭) 등이 항복을 주장하며 신료(臣僚)들 간에 논의가 길어지자 손권(孫權)도 차츰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항전파 주유의 한마디로 개전을 결의, 손권은 책상 모서리를 칼로 자르며 “앞으로 항복을 입에 담는 자는 이 책상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며 단호한 의지를 표명(表明)했다. 전황(戰況)은 조조 진영에서 역병(疫病)이 돌고 황개(黃蓋)의 거짓 항복이 조조(曹操)에게 통해서 싸움이 우세하게 전개(展開)되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벽(赤壁)에서 조조군을 완전히 격파하였다.

209년 주유(周瑜)는 1년간의 공방 끝에 조인(曹仁)을 남군에서 퇴각시켜 그 지역을 평정(平定)했다. 손권(孫權)은 주유를 남군태수(南郡太守)로 임명하고 좌장군 유비(劉備)가 형주목(荊州牧)을 맡아 공안에 근거지를 구축(構築)했다. 그러나 손권은 점차 유비의 세력이 확대(擴大)되어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여동생을 유비(劉備)와 혼인시켜 우호 관계(友好關係)를 깊게 하였다. 211년에는 자신의 본거지를 말릉(秣陵)으로 옮기고 다음해 건업(建業)으로 개명했다.

213년 조조(曹操)가 유수(濰水)를 침공하자 손권(孫權)은 이를 저지하며 1개월 넘게 서로 대치(對峙)하였다. 당시 손권은 몸소 배에 올라타 조조(曹操)의 진영을 시찰하러 나섰다고 한다. 손권의 시찰단(視察團)은 무기나 대오 등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없이 완벽(完璧)히 정돈된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조조(曹操)는 “자식을 낳는다면 손권과 같은 자를 원한다”라고 칭찬하며 군사를 퇴각(退却)시켰다고 한다.

214년 유비(劉備)가 익주(益州)를 평정하자 손권(孫權)은 형주(荊州) 반환을 요구했다. 이에 유비는 양주(揚州)를 손에 넣으면 돌려주겠노라 답한다. 이에 화가 난 손권(孫權)은 여몽(呂蒙)을 파견해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 세 군을 무력으로 탈취해 형주를 지키는 관우와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조조(曹操)가 한중(漢中)을 침공해 왔으므로 유비는 익주(益州)를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손권(孫權)과 화해하였다. 이리하여 형주(荊州)를 동서로 분할(分轄)해 동쪽을 손권이 서쪽을 유비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 후 손권(孫權)은 합비(合肥)를 10만 군세로 포위했는데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다가 장료(張遼)에게 기습당했다. 손권의 군사는 뿔뿔이 흩어지지만 능통(凌統) 의 분전(奮戰)으로 겨우 궁지에서 벗어났다.

217년 손권(孫權)은 조조(曹操)에게 항복하였다. 이는 형주(荊州)를 둘러싼 유비(劉備)와의 불화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219년 관우(關羽)는 조인(曹仁)이 지키는 양양(襄陽)을 포위했다. 구원에 나선 우금(于禁)마저 패하고 투항하여 조조가 곤경(困境)에 처하게 되자 이때 손권이 충성의 증거로 관우를 치겠다고 조조(曹操)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리하여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쳐 형주(荊州)를 평정하고 그를 사로잡아 처형(處刑)했다.

220년 조조(曹操)가 죽자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헌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文帝)로 즉위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촉한(蜀漢)의 유비도 제위에 올랐다. 손권(孫權)은 계속하여 위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춰 문제로부터 오왕으로 봉해진다. 같은 해 7월에 유비(劉備)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侵攻)하자 손권은 육손(陸遜)을 총지휘관에 임명해 방어케 하였다. 그리고 이 틈에 위나라로부터 침략(侵略) 받지 않도록 자주 사자를 파견했다. 이때 문제가 상아(象牙), 진주(珍珠), 공작(孔雀) 등 귀한 진상품(進上品)만을 헌상할 것을 요구하자 가신들이 일제히 분개(憤慨)하며 거절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손권(孫權)은 “백성들의 목숨이 나 한 사람의 결단(決斷)에 달려 있다”라며 이를 물리치고 바라는 물품을 모두 보내줬다고 한다. 222년(황초 3년) 육손이 화공으로 유비군을 격퇴(擊退)시켰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위나라와의 관계도 악화(惡化)되었다. 문제가 손권(孫權)의 자식을 조정 관직에 취임(就任)시켜주겠다는 명분으로 인질을 요구했고 손권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魏)나라는 오(吳)나라를 침공하고 오나라는 촉한(蜀漢)에 사자를 파견해 다시 우호관계를 수복(收復)하였다. 229년(황룡 원년) 손권(孫權)은 여러 신하들의 권고로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때 손견(孫堅)을 무열황제(武烈皇帝)로 추존(追尊)하면서 견(堅)과 같았던 견(甄)의 발음을 바꿔버린다.

230년 손권(孫權)은 잦은 전쟁으로 인하여 오나라가 주민 부족(部族)에 시달리게 되자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에게 정병 1만 명을 내주고 타이완 등지를 돌며 주민들을 징발(徵發)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위온과 제갈직은 가면서 풍랑을 만나 손권(孫權)이 내려준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그렇게 해서 타이완(臺灣)에 도착했는데 거기에 사는 말레이 폴리네시아계의 원주민(高山族) 1천명을 징발해서 건업(建業)으로 되돌아갔다. 이에 손권(孫權)은 대노하여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을 교수(絞首)했다.

233년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淵)이 사자를 파견(派遣)해 손권(孫權)에게 번국(蕃國)의 예를 갖추었다. 손권은 답례(答禮)로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금은보화(金銀寶貨)를 공손연에게 보내도록 하고 배를 타고 요동으로 향했다. 장소(張昭)가 아직 공손연(公孫淵)이 신뢰할 만한 인물인지 알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손권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사자(使者)를 파견했다. 과연 공손연은 손권의 사자를 죽여 그 목을 위(魏)나라로 보내고 오(吳)나라의 군대와 재물을 탈취(奪取)했다. 손권은 장소의 집을 찾아가 나올 것을 권하나 손권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며 함부로 대한 것에 마음이 상한 장소(張昭)는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난 손권(孫權)은 대문 밖에서 흙담을 쌓고 기가 찬 장소(張昭)도 안쪽에서 맞장구로 흙담을 쌓았다. 손권(孫權)은 장소가 안 나오자 아예 그의 집에 불을 질렀고 그래도 그가 나오지 않자 황급히 불을 끄고 장소를 수레에 태워 귀빈(貴賓)으로 모셔왔다.

그리고 241년에 황태자 손등(孫登)이 죽자 후계 선정을 둘러싸고 내분(內紛)이 일어났다. 손권(孫權)은 처음에는 손화(孫和)를 다음 황태자로 삼았지만 손패(孫覇)도 아껴 그를 노왕에 봉하고 황태자와 동등하게 대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손화파(孫覇派)와 손패파(孫覇派)로 분열되었다. 고옹(顧雍)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된 육손(陸遜)은 “적자와 서자의 대우에는 차별을 두어야 한다”라고 자주 상소했다. 그래서 손패파에게 죄가 날조되어 유형에 처해지고 만다. 손권이 문책 사자를 보내 추궁(追窮)했으므로 육손(陸遜)은 분을 이기지 못해 죽게 된다. 그래서 후계 싸움은 더욱 격화(激化)되어갔다.

250년 손권(孫權)은 양쪽 모두 벌하는 형식으로 손화(孫和)를 황태자에서 폐하고 손패(孫覇)에게는 자결을 명한 뒤 그 일당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리고 막내 손량(孫亮)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손화 폐위(廢位)를 간언한 신하 수십 명을 처형(處刑)하거나 유배(流配) 보냈다. 손권은 252년 4월에 제갈각(諸葛恪)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7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평가
젊었을 적의 손권(孫權)은 손책(孫策) 이상의 인재관리능력(人才管理能力)으로 오나라에서 인정을 받을 만큼 종합적으로 훌륭한 군주(君主)라고 할 수 있다. 동맹인 유비(劉備)가 형주를 반환(返還)하기로 한 약속을 계속 어기고 관우를 주둔시켜서 끝내 형주(荊州)를 먹기로 마음먹은 천하야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비를 공략(攻略)하기로 결정한다. 결국 관우(關羽)가 형주를 비운 사이에 여몽(呂蒙), 육손(陸遜) 등에게 지시하여 형주(荊州)를 되찾는데 성공하였고 근거지를 잃은 관우(關羽)를 생포하였다. 손권은 자신과 오나라를 우롱(愚弄)하며 머리끝까지 화가 나게 한 유비(劉備)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관우를 참수(斬首)했으며 이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유비가 무리하게 이릉대전(夷陵大戰)을 일으켰으나 육손(陸遜)의 기지로 유비를 무찔렀다. 또한 한종(韓綜)이 한당(韓當) 사후 방탕하게 굴어도 용서해주는 인자한 면모(面貌)를 보여줬다. 그러나 말년은 서툴러서 후사 문제(後事問題)에 있어서 육손과 대립(對立)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육손(陸遜)을 홧병으로 죽게 만들었다.

오(吳)나라의 정식 건국에 정비(整備)를 일단락 짓고 장기적으로는 남조(南朝)의 원형(原形)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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