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董卓)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이며 자는 중영(仲穎)이다. 자는 중영(仲穎)이며 양주(凉州) 농서군 임조현(臨洮縣) 사람이다. 변방에서 무공을 쌓았다. 영제(靈帝) 사후 십상시의 난 등 정치적 혼란(混亂)을 틈타 정권을 잡았다. 소제(少帝)를 폐하고 부패·살인·약탈·도굴·방화·축재 등 온갖 폭정(暴政)을 휘둘렀다. 관리들의 대규모 무장 항명사태인 반동탁 연합군과 각종 암살(暗殺) 시도가 있었고 결국 왕윤(王允)·여포(呂布)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대표적인 악인으로 두루 회자(膾炙)되었다.
생애
동탁(董卓)은 완력이 뛰어나 두 개의 궁대(弓袋)를 몸에 차고 말을 몰면서 어느 손으로도 활을 맘대로 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젊어서부터 의협적(義俠的)인 무리와 함께 강족 지역(羌族地域)을 방랑하여 유력자와 친분을 맺었다. 그 후 향리에 돌아와 농사에 전념(專念)하였는데,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마침 밭을 갈고 있던 소를 잡아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강족은 그 의기에 감격(感激)하였다. 또한 병주 정벌(幷州征伐)에서 전공을 세우자 포상금(褒賞金)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인심 장악에 뛰어난 기질(氣質)을 가지고 있었다.
강족과의 교류
젊어서부터 강족 지역을 유랑(流浪)하며 유력자와 친분을 맺었다. 돌아와서는 농사를 지었는데 친했던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밭 갈던 소를 잡아 연회를 베풀고 같이 즐겼다. 그러자 강족(羌族)들이 감격하여 말과 소를 제외한 가축 1,000여 마리를 선물로 주었다. 환제(桓帝)의 말년인 167년(영강 원년), 동탁(董卓)은 양갓집 자제로서 우림랑(羽林郞)으로 뽑혀 흉노 중랑장 장환(張奐) 밑에서 사마로 종군하여 한양(漢陽, 천수군)에서 강족을 쳐부수었다. 이 공으로 낭중(郎中)이 되고 비단 9,000필을 받았다. 비단은 부하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이민족(異民族)으로부터 변방을 지키며 여러 공을 세워 광무 현령(廣武―), 촉군 북부도위(北部都尉), 서역 무기교위(西域戊己校尉), 병주 자사(幷州刺史), 하동 태수(河東太守) 등을 거쳤다. 184년(중평 원년) 황건적(黃巾賊)을 상대로 승전을 거듭하던 노식(盧植)이 좌풍(左豊)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서 소환당하고 그 대신 동탁이 동중랑장(東中郞將)으로서 장각(張角)을 공격했다가 패하여 벌을 받았다.
양주의 난
겨울 북지군(北地郡), 농서군 부한현(枹罕縣)·하관현(河關縣)의 선령강(先零羌)과 소월지 가 북궁백옥(北宮伯玉)과 이문후(李文侯)를 장군으로 추대(推戴)하고 난을 일으켰다. 한수(韓遂)와 변장(邊章)은 위협을 받고 군정을 맡았다. 185년 봄 삼보(三輔)라 불리는 경조(京兆), 풍익(馮翊), 부풍(扶風)까지 기병 수만 명으로 침범해오므로 좌거기장군(左車騎將軍) 황보숭(皇甫嵩)의 지휘하에 그 진압을 맡았다. 7월(음력) 황보숭이 장양(張讓)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면직되고 장온(張溫)이 부임하였다. 동탁은 파로장군(破虜―)으로 승진하였다.
고전하다가 11월(음력) 떨어진 별똥별에 불안(不安)해하는 반군을 바로 공격하여 크게 깨트리고 수천 명을 베었다. 탕구장군(盪寇―) 주신(周愼)이 유중(楡中)으로 추격하였다. 동탁(董卓)은 주신(周愼)의 뒤에서 보급선(補給船)을 지키려 했으나 장온(張溫)은 선령강 토벌(先零羌討伐)을 명했다. 과연 보급선이 끊기고 주신은 패퇴(敗退)하였다. 동탁은 수만 명의 강족(羌族)에게 포위당했지만 둑을 쌓은 후 물고기를 잡는 척하면서 그 아래로 자맥질해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둑을 무너트리니 강족은 물이 깊어 쫓아오지 못했다. 진압군(鎭壓軍)이 모두 패퇴하는 와중에도 동탁군만이 전력을 보전(保全)한 채 돌아와 부풍(扶風)에 주둔했으므로 태향후(斄鄕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 1,000호를 받았다.
186년 겨울 한수(韓遂)가 북궁백옥(北宮伯玉), 이문후(李文侯), 변장(邊章)을 죽이고 10여만 명으로 늘어나자 187년 이상(李相), 마등(馬騰), 왕국(王國)마저 합세하였다. 188년 왕국 등이 진창(陳倉)을 포위하자 전장군이 되어 황보숭과 함께 구원하러 갔다. 동탁(董卓)은 진창으로 바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황보숭(皇甫嵩)은 진창이 충분히 버틸 수 있다며 반군이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189년 2월(음력) 왕국 등이 스스로 군을 물리자 황보숭이 때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려 하였다. 동탁이 이번에는 궁지(窮地)에 몰린 적을 치는 것은 위험하다며 반대하자 그의 부대를 후방에 남겨둔 채 황보숭만이 진격(進擊)하여 만여 명을 베고 반군을 소탕(掃蕩)하였다. 동탁은 몹시 부끄럽고 한스러워 황보숭을 미워하였다.
낙양 입성
중앙에서 소부로 삼아 불렀는데도 ‘호인(胡人) 병사들의 형편이 처참(悽慘)하여 자신을 가지 못하게 하니 어쩔 수 없이 위무하겠다’며 취임(就任)을 거부했다. 조정에서는 어찌하지 못하다가 이번에는 병주목(幷州牧)에 임명하고 기존의 병력은 황보숭(皇甫嵩)이 맡도록 하였다. 동탁은 ‘이들과 함께 한 지 10년이어서 목숨을 바칠 정도로 우애(友愛)가 깊다’며 또 거절(拒絶)하였다.
4월(음력) 영제(靈帝)가 죽은 후 대장군 하진(何進)과 원소(袁紹)가 환관들을 제거하려 했는데 하태후(何太后)가 반대하였다. 이에 여러 호걸들과 그 군대를 불러와 태후를 협박(脅迫)할 계획을 세우고 정태(鄭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탁까지 불렀다. 동탁이 미처 낙양(洛陽)에 도착하기 전에 하진은 암살(暗殺)되고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원술(袁術)과 사례교위(司隷校尉) 원소(袁紹)가 환관들을 몰살(沒殺)하였다. 환관 장양(張讓)과 단규(段珪) 등은 소제와 진류왕 유협(훗날 헌제)을 데리고 소평진(小平津)으로 도주하므로 상서 노식(盧植)과 하남중부연(河南中部掾) 민공이 좇아가 죽였다. 동탁이 북망산(北邙山)에서 황제 일행을 영접하여 낙양(洛陽)으로 들어왔다.
정권 장악과 횡포
원래 동탁(董卓)의 병사는 불과 3,000명뿐이었지만 사오일 간밤에는 몰래 밖으로 군사를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북을 울리며 입성(入城)시키기를 반복하여 대군인 양 꾸며서 위세를 보였다. 죽은 하진(何進)·하묘(何苗) 형제의 병력을 자연스레 거두었을 뿐더러 여포(呂布)를 부추겨 집금오(執金吾) 정원(丁原)을 제거하고 그 군대까지 흡수하니 정말로 대군이 되었다. 가뭄을 이유로 사공 유홍(劉弘)을 면직(免職)시키고 대신 그 자리에 올랐다.
소제는 어리석은 데 반해 유협(劉協)은 똑똑한데다 같은 성씨인 동태후가 길렀으므로 폐립(廢立)할 뜻을 품었다. 먼저 원소(袁紹)에게 그 뜻을 내비치니 반대하기에 ‘유씨(劉氏)는 남겨둘 수 없다’고 화냈다. 원소 역시 발끈하여 ‘천하에 강한 자가 어찌 동탁(董卓)뿐이겠는가!’라고 큰소리는 쳤지만 이내 기주(冀州)로 달아났다.
9월 대신들과 폐립(廢立)을 의논하였다. 오직 노식만이 반대했을 뿐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소제는 폐위하여 홍농왕(弘農王)으로 강등시키고 유협을 제위에 앉혔으며 하태후와 그 어머니 무양군(舞陽君)을 죽였다. 이내 태위로 옮겼다가 헌제를 옹립(擁立)한 공이 있다 하여 스스로 상국에 오르고(11월 26일) 자신은 미후(郿侯), 어머니는 지양군(池陽君)에 봉했다. 황제를 배알(拜謁)할 때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贊拜不名] 칼을 찬 채 전각에 올랐다.[劍履上殿] 동탁과 그 휘하 군대는 살인·약탈·겁탈·축재 등 온갖 전횡(專橫)을 저질렀다.
이민족 토벌
동탁(董卓)은 북방 이민족 토벌에 수많은 전과를 올려 승진(昇進)을 거듭하여 중랑장(中郞將)이 된다. 그 후 황건적(黃巾賊) 토벌에서 패배하여 면직되지만 한수(韓遂) 등이 양주(涼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복직되어 진압을 맡았다. 이 전투에서 수만 명의 강족(羌族)에게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지지만 동탁은 물고기를 잡는 척하면서 빠져나가고 도중에 하천을 막아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통과(通過)시키고 나서 제방(堤防)을 무너뜨렸다. 이에 강족은 물이 깊어 추격하지 못해 동탁은 상처 없이 무사히 귀환(歸還)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소환(召還)하여 소부로 삼고 군대를 좌장군 황보숭(皇甫嵩)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동탁은 계속 칙명(勅命)을 거역했다. 이때문에 일찍이 손견(孫堅)은 군율을 무시하는 동탁을 살려두면 절대 안된다고 장온(張溫)에게 진언했지만 장온은 강족과 동탁의 관계를 들어 이를 무시(無視)하였고 훗날 동탁은 장온을 매질하여 죽였다.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는 동탁이 베푸는 연회 중에 여포(呂布)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장온을 밖으로 끌고 가서 죽여 버린다고 묘사(描寫)되어 있다.
소제 폐위
그 무렵 하진(何進)이 환관 제거(宦官除去)를 모의하기 위해 전국의 제후들을 소집하였는데 동탁(董卓)도 이 거사에 동참(同參)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탁이 낙양(洛陽)에 도착하기 전에 하진이 주살(誅殺)되고 환관들에게 연행된 소제(少帝)와 진류왕(陳留王 : 헌제)의 신변을 보호하면서 낙양(洛陽)으로 들어왔다. 이때 동탁의 병사는 3천여 명밖에 없었으나, 4~5일 간격으로 밤에 네 성문에서 밖으로 군사를 보내 다음날 아침 군기와 북을 가지고 입성(入城)시켜 대군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으로 하진(何進)·하묘(何苗) 형제의 군사를 병합하는 데에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포(呂布)를 부추겨 집금오 정원(丁原)을 제거하도록 하고 그 군대를 흡수(吸收)했다. 그리고 가뭄을 이유로 사공 유홍(劉弘)을 면직(免職)시키고 대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자마자 태위(太尉)로 승진한다. 소제를 폐위(廢位)하여 홍농왕(弘濃王)으로 강등시킨 뒤 진류왕(眞柳王)을 제위에 앉혔고 소제를 모후인 하태후와 함께 시해하는 동시에 하진을 죽게 했다는 혐의로 십상시(十常侍)의 난 때 죽음을 당한 하묘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절단하면서 길에다 아무렇게나 버렸으며 하진, 하태후, 하묘의 어머니 무양군(舞陽君)을 비롯한 하씨 일족들을 모조리 몰살(沒殺)시켰다. 또한 소제 대신 헌제를 제위에 올리면서 스스로의 벼슬을 상국(相國)으로 높였다.
동탁의 포악(暴惡)함이 극심해진 것은 이때부터다. 군대를 이끌고 순찰(巡察) 중에 주민들이 춘절(春節)을 즐기는 것을 보자 거기에 있던 남자들은 목을 베고 여자는 탈취하여 병사들에게 첩(妾)으로 주고 재산(財産)을 몰수하였으며 심지어 궁녀(宮女)나 공주(公主)에게까지 함부로 폭행(暴行; 성폭행을 포함한다.)을 가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만행(蠻行)을 참을 수 없어 오부(伍孚)가 동탁(董卓)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지만 실패하여 살해(殺害)되고 만다. 조조(曹操)도 칠보도(七寶刀)를 빌려 동탁 암살을 모의(謀議)하지만 실패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또한 오수전(五銖錢)을 녹여 조그만 동전으로 주조(鑄造)했는데 막대한 양의 금속(金屬)을 여기에 투입했고 이 때문에 통화팽창(通貨膨脹)이 일어나 곡식 한 석이 수만 전에 이를 정도였다.
반동탁 연합군
190년, 각지의 제후가 원소(袁紹)를 맹주(盟主)로 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마침 영제 말기에 일어난 백파적(白波賊)이란 도둑이 태원(太原) · 하동(河東) 일대를 노략하자 우보(牛輔)를 보내 막게 했으나 실패했기에 더욱 두려워한 동탁은 장안(長安) 천도를 강행(强行)했다. 이때 낙양(洛陽) 사람들을 강제로 장안으로 옮기게 하니 사람들은 가는 도중 굶거나 약탈(掠奪)을 당하거나 하여 길에 죽은 자가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황제가 3월에 장안의 미앙궁(未央宮)에 입궁한 후 동탁은 낙양의 궁궐(宮闕)과 민가를 불태웠다. 한편 여포(呂布)에게는 왕릉(王陵)이나 대신들의 묘를 도굴(盜掘)하게 했다. 동탁 자신은 필규원(畢圭苑)에 주둔하고 있었다.
반동탁 연합군은 서로 강대한 동탁(董卓)의 눈치를 보며 진격에 지지부진(遲遲不進)했고 조조(曹操)와 포신(鮑信)이 독자적으로 동탁을 공격하려 하자 동탁은 서영(徐榮)을 보내 이들을 무찔렀다. 한편 장사태수(長沙太守) 손견(孫堅)이 남양태수(南陽太守) 장자(張咨)를 죽이니 남양은 원술(袁術)의 손에 넘어갔고 원술은 손견을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고 동탁을 공격하러 보냈다. 손견이 노양(魯陽)까지 진격하자 동탁은 다시 서영을 보내 손견을 패주시키고 영천태수(潁川太守) 이민(李旻)을 사로잡아 삶아죽였다. 하내태수(河內郡太守) 왕광(王匡)이 하양 나루에 주둔(駐屯)하여 동탁을 치려 하자 왕광을 도발(挑發)하는 한편 몰래 정예병(精銳軍)으로 강을 건너게 해 왕광 군을 무찔렀다. 191년에 손견이 군사를 수습해 양인(陽人)에 주둔(駐屯)하자 동탁은 호진(胡軫)을 대독호로 삼고 여포(呂布)를 기독으로 삼아 손견을 막게 했으나 호진과 여포가 불화하여 양인성을 공략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군세를 수습한 손견에게 대패(大敗)하여 도독 화웅(華雄)을 잃었다. 동탁은 이각(李傕)을 사신으로 보내어 손견에게 화친을 시도하였으며 이때 손견의 자제들에게 자사나 태수의 직위를 천거하겠다는 약조를 붙였으나 손견은 화친을 받아들일 의사가 전혀 없었으므로 결렬되었다. 동탁(董卓)은 연이어 손견(孫堅)과 싸워 져서 손견은 마침내 낙양(洛陽)에 입성했다. 그러나 동탁은 낙양에서 물러난 후에도 민지(黽池) · 안읍(安邑) · 화음(華陰) 등 요충지(要衝地)에 자기 장수들을 배치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방어(防禦)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낙양에는 주준(朱儁)을 남겼으나 주준은 반동탁 연합군과 내통(內通)하고 있었다. 동탁(董卓)은 주준을 쳐 형주로 내쫓고 양의(楊懿)로 대신 하남윤을 삼았으나, 주준이 다시 군대를 수습해 양의를 쫓아내니 동탁은 하남(河南)을 다시 잃었다.
동탁(董卓)은 중국 전토를 차지할 야욕(野慾)이 있었는데 이에 걸림돌이 될 만한 다섯 가지 요소를 꼽았다. 원소(袁紹)의 명성, 원술(袁術)의 명성, 유표(劉表)의 세력, 유언(劉焉)의 세력, 그리고 손견(孫堅)의 용맹이었다.
말년
반동탁 연합군은 오래가지 못하고 자연스레 해체(解體)되었지만 동탁(董卓)의 전횡(專橫)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2년, 여포(呂布)는 동탁의 시녀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동탁이 이 결혼(結婚)에 대해 여포에게 수극(手戟)을 던져가면서까지 반대하였으므로 여포는 동탁에 대해 극에 달하는 불만(不滿)을 갖고 있었다. 그해 4월 이를 이용한 왕윤(王允)은 동탁의 심복 여포에게 그 시녀와 여포를 혼인(婚姻)시켜준다는 조건으로 꾀어내어 동탁 살해를 모의(謀議)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왕윤이 양녀 초선(貂蟬)을 이용하여 ‘연환지계(連環之計)’로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쓰여있다. 이리하여 동탁은 선양(禪讓)과 관련된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갈(傳喝)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다. 그때 왕윤과 여포가 서로 짜고 황제를 알현(謁見)하는 자리에 칼을 들거나 말을 타고 알현할 수는 있지만 휘하 병력을 이끌고 알현할 수 없다는 궁중규칙(宮中規則)을 이용하여 황제(皇帝)의 호위병을 이용하여 동탁을 제지(制止)하였다. 이에 동탁은 호위병들에게 제지당한 후 황제의 조칙(詔勅)을 받은 여포에게 54세의 나이로 사형당한다. 동탁은 사망(死亡)한 후 참수되어 동탁의 머리와 몸통이 따로 분리(分離)되어 장안성에 효수(梟首)되었는데 한 병사가 동탁의 영구(靈柩)중에 뚱뚱한 몸의 배꼽에 불을 놓자 며칠씩이나 계속 탔다고 한다.
동탁의 재평가
적은 수이긴 하지만 동탁(董卓)이 삼국지연의의 작가인 나관중(羅貫中)과 역사가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왜곡(歪曲)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탁이 중원 출신이 아니라 변방(邊方) 서량(西凉) 출신으로 중앙 최고 관직에 오른 것을 사람들이 시샘하였다는 것이 그 주 내용이며 반동탁 연합군들도 모두 전통적인 권세가들이라는 것을 볼 때 반동탁 연합군 자체도 신흥귀족에게 자리를 빼앗긴 기성귀족(旣成貴族)들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 전쟁(戰爭)을 벌인 것이라고 주장(主張)한다. 그러나 반동탁연합군에 참가한 제후 중 한복(韓馥), 유대(劉岱), 공주(孔伷), 교모(喬瑁) 등은 동탁(董卓)이 임용한 관리였다.
특징과 성품
거칠고 사나웠으며 지략(智略)이 있었다. 강족(羌族)들도 경외(敬畏)할 정도로 힘이 세고 무예가 뛰어나서 동개(筒箇; 활과 화살을 꽂아 넣어 등에 지도록 만든 물건) 두 개를 차고 말을 몰면서 좌우로 활을 쏠 수 있었다. 오부(伍孚)가 동탁(董卓)의 암살을 시도했을 때도 힘이 세서 실패한 바 있다. 한편으로 매우 뚱뚱했다. 동탁의 시체에서 기름이 흘러 이를 지키는 관리(官吏)가 그 배꼽 위에 심지를 놓고 불을 붙였는데 며칠씩이나 계속 탔다.
흉악(凶惡)하고 방자(放恣)한데다 잔인(殘忍)했다. 한번은 양성(陽城)에 군대를 보낸 일이 있었는데 마침 백성들이 지신제(地神祭)를 지내고 있기에 모두 죽이고 재물과 부녀자를 취하고는 도적을 격파(擊破)했다며 만세를 불렀다. 장안(長安)에서는 공경대신(公卿大臣)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북지(北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항복(降伏)한 수백 명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먼저 혀를 자른 다음 손발을 베고 눈알마저 파낸 후에 삶았으며 미처 죽지 않은 자들은 주안상 사이로 굴러다녔다. 모두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수저를 들지 못하는데 동탁(董卓)만이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먹고 마셨다.
억세고 편협(偏狹)하며 화가 나면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동탁(董卓)이 아끼는 호인 부하가 이를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사례교위(司隸校尉) 조겸(趙謙)에게 죽었다. 동탁이 대노하여 “내가 사랑하는 개도 꾸짖지 못하게 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아닐쏘냐!”라고 하며 사례도관(司隸都官)을 죽였다. 위위(衛尉) 장온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태형(笞刑)을 받고 목숨을 잃었으며 동탁을 노려보기만 해도 저세상으로 갔다. 호위를 맡긴 여포(呂布)에게까지 사소한 이유로 수극(手戟)을 던질 정도였고 결국 이것이 화(禍)가 되었다.
평가
손견(孫堅)은 장온(張溫)의 호출에 늦게 온 동탁(董卓)이 그 태도까지 불손(不遜)하다며 군율에 따라 참수(斬首)할 것을 진언한 적이 있다. 장온은 ‘동탁이 농촉(隴蜀)에서 위세와 명성을 떨치고 있으므로 전투에 꼭 필요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진(何進)이 동탁을 부를 때 노식(盧植)은 ‘흉악하고 사나워 제어가 어려울 것’이라고 정태(鄭泰)는 ‘욕심이 끝이 없어서 조정(朝廷)이 위태로울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포신(鮑信) 역시 낙양(洛陽)에 갓 입성한 동탁(董卓)이 다른 뜻이 있으니 조속히 도모(圖謀)해야 하다고 원소(袁紹)에게 강권(强勸)하였다.
동탁(董卓)이 정권을 장악한 후 순유(荀攸)는 정태(鄭泰), 하옹(何顒), 충집(种輯), 오경(吳景)과 그 암살을 모의(謀議)하며 ‘동탁의 무도함은 걸왕(桀王), 주왕(紂王)보다도 심하니 그를 죽이는 것은 제환공(齊桓公)이나 진문공(秦文公)의 의거와 같다.’고 하였다. 순욱(荀彧)은 191년 조조(曹操)에게 임관하며 “그 포학(暴虐)함이 지나치게 심하니 필히 변을 당해 망할 것입니다.”라 평하였고 그 말대로 수회 암살(數回暗殺) 시도가 있었고 결국 왕윤(王允), 여포(呂布) 등에게 죽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거칠고 포악(暴惡)하며 사악한데다 잔인(殘忍)하다. 역사를 기록(記錄)한 이래 이와 같은 자는 없었다.’고 평하였다. '후한서(後漢書)'의 저자 범엽(范曄)은 ‘원래 호랑이 같은 성깔로 우연히 난세(亂世)를 만나 온갖 악행(惡行)을 저지르면서도 대신들과 정사를 타협(妥協)하고 찬탈(簒奪)도 주저했으니 어찌 보면 대도라 하겠다.’고 평하였다. 왕찬(王粲)의 "영웅기(英雄記)"에서는 사람들이 ‘동탁(董卓)이 있어서 큰 난리가 생겼고 그 난리(亂離)가 동탁 자신까지 집어삼켰다’고 말했다고 한다.
동아시아에서 동탁(董卓)은 왕망(王莽), 조조(曹操) 등과 함께 나라를 도탄(塗炭)에 빠트린 역적(逆賊)의 대명사로 취급되었다.
삼국지연의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도 악인으로 묘사한다. 장각(張角)과의 전투에서 자신을 구해준 유비(劉備) 삼형제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조조(曹操)가 칠보도(七寶刀)를 빌려 동탁(董卓) 암살(暗殺)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장면을 추가하였다. 왕윤(王允)이 양녀 초선(貂蟬)을 이용하여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으로 연출(演出)하였으며 죽는 날 선양(禪讓) 받는 줄 알고 궁궐(宮闕)로 들어간다.
여포 손에 죽다
장안(長安)으로 들어오기 전 태사(太師)라 칭했다.(190년 3월 25일(음력 2월 12일, 정축(丁丑)일) 황태자급의 수레와 복식(服食)을 사용하였고 동생 동민(董旻)에게는 좌장군과 호후(鄠侯), 큰조카 동황(董璜)에게는 시중과 중군교위를 주는 등 동탁의 가문 사람은 어린애라도 모두 한 자리씩 가졌다. 미현(郿縣)에 오(塢)를 쌓고 만세오(萬歲塢)라 하였다. 높이가 높은 곳은 7장(丈)에 이르렀으며 30년 치 식량을 비축(備蓄)했으므로 동탁(董卓) 스스로 “일이 잘되면 천하를 웅거(雄據)하고 잘 안되면 이곳을 지키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자신했다. 법령(法令)이 가혹하고 문란(紊亂)하여 억울하게 죽은 자가 많았다. 관중(關中)의 귀족들은 반역죄(反逆罪)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동탁(董卓)은 여포(呂布)를 매우 신임해서 양아들로 삼고 경호(警護)를 맡겼었다. 어느 날 동탁은 사소한 일로 화가 나서 여포에게 수극(手戟)을 던졌다. 민첩하게 피했기에 망정이지 죽을 뻔한 여포는 이 일이 앙금으로 남았다. 거기다 동탁의 시중드는 계집종과 몰래 정을 통한 일도 있어 발각(發覺)될까 두려웠다. 왕윤(王允)은 상서복야(尙書僕射) 사손서(士孫瑞)와 동탁 주살을 모의(謀議)하고 있었는데 여포가 수극에 죽을 뻔한 일을 듣고는 여포도 회유(懷柔)하였다. 여포는 처음에는 부자 사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펄쩍 뛰었지만 왕윤이 ‘친부(親父)도 아닐 뿐더러 아버지가 아들에게 수극을 던지겠느냐’고 설득(說得)하니 결국 동참(同參)하였다.
192년 4월 동탁(董卓)이 여포(呂布) 등 호위병을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는데 기도위(騎都尉) 이숙(李肅) 등 10여 명의 습격을 받았다. 동탁은 속에 갑옷을 입은지라 팔에만 부상을 입고 수레에서 떨어졌다. 큰 소리로 여포를 찾자 여포는 “조서를 받들어 역적(逆賊) 동탁을 치노라”고 하였고 동탁은 “개 같은 놈,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다.(5월 22일, 음력 4월 23일, 신사(辛巳)일) 이를 만방에 알리니 사졸(士卒)들은 만세를 부르고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노래하고 춤추며 잔치를 벌였다. 미오는 황보숭(皇甫嵩)이 점령하였으며 동탁의 시체는 거리에 내버려지고 그 일족은 멸족(滅族)되었다. 이때 동탁의 생모인 지양군(池陽君)도 왕윤(王允)의 면전에 끌려와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살려달라고 애원(哀怨)했으나 왕윤은 이를 묵살(默殺)하고 지양군을 '동탁을 낳은 죄'를 죄목으로 명시(明示)하고 지양군을 참수했다. 동탁(董卓)은 금 이삼만 근, 은 팔구만 근, 비단과 구슬 등 온갖 보물(寶物)을 산처럼 모아 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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