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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노숙(魯肅)

[삼국지 인물사전 - 노숙(魯肅)] 


노숙(魯肅, 172년 ~ 217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이자 정치가(政治家)로 자는 자경(子敬)이며 양주(楊州) 임회군(臨淮郡) 동성현(東城縣) 사람이다.

생애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모(祖母)와 함께 살았다. 집안이 부유(富裕)하며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고 돈을 풀어 가난한 자를 구휼(救恤)하고 인재들과 교제(交際)를 쌓아 고을의 환심(歡心)을 샀다.

주유(周瑜)가 거소장(居巢長; 거소현의 현장)일 때 노숙(魯肅)에게 군량을 요청하였고 노숙은 각각 3천곡의 곡식이 있는 창고 둘 중 하나를 주유에게 아주 내어 주어 이로써 주유와 친교(親交)를 쌓았다. 원술(袁術)이 불러서 동성장(東城長; 동성현의 현장)으로 삼았으나 원술의 통치에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보고 100여명의 소년들을 이끌고 주유(周瑜)가 있는 거소(居巢)로 갔다. 주유가 거소장(居巢長)을 버리고 동쪽으로 달아나자 함께했으나 마침 조모가 죽어 고향 동성현(東城縣)으로 돌아갔다. 친교가 있던 유엽(劉曄)이 편지를 보내 함께 정보(鄭寶)를 따르기를 권하였다. 마침 노숙은 장사를 마치고 곡아(曲阿)에 있었는데 유엽(劉曄)의 말에 따라 북쪽으로 가려 했다. 주유는 노숙의 어머니를 오군으로 모셔 왔었고 노숙(魯肅)이 정황을 말하자 주유는 자신의 주군 손권(孫權)을 선양하여 후한 왕실을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하여 노숙을 만류(挽留)했고 노숙은 주유의 설득(說得)을 받아들였다. 주유가 노숙을 손권에게 추천(推薦)했다.

208년 조조(曹操)가 하북의 원소(袁紹)와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싸워 이기고 하북을 평정한 기세로 유종(劉琮)의 형주마저 점령하니 조조는 마침내 강동(江東)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에 손권(孫權)의 신하들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하여 오나라의 평화를 지키자고 주장(主張)하였으나 노숙(魯肅)은 홀로 유비(劉備)와 결탁하여 형주(荊州)를 점령, 조조와 항전(抗戰)하자고 주장하였다. 노숙은 당양(當陽)으로 가서 유비와 동맹(同盟)을 맺고 주유(周瑜)의 활약으로 조조는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대패한다. 210년 주유를 이어 강동의 군권을 거느리게 되었다. 217년 여몽(呂蒙)을 후임으로 선정하고 병사하였다. 노숙은 손권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건의하였으며 사람됨이 온화(溫和)하였다.

실제 노숙과 소설 속 노숙의 차이점 
나관중(羅貫中)의 붓 아래 표현된 노숙(魯肅)은 온화하고 우아하며 충성(忠誠)스럽고 솔직하고 덕성스러운 기풍이 다분하다. 그러나 솔직(率直)함이 너무 지나쳐 심지어 좀 멍청할 정도이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이 벌어지기 직전에 제갈량(諸葛亮)과 주유(周瑜)는 여러 차례 불꽃 튀는 지혜 다툼을 벌인다. 중간에 처한 노숙은 방법(方法)을 찾지 못하고 진위와 허실을 분별(分別)하지 못한 채 단지 두 사람 사이의 눈앞에 나타난 모순(矛盾)을 평정하는 중재인(仲裁人) 역할만 한다.

제갈량(諸葛亮)이 풀 배로 10만 개의 화살을 얻으려고 할 때 제갈량(諸葛亮)과 함께 움직이면서도 그의 계책(計策)이 뭔지 몰랐으며 제갈량이 배 안으로 불러들여도 무슨 뜻으로 불렀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제갈량(諸葛亮)이 캄캄한 안개 속에서 병사(兵士)들에게 북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게 하니 놀란 노숙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며 조군의 공격(攻擊)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조조(曹操)가 채화(蔡和)와 채중(蔡中)을 동오(東吳)에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케 하고 주유는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이 두 사람을 역이용하여 거짓 소식을 전하게 할 때도 제갈량(諸葛亮)은 이미 그것을 간파(看破)했으나 노숙(魯肅)은 뒤늦게야 겨우 깨닫는다.

주유(周瑜)가 고육계(苦肉計)로 황개(黃蓋)를 매질할 때도 제갈량(諸葛亮)이 알려주어서야 깨닫는다. 수차에 걸쳐 형주(荊州)를 돌려달라고 요구할 때도 노숙(魯肅)은 제갈량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을 뿐만 아니라 종종 제갈량(諸葛亮)에게 대책 없이 설득만 당한다. 

두 번째 형주(荊州)를 돌려주기를 요구했을 때는 제갈량(諸葛亮)이 서천을 뺏으면 형주를 다시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문서를 써 주자 노숙(魯肅)은 어쩔 도리 없이 그대로 따른다. 

세 번째 형주(荊州)를 요구했을 때도 유비(劉備)의 울음에 마음이 약해져 결국 그대로 계속 빌려주는 요구를 승낙(承諾)하고 만다.

이처럼 노숙(魯肅)은 참으로 멍청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상의 내용들은 모두가 사서에는 없는 것들이고 멍청이 노숙(魯肅)이란 형상도 역사적 기재와 부합되지 않는다. 결국 나관중(羅貫中)이 제갈량(諸葛亮)의 지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허구화(虛構化)한 것들이다.

역사상의 노숙(魯肅)은 조금도 멍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략적 식견이 높고 재능이 걸출한 총명한 인물이었다. “삼국지(三國志)ㆍ노숙전(魯肅傳)” 배주에서 인용한 “오서(吳書)”에는 ‘노숙(魯肅)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엄숙하며 군사를 잘 다스리고, 금령(禁令)은 반드시 행하고, 또 담론(談論)을 잘 하고 문장에도 뛰어나고 생각이 깊고 넓고 원대(遠大)했으며 현명함이 다른 이들 보다 뛰어났다. 주유(周瑜)가 죽은 후로는 노숙(魯肅)이 최고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노숙(魯肅)은 조조의 100만 대군이 국경까지 밀어닥치는 위급한 상황 아래 조조(曹操)에게 항복하자는 다수의 의견을 힘써 물리치고 조조에게 대항(對抗)하기를 끝까지 견지했다. 아울러 적극적으로 유비(劉備)를 찾아가 함께 조조에게 맞서자는 동맹(同盟)을 맺었으며 특히 형주(荊州)를 유비에게 빌려주자는 차원 높은 주장을 하였으니 이는 조조(曹操)에게 있어서 강력한 적을 하나 더 첨가(添加)시킨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曹操)는 들고 있던 붓을 땅바닥에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한다. 그래서 주유(周瑜)는 죽음을 앞에 두고 손권(孫權)에게 글을 올려 이르기를 “노숙은 지모와 책략이 임무를 맡기에 충분하니 바라건대 저를 대신해 중용(重用)하소서.”라 하였다. 노숙은 주유(周瑜)의 뒤를 이어 동오의 대도독(大都督)이 되었고 강동을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활약을 했다.

송나라 사람 공평중(孔平仲)은 ‘자염장군(紫髥將軍)’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노씨네 무서운 아이 계책에 가장 뛰어나고 魯家狂兒策最長,
이끌고 조화롭게 한 자로는 주랑이 있었네 倡而和者有周郎.

여기서 ‘노씨네 무서운 아이’란 바로 노숙(魯肅)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사상의 노숙(魯肅)은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유명한 모사꾼이고 장령이며 손꼽아 셀 수 있는 극소수의 영웅호걸 중 한 명이었다. 

나관중(羅貫中)이 비록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조조(曹操)를 막자는 단호한 결정을 내린 노숙(魯肅)의 일을 서술했다 할지라도 소설 속 곳곳에서 주유(周瑜)와 제갈량(諸葛亮)에 비해 한참 낮은 위치로 깎아내렸을 뿐만 아니라 멍청한 모습을 너무나 세밀하게 묘사(描寫)했기 때문에 독자들 뇌리에 남은 노숙(魯肅)은 귀여울 정도로 멍청하고 우스울 정도로 어리석은 정직하고 무던한 형상(形象)이 되었다. 예술적 형상으로서의 노숙(魯肅)이란 인물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존재 가치(價値)가 있겠지만 역사상 재간 있는 군 통수자로서의 노숙(魯肅)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자신을 보호(保護)해주는 수호천사 같은 사람이 있기도 하고 자신도 생각지 못한 사이에 누군가를 보호해준 수호천사가 되어 있기도 한다. 노숙(魯肅)은 유비(劉備)에게 있어서 이런 수호천사(守護天使)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다.

노숙(魯肅)은 유비를 제대로 파악(把握)하고 있었다. 사실 유비(劉備)는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어디에라도 붙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엔 공손찬(公孫瓚)을 도와 원소(袁紹)와 싸우고 나중엔 도겸(陶謙)을 도와 조조와 싸우고 그러더니 또 조조(曹操)와 더불어 여포(呂布)와 싸운 다음엔 원소를 도와 조조와 싸우고 유표(劉表)를 도와 조조를 막는 등 필요에 따라 순식간에 적도 됐다 아군도 됐다 하며 정신없이 파트너를 바꿔치우는 데 이골이 난 인물이었다.

그래도 노숙(魯肅)은 유비(劉備)가 정족지세(鼎足之勢)의 한쪽을 차지해 동오(東吳)의 협력 상대가 되어야 조조(曹操)를 견제할 수 있다는 현실을 결코 놓치지 않고 실리적인 외교를 펼친다. 손권(孫權)조차도 형주(荊州)를 냉큼 삼켜버린 유비(劉備)를 향해 분노를 금치 못하고 수시로 출병(出兵)하려고 하는 마당에 이성(理性)을 잃지 않고 세력이 약한 동오와 유비 진영(陣營)이 협력을 유지하는 것만이 강한 세력(勢力)인 조조(曹操)에 맞서는 길임을 잊지 않는다. 그는 분주히 동오와 유비(劉備) 진영을 오가며 양쪽을 진정시키고 협력(協力)의 끈을 이어가는 참으로 욕먹을 일은 많고 빛도 나지 않는 고단한 역할(役割)을 한다. 그러나 당시 정국 구도를 안정(安定)시키는 데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노숙(魯肅)의 욕심과 야망을 드러내는 일화(逸話)가 있다. 적벽대전(赤壁大戰) 이후 합비(合肥)를 공격하던 손권에게 노숙(魯肅)이 찾아간다. 이때 손권(孫權)은 친히 군영 밖으로 나와 노숙이 오자 말에서 내려 노숙(魯肅)을 맞이한다. 이 모습에 모든 장졸(將卒)들이 놀라고 노숙(魯肅)도 황망하게 말에서 내려 절을 한다. 손권은 노숙(魯肅)과 함께 말을 타고 군영으로 들어가면서 말한다.

“내가 말에서 내려 공을 영접하여 빛나게 하려 하였소. 흡족하시오?” 노숙(魯肅)이 대답한다. “아닙니다.” “어찌해야 그대의 마음이 흡족(洽足)하겠소?” “주공의 위엄과 덕망(德望)이 사해에 떨치고 중원 9주를 통솔(統率)하고 능히 제업(帝業)을 이루어 이 노숙(魯肅)의 이름이 죽백(史書)에 오르는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 마음이 흡족함을 알 듯 합니다.”

이는 단순히 아부(阿附)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실력자’ 외길을 선택했고 실제로 천하의 제갈량(諸葛亮)과 유비(劉備)를 상대로 주군인 손권(孫權)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고단한 여정을 계속하며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어쨌든 노숙(魯肅)이야말로 참으로 부러운 행복한 신하였다. 뛰어난 제갈량(諸葛亮)도 워낙 기반 없는 주군을 모시다보니 온갖 양심 없는 짓을 수시로 저질러야 했고 청아한 순욱(荀彧)도 마지막엔 주군에게서 버림받는다. 그러나 노숙(魯肅)은 자기를 알아봐주고 자기 욕심의 크기만큼 따라오는 영명한 주군을 모셨고 주군(主君)의 기반이 튼튼하니 양심에 꺼리길 것 없이 유비(劉備) 진영을 상대로 갑(甲)의 입장에 설 수 있었다. 내게 어떤 신하의 삶을 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 노숙(魯肅)이다.

노숙(魯肅)은 오직 주군인 손권(孫權)이 그를 알아봐 주었지만 살아서도 동오의 부중에서 칭찬(稱讚)받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는 염치라고는 없는 유비(劉備) 진영과 평화를 유지하며 삼국시대(三國時代)를 정립하는 일에 고단하고 분주하기만 했다. 그런 궂은 인생을 버티게 해준 힘은 바로 손권(孫權)이라는 탁월한 주군(主君)을 만나 자신도 ‘실력자(實力者)’가 될 수 있으리라는 원대한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노숙(魯肅)은 217년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손권(孫權)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식(葬禮式)에 참석하였다. 제갈량(諸葛亮) 또한 노숙(魯肅)을 위한 추도식(追悼式)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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