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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양산박 두령 지맹성(地猛星) 신화장군(神火將軍) 위정국(魏定國)

[圖片信息  지맹성(地猛星) 신화장군(神火將軍) 위정국(魏定國)] 


중국의 4대명저 중 하나인 “수호전(水滸傳)”은 ‘송휘종(宋徽宗)’ 통치 시기의 기세가 대단했던 양산박 농민의거(農民義擧)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상 진실한 송강(宋江)과 양산박의거는 소설책에 나오는 것과 같았을까? 

실제의 역사자료를 뒤져보면 송(宋)나라의 300여 년간 크고 작은 농민반란(農民反亂)은 수백 번 있었다. 이는 모든 역대왕조가 모두 그러했다. 다만 송나라의 농민의거는 전국적(全國的)인 규모로 성장하지는 못했고 그저 일개 지방에 그쳤고 참여한 인원수도 한계(限界)가 있었으며 지속된 기간도 짧은 편이었다. 송나라에서 일어난 수백 번의 농민반란 중에서 송강(宋江)이 이끄는 양산박농민의거(梁山泊農民義擧)는 규모로 보거나 영향력으로 보거나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작은 반란이 이처럼 유명하게 되었는가? 첫째는 남송 때 편찬한 “선화유사(宣和遺事)”에서 이 농민의거를 소설화(小說化)하고 이야기로 만들었으며, 둘째는 명나라 때 시내암(施耐庵)이 “수호전(水滸傳)”을 썼으며 이때 양산박 영웅호한(英雄好漢)을 주제로 하게 됨에 따라 양산박과 송강의 이야기가 민간에 퍼지게 되었고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게 되었으며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소설은 비록 역사와 약간의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송강의거는 북송말기인 선화연간(宣和年間)에 일어났고 농민반란을 촉발시킨 도화선(導火線)은 북송이 설치한 "서성괄전소(西城括田所)"였다.  

송휘종(宋徽宗)은 재정곤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화원년(政和元年; 1111년)에 이 기구를 설치하였는데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긁어모으는데 전념(專念)하는 기구였다. 반란은 양산박을 근거지로 하게 된다. 양산박은 황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송강 등은 하북극도(河北劇盜)라고 불리웠다. 양산박은 운주(鄆州, 지금의 산동성 동평) 서남쪽에 양산(梁山; 지금의 양산현 남쪽)을 둘러싼 주위의 큰 호수였다. 이 큰 호수는 북송 때 황하가 두 번이나 둑이 무너지면서 형성되었다. 그때 황하(黃河)의 둑이 무너지면 강물이 범람(氾濫)하여 원래 얕은 땅에 물이 들어왔고 양산주위에 방원 800리의 큰 호수가 형성된 것이다. 그때 양산주위의 생활은 모두 물고기를 잡고, 연밥을 따며, 부들을 거둬서 먹고 사는 가난한 농민들이어서 그들의 생활은 아주 힘들었다. 그런데 양산과 같은 이런 생활조건하에서도 북송정부는 방대한 군사적 지출을 감당(堪當)하고, 요(遼)나라와 금(金)나라에 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곳 백성들의 부담(負擔)을 가중시켰다. 그리하여 원래 지급할 세금부역 외에 한꺼번에 10만여 관을 증가시킨다. 사람들은 조정에 세금(稅金)은 납부한 후에 생활조차 연명(延命)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지방정부는 세수증가를 위하여 양산박의 주위에 관문을 설치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양산의 백성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연밥을 따는데도 인두세(人頭稅)를 납부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누락된 세금에 따라 바로 형벌(刑罰)을 가했다. 게다가 가뭄이나 홍수 등 재해를 입어서 백성들이 수확을 하지 못해도 세금은 감면(減免)되지 않았다. 양산부근의 농민들은 더 이상 관청(官廳)의 잔혹한 착취와 압박(壓迫)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양산박을 기지로 반항(反抗)하게 된 것이다. 

사서(史書)에 기재된 송강의거에 참여한 사람은 36인인데 나중에 “수호전(水滸傳)”에서 108명으로 늘어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낭영(朗瑛)은 “칠수류고(七修類稿)”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나관중(羅貫中)이 책으로 만들고자 하면서 36명을 천강으로 하고 여기에 72명의 지살을 추가했다" 그래서 양산박 백팔호한의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수호전(水滸傳)"은 중국 명대의 장편소설로 시내암(施耐庵)의 작품 혹은 나관중(羅貫中), 시내암의 합작(合作)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홍루몽(紅樓夢), 서유기(西遊記)와 함께 중국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로 꼽힌다. 

북송(北宋) 말인 선화(宣和) 연간에 송강 이하 108명의 호걸들로 회집(會集)된 군도(群盜)가 산둥의 양산박을 근거지로 관(官)과 맞서는 이야기이다. 108명의 전력(前歷)은 하급관리·무관·시골 학자·농어민·상인·도박꾼·도둑 등 복잡하고 다양하며 이들은 각각 정정당당한 또는 불령(不逞)한 여러 가지 혐의 때문에 속속 양산박에 흘러들어왔다. 수호전(水滸傳)의 후반은 양산박을 진압 못한 조정의 귀순책(歸順策)에 속아서 관군으로 둔갑하고 북방의 요를 치고 다시 강남의 방납(方臘)의 난을 평정하다가 전사·이산되고 그중 남은 사람들은 탐관오리(貪官汚吏)에게 독살당하거나 체념하고 잠적(潛跡)하는 비극으로 끝난다. 

송강의 난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며 "송사(宋史)" 등 기타에 약간의 기록이 있으나 전설화되어 남송·원의 2대를 통해서 강담(講談)이나 연극의 재료가 되었다. 그 단계를 볼 수 있는 사료나 작품이 얼마간 전해지는데 그중에서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 전후 2집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강석(講釋) 대본식의 전기적(前期的)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북송 멸망 전후의 애사(哀史)를 엮은 속에 '송강 36인'의 모반(謀反)의 전말이 이미 한 편의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형태로 삽입(揷入)되어 있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명나라 초에(1400년 전후), 시내암(施耐庵)의 손으로 독본소설(讀本小說)로 꾸며져서 처음에는 사본으로 유포(流布)되었다고 추정되는데 다시 정리되어 가정 연간(1522-1566)에 '충의수호전(忠義水滸傳)' 100회의 간행(刊行)이 나왔다. 

수호전(水滸傳)은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만력(萬曆)에 걸쳐 있는 장편소설의 황금시대로서 어느 것이나 송(宋)·원(元) 이래의 민중연예의 정화(精華)를 전제로 하는 만큼 풍부한 오락성과 동시에 정통문학인 시문(詩文)에 담지 못했던 왕성한 상상이나 적나라한 인간 관찰(觀察)이 있다. 작자는 대부분 무명의 하급 문인으로서 전대의 연예장(演藝場) 고용 작가(雇傭作家)의 의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수호'는 그러하여 어조의 강석(講釋) 기분은 아주 농후하고 쾌조(快調)하다. 

수호전(水滸傳)이 후세에 끼친 영향은 무수한 무협 소설의 원조(元祖)가 되었을 뿐 아니라 소설 그 자체의 규범(規範)이 된 느낌이 있고 나아가서 소설의 울타리를 넘어 "삼국지(三國志)"와 함께 서민의 역사 지식과 인간학의 보고이기도 했다. 역대의 도둑·모반인은 다투어 양산박 건아(建兒)와 같은 별명을 자칭(自稱)했고 관은 관대로 '도둑을 가르치는' 책이라 하여 연이어 압박(壓迫)을 가했다. 따라서 혁명 후의 성망(聲望)은 반대로 극히 높은데 주제인 반관(反官) 정신은 원래 회도(誨盜)라든지 혁명으로만 부를 수 없는 통쾌한 불령감(不逞感)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100회본 후에 풍부한 운문(韻文)을 삭제하고 후반의 줄거리를 늘린 120회본이 나왔으나 문체를 더욱 철저히 산문화(散文化)시키고 전반의 양산박 세력이 모이는 데까지에서 끊어 버린 김성탄(金聖歎)의 70회본이 여러 책을 압도했다. 

여기서 지맹성(地猛星) 신화장군(神火將軍) 위정국(魏定國)은 소설 수호전에서 지살성(地煞星)72인 중 지맹성(地猛星)에 상응하는 인물로 불을 잘 다루어 화공(火攻)에 능하였기 때문에 신화장군(神火將軍)이라 불렸다. 상응하는 정기는 지맹성(地猛星)이며 별호는 신화장군(神火將軍)으로 화계(火計)를 잘 써 붙은 별호다. 

반대 속성인 성수장군(聖水將軍) 단정규(單廷珪)와 같이 양산박을 토벌(討伐)하기 위해 출진한다. 당연히 패배(敗北)하고 먼저 잡힌 단정규의 설득으로 인해 양산박의 도적(盜賊)이 된다. 

수계를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단정규(單廷珪)와는 달리 이쪽은 적이었을 때 한 번 정도 양산박군을 특기(特技)인 화계로 태운 적은 있다. 그러나 이 둘을 죽이려고 몰래 양산박에서 빠져나온 이규(李逵)가 포욱(鮑旭), 초정(焦挺), 선찬(宣贊), 학사문(郝思文)과 같이 성을 점령해 위정국(魏定國)을 포위했다. 결국 단정규(單廷珪)의 설득으로 투항한다. 

양산박에 합류한 이후에는 일절 화기(火器)와 관련해서 언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아마 양산박에 자기보다 불을 잘 지르는 사람이 여럿 있어서 그렇지 않나 싶다. 공손승(公孫勝)이나 능진(凌振) 같은 그래도 전호(田虎) 토벌전에서 교도청(喬道淸)을 상대로 불타는 수레를 밀어붙인 적이 있긴 했다. 바로 교도청의 물 도술에 발려서 그렇다. 방납(方臘)의 난 때 왕인(王寅)의 함정에 빠져 단정규(單廷珪)와 함께 화살에 맞아 사망한다. 

수호후전에서 송고종(宋高宗)이 이준(李俊)을 섬라국왕(暹羅國王)으로 봉하고 호걸들에게 관직(官職)을 내리고 사망한 양산박 호걸들에게 관직을 추증(追贈)할 때 앞의 5명인 선찬(宣贊), 학사문(郝思文), 한도(韓滔), 팽기(彭玘), 단정규(單廷珪)를 제치고 지살성(地煞星)을 대표해 이름이 올라온다. 

능주(綾州) 군관으로 관승(關勝)의 양산박 토벌 실패하자 양산박(梁山泊)을 토벌하러 와서 양산박에게 맹공(猛攻)을 퍼 부운 장수이다. 단정규(單廷珪)와 함께 다니며 그와는 대조적인 붉은 옷을 입은 500명의 부대를 이끈다. 그는 불을 쓰는 계략에 능해 신화장군(神火將軍)으로 불린다. 단정규의 설득으로 항복한다. 지살성(地煞星)중 상당히 인기가 높은 인물이기도 하다. 뒷날 양산박의 방납토벌(方臘討伐)에서 전사하였다. 상당한 맹장으로 지맹성(地猛星)을 상징한다. 

위정국(魏定國)은 소설 수호전에서 지살성(地煞星)72인 중 지맹성(地猛星)에 상응하는 인물로 불을 잘 다루어 화공에 능하였기 때문에 신화장군(神火將軍)이라 불렸다. 

그는 원래 성수장군 단정규(單廷珪)와 함께 능주(綾州)의 군관직을 맡고 있었다. 대도 관승(關勝)이 양산박 공격을 실패하고 오히려 양산박의 두령이 되자, 칙서(勅書)를 받고 단정규와 함께 양산박 공격(攻擊)을 할 채비를 한다. 

이때 오히려 양산박(梁山泊)에서 관승이 선찬(宣贊), 학사문(郝思文)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단정규(單廷珪)와 위정국(魏定國)이 유인계(誘引計)를 이용하여 단정규가 학사문을 사로잡고 위정국이 선찬(宣贊)을 사로잡는다. 

이에 혼자 남은 관승(關勝)이 어쩔 줄을 몰라 잠시 퇴각(退却)했다가 다시 싸움을 걸자 단정규(單廷珪)가 응하여 싸우던 중 오히려 관승의 꾀에 단정규가 낙마하여 사로잡혀버렸다. 

관승(關勝)은 위정국(魏定國)에게 단정규(單廷珪)를 보내 그를 항복시키려 했으나 위정국이 "관승이 직접 항복을 청해야 항복(降伏)을 할 것이다."라고 하여 다음에 관승이 직접 위정국을 찾아가 항복을 권하니 그제서야 항복의 예를 올리고 양산박(梁山泊)의 두령이 되었다. 

양산박의 두령(頭領)이 모두 모인 후에는 16명의 마군 소표장(小彪將) 겸 척후두령(斥候頭領) 중 한 명으로 활약하였으며 송강(宋江) 취임식(就任式) 때 발견된 비문에 의해 지살성(地煞星) 72인 중 지맹성(地猛星)이 되었다. 

방납(方臘)의 난에 흡주성(歙州城)을 치던 도중 처음으로 공을 세우려고 성안으로 달려가다가 적장 왕인(王寅)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창과 쇠뇌, 활을 맞고 전사(戰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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