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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육손(陸遜)

[삼국지 인물사전 - 육손(陸遜)] 


육손(陸遜, 183년 ~ 245년 2월)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오나라(吳)의 정치가로 자는 백언(伯言)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오현(吳縣) 사람이다. 촉한과 위나라의 침공을 여러 차례 격퇴(擊退)하여 오나라를 지켜냈으며 여몽(呂蒙)을 도와 관우(關羽)를 사로잡는데 공을 세웠고 이후 원한을 갚고자 침공(侵攻)한 유비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원래 이름은 육의(陸議)로 병법에 능통했고 기계(奇計)를 잘 썼다. 처음에는 유생으로 알려졌지만 웅재(雄才)와 대략(大略)을 품었었다. 편장군(偏將軍), 우도독(右都督)이 되어 여몽(呂蒙)을 대신하여 육구(陸口)에 둔병하였으며 형주(荊州)를 함락시켜 관우(關羽)를 죽게 한 것은 그의 지모(智謀)에서 나온 것이다.

뒤에 관우(關羽)의 복수를 위해 군사를 일으킨 유비(劉備)의 대군을 화공(火攻)으로 대파하였다. 이에 손권(孫權)은 그에게 큰일을 모두 맡기고 보국장군(輔國將軍), 형주목(荊州牧), 강릉후(江陵侯)에 책봉하였다. 뒤에 승상(丞相)이 되어 적자를 폐하려는 것을 극력 간하나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견책(譴責) 당하자 분에 못 이겨 병사한다.

손권(孫權) 막하의 장수이다. 오군 오현(吳郡吳縣) 사람으로 자는 백언(伯言)이며 소패왕(小覇王) 손책(孫策)의 사위이다. 아직 어린 나이로 뛰어난 지략을 지녀 관우(關羽)의 배후를 불의에 습격(襲擊)한 꾀도 그에게서 나왔고 뒷날 유비(劉備)가 복수의 군대를 움직여 연전연승(連戰連勝)하였을 때 역전 노장(歷戰老將)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침착하게 작전(作戰)하여 그의 40여 진지를 불살라 역으로 승리를 이끈 것이 모두 그의 지모(智謀)에서 나온 것이다.

유비(劉備)를 추격할 때 어복포(魚腹浦)에 이르렀을 때는 제갈량(諸葛亮)이 남긴 돌로 쌓은 팔진도(八陣圖)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을 가까이 살던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黃承彦)이 구해 주어서 살아났다. 뒤에 승상(丞相)이 되었는데 태자를 페하는 데 반대(反對)하였다가 노염을 사고 물러나 병들어 죽었다.

육손(陸遜)은 오나라의 공신(功臣)이다. 자는 백언(伯言)이고 오나라 사람이다. 그는 일족을 이끌고 손권(孫權)의 휘하에 들어가 회계산(會稽山)과 파양호(鄱陽湖)에 근거하던 도적을 무찔러 명성을 얻었다.

219년에는 여몽(呂蒙)을 대신하여 형주(荊州)에 주둔하고 탁월한 전략으로 관우(關羽)를 무찔러 형주를 오나라의 영유(領有)로 삼았다. 그 공으로 진서장군(鎭西將軍이 되고 누후(婁侯)에 봉해졌다. 촉나라의 유비(劉備)는 관우가 죽고 형주를 빼앗긴 일로 손권(孫權)에게 원한을 품고 221년에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 왔다. 이때 육손(陸遜)은 방위군 총사령관으로서 이릉(夷陵)에서 맞아 싸웠다. 이것이 유명한 '이릉의 싸움'으로서 그 결과 육손이 대승했다.

그 후 육손(陸遜)은 보국장군(輔國將軍) 형주목(荊州牧)으로 승진하고 강릉후(江陵侯)가 되었다. 그 뒤에도 계속 형주에 남아 위, 촉의 동향을 살피며 손권에 대해 자주 헌책(獻策)했다. 손권 역시 내정, 외교 면에서 중대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리하여 244년, 형주에 주재한 채로 정승(政丞)에 임명되는 등 오의 중신으로 군림(君臨)했다.

이에 앞서 손권(孫權)은 왕부인 사이에서 난 손화(孫和)를 태자로 삼았으나 한편으로는 그 동생 손패(孫覇)를 사랑하여 노왕(魯王)으로 봉하고 태자와 같이 대우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태자파(太子派)와 노왕파(魯王派)가 대두되어 서로 다툼을 벌였다.

형주에서 이 소문을 들은 육손(陸遜)은 상서를 올려 태자에게 더 비중을 두도록 요구했다. 이에 겁을 먹은 노왕파(魯王派)는 21개 군에 달하는 육손의 죄상을 들어 손권에게 제출했다. 이에 손권(孫權)이 일부러 형주에까지 문책(問責)의 사신을 보내자 육손(陸遜)은 분노 끝에 죽고 말았다. 나중에야 손권도 그 무죄를 알고 후회(後悔)했다.

생애 초반
육손(陸遜)의 원래 이름은 육의(陸議)인데 그의 집안은 대대로 강동 지역을 다스려온 호족(豪族)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종조부인 여강 태수 육강(陸康)에게 양육되었다. 그러나 육강이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던 원술(袁術)과 대적하게 되자 육강은 일족을 육손에게 맡기고 오나라로 피신(避身)시킨다.

오나라에서 육손(陸遜)은 관직으로 진출하여 현의 관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등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또 오나라는 당시 이민족(異民族)의 숱한 습격으로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는데, 육손은 주민들 가운데 지원병을 모집해 쳐들어오는 이민족을 하나하나 격파하고, 투항하는 자는 자기 군세에 가담시켰다. 육손(陸遜)의 그러한 활동에 주목하던 손권(孫權)은 그에게 형 손책(孫策)의 딸을 시집보내어 친분 관계를 맺고 종종 정치적 문제에 대해 조언(助言)을 구하였다. 육손의 ‘이민족을 하나둘씩 평정하여 그 가운데서 정예병(精銳兵)을 선발하여 강력한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主張)을 들은 손권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여 그 실행을 육손(陸遜)에게 맡겼다. 그래서 각지의 이민족은 육손에 의해 점차 토벌(討伐)되어 정예병으로 흡수되었다.

육강 토벌
원술(袁術)의 객장인 손책(孫策)은 여강태수(廬江太守) 자리를 준다는 조건으로 육강을 토벌했고 손책은 육강(陸康)을 교수했다. 그러나 원술은 손책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고 여강태수 자리를 유훈(劉勳)에게 넘겨줬다. 이에 분노한 손책은 원술과 결별(訣別)을 선언하고 곧바로 유훈을 토벌하고 여강을 힘으로 빼앗았다. 손책에게 박살이 난 유훈은 그 길로 조조(曹操)를 향해 도망쳤다.

손책 사후
오나라에서 육손(陸遜)은 관직으로 진출하여 현의 관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혜(施惠)를 베푸는 등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데 진력(盡力)하였다. 또 오나라는 당시 이민족의 숱한 습격(襲擊)으로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는데 육손은 주민들 가운데 지원병(志願兵)을 모집해 쳐들어오는 이민족을 하나하나 격파(擊破)하고 투항하는 자는 자기 군세에 가담시켰다. 육손의 그러한 활동에 주목하던 손권(孫權)은 그에게 형 손책(孫策)의 딸을 시집보내어 친분 관계를 맺고 종종 정치적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였다. 육손의 ‘이민족을 하나둘씩 평정(平定)하여 그 가운데서 정예병을 선발하여 강력한 군대를 조직(組織)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은 손권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여 그 실행을 육손(陸遜)에게 맡겼다. 그래서 각지의 이민족은 육손에 의해 점차 토벌되어 정예병으로 흡수(吸收)되었다.

관우와의 대립
오나라와 촉한 간에 형주(荊州)를 둘러싼 대립이 일어나고 있던 도중 관우(關羽)가 동맹을 제멋대로 깨고 오나라의 군량고(軍糧庫)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손권(孫權)이 대노하였고 관우를 체포하고 형주를 수복(收復)하라는 명령을 여몽(呂蒙)에게 내리게 되었다. 이 와중에 전선 사령관이었던 여몽이 병에 걸려 귀환길에 오르게 되었다. 여몽이 전선을 이탈(離脫)하면 조만간 그를 경계해 북쪽으로의 진격(進擊)을 망설였던 관우가 필시 방심하여 올 것이라 여기고 육손(陸遜)을 자기 진영으로 불러들여 관우가 방심한 틈을 노려 관우를 포박(捕縛)하여 오나라의 군량고를 습격한 책임을 물음과 아울러 형주를 되찾으라고 지시하였다. 여몽은 오나라로 돌아와 손권에게 그 점을 진언(進言)하고 자기 대신 형주 수비를 맡을 사람으로 육손(陸遜)을 추천하였다.

여몽(呂蒙)의 후임이 된 육손(陸遜)은 관우(關羽)에게 매우 겸손한 내용의 서신을 보내 그에게 자신감(自信感)을 불어넣어주었다. 안심하고 위나라를 침공(侵攻)한 관우는 여몽의 계략(計略)에 허를 찔러 패배(敗北)하고 사로잡혀 처형(處刑)되고 만다.

이릉 대전
이 소식을 들은 유비(劉備)는 관우(關羽)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약 5만 혹은 8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오나라를 침공하였다.(夷陵防禦戰) 이에 손권(孫權)은 육손(陸遜)을 대도독으로 임명해 전군의 지휘권(指揮權)을 맡겨 적의 침공을 막게 하였다. 양군은 이릉에서 대치하였는데 육손은 전군에게 수비(守備)를 단단히 하고 절대 방심(放心)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내린다. 그 때문에 육손을 향해 겁쟁이라며 불평하는 병사들이 많자 육손(陸遜)은 손권이 친히 내린 보검을 뽑아들고 “지금은 한 치의 땅이라도 취할 수 있다면 어떤 욕됨이라도 참아야 할 것이오! 그대들은 각처의 요지(要地)를 지키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시오! 만약 함부로 움직인다면 군령(軍令)을 어긴 죄로 처형할 것이오.” 하고 충고(忠告)하여 그들을 설득하였다. 마침내 오랜 대치상태(對峙狀態)로 촉한군이 진을 들에서 숲으로 바꾸자마자 육손은 즉시 화공(火攻)을 가하여 격파하였다.

삼국시기 촉나라(蜀)의 장군 관우(關羽)가 오나라(吳)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참수되니 유비(劉備)는 대로하여 전국의 60만 정예군사를 이끌고 동오 토벌에 나섰다. 동오의 손권(孫權)이 화해를 청해왔으나 유비가 이를 거부했다. 이 위급한 시각에 손권(孫權)은 당시로서는 신인인 육손(陸遜)을 대도독(大都督)으로 기용(起用)하고 동오의 삼군을 통솔해 유비와의 결전(決戰)을 준비하도록 했다.

손권(孫權)의 이 임명에 대해 동오(東吳)의 많은 노장군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연륜이나 경력으로 볼 때 육손(陸遜)이 삼군통수를 맡을 자격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허나 손권의 임명(任命)은 이미 내려졌고 변경될 여지가 없는지라 억울한 대로 육손(陸遜)의 명을 받들 수밖에 없었다.

육손(陸遜)은 촉나라 군사가 수적으로 많고 그 기세(氣勢) 또한 높은 것을 보고 동오 대군에 정면충돌(正面衝突)을 피하고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단단히 지키고 있으면서 촉나라 군사들의 갖가지 도발(挑發)에도 절대 출전하지 못하도록 했다.

동오의 노장들은 육손(陸遜)이 담이 작다고 여기고 너도나도 출전(出戰)하겠다고 자청했다. 손권(孫權)의 조카 손항(孫恒)은 혈기왕성한 나이에 자신의 용맹을 과신(過信)한 나머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그 결과 촉나라 군에 의해 고립(孤立)된 성에 포위되었다. 노장군 한당(韓當), 주태(周泰) 등은 손항이 포위된 것을 보고 군사를 내어 구출작전(救出作戰)을 펼쳐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主張)했으나 육손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拒否)했다. 이에 주태(周泰) 등은 육손을 욕하기 시작했고 지어는 군령을 어기는 일까지 발생했다. 사태의 심각성(深刻性)을 느낀 육손은 군율(軍律)의 엄정함을 보여주리라 결심하고 군사회의를 소집(召集)했다.

회의가 시작되자 육손(陸遜)은 허리에 찬 보검의 자루를 잡은 채 엄숙하게 말했다. "유비(劉備)는 당대의 호걸이고 용병술(用兵術)에도 능해 조조(曹操)마저도 두려워합니다. 이번에 유비가 직접 60만 정예군사(精銳軍士)를 통솔해 우리와 사생결단(死生決斷)을 내려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갓 삼군 통수직을 맡은 몸이오니 여러 장군들께서 나라를 위한 큰 국면(局面)을 생각하시고 저와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 강적을 물리치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육손(陸遜)은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가 여러분께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것은 결코 제 자신의 이익(利益)과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폐하(陛下)께서 나를 대장군으로 임명한 원인은 제게 큰일을 위해 치욕(恥辱)을 참을 줄 아는 작은 능력이나마 있기 때문입니다.(忍辱负重) 여러분께서 군령을 엄수(嚴守)하시지 않을 경우 군율에 따라 엄하게 처벌할 것입니다."

육손(陸遜)의 설득과 엄포에 여러 장군들은 비록 속으로는 마땅치 않았지만 더는 원망을 입 밖에 낼 수 없었고 명령(命令)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육손이 지휘한 동오군은 대승을 거두게 되고 여러 장군(將軍)들은 그때서야 육손의 뛰어난 군사재능(軍事才能)을 알게 되었다.

유비 사망 이후
유비(劉備)가 병으로 죽자 오나라와 촉한은 촉한(蜀漢)의 사신인 등지의 의견을 받아들여 우호 관계를 회복하고 함께 위나라에 대항하게 된다. 손권은 군사 면에서 육손(陸遜)은 오나라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存在)가 되어 위나라가 종종 오나라를 침공해오지만 그 때마다 육손의 전략으로 가까스로 저지시켰다. 그 후 오나라 신료들의 맹활약(猛活躍) 덕분에 마침내 손권(孫權)은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되었다.

244년 육손(陸遜)은 고옹(顧雍)의 뒤를 이어 승상(丞相)에 임명되었다. 손화와 손패(孫覇)의 후계자 분쟁에서는 이미 태자인 손화(孫和)를 지지하였고 손패파의 핵심 인물 전기를 그 아버지 위장군 전종(全琮)이 옹호하자 이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 전씨 일족과 사이가 벌어졌다. 육손(陸遜)은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태자를 폐하지 않기를 여러 차례 말했으며 또 직접 수도 건업(建業)으로 가서 말하고자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전종 부자는 육손(陸遜)의 외가며 태자를 지지하는 고담(顧譚), 고승(顧承), 요신(姚信) 등을 참소하여 유배 보냈고 또 육손과 편지를 주고받은 오찬(吾粲)은 그로 인해 하옥되어 주살(誅殺) 당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손권은 육손을 질책(叱責)하였다. 육손은 이듬해 63살의 나이로 화병으로 분사(憤死)했다.

육손(陸遜)이 죽은 뒤에도 손권(孫權)은 양축(楊竺)이 상소한 육손에 대한 20가지 조문을 들어 육항(陸抗)을 금고(禁錮)했으나 육항이 모두 조리 있게 대답하자 그제서야 손권은 육손에 대한 의심을 풀었고 태원 원년(251년)에 손권은 육항에게 참언(讒言)으로 육손 부자를 공격한 것을 사과(謝過)했다. 경제 시대에 소후(昭侯)란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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