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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주유(周瑜)

[삼국지 인물사전 - 주유(周瑜)] 


주유(周瑜, 175년 ~ 210년)는 중국 후한 말(後漢末)의 무장(武將)이며 양주(楊州) 여강군(廬江郡) 서현(舒縣) 사람으로 자는 공근(公瑾)이다.

종조부(從祖父) 주경(周景), 주경의 아들 주충(周忠)은 모두 한의 태위(太尉)를 지냈고 부친 주이(周異) 낙양현령(洛陽 縣令)을 지냈다.

주유(周瑜)는 건장하며 빼어난 자태(姿態)가 있었다. 처음 손견(孫堅)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董託)을 토벌하매 집을 서(舒)으로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孫策)과 주유는 동년배로 둘의 우의(友誼)는 깊어서 주유가 길가 남쪽의 큰 집을 옮겨다 손책(孫策)에게 주고, 당위에 올라가 손책의 모친에게 절 하였다. 서로 있고 없는 바를 같이 융통(融通)하였다.

생애

청년기
초평 원년(190년), 손견(孫堅)이 동탁(董卓)을 치고자 거병(擧兵)했을 때 집을 서로 옮기면서 동년배인 손책(孫策)과 주유(周瑜)는 친교를 맺어 ‘단금’(斷金), 즉 금속을 끊을 정도로 굳은 정으로 연결(連結)되고 있었다. 손견이 죽고 난 뒤 원술(袁術)은 주유의 종부 주상을 단양태수(丹陽太守)로 임명했고 주유(周瑜)도 이를 따라갔는데 원술(袁術) 휘하에 있던 손책이 강동(江東)을 치러 나아가면서 편지를 보내 주유를 불렀고 주유는 병사를 이끌고 손책을 맞이했다. 이후 손책을 따라 후한의 양주자사 유요(劉繇)의 대 원술 항전의 최전선인 횡강(橫江)과 당리구(當利口)에 주둔하고 있던 우미(于糜), 번능(樊能), 장영(張英)을 무찔렀고 장강을 건너 말릉(秣陵)을 지키고 있던 착융(笮融)과 설례(薛禮)도 깨부쉈으며 호숙(湖孰)과 강승(江乘)으로 넘어가 유요(劉繇)의 치소 곡아(曲阿)로 들어가자 유요는 달아났다. 

손책(孫策)은 자신은 회계(會稽)로 나아가면서 주유(周瑜)에게는 단양군(丹陽郡)을 지키게 했다. 이후 원술(袁術)은 단양태수를 원윤(袁胤)으로 교체하고 주상(周尙)과 주유를 수춘(壽春)으로 불러들였으며 주유를 장군으로 쓰려 했으나 주유는 원술을 낮게 보고 나중에 동쪽으로 가고자 거소장(居巢長; 여강군 거소국의 현장)을 자청했다. 거소장(居巢長) 시절에 노숙(魯肅)에게 군자와 식량을 청했고 노숙이 가진 곡식의 절반인 3천곡을 흔쾌히 내어준 것을 계기로 노숙과 친교(親交)를 맺었다. 건안 3년(198년)에 오로 달아났다. 손책은 주유를 환영하고 건위중랑장(建威中郎将)으로 임명했다. 주유는 여강군(廬江郡)에서 민심을 얻고 있었으므로 우저(牛渚)를 지키면서 나중에는 춘곡장(春穀長)도 겸임했다.

손책(孫策)은 형주(荊州)를 노리고 주유(周瑜)를 중호군(中護軍) 겸 강하태수(江夏太守)로 삼았다. 주유는 손책을 따라 양주(楊州) 북부의 환현(环縣)을 공격했다. 이때 교공(喬公)의 두 명의 딸(二喬)의 언니 대교(大喬)를 손책의 여동생 소교(小喬)를 주유가 아내로 삼았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이교는 교현(橋玄)의 딸로 “강동의 이교”라고 알려져 있어 언니는 대교, 여동생은 소교로 불려 절세(絶世)의 미녀로 불리고 있었다. 건안 4년(199년), 손책을 따라 원술 사후 독립 세력을 유지하던 여강태수(廬江太守) 유훈(劉勳)을 무찔러 여강에서 쫓아냈고 유훈(劉勳)을 돕는 강하태수(江夏太守) 황조(黃祖)도 격파했다. 여강태수(廬江太守) 유훈이 손책의 꾐에 빠져 상료(上繚)로 군을 낸 사이 손책은 손분(孫賁), 손보(孫輔) 형제에게 팽택(彭澤)에서 유훈을 기다리게 하고 자신은 주유(周瑜)와 함께 유훈의 본성인 환성(皖城)을 쳐 이겼다. 돌아오면서 예장(豫章)과 여릉(廬陵)을 평정했고 파구(巴丘)에 주둔했다.

건안 5년(200년), 손책(孫策)이 급사해서 남동생인 손권(孫權)이 그 뒤를 이었다. 주유(周瑜)는 중호군(中護軍)으로써 장사 장소(張昭)와 함께 온갖 일을 관장(管掌)했다. 이 무렵에는 손권과 그에게 의탁한 사람들 사이에 군신 관계가 확립(確立)되지 않았는데 장소(張昭)와 주유 등이 손권을 대업을 이룰 만 하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손권에게 심복(心腹)하게 되었다. 건안 7년(202년), 조조(曹操)가 전년에 원소(袁紹)를 무찌른 위세를 앞세워 손권에게 임자(지방관의 아들을 중앙직에 두어 일종의 볼모로 삼는 것, 혹은 그 아들)를 보내도록 꾸짖었다. 장소나 진송(秦松) 등은 우물쭈물하여 결단하지 못했는데 손권의 뜻은 볼모를 보내지 않는 것이었고 주유가 나서서 반대 의견을 밝히자 손권의 모친도 찬성하여 결국 볼모를 보내지 않았다.

건안 11년(206년), 마둔(麻屯)과 보둔(保屯)을 쳐 그 우두머리를 효수(梟首)하고 포로를 잡아왔으며 황조(黃祖)가 등룡(鄧龍)을 보내 시상현(柴桑縣)을 공격하자 이를 쳐 등룡을 사로잡아 오로 압송(押送)했다. 건안 13년(208년) 봄에 손권(孫權)이 황조를 칠 때 전부대독(前部大督)이 되었다.

적벽 대전
이 부분의 본문은 적벽 대전(赤壁大戰)이다. 이 해 9월, 하북(河北)을 통일한 조조(曹操)가 군대를 인솔해서 남하하고 형주자사(荊州刺史) 유종(劉琮)을 항복시켜 그 병사를 흡수(吸收)하면서 수병과 보병 아울러서 80만이라고도 하는 대군이 되었다. 이 사태 당시의 손권(孫權) 진영에서는 조조가 후한의 승상(丞相)으로써 대의명분(大義名分)을 갖추고 있고 장강(長江)의 지리적 이점도 조조가 형주(荊州)를 얻고 유표(劉表)의 수군을 얻는 바람에 없어졌으므로 항복(降伏)하자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유는 노숙과 함께 의견을 같이 해서 싸움을 주장했다. 주유(周瑜)는 조조를 후한의 적으로 규정하여 조조의 대의명분을 부정했고 또 조조군에 있는 많은 불리한 점과 대항(對抗)하는 자군의 이로운 점 등을 설명해서 이에 뜻을 얻은 손권은 조조에게 대항하는 일을 결단(決斷)했다.

손권(孫權)은 3만 군사를 주유(周瑜)와 정보(程普) 등에게 주었고 이때 형주로부터 피해 온 유비(劉備)와 협력해 조조를 적벽(赤壁)의 땅에서 대치했다. 조조군은 벌써 군대에 전염병(傳染病) 등을 안고 있어서 단 한 번의 교전에서 조조군은 패배(敗北)하고 장강 북안에 주둔했다. 주유는 남안에 포진하고 황개(黃蓋)의 화공책을 채용(採用)하고 사항계(詐降計)라는 이중의 계책을 고안해내어 황개(黃蓋)로 하여금 조조군에 거짓 투항(投降)하게 만들어 조조군 함대 내에서 화공을 실행하도록 계획했다. 이후 투항을 위장해 접근에 성공한 황개가 조조군의 선단(船團)에 불을 질렀다. 불은 금세 다른 배에 번져서 거의 모든 배가 타들었다. 피해(被害)가 아주 컸기 때문에 조조군은 마침내 패배했고 조조(曹操)는 도망쳤다. 유비(劉備)는 주유(周瑜) 등과 함께 조조를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曹仁)에게 강릉성(江陵城)의 수비를 악진(樂進)에게는 양양(襄阳)의 수비를 맡겼고 자신은 북쪽으로 도망쳐 갔다.

강릉 전투
208년 12월에 적벽(赤壁)에서 조조(曹操)를 격파한 주유(周瑜)는 유비(劉備)와 함께 남군(南郡)까지 조조를 추격, 이후 강릉(江陵)에서 조인과 대치한다. 감녕(甘寧)에게 명하여 이릉(夷陵)을 점령하게 하지만 감녕이 조인(曹仁)에게 패하여 포위당하자 위태로움을 주유에게 알렸다.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조인과 전투를 치르지만 화살에 맞아 부상(負傷)당한다. 이에 조인이 주유(周瑜)를 격파하였다. 조인(曹仁)이 군을 이끌고 주유에게  싸움을 걸었다. 주유는 유비에게 원군(援軍)을 요청하였고 유비(劉備)와 함께 조인을 공격하였다. 조인은 군량(軍糧)과 병사도 크게 부상을 당하여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유비가군을 이끌고 남군(南郡)을 포위하였다. 주유는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말을 타고 군을 통솔(統率)했다. 조인은 성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이후 유비군의 관우(關羽)와 함께 후퇴하는 조인군을 격파하고 1년여에 걸친 전투 끝에 강릉(江陵)을 점령한다.

일화
주유(周瑜)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音樂)에 정통하였다. 술에 많이 취했어도 연주한 음악의 음이 틀리면 그것을 알아채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곡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주랑(周郞)이 돌아본다.”라고 말을 했다.

손권(孫權)의 가신 중 정보는 손견(孫堅)이 거병할 때부터 손가(孫家)를 섬겼던 황개(黃蓋)나 한당(韓當)보다 오래된 가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주유(周瑜)보다 연장자이기에 그를 무시했는데 주유는 오히려 정보(程普)에게 성의를 다한 태도를 보였다. 후에 정보는 감복(感服)하고 주유와 친해지고 존중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평하기를 주유의 친화력(親和力)은 “주공근(周公瑾)과의 사귐은 마치 향기(香氣) 나는 맛있는 술과 같아서 스스로 취함을 느끼지 못한다.”라고 했다.

평가
주유(周瑜)는 명문가(名門家)의 자제답게 자신감(自信感)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당초 적벽대전(赤壁大戰) 전에 주유는 손권(孫權)에게 5만의 군사를 청했는데 손권은 3만만을 주었을 뿐이다. 이후 유비(劉備)와 만나고 유비가 “조조(曹操)를 격파하기에는 모자라다.”라고 말을 하자 오히려 주유(周瑜)는 “격파하기 충분한 숫자이니 유공께서는 지켜보기만 하십시오.”라고 말을 한 것은 그의 성격을 대변해주는 일화(逸話)이다.

당대 최고의 군략가 조조(曹操) 또한 주유(周瑜)가 나이가 어리면서도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며 높게 평가(評價)하였다.

손권의 평가
손권(孫權)은 천황(天皇), 황후(皇后), 황태자(皇太子) 등의 칭호(稱號)를 칭했을 때 공경(公卿)들에게 말했다.

“주공근(周公瑾)이 없었다면, 나는 제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주유(周瑜)가 제갈량(諸葛亮)을 시기하여 거듭 죽이려고 하나 정사에서의 주유는 제갈량에 대해 오히려 삼국지연의와는 정 반대로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위인(爲人)으로 간주했다. 다만 유비(劉備)에 대해서는 제왕의 자질이 있고 영웅의 기질(氣質)이 있으므로 매우 경계했다. 이는 나관중(羅貫中)이 친구이자 외가쪽 친척인 주서(周敍)와 같이 과거시험(科擧試驗)을 치렀는데 주서는 당당히 합격한 반면 나관중은 탈락했다. 이 때문에 주서에 대한 시기(猜忌)와 질투(嫉妬)로 주서의 직계조상인 주유(周瑜)에 대해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에서 이런 악평가(惡評價)를 한 것이다. 주유야말로 손견에 필적(匹敵)하는 삼국지연의의 큰 피해자이다.

천하이분지계(天下二分之計)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그러나 당시 남군(南郡)을 지키던 조인(曹仁)을 밀어내고 오나라의 기틀을 만든 점을 볼 때 실행할만한 전략(戰略)이라는 것이 타당하다.

반유비파인 여몽(呂蒙)은 형주를 점령하여 중원진출(中原進出)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형주(荊州) 점령은 촉, 오 둘에게 실이 되는 전략이었다고 평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촉 입장의 생각이다. 오 입장에선 형주라는 요충지(要衝地)를 확보함으로써 실로 많은 득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육손(陸遜)은 오국의 재상으로 이릉대전(夷陵大戰), 삼로전투, 석정전투(石亭戰鬪)에서 수성뿐만 아니라 적의 대군을 대파(大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유(周瑜)에게는 2남 1녀가 있었다. 여식의 배필은 태잔 손등(孫登)이었고 아들 주순(周循)은 공주를 맞이했는데 기도위(騎都尉)에 배수되었고 주유(周瑜)의 풍모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주순의 아우는 주윤(周胤)으로 일찍이 흥업도위(興業都尉)에 배수되어 종실의 여자를 아내로 맞았고, 병사 1천인을 받아 공안(公安)에 주둔했다. 황룡(黃龍) 원년(229)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는데 후에 죄를 지어 여릉군(廬陵郡)으로 옮겨졌다.

주유(周瑜)가 강릉(江陵)으로 돌아와 행장을 꾸려 파구(巴丘)로 가는 도중에 병들어 죽고 말았다. 이때 나이 36이었다. 손권(孫權)이 소복을 입고 거동해 슬퍼하니 좌우를 감동(感動)시켰다. 상여가 오로 돌아오자 또 무호(蕪湖)까지 가서 영접하고, 여러 상사(喪事)의 비용을 일체 다 대어주었다. 후에 영을 내려 말하길 죽은 장군 주유(周瑜)와 정보(鄭寶) 그 집안의 빈객(賓客)에게는 모두 묻지 말라고 했다. 처음 주유는 손책(孫策)에게 벗으로 대접받았고 태비 또한 손권에게 그를 형으로 받들도록 했다. 이 때 손권(孫權)의 직위는 장군이었는데 여러 장수와 빈객들이 예를 행함에 오히려 간소했지만 주유에만은 먼저 공경(恭敬)함을 다하여 신하의 절개(節槪)를 지켰다. 성품과 도량이 넓어 크게 사람들의 따름을 얻었으나 오직 정보(鄭寶)와는 사이가 화목치 못했다.

주유(周瑜)의 형의 아들인 주준(周峻)또한 주유의 원래 공적(功績) 때문에 편장군이 되어 관리와 병사 1천명을 통령(統領)하게 되었다. 주준이 죽자 전종(全琮)이 표를 올려 주준의 아들 주호(周護)를 장수로 삼게 하였다. 손권(孫權)이 말하길 옛날 조조(曹操)를 패주시키고 형주(荊州)를 개척해 소유케 한 것은 무도 공근(公瑾)이니 항상 그를 잊지 않았다. 처음 주준이 죽었다고 들었을 때 곧 주호(周護)를 쓰고자 했으나 듣자하니 주호의 성품과 행실이 위험해 그를 쓰면 마침 화란(禍亂)을 짓게 될 것 같았기에 곧 쓰는 것을 멈추었다. 내가 공근(公瑾)을 생각함에 어찌 그침이 잇겠는가?

결론으로 본다면 주유(周瑜)를 옹졸하고 자존심 강하고 제갈량(諸葛亮)에 놀아나는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그 대부분의 것은 허황된 소설 이야기이고 실제로 주유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강동지방의 명문의 아들로서 철저한 분석과 자연에 대한 이치(理致)를 깨닫고 있었던 그래서 적은 병력으로 조조(曹操)의 대군을 무찌르고 동오(東吳)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던 하지만 안타깝게도 명이 짧아서 35이라는 젊은 나이에 병사(病死)한 동오의 기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주유(周瑜)의 머리에는 미래를 향한 국가를 건설할 선견과 통찰력(洞察力)이 있었다. 물론 손권(孫權)과 함께 구상한 미래였다. 그의 죽음으로 손권은 두 살 터울의 지기이자 신하이며 동료(同僚)인 주유를 잃고 결국은 그 날개가 꺾이고 만다. 즉 자신의 꿈을 이룰 가장 중요한 지기(知己)이자 지지자(支持者)를 잃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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